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잦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이따금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2017년 여름
김애란






지난달 어머니가 잠시 집에 다녀갔다. 두 사람 다 경황이 없을테니 당분간 살림을 맡아주겠다는 명분이었다. 짐을 푼 첫날부터어머니는 집안 곳곳을 의욕적으로 쓸고 닦았다. 우편물을 정리하고, 먼지 낀 선풍기를 분해해 일일이 날개를 닦고, 시든 고무나무에 물을 줬다. 돼지고기와 메추리 알을 섞어 간장에 조리고, 멸치와 꽈리고추를 볶아 집안에 매운 내를 풍기고, 김을 굽고, 깻잎을재우고, 냉동실을 정리했다. 아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무기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이 드신 양반의 악의 없는 참견과잔소리도 묵묵 감내하는 듯했다. 아니 감내했다기보다 의식하지못했다 할까, 안 했다 할까. 적당한 말을 몰라, 그냥 그게 말이니싶어 저쪽에서 열심히 구사하는 몸짓을 아내는 수신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좀 아팠다.

---- 입동 - P10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작년 봄이다. 분양면적이십사 평실면적 십칠 평에 지은 지 이십 년 된 아파트였다. 요즘 같은 때빚내서 집 사는 건 다들 미친 짓이라 했지만 경매로 싸게 나온 물건이어서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많은 경우 매매가와 전세 보증금차가 크지 않았고, 조건 맞는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웠을뿐더러 이사라면 지긋지긋하던 차였다. 오랜 고민 끝에 우리는 이 집을 사기로 했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로 끼고서였다. 몇십 년간 매달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를 떠올리면 마음이 자주 무거워졌다. 그래도 남의 주머니가 아닌 내 공간에 붓는 돈이라 생각하면 억울함이덜했다. 누군가 그 아파트 역시 당신 집이 아닌 커다란 남의 주머니일 따름이라 일러준다 해도 할 수 없었다.  - P12

대학 동기들은 내게 벌써 집 장만을 했냐며 부러움 섞인 축하를 건넸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봤자 하우스 푸어"라고 겸연쩍게 변명했다. 한 녀석은 "나는 그냥 푸어인데 그래도 너는 하우스푸어니 얼마나 좋냐"고 받아쳤다. 입주 후 양가부모님과 친구들, 직장 동료를 초대해 몇 차례 집들이를 했다. 가까운 이들과 떠들썩하게 음식을 나 - P14

누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럴 땐 우리가 채무자란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파트 매매계약서와 은행 대출 서류에 쓴 내 이름이 가명처럼 여겨졌다. 새벽에 요의를 느껴 화장실에 갈 때면욕실 문 앞에서 불 꺼진 거실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지켜야 할 것은 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한 뒤 자리를 떴다. - P15

그림책을 찢고, 음악이 나오면 상체를 좌우로 흔들고, 식탁 아래 좁은 공간에 들어가 놀았다. 그리고 가끔은 원뿔형의 인디언 천막에 들어가 종알종알 싱그러운 헛소리를 하다 잠이 들었다.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 P18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 가끔은 열불이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만날 수 있는 양 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 P21

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봤다. 텅 빈 눈동자가 불 꺼진 형광등처럼 어두웠다. 아내는 한 손으로 영우가 직접 쓴 아니 쓰다 만이름을 어루만졌다. 순간 어디선가 영우가 다다다다 뛰어와 두 팔로 내 다리를 감싸안을 것 같았다. ‘토닥토닥‘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엄마 등을 말없이 두드려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물먹은 풀이 내 몸에서나오는 고름처럼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 P37

찬성은 K시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 살았다. 이웃이라 해봐야 산자락에 띄엄띄엄 박힌 농가 몇 채가 전부인 동네였다. 찬성의 할머니는 휴게소 분식 코너에서 일했다. 급식이 끊기는 방학마다 찬성은 휴게소에 들러 자주 끼니를 때웠다. 초등학생 걸음으로 사십 분 걸려 도착한 곳에서 오분 만에 그릇을 비우고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찬성에게 식대겸용돈으로 매일 이천원씩 줬다. 날이 궂거나 곧장 집에 가기 싫을 때 찬성은 등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관광객 흉내를 냈다. 그러면 자기도 그곳에들른 사람, 잠깐 쉬는 사람, 이제 막 먼 데서 돌아왔거나 떠날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땐 거기 몇 시간씩 앉아 있곤했다. 날은 후텁지근하고, 방학은 길고, 그해 여름은 왠지 모든 게지겨웠으니까.

---- 노찬성과 에반 - P42

하루 또 하루가 갔다. 인간 시계로 이 년, 개들 시력으로 십년이 흘렀다. 찬성과 에반은 어느새 서로 가장 의지하는 존재가됐다. 비록 움직임이 굼뜨고 귀가 어두웠지만 에반은 여느 개처럼공놀이와 산책을 좋아했다. 찬성이 보푸라기인 테니스공을 멀리던지면 에반은 찬성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반드시 공과 함께 다시나타났다. 무언가 제자리에 도로 갖고 오는 건 에반이 잘하는 일중 하나였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 P52

- 마지막 방법으로・・・・・・ 드물게 안락사를 선택하는 분들이 있어-그게 뭔데요?
-아픈 동물 친구를 곤히 재운 뒤 심장 멎는 주사를 놔주는 거야, 편안하라고,
의사는 "그러고 나서 후회하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으니 신중하게 결정할 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단 에반에게 잘해주라고, 살아 버티는 동안 무척 고통스러울 테니 옆에서 잘 다독여주라고 했다. 그렇지만 찬성은 어떻게 해야 잘해주는 건지, 에반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때마침 건넛방에서 할머니가 한숨 토하듯 "아이고, 죽어야 모든 고통이 사라지지. 죽어야근심이 없지. 하나님 나 좀 조용히 데리고 가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성이 몸을 돌려 에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로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 알고 있니?"
- P62

찬성이 멀리 불 켜진 고속도로 휴게소를 바라봤다. 자신도그곳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없어 그랬는지 몰랐다. 아니면 덜컥 겁이 나 할머니가 보고 싶었는지도. 찬성이 숨을 고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만일 에반이 혼자 힘으로 어딘가 갔다면 전에 한 번이라도 가본 데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은 찬성도이는 곳일 확률이 높았다. 찬성은 에반이 지금 생각보다 가까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찬성은일단 분식 코너에 들러 할머니에게 혹시 에반이 여기 오지 않았느냐고 물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유소 앞을 지날 즈음 문득 불길한 느낌에 휩싸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얼굴에 피가 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니까 거기 주유소 쓰레기통 옆에 눈에 익은 자루 하나가 보여서였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자루 아래가 불룩했고입구는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 P79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너무 오래 사용한 탓에 기기에서 열이 났다.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P81

-그런데 모레는 나가봐야 해.
도화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눈가 주름에 파운데이션이 끼지 않았는지 살폈다. 그러곤 자신이 한창때를 지났다는 걸 체감했다. 아무렴 한창때가 지났으니 나물맛도 알고 물맛도 아는 거겠지 살면서 물 맛있는 줄 알게 될지 어찌 알았던가.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 건너편 - P87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귀에 잘이들어왔다. 이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ㅇ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그 자식 공부 잘했는데. 그러니까 걔가 그렇게 될줄 어떻게 알았어. 인생 길게 봐야 하나봐. 누구는 벌써 부장 달았던데 걔가 잘 풀릴 줄 아무도 몰랐잖아.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색한침묵이 돌면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내겠지. 어쩌면 다른 친구들도이미 타인의 삶에 심드렁해진 지 오랜데 이수 혼자 그렇게 추측하는지 몰랐다. 이수는 3차 자리에서 일어나 동오와 어깨동무를 한채 해물포차에 갔다. 동오는 안주가 나오자마자 탁자 위로 뻗어버렸고, 이수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친구의 휑한 정수리를 바라보며한 시간 넘게 혼자 소주를 마셨다.  - P92

재수 끝에 도화가 합격증을 받아든 건 스물아홉 때였다. 그해여름 이수는 7급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 도화를 만나기 전 이미두 차례 낙방한 경험이 있지만 처음에는 이수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원래 7급이나 5급은 삼 년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거‘라기에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사 년, 오 년을 넘어가자 어느 순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도화가 경찰공무원 시험에합격한 뒤에도 이수는 혼자 노량진에 남아 공부했다. 도화를 만나기 전 이 년, 도화와 함께 이 년, 도화가 떠난 뒤 이 년 도합 육 년이니 이수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뒤 손을 털고 나온 셈이었다. - P98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 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한 시절과 작별하는 기분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뒤도 안 돌아보기‘ 위해 이를 악물며 1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 P99

왜 말 안 했어?
······ 마지막이니까.
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내가 나 자신에게 마지막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아. 잘될 거 같아. 사 년 전에도 마지막이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도화야, 조금만 기다려줘. 정말 딱 한 번만. 내년 여름까지만부탁할게.
도화가 침착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 이수야.
- 응.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돼서, 전세금을빼가서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 P115

-오십오분 교통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교통량은 적으나 대기가 뿌옇습니다. 안개와 먼지가 뒤엉켜 가시거리가 짧으니 자동차 전조등을 밝게 켜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노량진・・・・・・

짧은 사이 도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 실수였으나 방송 베테랑최경위만은 심상찮은 눈으로 도화를주시했다.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 식당에서 "도화씨가 좋아하는 거 같아잔뜩 집어왔어요"라고 말하며 흰색 플라스틱 그릇 위에 가득 쌓인 동그랑땡을 자랑하던 모습과 옆면이 새카매진 한국사 교재,  - P117

베갯잇에 묻은 흰 머리카락, 눈가주름, 살냄새 그런 것이 밀려왔다.
한겨울, 도화가 오들오들 떨며 현관문을 열면 따뜻한 두 손으로언 귀를 녹여주던 모습과 여름이면 도화 쪽으로 바람이 더 가도록선풍기 각도를 조절해주던 이수의 옆얼굴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 도화가 목울대에 걸린 지난 시절을 간신히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경위가 나서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교통방송 때 늘 하는 말, 도화가 신뢰하는 말, 과장도, 수사도, 왜곡도 없는 문장을 풀어냈다.

- 노량진역에서 노들역 방향 사이 승용차 추돌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사고 정리가 모두 끝난 상태라 양방향 모두 교통상황 원활합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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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처 김애란이다.
어느 단편은 처음인 듯 새롭고, 어느 단편은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오기도 한다.
‘벌레들‘ 과 ‘물 속 골리앗‘ 은 한동안 나를 가위눌리게 만들었다. 꿈 속에서 화자가 되어 황톳물에 잠긴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앉아있거나, 벌레들에 둘러싸여 있고는 했다.
오늘 밤도 그럴지 모른다.





여름옷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어쨌든 장례식에 입고 갈 옷을 골라야 했다. 바지와 스커트 사이에서 고민하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에이라인 치마를 택했다. 다행히 같은 색 블라우스가 있어, 간절기 조문 복장으로나쁘지 않을 듯했다. 검은 옷이라면 사실 얼마든지 있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 P11

번식기의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싱싱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거기, 어두운 인문학관 통로에 선배가 있었다. 복도 끝 굽이진곳에 길고 흐린 실루엣으로 화장실에 들른 건지, 사물함을확인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 P13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수(數)를 향한 내집중력을 흩뜨려놓던 순간을 기억한다. 조바심과 짜증이 일면서도 짝의 기분이 상할까 내색 못 하고, 선생님께 혼나면어쩌나 불안해하던 복잡한 찰나를 말이다. 문제는 그 뒤로 내산수 점수가 계속 바닥을 쳤다는 건데, 살면서 셈을 망칠 때마다 왠지 그게 다 병만이 탓인 것처럼 느껴져 억울하곤 했다. 어쨌든 우리는 자주 모여 놀았다. 대부분 장사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해거름까지는 어떻게든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가야 했다. 당시 신나는 폐활량을 떠올리면 지금도개운한 기분이 든다. 편을 가르고, 규칙을 익히고, 보잘것없는 어휘력으로 열심히 말싸움을 하고, 토라져 집에 가기도 했지만 언젠가 최대한 멀리 나가려 도움닫기 해 올라탄 그네위에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깨달았더랬다.
‘자란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구나.‘ - P25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조용히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물속에서 느낀 아주 기이한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가까스로 물 밖에 머리를 디밀었을 때 매미 소리가무척 시끄럽게 들려왔던 것도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순간 누가 보고 싶다거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그리고 좀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면 위로 아른아른 조용하게 빛나는여름 햇빛이 보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유혹하듯 화사하게 출렁이던 차안(此岸)의 얇고 환한 막 나는 그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 P41

환한 봄날 한가운데에 어두운옷을 입고 서 있던 내게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 좋아‘라고 말하던 선배의 아름다운 옆얼굴도·그러자 고향의 병만이가 떠올랐다.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이…………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감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결국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천장 위 형광등은 여전히 꺼질 듯 말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여름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고 있었다. - P44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피로, 남편의 한숨, 남편의 짜증 같은게 느껴졌다. 비슷한 전화를 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사람 사는 집에 늘 있기 마련이라고 우리 몸 안에도 사실 수많은 벌레들이 산다고.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돈벌레며 애벌레며 그도 몸서리친 경우를 상기시켰다. 부엌에도, 천장에도 나타났던 벌레들이 이불이나밥그릇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있냐고.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이래서야 안심하고 키울 수 있겠냐고. 그는 미납금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미안했는지 조그맣게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인 걸 알았다. 하지만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나만큼 벌레를 자주 보지 못했다. 그는 집에 올 때마다 숙면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처참히 곯아떨어졌다. 그가 유심히 보는 건 벌레가 아니라 통장 잔고였다. 배가 고프다거나 졸립다거나 하는 일상의자잘한 욕구와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아내의 배, 

----벌레들 - P64

가을은 왔지만 가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치지 않고 번식하는 계절, 이 지나치게 싱싱한 여름은 먹성좋은 괴물처럼 뚱뚱해져갔다. 때 아닌 열대야가 지속됐다. 우리는 녹조류 가득한 호수 아래의 물고기들처럼 이불을 걷어차며 허우적댔다. 더위에 뒤척이다 겨우 잠들 즈음엔 귓가를맴도는 모기 소리에 소름이 돋아 일어날 때도 많았다. 폭염이, 장마가 지속됐다. 큰비는 세계를 집어삼킬 듯 열흘이나계속됐다.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 P65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쩌면 A구역 전체로 뻗어 있을 뿌리가 워낙 깊고 완강해서인지도 몰랐다. 나무는 자신이 쥐고 있는 걸 놓으려 하지 않았다. 굴착기는 계속나무를 공략했다. 나무는 질기게 저항하다 결국 쩌억 소리를내며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흡ㅡ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런 뒤 창가에 놓인 수납장을 붙들고 심호흡을 했다.
식은땀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이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꿈틀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인 움직임이었다. 한 손으로 배를 감싼 채 벽을 짚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굴착기가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겨우 숨을 고른 후 창밖을 바라봤다. 나무는 전쟁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 P67

이 시간에, 그것도 혼자,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 날 터였다. 게다가 절벽 아래 풀숲이라면절대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벌레를 떨어뜨린곳이기도 하고, 그 속에 또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반지. 그 안에 담긴 남편의 노동과 우리의 한 시절.
그 추억과 의미는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 P76

멀리, 아직 헐리지 않은 건물 서너 채가 남아 있었다. 가로등은 그곳에 하나, 그리고 그 반대편에 멀찍이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손전등과 희미한 가로등불빛에 기대어 한 발 한 발 어둠을 헤쳐 나갔다. 걸음마다 쩌억, 바스락,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무거워 이동이 쉽지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고 숨이 찼다. 그래도 가로등불빛이 묘한 안도감을 줬다. 불빛에 얼비쳐 노르스름해진 가림막의 윤곽은 A구역과 바깥세상의 경계가 아주 얇다는 걸상기시켜줬다. 여긴 정글이나 미로가 아니라 도시라고. 조금만 발 디디면 저기 모텔이 있고, 교회가 있고, 패밀리레스토랑이 있는 서울 한복판이라고 불빛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듯했다. A구역의 땅은 건물 잔해 때문에 평편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처럼 솟은 곳이 있는가 하면, 움푹 꺼졌거나, 중간에 발이 푹푹 빠지는 데도 있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걸음을옮기며 목적지를 향했다. 흙 속에서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났다. 비위가 상해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 P77

단단하고 우둘투둘한 피부, 구조를 요청하는 손처럼 길게 뻗어 있는 가지, 나무였다. 어느고기처럼 떼로 죽어 있는 잎사귀들·여염집 마당 한가운데 억척스럽게 솟아 있던, A구역의 유일한 나무. 몇 살을 먹었는지 모르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았을 게 틀림없는 고목. 바람이 불때마다 신령스럽게출렁이던, 오늘 아침 잘린 나무………… 께름칙한 기분 탓이었을까?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를 싸고도는, 조용하고 알 수 없는 이동의 에너지 같은 게. 손전등으로 땅바닥을비춰봤다. 발등 위로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보였다. 개미는 어딘가로 이동하다 불빛에 노출되자 우왕좌왕했다. 손전등을 풀숲에 비춰봤다. 무성한 잡초들만 눈에 들어올 뿐 상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 P78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지점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등을 쥔 손이 바들바들떨렸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벌레들이 행로를 바꿔일제히 내게 몰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양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사타구니에서 오줌처럼 뜨듯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가터진 거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 P79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깨진 콘크리트조각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봉긋한 무덤 같은 곳에서였다.
그 봉분에 허리를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그리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소리는 허공 위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새벽 1시에, 아무도 없는 재개발지역의 건물 잔해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을 임산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아랫배가 얼얼하고 현기증이 났다.
너무 아파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죽을힘을 다해외쳤다.
"살려주세요." - P80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물 속 골리앗 - P85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ㅡ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그것은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지 낀 유리 너머로소리가 삭제된 채 보이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 P86

장맛비가 내린 그 며칠은 내 생애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 마음이 그랬다는 게 아니다. 집에 전기가 나가서였다. 이곳은 시골처럼 날이 빨리 저물었다. 이름만 대안도시일뿐, 오래전 수도(首都)에서 밀려난 이들이 허허벌판에 둥지를 튼 곳이니 그럴 만했다. 전기가 원만하게 들어오는 날이라도, 땅거미가 지면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몇 개의빛으로는 물릴 수 없는 유구하고 원시적인 어둠, 우리가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심박동에 홀려 신을 벗고 길 떠나는 꿈을 꿨다. 또는 알 수 없는 초조를 어쩌지 못해 옷을 벗고 아내 위에 올라탔다. 잘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우리가 붙잡고 헤매는 실 끝에는 언제나 가는 눈을 반짝이며 웅크리고 있는 원시인이 있으니까. 그들은 늘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장마철엔살냄새가 짙어졌다.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띠었다. - P87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 - P94

돼지탁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티브이와 라디오는 나오지않았고, 양초는 되도록 아껴야 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거나이런저런 몽상에 잠기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곤 눅눅한방바닥에 누워 지구의 살갗 위로 번져 나가는 무수한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봤다. 동그라미속의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들………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일으키는 동그라미들.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고, 당장 뭘 이해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떼를 입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봉분 위에도 동심원이 고요하게 퍼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아직 떠내려간 것만아니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 P95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얼마 안 가벼락이 쳤다. 구름이 가벼워졌다 싶으면 어느새 폭풍이 왔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이고자 했다. 예상하지 말라는 듯. 예고도 준비도 설명도 말며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듯. 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너희도 하라는 듯 난폭하게굴었다. 비상용물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연신 식은땀을 흘려댔다. 장마는 한 달을 넘 - P100

어서고 있었다. 빗방울이 가늘고 성기게 내릴 때도, 뭇매를치듯 세차게 쏟아지기도,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려앉을 적도있었지만, 어쨌든 하루도 그치지 않고 내린 것만은 분명했다.
비바람이 거세질 때면 아버지의 방에 묶여 있는 물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릇 위로 동심원이 엷게 번지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어쩌면 집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끔은 물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것은 음정 없는 노래처럼 갈 길 잃은 전파처럼 웅웅웅웅 울어댔다. 한밤중 이상한기척이 들릴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 P101

어머니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파트를 떠나는 대신 세상을 떠나셔야 했다. 배는 생각보다 말을듣지 않았다. 작은 파도나 장애물 앞에서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휘청거렸다. 잡동사니로 얼기설기 만든 거니 그럴 만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많은 빗물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집을 떠난 뒤 단 한 대의 헬리콥터도, 단 한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감기에 걸릴지 몰랐다. 배가 언제까지 버티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부디 우리가 구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P113

대신 물 밖에 나왔을 땐 반드시 하늘을 봐야 한다고, 그 정도야 뭐.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여유를 부리며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온몸에 힘을 빼고 물에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여름 강물의 속살은 차고 깊었다. 부드럽고 물컹하니 아득하며 편안했다. 생경한 듯 잘 아는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 세상의 그 어떤 소음과도차단돼 짧은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나는 더이상 견딜 수없을 때까지 물속에 있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고 어느 순간, 숨을 참지 못해 수면밖으로 나왔을 때 내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물속에 있었을 때보다 숨이 더막혔다.  - P125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일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을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그걸 보니 엄마, 나무뿌리에안겨 떠내려간 엄마 생각이 났다. 녹색 테이프에 감긴 얼굴로오랫동안 내 쪽을 바라보던 모습도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어디쯤 가셨을까. 부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좋을 텐데. 젖은 옷가지가 바람에 마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밖에 나오니 물속에 있을 때보다오히려 더 추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 있다 체조를 해야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속눈썹을 깜빡이며 달무리 진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 P126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머물 수도 떠날수도 있다고. 그녀는 ‘짜이날‘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라 했다.
그 말이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그다음, 그곳에 어떻게 갈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용대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투박한 한국어 문장으로 설명해줬다.
용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말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 그럴 자격이 있는사내로 여겨지곤 했다. 이 여자, 언제나 내겐 좀 과분하다‘는느낌이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 못 할 게 없다는, 소통에 관한 한 순진할 정도의 믿음이있던 여자. 일도 참 잘했지만 공부를 했다면 더 좋았을 젊은아내. 처음, 손바닥에 땀을 닦고 악수를 건네자, 세상에서 제일 작은 부족의 인사법을 존중하듯, 웃으며 따라 한 북쪽 여자.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짜이날‘을 발음하자,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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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

2007년 가을, 김애란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전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 하고 소리 낸 뒤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 빅 사이론 오후의 빛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ㆍㆍㆍㆍㆍㆍ

----도도한 생활  - P9

피아노 건반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것은 희거나 검었고,
동일한 크기와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도의 위치를 자주잊었다. 그것이 레가 아니라 도라는 것을, 미가 아니라 파라는 것을 만져보기 전에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찾는 도는 왼쪽 가장자리 건반으로부터 스물네 손가락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건반 위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1부터 24 까지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봐야 했다. 그렇게 도를 찾아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를 다시 치는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덩치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다행히도를 찾고 나면 레를 짚기가 수월했다. 레는 도 바로 옆에 있었다. 미는 레 옆이고, 파는 미 다음이니까, 일단 도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 P10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
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누군가의 이齒]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대학에 붙었다는 말도 못한 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를 노래만 연습하고 있었다. - P21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 다급하게 깜빡이는 휴대 전화 불빛은 그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경보 같와다. 아침마다 그 작은 재난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은.
한밤중 폭우를 만나 해변으로 쏠려 온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머리맡을 더듬어 불빛을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쥔 채 죽은 듯 엎드려 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이제 막 출동하려 한손을 들고 있는 슈퍼맨과 같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녀가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주먹을 뻗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그녀가 자세를 튼다. 몸에서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침이 고인다  - P45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면바지에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가슴 한쪽엔 지구의 모양의 로고와 ‘축 개원 10주년 뉴 엘리트 학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광복절이라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다.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도, 무가지를 나눠주는가판대도 한적하기만 하다. 에스컬레이터 위로 얼굴이 부은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들 모두 어릴 때 꿈이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공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은아니었을 거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의 긴 행렬에 바싹 따라붙은 뒤, ‘내가 사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러고 있지 않을텐데‘ 탄식한다. 그러고는 이내 부끄러워한다. 학부모들이상담 때마다 하는 말 중 하나가 우리 애가 ‘공부를 못 해서‘가아니라 ‘욕심이 없어서‘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49

버스가 출발한다. 수십 개의 소형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쏟아진다. 춥다. 그리고 우울하다. 생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공휴일의 체육 대회 탓인지, 부장 탓인지 모르겠다. 에어컨 바람과 차 냄새 때문에 멀미가 난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꼭짓점 댄스의 순서를 짚어본다. 하나 둘 셋 틀고. 하나 둘셋 전진, 그걸 좁은 원룸 안에서 연습했을 때, 후배가 배를잡고 웃던 기억이 난다. 언니! 왜? 후배는 하얗게 웃으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못 춰요? 날씨는 화창하고, 피곤한 얼굴의 선생 몇이 코를 고며 졸고 있다. 부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 팀장과 함께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 있다. 평소 국어과는수학과나 영어과에 비해 하는 일이 없다‘는 오해를 받아왔던터라 이번에야말로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건너편 자리에서는 학원 버스를 모는 기사 아저씨들이 얘기를나누고 있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았다. 좀 잘까? 훌쩍, 콧물이 나온다. 이런, 성가시다. - P62

몇 번의 알람이 울렸다 꺼지고, 고단하고 일상적인 날들이지나갔다. 후배는 여전히 목소리가 좋았지만 예전만큼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습관‘이란 게 생겨버린 탓이었다. 일상의 습관, 관계의 습관, 그 습관을 예상하는 습관까지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퇴근 후 현관에 서서 ‘지금 저안에 후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후배를 안다고 생각했다. 후배의 습관 중 부정적인 목록을 발견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그렇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 P66

그녀가 현관문을 연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이불 위에 누워 첨삭을 하고 있는 후배의 모습이 보인다. 후배가 고개 들어 반색한다. 언니 왔어요? 그녀는 ‘락앤락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야, 그거 언니가 상 탄 거예요?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아냐. 그냥 참가하면 다 주는거야. 후배는 집에 반찬통이 없었는데 잘됐다며 좋아한다. 그녀가 홀깃 원고지를 보며 말한다. 아직도 해? 후배가 싱그럽게 웃으며 자랑한다. 네, 언니 저 거의 다 했어요. 이번 주주제가 다양성인데요, 획일성은 나쁘고 다양성이 중요하다는내용을 모든 아이들이 완전 획일적으로 써냈어요. 웃기죠? - P76

샤워기를 틀자 쏴아-하고 뜨거운 물이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 P77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말썽 많은 하루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하루가 지나갔다‘는 데 있다. 후배와 지낼 불편한 날들 역시 곧 지나갈 것이다. 그녀는 귓바퀴와 배꼽에 낀 먼지를 산산이 씻어낸다. 수챗구멍 위로 그녀의 것과후배의 것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회오리친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후배가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최대한 잘해주자고 결심한다. 그녀는 몸에 수건을 감고 나온다. 그런 뒤 발판에 발바닥을 문지르며 주위를살펴본다. 이상하다. 방 한가운데 오래된 적요가 손님처럼 앉아 있다.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이 보인다. 요 껍데기는 벗겨진 상태다. 방안을 둘러본다. 항상 행거 아래 있었던후배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후배가 없다. - P78

그렇지만 이제 가슴이 아리진 않다. 지금 사내의 옆구리엔한 봉지 라면이 다정하게 바스락거리고, 오늘 밤 티브이에선틀림없이 성탄특선 영화가 나올 테니까. 저기 ‘여관‘의 간판불은 꺼져 있다. 방이 모두 나간 모양이다. ‘크리스마스니까‘ 하고 사내는 웃는다. ‘오늘 밤 어느 야쿠자 두목은 세 명이랑도 하겠지?‘ 생각하니 조금 시무룩해진다. 그러자 곧 먼곳에서 사슴뿔을 단 세 명의 아가씨들이 엎드린 채 사내를 바라보며 ‘음매에 하고 운다. ‘・・・・ 사슴이 그렇게 울었던가?‘ 생각해보지만 사내는 한 번도 사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성탄 특선 - P88

사내는 두 손 가득 보리차가 든 유리컵을 들고 아이처럼 외쳤다.
"이야! 컵에다 물 마시니까 정말 맛있다!"
오래전부터 ‘소독한 델몬트 주스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은 사내의 로망중에 하나였다. 그런 것 하나가 자기 삶을 어떤 보통의 기준에 가깝게 해주고 또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였다. 사내가 고집하는 생활 습관은 몇 개 더 있었다. 사내는 여동생에게 ‘아무리 돈이 없어도 화장실 세정제만은 반드시 사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 P101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 P117

그렇다고 뭔가깨달아버리기에도 이른 나이였던 때, 나는 장기판 위에 놓인한 마리 말(馬)처럼 대책 없고 수줍었다. 열차 안으로는 도심의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 철교와 올림확대로, 크고 작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스무 살의 나는 ‘이아 다리는 정말 다리가 많네?‘하고 신기해했다. 오후 2시.
머리 위로 고요하고 오래된 태양계의 질서가 자전하고있던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짝 조여들었던 나의 동공은 점점 크게 벌어져 하나의상 앞에서 멈췄다. 한강 너머 - 호젓하게 솟은 빌딩 한 채가보였다. 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63빌딩이다ㅡ라고, 나는 63빌딩을 보자 서울에 온 것이 실감 났고비로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 P123

여름은 재수생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삼복더위에 나는 연필 들 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식욕 같은 건 없었지만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큰일이었다. 나는 아주 젊었지만 허약했고, 날짜를 지우고 답안을 쓰다 졸곤 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체력은 바닥났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고득점자에 대한신화가 떠돌았다. 누구는 하루에 모나미 볼펜 세 자루를 쓴다더라, 누구는 목욕탕 갈 때 목욕 바구니에 영어 단어 써서 간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그런 말들이 잘 믿겼다. 나는 학원에 가고, 시골에 전화를 하고, 삐삐 진동음에 뒤척이고,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근처 사육신묘에 가서 바람을 쐬다 오곤 했다. - P138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량(梁) 자와 나루터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내 밟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있었다. - P148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창자와 내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칼자국  - P151

그런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점점한 아가리 속으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1) 만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때 전해지는 그 저격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면 햇빛의 뼈와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 P155

부엌에는 칼이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한가지 칼로만 국수를 썰었다. 나머지 칼은 과일을 깎거나 바지락을 까고, 김장 때 다른 일손에게 빌려주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눈 감고도 썰 수 있었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칼날 위에 들러붙은 반죽을 쇠숟가락으로 쓱쓱긁어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체육복 바지를 입고 잔일을 도왔다. 사춘기 땐 쟁반을 들고 배달을 가다, 길에서 좋아하는 남자 애를 만나 다리가 후들거린 적도 있다. 성질 급한 어머니는 잔소리가 심했다. 대파는 가랑이를 잘 씻어야 한다. 대걸레질하라고 했더니 홀에 물만 발라놨냐.  - P155

 손님들이 순서 뒤바뀌는 걸 언짢아하는 탓도 있지만, 오래전 한 여자가 갓 나온 국수를 그대로 들고 나가, 거리에 쏟아버린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밥장사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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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 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안에서버둥거리던 어머니는 잡을 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 - P8

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9

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 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운동중인 모든 사람이 우스꽝스러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네 공원에서 소나무에 대고배치기를 하는 아저씨나, 손뼉을 치며 걷는 아주머니들을 볼때마다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진지했고 열성적이었다. 마치 건강해지기위해서는 조금씩 우스워져야 된다는 듯이. - P10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한번도 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를 낳았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양반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늦게 왔지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주눅든 지각생의 눈빛 때문에 항상 먼저 농담을 건네던 여자였다. 아버지는 변명을 하지도, 큰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그저마른 입술과 새까매진 얼굴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상상하건대, 어쩌면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 P11

달리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한다. 달리기는 심폐계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신운동으로, 걷기와 뛰기의 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리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고도의스피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장소나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리기는강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떠난 사람이, 나를 떠난 곳에서 오래 달리고 있는 이유를, 그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생각이 든다. - P14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뛴다. 물론 아무도 박수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5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십수년 만에 우편을 타고 가뿐하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善意)처럼, 종지감 없는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낯선 억양의 인사를 건네며 돌아온 부고(告).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세계 곳곳을 달린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세계를 뛰어다닌것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계셨다. - P22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후꾸오까를 지나, 보루네오섬을 건너,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가는 아버지, 스핑크스의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거쳐,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아버지. 웃으면서 달리는 아버지. 달리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썬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가장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 - P28

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 - P29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무언가 필요해진다.

약속과 우연과 재난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3년 서울.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편의점은 기원을 알수 없는 전설처럼 그렇게 왔다. 시치미를 떼고 앉은 남편의 애첩처럼, 혹은 통조림 속 봉인된 시간처럼 수상할 것도 없이.

2003년 서울 사람들에게 습관이란 구원만큼 중요한 문제가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 서울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뭘까 항시 고민하는 창백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편의점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많이, 그리고 신속하게 생겨났다. - P32

편의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은 모두 누구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저마다 하나씩 앨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운동회 때 2등으로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1등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같이 흠칫 놀랐다거나, 형제에게돈을 꾸어 여자를 만나고, 모든 문제집의 첫장만을 풀어봤다거나, 뜻을 알면서도 국어사전에서 ‘음부‘나 ‘성교‘라는 단어를찾아봤을 사람들, 혹은 하게 될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건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다. - P33

하루에도 몇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사러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 P33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 P57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사실뿐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길게 내민 모가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아프리카 평원위에 최초로 직립하게 된 유인원처럼ㅡ고독하게. - P60

나는 한번 올라가면 다신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스카이콩콩을 잘 탔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좋아하는 가수가 십대가수상을 타도, 형이 알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놓아도 스카이 콩콩을 탔다. 언젠가 핼리혜성이 76년 만에 돌아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어대던 날도, 나는 옥상 위에서 조용히 스카이콩콩을타고 있었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또 우아했다.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들어 있었다. - P65

스카이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 P66

형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형은 과학적 소질이 전혀없어 보였다. 어쩌면 형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은 변했다. 형은 더이상 안경을 벗어던지며 "아버지, 앞이 보여요!"라고 외치던 병신이 아니었다. 형은말수 적은, 그러나 할말 있는 표정을 가진 소년이 되어갔다.
형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옆구리에 항상 과학서적을 끼고 다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 절대 멋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은 공공연히 자신이 한국과학기술원에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반에서 36등을 했다. 형은 과학자가 되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공부, 운동, 신문 스크랩, 게다가 문학동아리 가입까지. 형은 과학자가 되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천문학자들의 이론은 그 자체로완벽한 하나의 시(詩)‘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지만 그후로도 몇년 동안 형은 라디오를 고치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형에게 뭔가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스카이 콩콩을 탔다. - P72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

형이 돌아왔으니, 그리고 우리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저렇게 괜찮아져 있으니 가로등 앞에 있던 우리집 이야기는이제 그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 깜박 잊고 있던 이야기 하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은 형이 고무동력기대회에서 일등을 먹은 날로부터 일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P81

우와 하는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추락의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형은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서꼼짝하지 않았다. 창공 위로 여전히 수십개의 비행기가 고운선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에 성공한 각각의 비행기들이 약속한 듯 모두 추락하기 시작했다. 형은 두번째로 놀라며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비행기들은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며 하나둘 낙하하고 있었다. 다른 형들은, 작년에 형이일등한 비결을 알고 형을 따라 모두 비행기 꼬리부분을 손봤던 것이다. 하지만 형들도 서로 그것을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고개를 들어 낙하하는 비행기들의 춤을 바라봤다. 빙글빙글돌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행기 떼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꽃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꽤 아름다웠다. 형은 멍하니 서서 그 꽃비를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말도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어떤 재능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그날 밤 집으로돌아온 뒤 홀로· 스카이콩콩을 탔다.

----스카이 콩콩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 P83

그녀는 벌써 몇번째 자세를 뒤척였다. 바로 누웠다. 옆으로누웠다. 엎드렸다 하는 것은 기본이며 쿠션을 다리 사이 혹은다리 밑에 끼우거나 안거나 팽개치거나 함은 물론이다. 팔을둘다 올리거나 하나만 올릴 수도 있고, 팔은 구부리고 다리는펼 수도, 다리는 구부리고 팔을 펼 수도 있다. 한쪽 다리는 올리고 한쪽 다리는 내린 채 팔은 양쪽 다 머리 위로, 고개는 오른쪽을 향하게 할 수도, 왼쪽을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의자세는 모두 세분화된 신체의 경우의 수로 만들어진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아직 모르는, 어떤 예민한 사람이라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독특한 자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척임은 바로 그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가며 ‘빙고‘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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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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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 복판에서 지난 겨울에 읽은 책을 떠올리면 조금 시원해질까? 철학은 내게 어울리지 않지만 기차와 여행은 다르다. 완행열차의 삶이고 읽기, 쓰기도 그러해서 비둘기호 속도로 읽는 책은 나름 좋았다. 특히 시몬 베유, 보부와르를 같이 만나고 철학과 삶의 여정을 살펴보며 따라가는 동행은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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