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는 떠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직장이나 일에는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글을 쓰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열정도 희열도 없었다. 벽 너머의 벽, 그 너머의 또 다른 벽과 또 다른벽. 매 순간마다 혼자라는 생각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고독은 세상에서 가장 역한 비린내를 풍기며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수니 곁에 있고 싶었다. 수니의 따뜻한 몸 곁에 있고 싶었다. 수용소로 가버린 수니 곁에, 가방을 들고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던 수니 곁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던 수니 곁에,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수니 곁에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던 수니 곁에, 수니라고 불리는 수니 곁에, 수니의 옷을 입고 수니의 얼굴을 한 수니 곁에, 수니의 언어로 말하는 수니의 곁에, 오, 한때 쓸쓸했던 수니와 명랑했던 수니 곁에, 떠나지 말라고 소리 없이 애원하는 수니 곁에, 질문 없이 묻는 수니 곁에, 그누구보다 비통한 수니 곁에, 일그러진 조각상 같은 수니 곁에, 이 수니와 저 수니 곁에, 내 모든 수니의 곁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런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니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 비로소 선명하게 인식이 되었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보다 더욱 절실하게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혼자인 자들의 고독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욱 절실한, 절실함의 폭풍. - P74

여인은 바람의 겹 속으로 사라졌다가,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린 채 흰 나뭇가지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가을이었으므로, 여인의 모든 것이 꿀빛으로 일렁였다. 나는 숲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숲은 여인의 한가운데였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 새의 외마디 울음소리. 그리고 정적. 먼 정적. 그 단어, 머나먼. 우리는 커피를 마셨고, 마침내 나는 여인을 위해서 한 조각의 빵을 주문할 수 있었다. 빵에 바를 치즈도 함께. 여인이 말했다. 수니와는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전부터 수니의 오디오북 「몬타우크Montauk」를 통해서 수니의 목소리는 잘 알고 있었다.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는 수니의 오디오북 중에서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어떤 목소리를 갖는다면 그건 수니의 음성이다. 라고 여인은 단언했다. 그 이외의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니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수니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까지 받게 되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메일을 통한 교류는 꾸준히 이어지기까지 했다. 여인은 오디오북 팬이다. 할머니들을 돌보느라 항상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살았거든요...... - P76

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작 할머니들은 오디오북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여인은 곧 오디오북에, 정확히는 오디오북 속 수니의 목소리에 도취되어버린다. 마음의 떨림을 표현하는 고요한 목소리에 문자 텍스트의 알토 아리아. 여인은 아무 희망 없는 간병인으로 평생을 시골구석에서 썩어갈 거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녀의 강철 같은 신념이었다. 그런데 수니를 알게 되었다. 수니는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고 여인의 열정에 다정하게 응대를 했다. 심지어 서울로 올라오면 스튜디오에서 간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언질까지도 준다. 물론 수입은 시골의 실버타운에서 일하는 것보다 덜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여인은 시골도 실버타운도 싫으며, 무엇보다도 노인들이 싫다. 오디오북을 위해서 일할 수만 있다면. 어느새 여인은 밤마다 책을소리 내어 읽어본다. 낭송 극본도 구해서 읽었다. 수니가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찾아서 듣고 CD를 구입했다. 실버타운에 정규직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운이 엄청나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부동산 사무실의 경리, 화장품 가게 점원, 길거리내레이터 모델, 편의점 점원, 음료수 공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오디오북 같은 것을 들을 시간도 없었고, 그런 게 있다는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이다. 그녀는 말했다. 세상에는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는데, 운 나쁘게도 내가 태어난 집안이 그런 사람들이었거든요. 게다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서 10대 시절부터 집을 나와 살았으므로 스스로 방세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 P77

린의 메모, 의문부호가 없는 질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문장의 어느 특정 모퉁이를 돌면서부터는 문득, 비밀스러우면서도 동시에도저히 숨길 수 없는 엄청난 분출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러한 모퉁이와 막다른 골목과 강물과 다리, 갑자기 나타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입구와 닫힌 문들, 낡은 벽들과 낯선 이들의 집, 강물에 비치며 흘러가는 발코니. 소박한 나무 창살, 화려한 무덤, 신비한 녹색의 포석(石)들, 잠든 정원들, 지붕과 그 아래 은밀한 방들로 이루어진 세계, 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특정 시점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만을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그 순간부터는 세계가 오직 글을 쓰는자의 이야기로만, 글로 씌어질 이야기들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람들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이야 - P83

기 속에서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왜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만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 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오직 그 속에서만.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입으로 말해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방인으로 나타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언제 ‘그‘이며, 언제 ‘나‘가 되는 것일까. 마침내, 글을 쓰는 사람들은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달아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일까. 달아날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하여 세계가 글을쓰는 사람들이 쓴 글과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고자 꿈꾸는 글로만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각각을 현실과 꿈으로 이름 붙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희열 속에서 비통해하고 비통해하면서희열에 떠는 것일까. 그러고는 말한다. 놀라워라, 아름다운 것이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니,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하고.
어느 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 사람에서 서서히 씌어지거나 씌어져야 할 글로 변해가는 것일까.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시점부터는 스스로 글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수 있는 것일까.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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