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에 관한 꿈. 빛이 있기 전에 한 여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라고. 나는 어디라도 갈 수있다고.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여기에 항상 없지만, 나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눈을 뜬다. 어느 역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것이 보이고, 그 철자들은 나에게 어떤 가까우면서도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다.
나는 계속해서 그 생각 속에 머문다. 놋쇠처럼 번쩍이는 뜨거운한여름 햇빛이 선로 주변 짙은 녹색의 벌판을 말없이 달구었으며, 그래서 풍경은 대기 중에 우연히 고정된 누군가의 잊혀진 한 장면인 듯한데, 역사의 아치형 지붕도, 커피와 핫도그를 파는 비닐 천막의 가판대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이 차창 밖으로 드러나자, 비로소 나는 급행열차나 국경 간 고속열차는 서지 않는 그 역에 도착해버린 것이, 기차를 잘못 탄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P199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수니는 유일하게소리를 내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다. 유일하게 너무 늙거나 너무어리지 않은 존재이며, 예방주사를 원하지도, 원하지 않을 수도있는 존재이다. 보호할 필요도, 보호받을 필요도 없다. 수니에게속한 모든 존재의 양식은 저마다 독특한 소음을 갖는다. 가죽 구두 밑창은 바닥을 무겁게 쓸며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고, 수니의두꺼운 모직 원피스 자락은 종아리에서 파닥거리며 정전기를 일으킨다. 수니의 속치마와 머리카락, 손톱 하나하나도 지속적으로소름 끼치는 바스락거림을 야기한다. 수니의 몸이 만들어내는 그런 소음은 수니를, 수니의 목소리를 방해한다. 수니는 소음의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목소리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을 떠나 망명자가 되어야 하리라. 종종 수니는 기꺼이 벙어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망명자는 아니다. 단 한번, 수니는 남편의 나라로 가서 함께 낭송극을 관람했다. 놀라운일이다. 무대 위의 낭송극 여배우가 벙어리의 역할을 맡다니. 아니면 그녀는 혹시 실제로 벙어리가 아니었는지. 충격으로 수니는좌석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바스락거리며 노려보는 눈동자들.
눈길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의 솜씨가 없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타고난 눈거우 넘어서기 때문이다.  - P203

우리는 브레히트의 그런 시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는 대답이수니의 귀에 들려왔다. 당신이 그런 시만 읽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브레히트라는 시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수니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시 대학의 강의실에 들어와 있는 것이란 착각에 빠진다. 20세기 현대 문학 강의. 하지만, 수니의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 브레히트의 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와 함께, 공식적인 금서에 속했다. 학생들 간의 조그만 소요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교수는 계속한다. 그의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의 비밀」이군요. 그런데 도대체 ‘그는 베어내리라‘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는 상대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대편을 칼로 찌른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추정에 의하면, 어쩌면 상대편을 파괴하고 죽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생각하는 피비린내 나는 사랑의 정의이자 판타지, 혹은 사랑의 상호불가능성을 노래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사랑의 성격과 매혹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이 세계가 두 가지로 양분된 가슴 아픈 현실을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고 슬픈 눈을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말했다.  - P217

지금 당장은 상대방이 원하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이의 다른 생각은, 종종 현실의 생각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얼굴에 보류의 장막을 드리운다.
우리가 하나의 육신을 꼼꼼히 묘사하는 사이에도, 그 육신은시시각각 변해가며 표정을 바꾸어가고 있다. 입술의 모양은 웃음에서 울음으로, 울음에서 다시 미소로 바뀌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헛되이 웅얼거리다가 마침내는 체념으로 굳어진다. 잇몸이드러난 다음 굴욕을 눈치채고 이를 악문다. 죽은 자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 자의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와 수니는마침내 몸을 떼고 서로의 육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 안에서남다른 육신의 영혼을 발견한 듯이 눈을 잠시 감았고, 그리고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는 1970년대의 교외선 열차처럼 흔들리며 지상으로 상승한다. 그러면 일이 끝난 다음내가 당신을 만나러 진료소로 가겠어요. 도서관 1층 입구에서 수니는 남자에게 작별을 고한다. - P2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