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이곳에 살기 위하여 탁구를 칩니다. 주고, 받고, 받고, 주고, 단순하고 정직한 게 마음에 듭니다. 승부를 가르면 대부분 지지만 가끔 이기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탁구공도 지구도 둥글고 둥근 것들은 예상 밖이고 예상 밖은 가끔 몹시 아름다운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마저도 끝장나버린 이곳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아니 정확하게 미워하기 위해 시를 쓰고 탁구를 칩니다.

2024년 여름
안현미 - P-1

탁구


K가 돌아온 밤은까마귀보다 검었다 우리는 그날 밤 탁구를 치고 있었기에 그가 데리고 온 밤의 검정과 탁구공의 하양은 꽤 근사하게 어울렸다 주고받는다 받기위해 준다 주기 위해 받는다 그것밖에 없다 그것밖에 없어서 즐겁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는다 헛소리 같지만 그것밖에 없다 튀어 오르고 튕겨 나간 건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공 같은 것 아무튼 K는 돌아왔고 그가 데리고 온 밤은 까마귀보다 검었고 헛소리 같지만 방금 막 도착한 자정을 향해 튀어 오른 탁구공은 미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밖에 없어도 그러하듯이 - P13

귀래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깊은 밤 불 꺼진 집으로 돌아와 물을 끓이는 일처럼 황막하고 황홀한 것이다 생이 뭔지 도통 모르겠는 여자가 하루에도 수없이 지었다 부수는 지옥처럼 폐사지 돌 밑 텅 빈 검은 흙처럼 천 년 동안 살아온 느티나무의 침묵처럼 그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미지의 어둠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울고 싶은 여자처럼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폐교 앞에서 만난 아기 고양이의 미래처럼 황홀하고 황막한 것이다 살아질 것이다 살아질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죽음이 뭔지 도통 모르겠는여자가 하루에도 수없이 지껄이는 주문처럼 누군가 다녀간 폐사지 돌 위텅 빈 허공처럼 휴대한 줄도 모르고 휴대하고 다니는 죽음처럼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자꾸자꾸 돌아오는 보름달처럼 - P14

사과술


한때 시간만이 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이 침묵도 종내에는 나와 함께시간 밖으로 날아가리란 믿음의 신도로 어떤 밤엔 술에 취해 잠들고 어떤 밤엔 술을 담그다 잠들었다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그것이 딱 내 수준이었지만 내 수준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고 부끄러워하며 죽지도 않을 계획이다 시간은 신에게로 날아간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신에게로 쿵, 쿵, 쿵 코끼리 발걸음만큼 무거운 봄이 오고 있다 어떤 봄엔 술에 취해 잠들고 어떤 봄엔 술을 담그다 잠든다 더 이상 사과가 아닌 사과를 - P15

주천강 옆 겨울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안과 밖이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어디선가 눈먼 물고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과 의문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그림자를 벗고 겨울 강 속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무자비가 무를 버리고 있었다 고독이 내려오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은 신이 없다면 고독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독이 아니 신이 내려오고 있었다 의문에 휩싸인 울음과 물음이 겨울밤과 뒤섞이고 있었다 앞뒤가 뒤바뀐 이면과 표면이 있었다 입장을 바꾼 삶과 죽음이 엉키고 있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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