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 P-1

축복


고통이 바뀌면 축복이 된다기에
그 축복 받으려고
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절망을 씹다 뱉고 희망을 폈다 접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외면할 수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 P-1

어둠


어둠을 빚어 몇해나 익혀야 빛이 되나
빛 보듯 널 보려고
나는 오래 어둠이 된다 - P-1

나의 숟가락


얼마나 많이 내 삶을 내가 파먹었는가 - P-1

후기(後記)


시(詩)는 내 자작(作)나무
네가 내 전 집(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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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심사평


나무들이 바람을 남기듯이
시간이 메아리를 남기듯이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듯이

불켠 듯 불을 켠 듯

해를 향해 가라
그림자는 늘 자신 뒤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행성이 아닌 항성

장래가 천천히
눈부셔지길 바란다 - P-1

저항


독수리는
바람의 저항이 없으면
날 수가 없고

고래는
물결의 저항이 없으면
뜰 수가 없다

사람은
어떻게 저항해야
살 수가 있나 - P-1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P-1

교감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 P-1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네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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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들 내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타협은 곧 패배다‘. 이것이 내 생의 한 모토이기도 하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난 호랑이처럼 달려왔다. 어려운 일 있어도 내색하지 않기, 돈이 없으면 밥을 굶고 낮이나 밤이나 일할 각오가돼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나와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말이다. 지금 나를 보고 우아한 독신녀의 생활을 즐긴다고부러워하는 후배들도 있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철없는 말이다. 방을 얻기 위해 친척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나는 몇1년 동안이나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내 생활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런 전투를 헤치고 나왔으니 당연히 부상도 많이 입었다.  - P9

영화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녀시절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요는 사람들이 처음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장 용이하게 사용하는 접근 수단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나 스스로도자신이 코뿔소나 멧돼지나 하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어울려 다니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고집이 세고 게다가 근시안이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머리가 좋았다기보다는 노력하는 편이었고 사회에 나왔을 때는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좀미련하게 일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이쯤 되면 열 명 중에세 명 정도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천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니고 운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제로다. 그러니 무슨 행운이 따라오겠는가. 그리고 성격상 무임승차를 참지 못하는 결벽스러움이 문제다. - P21

실제로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한가한 시간이면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동물원 산책이다. 아직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습기 찬 동물원의 공기 말이다. 그러나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한가한 시간이란 것이 있었나? 물론나에게도 운이 좋은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랜 별거 끝에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우리 집은 자식들이 혼기를 놓쳐서 결혼은 반드시 시켜야 한다는 뭐 그런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셈이 되었다. 집안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아이들은 제각각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정도나 얼굴을 보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교육을 받았고 가족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이제 내 앞에는 오직 내 힘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내 문제들이 다가올 뿐이다.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든 백화점에서 옷을 훔치든 아니면 아프리카에 가든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감옥에 간 적도 없고 빚지지 않고살아왔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인가? 그래, 분명 보랏빛 인생은 아닐 것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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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관한 꿈. 빛이 있기 전에 한 여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라고. 나는 어디라도 갈 수있다고.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여기에 항상 없지만, 나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눈을 뜬다. 어느 역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것이 보이고, 그 철자들은 나에게 어떤 가까우면서도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다.
나는 계속해서 그 생각 속에 머문다. 놋쇠처럼 번쩍이는 뜨거운한여름 햇빛이 선로 주변 짙은 녹색의 벌판을 말없이 달구었으며, 그래서 풍경은 대기 중에 우연히 고정된 누군가의 잊혀진 한 장면인 듯한데, 역사의 아치형 지붕도, 커피와 핫도그를 파는 비닐 천막의 가판대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이 차창 밖으로 드러나자, 비로소 나는 급행열차나 국경 간 고속열차는 서지 않는 그 역에 도착해버린 것이, 기차를 잘못 탄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P199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수니는 유일하게소리를 내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다. 유일하게 너무 늙거나 너무어리지 않은 존재이며, 예방주사를 원하지도, 원하지 않을 수도있는 존재이다. 보호할 필요도, 보호받을 필요도 없다. 수니에게속한 모든 존재의 양식은 저마다 독특한 소음을 갖는다. 가죽 구두 밑창은 바닥을 무겁게 쓸며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고, 수니의두꺼운 모직 원피스 자락은 종아리에서 파닥거리며 정전기를 일으킨다. 수니의 속치마와 머리카락, 손톱 하나하나도 지속적으로소름 끼치는 바스락거림을 야기한다. 수니의 몸이 만들어내는 그런 소음은 수니를, 수니의 목소리를 방해한다. 수니는 소음의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목소리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을 떠나 망명자가 되어야 하리라. 종종 수니는 기꺼이 벙어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망명자는 아니다. 단 한번, 수니는 남편의 나라로 가서 함께 낭송극을 관람했다. 놀라운일이다. 무대 위의 낭송극 여배우가 벙어리의 역할을 맡다니. 아니면 그녀는 혹시 실제로 벙어리가 아니었는지. 충격으로 수니는좌석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바스락거리며 노려보는 눈동자들.
눈길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의 솜씨가 없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타고난 눈거우 넘어서기 때문이다.  - P203

우리는 브레히트의 그런 시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는 대답이수니의 귀에 들려왔다. 당신이 그런 시만 읽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브레히트라는 시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수니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시 대학의 강의실에 들어와 있는 것이란 착각에 빠진다. 20세기 현대 문학 강의. 하지만, 수니의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 브레히트의 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와 함께, 공식적인 금서에 속했다. 학생들 간의 조그만 소요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교수는 계속한다. 그의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의 비밀」이군요. 그런데 도대체 ‘그는 베어내리라‘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는 상대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대편을 칼로 찌른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추정에 의하면, 어쩌면 상대편을 파괴하고 죽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생각하는 피비린내 나는 사랑의 정의이자 판타지, 혹은 사랑의 상호불가능성을 노래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사랑의 성격과 매혹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이 세계가 두 가지로 양분된 가슴 아픈 현실을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고 슬픈 눈을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말했다.  - P217

지금 당장은 상대방이 원하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이의 다른 생각은, 종종 현실의 생각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얼굴에 보류의 장막을 드리운다.
우리가 하나의 육신을 꼼꼼히 묘사하는 사이에도, 그 육신은시시각각 변해가며 표정을 바꾸어가고 있다. 입술의 모양은 웃음에서 울음으로, 울음에서 다시 미소로 바뀌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헛되이 웅얼거리다가 마침내는 체념으로 굳어진다. 잇몸이드러난 다음 굴욕을 눈치채고 이를 악문다. 죽은 자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 자의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와 수니는마침내 몸을 떼고 서로의 육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 안에서남다른 육신의 영혼을 발견한 듯이 눈을 잠시 감았고, 그리고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는 1970년대의 교외선 열차처럼 흔들리며 지상으로 상승한다. 그러면 일이 끝난 다음내가 당신을 만나러 진료소로 가겠어요. 도서관 1층 입구에서 수니는 남자에게 작별을 고한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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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누더기 시


가난과 시를 섞는다 진실을 소금에 절인다 정신에 침을 뱉는다 아이러니 속에 아이러니를 투척한다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겹친다 아무려나 시에서 가난을 추출한다 소금에서 진실을 구한다 침 묻은 정신을 닦는다 아이러니 속에 아이러니를 구조한다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찢는다 아무려나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겹쳐도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찢어도 누더기는 누더기다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가난을 환대할 순 있다고? 이런 시는 사원보다도 춥고 그림자보다도 어둡다 죽기도 전에 죽은 목숨 눈물 속으로 가라앉은 신 아무래도 좋다 죽은 목숨에 죽은 목숨을 더해도 죽음의 누누더기일 뿐인 - P62

엄헬레나


1942916-2024211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의 딸 엄∙∙∙ 헬레나... 과부는 아니었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 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치면... 엄... 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엄... 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니이켜... 어디 계시니이껴...... - P64

횡성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가을이 다 갔지만 어떤 날은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다 잠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나가 앉아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침부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자작나무 잎들이 춤을 추면 읍내에 나가 술을 받아 와 대낮부터 대취했고 고라니 울음소리에 깬 밤이면 지난날 용서 빌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오지 않는 엄마 오지 않는 아버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러 횡성 갔다 지난날 빌지 못한 죄들과 오지 않는 것들이 매일 밤 별처럼 돋아나던 - P69

사월


고장난 심장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헛된 가난은 피할수 있다고?

죽기도 전에 죽은 목숨

내가 아직 사람인가?

아무래도 좋다

고장 난 심장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가난을 환대할 순 있다
고?

물속으로 던진 돌처럼

눈 속으로 가라앉는 신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고장 난 신 - P78

비두리 옛집


무너지고 있었다

버림받고 있었다

버림받고도 집이었다

무너지면서도 집이었다

내 마음 내 마음 같았다

자신마저 버릴 거요?

묻고 있었다 시간이

무너진 집의 문이 열린다

비두리 옛집

자신으로 죽고 있었다

자신으로 살고 있었다 - P80

수학여행 가는 나무*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모두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나무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해 나무는 간다 사월의 사월의 바다로 - P-1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수학여행 다녀올게요 기억하겠습니다 기록하겠습니다 살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요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그 사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이영광 시인의 「수학여행 다녀올게요 ㅡ유령6 (「끝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을 읽고 쓰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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