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강제, 노동, 죽음이라는, 수용소와 전통적으로 어울리는 전치 단어들을 입에 올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사물이 그것과 유사한 기색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유사함을 유발하는 유순하고 평화로운 눈빛을. 그들은 실제로 더 순하고 더 무심하며 더 느리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하고 무심하고 느린 사람은 여죄수였다. 아마도 반쯤 다른 생각에 잠긴 말투나 초조해하지 않는 행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죄수는 약속 시간에 늦게 나오지는 않는다. 여죄수는 어두운 녹색의 긴 원피스에 어깨에는 커다란 모직 숄을 두르고 앉아 있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잡지가 펼쳐져있다. 혼자 있을 때 여죄수는 이상할 만큼 느린 속도로 미소 지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잿빛 중절모를 쓴 남자가 카페의 입구로 들어서며 눈길로 여죄수를 찾는다. 도서관 카페가 비록 아주 넓은 홀이기는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거의 - P129

비어 있다시피 하므로 그들은 서로를 쉽게 찾아낸다.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오고, 여죄수는 손가락을 잡지의 페이지 위에 둔 채 지속적으로 침착하다. 너무나 정적이고 침착해서, 마치 희고 커다란 여신상에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이미 적어도반 시간 전부터 도서관 2층에서 빌려온 잡지의 똑같은 페이지를펼쳐놓고 있는 중이다. 물론 수용소 도서관에 신간잡지는 없으므로, 『무대」란 이름의 그 낡은 공연잡지는 1978년도에 나온 것으로 지금은 폐간된 지 오래인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강제, 노동. 죽음이라는 글자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그러나 수용소의용수철 또한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더 순하고 더 느릴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발견한, 회오리바람 모양의 주인 없는 척추뼈처럼. 여죄수는 남자가 자신을 발견한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에게로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잡지의 페이지를 유심히 읽기 시작한다. - P130

여죄수는 자신의 안에서 줄곧 금이 가고 분열되고 있던 어떤요소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그 충격으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몸을 헛되이 지탱해보려는 것처럼 여죄수는 무의식중에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꽉 잡는다. 만약 우리가 오직 죽기위해서 왔다고 한다면, 무엇이 우리의 신경을 긁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우리가 준비된 죽음의 자리에서 예상치못하게 다시 반대편 해안으로 떠밀려 나가야 한다면, 다시 말할수 있게 된 벙어리처럼 모든 것을 더듬거릴 뿐인데,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혹한 파트너의 손을어떻게 다시 놓아야 한단 말인가! 다른 자연에 던져진 우리는 또다시 무엇이란 말인가! 여죄수는 무의미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남자에게는 그 입술의 왜곡된 움직임이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치켜든 혓바닥처럼.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유혹이라고 부른다. 여죄수는 무의미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다. 그들은 서로의 일화를 모른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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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는 떠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직장이나 일에는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글을 쓰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열정도 희열도 없었다. 벽 너머의 벽, 그 너머의 또 다른 벽과 또 다른벽. 매 순간마다 혼자라는 생각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고독은 세상에서 가장 역한 비린내를 풍기며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수니 곁에 있고 싶었다. 수니의 따뜻한 몸 곁에 있고 싶었다. 수용소로 가버린 수니 곁에, 가방을 들고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던 수니 곁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던 수니 곁에,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수니 곁에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던 수니 곁에, 수니라고 불리는 수니 곁에, 수니의 옷을 입고 수니의 얼굴을 한 수니 곁에, 수니의 언어로 말하는 수니의 곁에, 오, 한때 쓸쓸했던 수니와 명랑했던 수니 곁에, 떠나지 말라고 소리 없이 애원하는 수니 곁에, 질문 없이 묻는 수니 곁에, 그누구보다 비통한 수니 곁에, 일그러진 조각상 같은 수니 곁에, 이 수니와 저 수니 곁에, 내 모든 수니의 곁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런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니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 비로소 선명하게 인식이 되었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보다 더욱 절실하게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혼자인 자들의 고독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욱 절실한, 절실함의 폭풍. - P74

여인은 바람의 겹 속으로 사라졌다가,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린 채 흰 나뭇가지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가을이었으므로, 여인의 모든 것이 꿀빛으로 일렁였다. 나는 숲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숲은 여인의 한가운데였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 새의 외마디 울음소리. 그리고 정적. 먼 정적. 그 단어, 머나먼. 우리는 커피를 마셨고, 마침내 나는 여인을 위해서 한 조각의 빵을 주문할 수 있었다. 빵에 바를 치즈도 함께. 여인이 말했다. 수니와는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전부터 수니의 오디오북 「몬타우크Montauk」를 통해서 수니의 목소리는 잘 알고 있었다.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는 수니의 오디오북 중에서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어떤 목소리를 갖는다면 그건 수니의 음성이다. 라고 여인은 단언했다. 그 이외의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니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수니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까지 받게 되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메일을 통한 교류는 꾸준히 이어지기까지 했다. 여인은 오디오북 팬이다. 할머니들을 돌보느라 항상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살았거든요...... - P76

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작 할머니들은 오디오북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여인은 곧 오디오북에, 정확히는 오디오북 속 수니의 목소리에 도취되어버린다. 마음의 떨림을 표현하는 고요한 목소리에 문자 텍스트의 알토 아리아. 여인은 아무 희망 없는 간병인으로 평생을 시골구석에서 썩어갈 거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녀의 강철 같은 신념이었다. 그런데 수니를 알게 되었다. 수니는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고 여인의 열정에 다정하게 응대를 했다. 심지어 서울로 올라오면 스튜디오에서 간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언질까지도 준다. 물론 수입은 시골의 실버타운에서 일하는 것보다 덜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여인은 시골도 실버타운도 싫으며, 무엇보다도 노인들이 싫다. 오디오북을 위해서 일할 수만 있다면. 어느새 여인은 밤마다 책을소리 내어 읽어본다. 낭송 극본도 구해서 읽었다. 수니가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찾아서 듣고 CD를 구입했다. 실버타운에 정규직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운이 엄청나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부동산 사무실의 경리, 화장품 가게 점원, 길거리내레이터 모델, 편의점 점원, 음료수 공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오디오북 같은 것을 들을 시간도 없었고, 그런 게 있다는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이다. 그녀는 말했다. 세상에는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는데, 운 나쁘게도 내가 태어난 집안이 그런 사람들이었거든요. 게다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서 10대 시절부터 집을 나와 살았으므로 스스로 방세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 P77

린의 메모, 의문부호가 없는 질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문장의 어느 특정 모퉁이를 돌면서부터는 문득, 비밀스러우면서도 동시에도저히 숨길 수 없는 엄청난 분출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러한 모퉁이와 막다른 골목과 강물과 다리, 갑자기 나타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입구와 닫힌 문들, 낡은 벽들과 낯선 이들의 집, 강물에 비치며 흘러가는 발코니. 소박한 나무 창살, 화려한 무덤, 신비한 녹색의 포석(石)들, 잠든 정원들, 지붕과 그 아래 은밀한 방들로 이루어진 세계, 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특정 시점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만을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그 순간부터는 세계가 오직 글을 쓰는자의 이야기로만, 글로 씌어질 이야기들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람들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이야 - P83

기 속에서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왜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만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 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오직 그 속에서만.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입으로 말해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방인으로 나타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언제 ‘그‘이며, 언제 ‘나‘가 되는 것일까. 마침내, 글을 쓰는 사람들은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달아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일까. 달아날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하여 세계가 글을쓰는 사람들이 쓴 글과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고자 꿈꾸는 글로만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각각을 현실과 꿈으로 이름 붙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희열 속에서 비통해하고 비통해하면서희열에 떠는 것일까. 그러고는 말한다. 놀라워라, 아름다운 것이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니,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하고.
어느 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 사람에서 서서히 씌어지거나 씌어져야 할 글로 변해가는 것일까.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시점부터는 스스로 글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수 있는 것일까.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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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하지만 사실상 크게 놀랄 일도 아니며, 따라서 소란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에게 실제로 닥치면 충분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일첫번째 탄원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출한 지 일주일 만에 우체국 창구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자 담당자로부터 접수가 거부되었다는 제출 요건에 미달하므로 통보와 함께 봉투째 되돌려 받은 것이 전부였다. 여자 담당자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30년 동안있었답니다. 하는 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이경우에는 부주의하게도 서툰 자만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나이 든 담당자는 입술에 주름을 강하게 모으고, 뭔가 말하고싶고 그럴 수도 있으나 말하지 않겠으며, 말하지 않음이 순전히자신의 고귀한 의지에서 연유한 것임을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적극적이고 투철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나는 어쩌면 앞으로도 30년 - P9

동안은 더 이곳에 있겠지. 그러나 너는 끝내 아무런 대답도 듣지못할 거야. 하는 제삼자의 신경줄로 이루어진 무의지적인 의지.
깊숙하게 들어간 눈두덩 아래서 눈동자가 수니를 향해 흐릿하게 번쩍거렸다. 그 눈동자는 수니의 것이기도 했다. 거울의 세상에서 모든 사물은 반사이므로. 하지만 거의 동시에 제출한 두번째탄원서는 조금 더 시간을 끈 다음에 위원회가 열릴 것이란 통보까지는 받았으나, 2주일 정도 후 결국 ‘도저히 불가함‘이란 스탬프가 찍힌 결정서와 함께 되돌아왔다. 귀하의 소망과 그 소망의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호의와 공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조항과 절차를 먹고사는 관료주의의 유령이 아니며 편의와 효율보다는 한 개인의 간절함을 더욱 소중히 할 줄 알기에, 귀하의청원이 이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충분히 검토했고 설사 변칙이라 해도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여러 면에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펴보았으나, 귀하와 같은 22조 수정 항의 경계성 케이스가 우리의 추가 부담 감당 능력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많을뿐만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므로, 우리는 안타깝게도 극히 제한적으로 예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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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대국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쉰 살의 당신과 열아홉 살의 나
첫 직장에 입사하는 나와
대학교를 졸업하는 당신

산산조각으로 희고 검은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돌을 던진 당신과 사표를 쓴 나
기차를 타러 가는 당신과
실업급여를 타러 가는 나

산산조각으로 산산조각으로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죽여줄 때까지 죽고 싶을 때까지 - P36

중력과 권력 AI와 고독에 맞서며
서른 살의 나와 아홉 살의 당신
탈을 쓴 당신과 털을 기른 나
검은 돌이 흰돌을 사랑하듯

희고 검은 산산조각으로

우리는 밤새도록 사랑을 했네
죽여줄 때까지 죽고 싶을 때까지
무한하면서 유한한 유한하면서 무한한
미래이면서 반미래인 반미래이면서 미래인
하나의 거울이 두 개의 얼굴을 비추듯
두 개의 얼굴을 하나의 거울이 비추듯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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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곳에 살기 위하여 탁구를 칩니다. 주고, 받고, 받고, 주고, 단순하고 정직한 게 마음에 듭니다. 승부를 가르면 대부분 지지만 가끔 이기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탁구공도 지구도 둥글고 둥근 것들은 예상 밖이고 예상 밖은 가끔 몹시 아름다운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마저도 끝장나버린 이곳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아니 정확하게 미워하기 위해 시를 쓰고 탁구를 칩니다.

2024년 여름
안현미 - P-1

탁구


K가 돌아온 밤은까마귀보다 검었다 우리는 그날 밤 탁구를 치고 있었기에 그가 데리고 온 밤의 검정과 탁구공의 하양은 꽤 근사하게 어울렸다 주고받는다 받기위해 준다 주기 위해 받는다 그것밖에 없다 그것밖에 없어서 즐겁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는다 헛소리 같지만 그것밖에 없다 튀어 오르고 튕겨 나간 건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공 같은 것 아무튼 K는 돌아왔고 그가 데리고 온 밤은 까마귀보다 검었고 헛소리 같지만 방금 막 도착한 자정을 향해 튀어 오른 탁구공은 미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밖에 없어도 그러하듯이 - P13

귀래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깊은 밤 불 꺼진 집으로 돌아와 물을 끓이는 일처럼 황막하고 황홀한 것이다 생이 뭔지 도통 모르겠는 여자가 하루에도 수없이 지었다 부수는 지옥처럼 폐사지 돌 밑 텅 빈 검은 흙처럼 천 년 동안 살아온 느티나무의 침묵처럼 그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미지의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울고 싶은 여자처럼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폐교 앞에서 만난 아기 고양이의 미래처럼 황홀하고 황막한 것이다 살아질 것이다 살아질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죽음이 뭔지 도통 모르겠는여자가 하루에도 수없이 지껄이는 주문처럼 누군가 다녀간 폐사지 돌 위텅 빈 허공처럼 휴대한 줄도 모르고 휴대하고 다니는 죽음처럼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자꾸자꾸 돌아오는 보름달처럼 - P14

사과술


한때 시간만이 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이 침묵도 종내에는 나와 함께시간 밖으로 날아가리란 믿음의 신도로 어떤 밤엔 술에 취해 잠들고 어떤 밤엔 술을 담그다 잠들었다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그것이 딱 내 수준이었지만 내 수준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고 부끄러워하며 죽지도 않을 계획이다 시간은 신에게로 날아간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신에게로 쿵, 쿵, 쿵 코끼리 발걸음만큼 무거운 봄이 오고 있다 어떤 봄엔 술에 취해 잠들고 어떤 봄엔 술을 담그다 잠든다 더 이상 사과가 아닌 사과를 - P15

주천강 옆 겨울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안과 밖이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어디선가 눈먼 물고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과 의문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그림자를 벗고 겨울 강 속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무자비가 무를 버리고 있었다 고독이 내려오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은 신이 없다면 고독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독이 아니 신이 내려오고 있었다 의문에 휩싸인 울음과 물음이 겨울밤과 뒤섞이고 있었다 앞뒤가 뒤바뀐 이면과 표면이 있었다 입장을 바꾼 삶과 죽음이 엉키고 있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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