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 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안에서버둥거리던 어머니는 잡을 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 - P8
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정적 속에서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아버지가 어디 계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항상 어딘가에 계셨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언제나 늦게 오거나 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펄떡이는 심장을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P9
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 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 나는 아버지뿐 아니라 운동중인 모든 사람이 우스꽝스러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네 공원에서 소나무에 대고배치기를 하는 아저씨나, 손뼉을 치며 걷는 아주머니들을 볼때마다 내가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진지했고 열성적이었다. 마치 건강해지기위해서는 조금씩 우스워져야 된다는 듯이. - P10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한번도 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나를 낳았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양반이라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바보라고 생각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늦게 왔지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주눅든 지각생의 눈빛 때문에 항상 먼저 농담을 건네던 여자였다. 아버지는 변명을 하지도, 큰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그저마른 입술과 새까매진 얼굴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상상하건대, 어쩌면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 P11
달리기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한다. 달리기는 심폐계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전신운동으로, 걷기와 뛰기의 복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리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고도의스피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장소나 기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리기는강한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를 떠난 사람이, 나를 떠난 곳에서 오래 달리고 있는 이유를, 그 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생각이 든다. - P14
내겐 아버지가 없다. 하지만 여기 없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계속 뛰고 계신다. 나는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가 지금 막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천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막 스핑크스의 왼쪽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백십번째 화장실에 들러,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야광 바지가 언제나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뛴다. 물론 아무도 박수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5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십수년 만에 우편을 타고 가뿐하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善意)처럼, 종지감 없는연극이 끝난 뒤에 터지는 어정쩡한 박수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낯선 억양의 인사를 건네며 돌아온 부고(告). 그때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세계 곳곳을 달린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당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당신이 죽었다고 말하기 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 세계를 뛰어다닌것이 아니라 미국에 살고 계셨다. - P22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상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후꾸오까를 지나, 보루네오섬을 건너,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가는 아버지, 스핑크스의 발등을 돌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거쳐, 과다라마산맥을 넘고 있는 아버지. 웃으면서 달리는 아버지. 달리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 그러다 나는 문득, 아버지가 그동안 언제나 눈부신 땡볕 아래서 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야광 반바지도 입혀드리고, 밑창이 말랑말랑한 운동화도 신겨드리고, 바람이 잘 통하는 셔츠도 입혀드리고, 달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상상해왔다. 그런데 그중 썬글라스를 씌워드릴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가 비록 세상에서가장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 - P28
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뛰실 수 있을 것이다. ----달려라, 아비『한국문학』 2004년 겨울호 - P29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무언가 필요해진다.
약속과 우연과 재난이 이삿짐처럼 사라진 2003년 서울.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편의점은 기원을 알수 없는 전설처럼 그렇게 왔다. 시치미를 떼고 앉은 남편의 애첩처럼, 혹은 통조림 속 봉인된 시간처럼 수상할 것도 없이.
2003년 서울 사람들에게 습관이란 구원만큼 중요한 문제가되었다. 그리하여 2003년 서울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뭘까 항시 고민하는 창백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편의점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많이, 그리고 신속하게 생겨났다. - P32
편의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은 모두 누구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저마다 하나씩 앨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운동회 때 2등으로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1등 아이의 얼굴을 보고 같이 흠칫 놀랐다거나, 형제에게돈을 꾸어 여자를 만나고, 모든 문제집의 첫장만을 풀어봤다거나, 뜻을 알면서도 국어사전에서 ‘음부‘나 ‘성교‘라는 단어를찾아봤을 사람들, 혹은 하게 될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건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다. - P33
하루에도 몇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수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사러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 P33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나의 필요를 아는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서 물을 살 때, 그것은 약을 먹기 위함이며, 당신 뒤의 남자가 편의점에서 면도날을 살 때, 그것은 손을 긋기 위함이며, 당신 앞의 소년이 휴지를 살 때, 그것은 병든 노모의 밑을 닦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당신은 이따금 상기해도 좋고 아니래도 좋다. 큐마트,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는 모른다. 편의점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물이다. 휴지다, 면도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문학과사회』 2003년 가을호 - P57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사실뿐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길게 내민 모가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아프리카 평원위에 최초로 직립하게 된 유인원처럼ㅡ고독하게. - P60
나는 한번 올라가면 다신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스카이콩콩을 잘 탔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도, 좋아하는 가수가 십대가수상을 타도, 형이 알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놓아도 스카이 콩콩을 탔다. 언젠가 핼리혜성이 76년 만에 돌아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어대던 날도, 나는 옥상 위에서 조용히 스카이콩콩을타고 있었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또 우아했다. 스카이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들어 있었다. - P65
스카이콩콩을 타지 않는 날이면, 옥상 위에서 침을 뱉거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놀았다. 창문에는 가을 석류처럼 활짝 터진, 구멍난 방충망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오랫동안 빨지 않은 녹색 커튼이 펄럭거렸다. 나는 커튼 안에 고개를파묻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먼지냄새가 주는 그 오래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먼지냄새는 뭐랄까, 내가 살아본 적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번은살았던 것도 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는 세상 말이다. 그땐지금보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나와 밤하늘 사이도 더 멀었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작아져도 좋을 만큼 그것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 P66
형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형은 과학적 소질이 전혀없어 보였다. 어쩌면 형이 가진 유일한 재능은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은 변했다. 형은 더이상 안경을 벗어던지며 "아버지, 앞이 보여요!"라고 외치던 병신이 아니었다. 형은말수 적은, 그러나 할말 있는 표정을 가진 소년이 되어갔다. 형은 수심어린 표정으로 옆구리에 항상 과학서적을 끼고 다녔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 절대 멋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은 공공연히 자신이 한국과학기술원에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반에서 36등을 했다. 형은 과학자가 되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공부, 운동, 신문 스크랩, 게다가 문학동아리 가입까지. 형은 과학자가 되려면 상상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천문학자들의 이론은 그 자체로완벽한 하나의 시(詩)‘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면서. 하지만 그후로도 몇년 동안 형은 라디오를 고치지 못했다. 그때도 나는 형에게 뭔가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스카이 콩콩을 탔다. - P72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
형이 돌아왔으니, 그리고 우리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저렇게 괜찮아져 있으니 가로등 앞에 있던 우리집 이야기는이제 그만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 깜박 잊고 있던 이야기 하나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은 형이 고무동력기대회에서 일등을 먹은 날로부터 일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 P81
우와 하는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추락의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형은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서꼼짝하지 않았다. 창공 위로 여전히 수십개의 비행기가 고운선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에 성공한 각각의 비행기들이 약속한 듯 모두 추락하기 시작했다. 형은 두번째로 놀라며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비행기들은 바람개비마냥 빙글빙글 돌며 하나둘 낙하하고 있었다. 다른 형들은, 작년에 형이일등한 비결을 알고 형을 따라 모두 비행기 꼬리부분을 손봤던 것이다. 하지만 형들도 서로 그것을 약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는 눈치였다. 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고개를 들어 낙하하는 비행기들의 춤을 바라봤다. 빙글빙글돌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행기 떼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꽃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꽤 아름다웠다. 형은 멍하니 서서 그 꽃비를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말도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어떤 재능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그날 밤 집으로돌아온 뒤 홀로· 스카이콩콩을 탔다.
----스카이 콩콩 『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 P83
그녀는 벌써 몇번째 자세를 뒤척였다. 바로 누웠다. 옆으로누웠다. 엎드렸다 하는 것은 기본이며 쿠션을 다리 사이 혹은다리 밑에 끼우거나 안거나 팽개치거나 함은 물론이다. 팔을둘다 올리거나 하나만 올릴 수도 있고, 팔은 구부리고 다리는펼 수도, 다리는 구부리고 팔을 펼 수도 있다. 한쪽 다리는 올리고 한쪽 다리는 내린 채 팔은 양쪽 다 머리 위로, 고개는 오른쪽을 향하게 할 수도, 왼쪽을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녀의자세는 모두 세분화된 신체의 경우의 수로 만들어진다. 이 세상에는 그녀가 아직 모르는, 어떤 예민한 사람이라도 깊이 잠들 수 있는 독특한 자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뒤척임은 바로 그 경우의 수를 하나씩 지워가며 ‘빙고‘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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