전출처 : 마냐 > 이제라도 보니 좋더라.

`천지왕, 대별왕, 당금애기, 강림도령, 바리, 한락궁이, 궤네깃또, 오늘이, 내일이….'

첫머리에 저자는 묻는다. 이 이름들을 들어본 적 있느냐고. 미리 고백해두자. 소싯적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줄줄 읊었다. 이집트 신화나 중국 신화도 곁눈질해봤다. 요즘에야 제우스나 아프로디테를 모르는 이가 드물지만, 일찌감치 신화에 관심이 있노라고 떠들었다. 그런데 제대로 몰랐다. 놀랍고 벅찬 우리 신화를. `머나먼 시간부터 우리 속에 강물처럼 흘려내려온, 이땅의 설운 민중들이 적을 글자도 없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가슴마다 성스럽게 새겨온' 그 신성한 이야기를.

우리 민담, 구비문학을 꾸준히 연구해온 저자는 나같은 독자의 `신화 편식', `신화 사대주의'를 부드럽게 나무란다. 그리고 경이로운 상상과 가슴 저린 사연으로 가득찬 우리 신화를 들려준다. 78명의 신들이 펼쳐내는 25편의 이야기가 묶였다.

창세신화부터 그들의 것과 다르다. 유에서 무를 창조했노라 잘난척 하지 않는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혼돈의 상태에서 세상 어딘가에 생긴 작은 틈. 거구의 신은 그것을 벌리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로 우주의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대단한 신에게 물과 불의 근본을 가르치는 건 생쥐였으니, 우리네 유머감각도 장난이 아니다.

강하고 올곧은 여신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헤라나 아프로디테, 심지어 현명한 아테네까지 미모를 뽐내거나 질투로 일을 그르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어미 몸에 아기를 불어넣어주는 생불왕 삼승할망이 없어 적막하던 시절, 옥황상제는 인간세상 명진국의 공덕높은 따님애기에게 이 임무를 맡긴다. 그녀가 하늘땅에 가니 상제가 그 됨됨이를 떠보고자 "머리 땋은 처녀가 어찌 대청 한가운데로 들어오느냐?"라고 호통친다. 이에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엄연히 다른 세상인데 시집도 못간 처녀를 부모와 갈라놓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당차게 대답하던 그녀는 현명한 생불왕이 된다.
들판에서 학이 키운 소녀 오늘이도 부모를 만나기 위해 모험에 나서면서 여행길에서 만난 모든 이들, 글읽는 청년부터 큰 뱀과 연꽃나무, 선녀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이타적 인물이다.

바리공주도 새삼 심금을 울린다. 아들 기다리던 오구대왕은 일곱째 딸을 버린다. 하지만 십오년만에 부모와 상봉한 바리는 병든 아비를 위해 저승의 약수를 구하러 나선다. 온갖 역경을 바른 마음으로 뚫는 바리에게 오딧세우스식의 영악함은 없다. 그녀는 결국 죽은지 3년, 뼈만 남은 아비를 부활시킨다. 또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저승의 영혼들을 인도하는 `오구신'이 된다.

물론 전형적 영웅 이야기가 빠질쏘냐. 저승사자를 단숨에 때려눕히고 염라대왕을 제압한 강림도령, 불칼 휘두르는 흑룡과 싸워 백두산 천지를 만들어낸 백장군, 해를 삼켜버린 용과 싸워 세상을 구한뒤 영원히 해를 지키기 위해 별(삼태성)이 된 삼형제,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용왕국을 헤집어놓았으며 천자의 절을 받고 오랑캐를 물리쳐 대륙을 평정, 땅과 바다를 아울렀던 궤네깃또 등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 부럽지 않은 장부들이다.

화려하기보다 소박한, 기괴하기보다 자연스러운, 공포스럽기보다 친근함이 두드러진 우리네 신들. 이야기 하나마다 이런저런 해석을 풀어주는 저자의 글이 스스로 감격하고 흥분하는 것도 이해된다....

(솔직히 신화가 유행하는 시대. 우리 신화 이야기도 여럿 있을텐데, 아쉽게도 처음 접한 책이다. 대체 비교할 도리가 없는게 아쉬웠다. 우리 신화는 기대 이상 흥미있었다. 저자의 '벅찬 흥분이 묻어나는 해설'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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