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처 김애란이다.
어느 단편은 처음인 듯 새롭고, 어느 단편은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오기도 한다.
‘벌레들‘ 과 ‘물 속 골리앗‘ 은 한동안 나를 가위눌리게 만들었다. 꿈 속에서 화자가 되어 황톳물에 잠긴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 앉아있거나, 벌레들에 둘러싸여 있고는 했다.
오늘 밤도 그럴지 모른다.





여름옷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어쨌든 장례식에 입고 갈 옷을 골라야 했다. 바지와 스커트 사이에서 고민하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에이라인 치마를 택했다. 다행히 같은 색 블라우스가 있어, 간절기 조문 복장으로나쁘지 않을 듯했다. 검은 옷이라면 사실 얼마든지 있었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 P11

번식기의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싱싱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석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그런데 거기, 어두운 인문학관 통로에 선배가 있었다. 복도 끝 굽이진곳에 길고 흐린 실루엣으로 화장실에 들른 건지, 사물함을확인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선배가 나를 알아봤다는 거다. - P13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수(數)를 향한 내집중력을 흩뜨려놓던 순간을 기억한다. 조바심과 짜증이 일면서도 짝의 기분이 상할까 내색 못 하고, 선생님께 혼나면어쩌나 불안해하던 복잡한 찰나를 말이다. 문제는 그 뒤로 내산수 점수가 계속 바닥을 쳤다는 건데, 살면서 셈을 망칠 때마다 왠지 그게 다 병만이 탓인 것처럼 느껴져 억울하곤 했다. 어쨌든 우리는 자주 모여 놀았다. 대부분 장사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해거름까지는 어떻게든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가야 했다. 당시 신나는 폐활량을 떠올리면 지금도개운한 기분이 든다. 편을 가르고, 규칙을 익히고, 보잘것없는 어휘력으로 열심히 말싸움을 하고, 토라져 집에 가기도 했지만 언젠가 최대한 멀리 나가려 도움닫기 해 올라탄 그네위에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깨달았더랬다.
‘자란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구나.‘ - P25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조용히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물속에서 느낀 아주 기이한 고요를 기억하고 있다. 가까스로 물 밖에 머리를 디밀었을 때 매미 소리가무척 시끄럽게 들려왔던 것도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순간 누가 보고 싶다거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그리고 좀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면 위로 아른아른 조용하게 빛나는여름 햇빛이 보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유혹하듯 화사하게 출렁이던 차안(此岸)의 얇고 환한 막 나는 그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 P41

환한 봄날 한가운데에 어두운옷을 입고 서 있던 내게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 좋아‘라고 말하던 선배의 아름다운 옆얼굴도·그러자 고향의 병만이가 떠올랐다.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이…………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감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빨리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왔다. 결국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천장 위 형광등은 여전히 꺼질 듯 말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여름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고 있었다. - P44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피로, 남편의 한숨, 남편의 짜증 같은게 느껴졌다. 비슷한 전화를 건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그런 건, 사람 사는 집에 늘 있기 마련이라고 우리 몸 안에도 사실 수많은 벌레들이 산다고.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돈벌레며 애벌레며 그도 몸서리친 경우를 상기시켰다. 부엌에도, 천장에도 나타났던 벌레들이 이불이나밥그릇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있냐고. 곧 아기가 태어날 텐데이래서야 안심하고 키울 수 있겠냐고. 그는 미납금 때문에 정신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미안했는지 조그맣게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인 걸 알았다. 하지만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나만큼 벌레를 자주 보지 못했다. 그는 집에 올 때마다 숙면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처참히 곯아떨어졌다. 그가 유심히 보는 건 벌레가 아니라 통장 잔고였다. 배가 고프다거나 졸립다거나 하는 일상의자잘한 욕구와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아내의 배, 

----벌레들 - P64

가을은 왔지만 가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치지 않고 번식하는 계절, 이 지나치게 싱싱한 여름은 먹성좋은 괴물처럼 뚱뚱해져갔다. 때 아닌 열대야가 지속됐다. 우리는 녹조류 가득한 호수 아래의 물고기들처럼 이불을 걷어차며 허우적댔다. 더위에 뒤척이다 겨우 잠들 즈음엔 귓가를맴도는 모기 소리에 소름이 돋아 일어날 때도 많았다. 폭염이, 장마가 지속됐다. 큰비는 세계를 집어삼킬 듯 열흘이나계속됐다.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 P65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쩌면 A구역 전체로 뻗어 있을 뿌리가 워낙 깊고 완강해서인지도 몰랐다. 나무는 자신이 쥐고 있는 걸 놓으려 하지 않았다. 굴착기는 계속나무를 공략했다. 나무는 질기게 저항하다 결국 쩌억 소리를내며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흡ㅡ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런 뒤 창가에 놓인 수납장을 붙들고 심호흡을 했다.
식은땀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이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꿈틀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인 움직임이었다. 한 손으로 배를 감싼 채 벽을 짚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굴착기가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겨우 숨을 고른 후 창밖을 바라봤다. 나무는 전쟁중 길가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처럼 쓰러져 있었다. - P67

이 시간에, 그것도 혼자, 발이라도 헛디디면 큰일 날 터였다. 게다가 절벽 아래 풀숲이라면절대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벌레를 떨어뜨린곳이기도 하고, 그 속에 또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반지. 그 안에 담긴 남편의 노동과 우리의 한 시절.
그 추억과 의미는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 P76

멀리, 아직 헐리지 않은 건물 서너 채가 남아 있었다. 가로등은 그곳에 하나, 그리고 그 반대편에 멀찍이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손전등과 희미한 가로등불빛에 기대어 한 발 한 발 어둠을 헤쳐 나갔다. 걸음마다 쩌억, 바스락,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몸이 무거워 이동이 쉽지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고 숨이 찼다. 그래도 가로등불빛이 묘한 안도감을 줬다. 불빛에 얼비쳐 노르스름해진 가림막의 윤곽은 A구역과 바깥세상의 경계가 아주 얇다는 걸상기시켜줬다. 여긴 정글이나 미로가 아니라 도시라고. 조금만 발 디디면 저기 모텔이 있고, 교회가 있고, 패밀리레스토랑이 있는 서울 한복판이라고 불빛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듯했다. A구역의 땅은 건물 잔해 때문에 평편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처럼 솟은 곳이 있는가 하면, 움푹 꺼졌거나, 중간에 발이 푹푹 빠지는 데도 있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걸음을옮기며 목적지를 향했다. 흙 속에서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났다. 비위가 상해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 P77

단단하고 우둘투둘한 피부, 구조를 요청하는 손처럼 길게 뻗어 있는 가지, 나무였다. 어느고기처럼 떼로 죽어 있는 잎사귀들·여염집 마당 한가운데 억척스럽게 솟아 있던, A구역의 유일한 나무. 몇 살을 먹었는지 모르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았을 게 틀림없는 고목. 바람이 불때마다 신령스럽게출렁이던, 오늘 아침 잘린 나무………… 께름칙한 기분 탓이었을까?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를 싸고도는, 조용하고 알 수 없는 이동의 에너지 같은 게. 손전등으로 땅바닥을비춰봤다. 발등 위로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보였다. 개미는 어딘가로 이동하다 불빛에 노출되자 우왕좌왕했다. 손전등을 풀숲에 비춰봤다. 무성한 잡초들만 눈에 들어올 뿐 상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 P78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지점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등을 쥔 손이 바들바들떨렸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벌레들이 행로를 바꿔일제히 내게 몰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양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사타구니에서 오줌처럼 뜨듯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가터진 거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 P79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깨진 콘크리트조각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봉긋한 무덤 같은 곳에서였다.
그 봉분에 허리를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그리고 온힘을 다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소리는 허공 위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새벽 1시에, 아무도 없는 재개발지역의 건물 잔해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을 임산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아랫배가 얼얼하고 현기증이 났다.
너무 아파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죽을힘을 다해외쳤다.
"살려주세요." - P80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물 속 골리앗 - P85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 두 눈을 감고ㅡ 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 나무답게 번식하고 나무답게 죽는 것. 어떻게 죽는 것이 나무다운 삶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게 종(種) 내부에 오랫동안새겨져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목은 장마 내 몸을 틀었다.
끌려가는 건지 버티려는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뿌리가 있는것은 의당 그래야 한다는 듯, 순응과 저항 사이의 미묘한 춤을 췄다. 그것은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을 터였다.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먼지 낀 유리 너머로소리가 삭제된 채 보이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았다. - P86

장맛비가 내린 그 며칠은 내 생애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 마음이 그랬다는 게 아니다. 집에 전기가 나가서였다. 이곳은 시골처럼 날이 빨리 저물었다. 이름만 대안도시일뿐, 오래전 수도(首都)에서 밀려난 이들이 허허벌판에 둥지를 튼 곳이니 그럴 만했다. 전기가 원만하게 들어오는 날이라도, 땅거미가 지면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몇 개의빛으로는 물릴 수 없는 유구하고 원시적인 어둠, 우리가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심박동에 홀려 신을 벗고 길 떠나는 꿈을 꿨다. 또는 알 수 없는 초조를 어쩌지 못해 옷을 벗고 아내 위에 올라탔다. 잘 모르지만 그랬을 거란 느낌이 든다. 우리가 붙잡고 헤매는 실 끝에는 언제나 가는 눈을 반짝이며 웅크리고 있는 원시인이 있으니까. 그들은 늘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게다가 장마철엔살냄새가 짙어졌다.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폭우 속, 사물들은 흐려졌고 그럴수록 기이한 생기를띠었다. - P87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 - P94

돼지탁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티브이와 라디오는 나오지않았고, 양초는 되도록 아껴야 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거나이런저런 몽상에 잠기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곤 눅눅한방바닥에 누워 지구의 살갗 위로 번져 나가는 무수한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봤다. 동그라미속의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들………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일으키는 동그라미들.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고, 당장 뭘 이해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떼를 입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봉분 위에도 동심원이 고요하게 퍼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아직 떠내려간 것만아니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 P95

날씨는 예측할 수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으면 얼마 안 가벼락이 쳤다. 구름이 가벼워졌다 싶으면 어느새 폭풍이 왔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이고자 했다. 예상하지 말라는 듯. 예고도 준비도 설명도 말며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듯. 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너희도 하라는 듯 난폭하게굴었다. 비상용물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연신 식은땀을 흘려댔다. 장마는 한 달을 넘 - P100

어서고 있었다. 빗방울이 가늘고 성기게 내릴 때도, 뭇매를치듯 세차게 쏟아지기도,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려앉을 적도있었지만, 어쨌든 하루도 그치지 않고 내린 것만은 분명했다.
비바람이 거세질 때면 아버지의 방에 묶여 있는 물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릇 위로 동심원이 엷게 번지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어쩌면 집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끔은 물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것은 음정 없는 노래처럼 갈 길 잃은 전파처럼 웅웅웅웅 울어댔다. 한밤중 이상한기척이 들릴 때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 P101

어머니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파트를 떠나는 대신 세상을 떠나셔야 했다. 배는 생각보다 말을듣지 않았다. 작은 파도나 장애물 앞에서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휘청거렸다. 잡동사니로 얼기설기 만든 거니 그럴 만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많은 빗물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집을 떠난 뒤 단 한 대의 헬리콥터도, 단 한명의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감기에 걸릴지 몰랐다. 배가 언제까지 버티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부디 우리가 구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P113

대신 물 밖에 나왔을 땐 반드시 하늘을 봐야 한다고, 그 정도야 뭐.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여유를 부리며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온몸에 힘을 빼고 물에떠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여름 강물의 속살은 차고 깊었다. 부드럽고 물컹하니 아득하며 편안했다. 생경한 듯 잘 아는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 세상의 그 어떤 소음과도차단돼 짧은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나는 더이상 견딜 수없을 때까지 물속에 있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고 어느 순간, 숨을 참지 못해 수면밖으로 나왔을 때 내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물속에 있었을 때보다 숨이 더막혔다.  - P125

주위는 조금씩 밝아졌다. 놀랍게도 비가 거의 멎은 듯했다.
이러다 다시 내릴지, 완전히 개일지 알 수 없었다. 이 마을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그걸 보니 엄마, 나무뿌리에안겨 떠내려간 엄마 생각이 났다. 녹색 테이프에 감긴 얼굴로오랫동안 내 쪽을 바라보던 모습도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어디쯤 가셨을까. 부디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좋을 텐데. 젖은 옷가지가 바람에 마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밖에 나오니 물속에 있을 때보다오히려 더 추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조금 있다 체조를 해야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속눈썹을 깜빡이며 달무리 진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 P126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그걸 알아야 머물 수도 떠날수도 있다고. 그녀는 ‘짜이날‘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라 했다.
그 말이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그다음, 그곳에 어떻게 갈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 잃은 나그네에게 친절하다고. 그러니 외지에 나가선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가 중요하다고, 용대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투박한 한국어 문장으로 설명해줬다.
용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런 말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 사람, 그럴 자격이 있는사내로 여겨지곤 했다. 이 여자, 언제나 내겐 좀 과분하다‘는느낌이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정성으로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 못 할 게 없다는, 소통에 관한 한 순진할 정도의 믿음이있던 여자. 일도 참 잘했지만 공부를 했다면 더 좋았을 젊은아내. 처음, 손바닥에 땀을 닦고 악수를 건네자, 세상에서 제일 작은 부족의 인사법을 존중하듯, 웃으며 따라 한 북쪽 여자.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짜이날‘을 발음하자,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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