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마침내 시시해지는 내 마음이 참 좋다.

2007년 가을, 김애란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번째 음이니까, 첫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전반을 누르자, 도는 겨우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보았다. 도는 당황한 듯 다시 도 하고 소리 낸 뒤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 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 빅 사이론 오후의 빛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ㆍㆍㆍㆍㆍㆍ

----도도한 생활  - P9

피아노 건반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것은 희거나 검었고,
동일한 크기와 질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도의 위치를 자주잊었다. 그것이 레가 아니라 도라는 것을, 미가 아니라 파라는 것을 만져보기 전에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찾는 도는 왼쪽 가장자리 건반으로부터 스물네 손가락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건반 위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1부터 24 까지의 숫자를 일일이 세어봐야 했다. 그렇게 도를 찾아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를 다시 치는 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덩치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다행히도를 찾고 나면 레를 짚기가 수월했다. 레는 도 바로 옆에 있었다. 미는 레 옆이고, 파는 미 다음이니까, 일단 도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 P10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서 ‘치기공‘
을 배우고 있었다. 주로 치아 보철물의 제작 기술을 배우는학과였다. 언니는 원서를 쓰기 바로 전날까지도, 자신이 평생누군가의 이齒] 모형을 만들며 살게 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대학에 붙었다는 말도 못한 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를 노래만 연습하고 있었다. - P21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 다급하게 깜빡이는 휴대 전화 불빛은 그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데 꼭 필요한 경보 같와다. 아침마다 그 작은 재난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모습은.
한밤중 폭우를 만나 해변으로 쏠려 온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머리맡을 더듬어 불빛을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쥔 채 죽은 듯 엎드려 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이제 막 출동하려 한손을 들고 있는 슈퍼맨과 같다 말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녀가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주먹을 뻗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그녀가 자세를 튼다. 몸에서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침이 고인다  - P45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면바지에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가슴 한쪽엔 지구의 모양의 로고와 ‘축 개원 10주년 뉴 엘리트 학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광복절이라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다. 토스트를 파는 포장마차도, 무가지를 나눠주는가판대도 한적하기만 하다. 에스컬레이터 위로 얼굴이 부은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게 보인다. 그들 모두 어릴 때 꿈이
‘훌륭한 사람‘은 못 되었어도, ‘공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은아니었을 거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의 긴 행렬에 바싹 따라붙은 뒤, ‘내가 사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이러고 있지 않을텐데‘ 탄식한다. 그러고는 이내 부끄러워한다. 학부모들이상담 때마다 하는 말 중 하나가 우리 애가 ‘공부를 못 해서‘가아니라 ‘욕심이 없어서‘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49

버스가 출발한다. 수십 개의 소형 에어컨에서 찬바람이 쏟아진다. 춥다. 그리고 우울하다. 생리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공휴일의 체육 대회 탓인지, 부장 탓인지 모르겠다. 에어컨 바람과 차 냄새 때문에 멀미가 난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꼭짓점 댄스의 순서를 짚어본다. 하나 둘 셋 틀고. 하나 둘셋 전진, 그걸 좁은 원룸 안에서 연습했을 때, 후배가 배를잡고 웃던 기억이 난다. 언니! 왜? 후배는 하얗게 웃으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못 춰요? 날씨는 화창하고, 피곤한 얼굴의 선생 몇이 코를 고며 졸고 있다. 부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 팀장과 함께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 있다. 평소 국어과는수학과나 영어과에 비해 하는 일이 없다‘는 오해를 받아왔던터라 이번에야말로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건너편 자리에서는 학원 버스를 모는 기사 아저씨들이 얘기를나누고 있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았다. 좀 잘까? 훌쩍, 콧물이 나온다. 이런, 성가시다. - P62

몇 번의 알람이 울렸다 꺼지고, 고단하고 일상적인 날들이지나갔다. 후배는 여전히 목소리가 좋았지만 예전만큼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습관‘이란 게 생겨버린 탓이었다. 일상의 습관, 관계의 습관, 그 습관을 예상하는 습관까지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퇴근 후 현관에 서서 ‘지금 저안에 후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후배를 안다고 생각했다. 후배의 습관 중 부정적인 목록을 발견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자처럼, 후배가 저지르는작은 실수들을 숨죽여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그렇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 P66

그녀가 현관문을 연다.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이불 위에 누워 첨삭을 하고 있는 후배의 모습이 보인다. 후배가 고개 들어 반색한다. 언니 왔어요? 그녀는 ‘락앤락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야, 그거 언니가 상 탄 거예요?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아냐. 그냥 참가하면 다 주는거야. 후배는 집에 반찬통이 없었는데 잘됐다며 좋아한다. 그녀가 홀깃 원고지를 보며 말한다. 아직도 해? 후배가 싱그럽게 웃으며 자랑한다. 네, 언니 저 거의 다 했어요. 이번 주주제가 다양성인데요, 획일성은 나쁘고 다양성이 중요하다는내용을 모든 아이들이 완전 획일적으로 써냈어요. 웃기죠? - P76

샤워기를 틀자 쏴아-하고 뜨거운 물이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 P77

 많은 일이 있었고 또 말썽 많은 하루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하루가 지나갔다‘는 데 있다. 후배와 지낼 불편한 날들 역시 곧 지나갈 것이다. 그녀는 귓바퀴와 배꼽에 낀 먼지를 산산이 씻어낸다. 수챗구멍 위로 그녀의 것과후배의 것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회오리친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후배가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최대한 잘해주자고 결심한다. 그녀는 몸에 수건을 감고 나온다. 그런 뒤 발판에 발바닥을 문지르며 주위를살펴본다. 이상하다. 방 한가운데 오래된 적요가 손님처럼 앉아 있다.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진 이불이 보인다. 요 껍데기는 벗겨진 상태다. 방안을 둘러본다. 항상 행거 아래 있었던후배의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후배가 없다. - P78

그렇지만 이제 가슴이 아리진 않다. 지금 사내의 옆구리엔한 봉지 라면이 다정하게 바스락거리고, 오늘 밤 티브이에선틀림없이 성탄특선 영화가 나올 테니까. 저기 ‘여관‘의 간판불은 꺼져 있다. 방이 모두 나간 모양이다. ‘크리스마스니까‘ 하고 사내는 웃는다. ‘오늘 밤 어느 야쿠자 두목은 세 명이랑도 하겠지?‘ 생각하니 조금 시무룩해진다. 그러자 곧 먼곳에서 사슴뿔을 단 세 명의 아가씨들이 엎드린 채 사내를 바라보며 ‘음매에 하고 운다. ‘・・・・ 사슴이 그렇게 울었던가?‘ 생각해보지만 사내는 한 번도 사슴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성탄 특선 - P88

사내는 두 손 가득 보리차가 든 유리컵을 들고 아이처럼 외쳤다.
"이야! 컵에다 물 마시니까 정말 맛있다!"
오래전부터 ‘소독한 델몬트 주스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은 사내의 로망중에 하나였다. 그런 것 하나가 자기 삶을 어떤 보통의 기준에 가깝게 해주고 또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였다. 사내가 고집하는 생활 습관은 몇 개 더 있었다. 사내는 여동생에게 ‘아무리 돈이 없어도 화장실 세정제만은 반드시 사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 P101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표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 P117

그렇다고 뭔가깨달아버리기에도 이른 나이였던 때, 나는 장기판 위에 놓인한 마리 말(馬)처럼 대책 없고 수줍었다. 열차 안으로는 도심의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한강 철교와 올림확대로, 크고 작은 빌딩들이 지나갔다. 스무 살의 나는 ‘이아 다리는 정말 다리가 많네?‘하고 신기해했다. 오후 2시.
머리 위로 고요하고 오래된 태양계의 질서가 자전하고있던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바짝 조여들었던 나의 동공은 점점 크게 벌어져 하나의상 앞에서 멈췄다. 한강 너머 - 호젓하게 솟은 빌딩 한 채가보였다. 온몸으로 푸른 하늘을 인 채 수백 장의 금빛 비늘을 얌전하게 펄럭이고 있던 그것.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63빌딩이다."
내 마음의 데시벨은 너무 낮아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없었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63빌딩이다ㅡ라고, 나는 63빌딩을 보자 서울에 온 것이 실감 났고비로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 P123

여름은 재수생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었다. 삼복더위에 나는 연필 들 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식욕 같은 건 없었지만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큰일이었다. 나는 아주 젊었지만 허약했고, 날짜를 지우고 답안을 쓰다 졸곤 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체력은 바닥났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고득점자에 대한신화가 떠돌았다. 누구는 하루에 모나미 볼펜 세 자루를 쓴다더라, 누구는 목욕탕 갈 때 목욕 바구니에 영어 단어 써서 간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그런 말들이 잘 믿겼다. 나는 학원에 가고, 시골에 전화를 하고, 삐삐 진동음에 뒤척이고, 님은 먼 곳에」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마음이 답답할 때면 근처 사육신묘에 가서 바람을 쐬다 오곤 했다. - P138

2005년 가을, 사람들 틈에 끼어 서울의 불빛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량진의 이름을 생각했다. 다리량(梁) 자와 나루터진(津) 자가 동시에 들어간 곳. 1999년 내가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곳,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곳. 하지만 그곳이 정말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7년이 지난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걸까. 짧은 정차 후,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한 여자가내 밟을 밟으며 소리쳤다. "밀지 마요!" 우주 먼 곳 아직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항성 하나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어디선가 아득히 ‘아영아, 내 손 잡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열차가 어디까지 왔는지 따져보았다. 벌써 집 근처에 가까워져 있었다. 차고 깊은 가을 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 서울의 북쪽으로 달려가고있었다. - P148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창자와 내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칼자국  - P151

그런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점점한 아가리 속으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1) 만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때 전해지는 그 저격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면 햇빛의 뼈와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 P155

부엌에는 칼이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한가지 칼로만 국수를 썰었다. 나머지 칼은 과일을 깎거나 바지락을 까고, 김장 때 다른 일손에게 빌려주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눈 감고도 썰 수 있었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칼날 위에 들러붙은 반죽을 쇠숟가락으로 쓱쓱긁어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체육복 바지를 입고 잔일을 도왔다. 사춘기 땐 쟁반을 들고 배달을 가다, 길에서 좋아하는 남자 애를 만나 다리가 후들거린 적도 있다. 성질 급한 어머니는 잔소리가 심했다. 대파는 가랑이를 잘 씻어야 한다. 대걸레질하라고 했더니 홀에 물만 발라놨냐.  - P155

 손님들이 순서 뒤바뀌는 걸 언짢아하는 탓도 있지만, 오래전 한 여자가 갓 나온 국수를 그대로 들고 나가, 거리에 쏟아버린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밥장사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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