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밥 버지스의 이야기다. 메인주 크로스비 타운에 사는 키 크고 체격 좋은 남자인 그는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 예순다섯 살이었다. 밥은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는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자신의 삶에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있고,
그런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 P13

메인에는 가을이 일찍 찾아온다.
8월 둘째 주나 셋째 주에 차를 몰고 가다 시선을 들면 저멀리 붉게 물든 나무 꼭대기가 보인다. 올해 메인주 크로스비에서 그 변화는 교회 옆 큰 단풍나무에 가장 먼저 일어났는데, 아직 8월 중순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동쪽을 향한 면에서 나무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오래 살아온사람들조차 그것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는데, 그 나무의 색깔이 가장 먼저 바뀐다는 사실을 그들이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8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나무 전체가 붉은색이기보다는 오렌지빛이 살짝 도는 노란색이 되는데, 모퉁이를 돌아메인 스트리트로 들어서면 보일 것이다. 이어 9월이 오면 여름의 사람들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크로스비 거리에는겨우 몇 사람만 걸어다닐 때가 많았다. 잎사귀는 대체로 생기가 없어 보였는데, 사람들은 8월과 9월에 강수량이 턱없이부족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 P14

커튼을 완전히 치기 전까지는 밥 버지스와 그의 아내 마거릿에스테이버가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았고, 완벽히 의식하지는 못해도 이 부부가 바로 여기 타운 한복판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거릿은 유니테리언교 목사였고, 그녀를 따르는 회중이 있었다. 밥은 젊은 시절 오랫동안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했는데,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가 여기서 사십오 분 거리에있는 셜리폴스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는 마거릿과 결혼하면서 거의 십오 년 전에 메인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셜리폴스에서 이따금 형사사건을 맡고 그곳에 사무실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거의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또한 밥은 어린 시절에 비극을 경험했다ㅡ사람들은 이일에 대해 쉬쉬하며 말했다. 밥이 가족 차의 기어를 갖고 놀다가, 차가 버지스네 집 진입로 언덕에서 굴러내려간 것이었다. 타운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그 차가 ㅡ따라서 밥이ㅡ거기서 우편함을 확인하고 있던 밥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 P16

아흔 살로 지금 노인 주거 단지인 메이플트리 아파트에 살고 있는 올리브 키터리치는 밤에 대한 이런 사실들을 알고있었고, 늘 그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에게 조용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그건 아마도 삶의 초기에 일어난 그 불운한 사건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밥의 아내인 마거릿을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마거릿이 목사였고 올리브는ㅡ그녀와 첫 남편 헨리를 결혼시켜준 쿡을 제외하면ㅡ 목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니얼 쿡 목사는 훌륭한남자였다. 그리고 헨리 키터리지도 훌륭한 남자였다.
팬데믹은 올리브 키터리지에게 힘든 시기였고 정말로 모두에게 힘들었고 올리브는 이 노인 주거 단지에 있는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그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식당에서 먹는 것이 금지되고 대신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주기 시작했을때는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첫해가 끝나갈무렵 백신을 맞고 2차 접종까지 마치자 조금 더 멀리까지 외출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차에 태워 타운이나 강가로 데려가주었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일어난 진짜 문제는 올리브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두 집 떨어진 곳에 사는 이저벨 굿로가 심하게 넘어져 ㅡ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 - P17

서 가장 나쁜 일이었다 ㅡ‘다리 건너" 단지 안의 요양원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 올리브는 날마다 그녀를 찾아가신문을 1면에서 마지막 면까지 읽어주었다. 그것은 힘든 일이었고, 여전히 힘들었다.

크로스비의 곶 끝 대서양의 (대체로) 넘실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 높은 곳에 루시 바턴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살았다. 이 년 전 팬데믹 때 뉴욕에서 달아나 전남편 윌리엄과함께 이곳에 도착했고, 결국 이 타운에 남았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뉴욕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거리감도 있었지만, 타운에 남기로 한 루시 바턴 같은 사람들때문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었던 원래 메인 주민들이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루시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작은 타운에서 성장했고, 어른이 된 뒤로는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전남편과 함께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가 메인의 여름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다. 또한 루시 바턴이 소설을 쓰는 작가였기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달랐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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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그늘진 말들이 와서
가만히 안아주었네
빨리 늙고 싶은 마음들이 함께
차가운 맹지에 숨어들었네
끝내 묻지 않고 묻어둘 수도 없는
침묵은 다 벗은 상처의 끝물이었네
서로를 베어물면 햇볕마저 시고 떫었네
누구라도 먼저 져버리길
애타게 기다리지 않고
이미 전생에서 버림받은 말들로
사랑을 나누며 잠이 들었네
바람꽃 앞에 내던진 시간,
늘어진 속옷처럼 놓아버린 마음들이
꽃자리에 머물렀네, 저만치
떠올릴 때마다 새벽 가등이 꺼지네
어스름 속으로 푸르게 돌아보면
짓다 말고 버리고 온 집이 한채,
그 자리에 선 채로 늙고 있네 - P65

그믐달


우주로 열렸다 닫히는 문,

그대의 눈 - P94

곡우


쏟은 꽃잎을 담을 수가 없었다

라면 두 박스를 쌓아놓고
자취방에 숨어 잠만 잤다

가랑비 그치는가, 서툴게
때를 놓친 꽃들이 서둘러 갔다

먼 데까지 실비가 내린다 - P98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서


미당(堂)의 아리따운 처제는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범 김관식과 결혼했다지
술독에 빠진 남편을 찾아헤맬 때 그녀는
관식아! 관식아아! 판자촌 떠나가라 외쳤다지
마치 저녁밥 차려놓고 부르는 애 이름처럼
기억나는가, 달빛 환할수록 더 가난한 골목들
가진 것 없는 우리도 탕진하자
취생몽사 관식이처럼 몰락해버리자
맞짱 뜨려면 이 정부 아니면 장면(張勉) 급은 상대해야지
그렇게 싸우자 관식이처럼 망해버리자
취해서만 호기롭던 청춘이 허기질 때마다
그도 함께 마셔주었지
수십년 전에 요절한 젊음이 마치
오래된 술친구처럼 마주 앉아서

출판사 직원이 되어 편집용 시집을 뒤적이는데
갈피 사이에서 툭 떨어지는 흰 봉투
남태령 산동네에서 발신한 편지가 와 있었다 - P99

이십년 전 사월 어느날 너와 나의 숙취를 
동봉해서
"귀사에서 펴낸 「다시 광야에』(증보판)에도 누락된
김관식 시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전문을 보내드립니다"
정지신호를 무시한 죽음이 너를 앞세우고
십년이 흐르고 또 누군가 곁을 떠난 뒤에도
여린 마음과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혈서 쓴 지문 필름이 돌고 돌아 세월은 가고
똥으로 오줌으로 위조(僞造)된 역사(歷史)는 굴러내리고**
그 역사가 또다시 조작되고 미화되는 지금도
이 똥밭 이승의 한 갈피에 살아 있었다

산동네가 전원마을 부촌으로 바뀌고
갓난쟁이 너의 딸들이 입학하고 졸업하고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도
내가 죽고 또 천지와 꽃들이 폭삭 망하는 날에도
도움이 될까 하는, 너의 마음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중얼중얼 나는 마신다 - P100

배꽃 피면서 벚꽃 무너지는 자리에
주저앉자던 약속은 또 기억하는가
소심하고 걱정 많은 눈망울로 남은 벗이여
자꾸 없는 듯 희미하게 있지만 말고
관식이처럼 마주 앉아 딱 한잔만 받아주거라
서른몇살 ‘피투성이 낙화(落花)‘로 갔을지라도
흔들리는 이 봄밤의 꽃잎처럼 잠시만
제발 잠시만 앉았다가 가거라



김관식 ‘완전범죄형의 범죄‘ 앞에서」(『66 연간한국시집』, 휘문출판사 1966) 변형 인용.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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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무사


하도리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옆집 하르방은 볼 때마다 맵쌌다
인사해도 고개를 틀어 받는 둥 마는 둥
말하지 않아도 냉랭하게 들렸다
재수 없게 육지 뜨내기가 굴러들어왔다고
뭐라도 물어볼라치면 쏴붙이는 "무사?"
숯검정 눈썹을 갈아세우고 그가 하는 말이라고는
싸울 준비를 마친 무사,밖에 없었다
느닷없는 가을 태풍이 왔다
코를 골며 평온한 것은 어린것들뿐
굉음 한가운데서 벌벌 떨며 한숨도 못 잤다
제주에 오래 살고 싶다던 아내는 몇시간 만에
머무는 곳이지 사는 곳은 아니라고 말을 바꿨다
밤새 꼬박 부서지던 폭풍우가 육지로 떠나자마자
들이댓바람에 달려온 하르방
ㅡ어떵안해신냐? 애기들 다치진 안했고?
따지듯 묻더니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발길을 돌린다 우물쭈물 뒤따라가자
가차 없이 가래 끓는 무사,가 날아온다 - P28

별일 없으신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 안부를 묻자
ㅡ 이 보름에 소름이, 소름이 좀이나 자져?
더듬더듬 사투리를 번역하는 사이
폭풍같이 쌩하니 사라지는 무사
쌩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겨루자면
무너진 돌담에 쏟아지는 햇살도
날아간 지붕에 솟아난 아침 달도
늙은 무사에 질 수는 없었다 - P29

눈길을 따라가다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남고
죽지는 않았을 때 바다로 갔다
등을 돌리고 보이는 것은 사람뿐이라서
머나먼 시골 바다로 갔다
관광객이 보이는 주말이면
깊게 숨은 절벽에 누워
별빛과 파도에 숨소리를 조율했다
그리운 것이 지면 그믐달이 떴다
외로움만은 끝끝내 더러워질 수 없다고
노래할 때마다 바다는 더 외롭게 아름다웠다
먼바다를 향해 사람의 마을을 등지고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늦은 저녁부터 태풍이 덮쳤다
분노보다 더 가속도가 붙더니 결국
영등할망은 몰고 가던 바람의 고삐를 놓쳤다
귓속에는 사람들의 허상을 찢는 전투기 소리
담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불과 물이 끊겼다, 폭격이 멈춘 아침 - P32

안부를 묻는 사람들과 마을이
하나같이 쓸쓸했다, 한없이 화창했으므로
세수 못한 얼굴들이 난민처럼 막막했다
잠잠해진 바다는 더 깊고 푸르렀으나
폐허로만 사람 사는 곳으로만
자꾸 눈길이 갔다 - P33

나무수국

꽃보다 그늘이 아름답지
한밤중일수록 그늘은 더 환하지

한껏 피어나서 지지 않는
속옷만 스쳐도 아리는 몸살
태동이 사라진 아랫배가 서늘하다

단번에 그믐 쪽으로 건너뛰고 싶은
보름달 아래
나무수국 아래
젖을 주는 여자

배고파 우는 무정한 그늘
텅빈 흰 그늘 - P35

노을 알레르기

집시가 말했다
지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은
아라베스끄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성곽에 번지는 노을,
그 붉은 침묵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패멸한 왕이 울며 성을 내어주던 날
홀로 망루에 서서 사라진 후궁처럼
노을 한가운데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유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에 우는 자가 할 수 있는 건
눈물로 얻은 소금 한줌을 뿌려
부패해가는 시간을 하룻밤 더 연장하는 것일 뿐‘
금지된 노을을 뒤돌아보면
그리운 얼굴 만지고 싶은 몸은 온통
소금기둥으로 굳어져 부서진다
도무지 잊을 수 없어서 아름답게 조작해버리는 
기억처럼
누구나 공평하게 표절하는 것이 또 있을까
망각을 위한 연주는 없는가 집시에게 물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지워낼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 P52

노을빛에 온통 미어져 밀려간 사람을 연주하겠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자의 빈 가슴을 노래하
겠네
허풍선이 바이올린이 삐걱거릴수록
소금창고처럼 건조하고 쓸쓸한 성곽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건
어긋난 사랑이 아니라 썩어가는 몸,
결단코 조작할 수 없는 몸
소금창고에 매달려 그 여자 대롱거리고 있었다
늘어진 혀, 붉은 구더기들
가슴을 긁어 피가 터질 때까지
판자처럼 부서진 머릿속으로 또다시
스멀스멀 노을이 기어들어온다 - P53

연시가 녹는 시간

초겨울 아픈 이마를 짚어주다 말고
연시 두개 냉동실에 넣어두었지요

차갑게 베어문 채로 사월 꽃비를 봅니다

연하고 부드럽고 슬퍼서
얼릴 수도 없었던 시간

낙화까지는 살아남겠다.
얼음에 쓴 서약이 있었습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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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밤중에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다.
"지금 오로라가 나타났어."
"진짜야?"
"꽤 격렬하게 움직이는데? 너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렇군......"
친구의 말이 일순 끊겼다.

북쪽 하늘에서 나타난 한 줄기의 빛은 바람에 날린 것처럼흔들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온 하늘에 퍼졌다. 시시각각 변하는빛의 띠는 커튼이 되었다가 다시 토네이도가 되었다가 하며 어두운 밤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잠시 보고 있어야지 생각했는데마침 친구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내가 사는 극북의 도시 페어뱅크스는 북위 65도에 자리하며, 경도로 봤을 때 오로라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오로라는 보기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 P174

도 온 하늘을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날뛰어 다니는 차가운 불길에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뭔가 위대한 존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ㅈ예전에 겨울 산에서 홀로 오로라를 본 적이 있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눈밭에 반사된 빛으로 주위가 순간 낮처럼 환해졌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에스키모 민화에서도 오로라는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빛이 지상에 내려와 아이를 낚아채 간다고 믿었다. 일찍이 오로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에스키모에게는 그 빛은 어쩐지불길해 보였다. 아름답게 느낄 리가 없었다.

전화를 건 친구의 목소리가 끊긴 것은 수화기 저편에서 뭔가를 상상했기 때문일까? ‘내가 일본에서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알래스카에서는 오로라가 춤추고 있다.‘ 그것은 당연하면서도참으로 심원한 일일 것이다. - P175

우리는 두 개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간다. 달력이나 시계바늘로 새겨지는 분주한 일상과 또 하나는 막연한 생명의 시간이다.
만물에 평등하게 똑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 신비함이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간을 느끼게 하고, 매일의 일상에 아득히 먼 시점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 P176

알래스카로 이주한 지 10년이 지났을 무렵일까, 친구가 땅을사서 집을 짓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그의 집 옆에있는 숲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작은 오두막을 세내어 살고 있었기에 여행을 해도 돌아갈 터전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알래스카에서 지내다가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국 나는 나그네였다. 이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을 접하며 나는 어느순간부터 자문하고 있었다. ‘넌 도대체 어디서 살아가려고 하는거야?" 나는 나그네라는 상황에 어떤 피로감과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니 주위의 풍경이 조금씩달리 보였다. 봄에 남쪽에서 날아오는 철새, 발밑에 핀 꽃들과 주위의 나무들, 아니 불어오는 바람마저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 친밀함은 지금이라는 좌표축에 머물지 않고 먼 과거의 시간을 향해서도 이어졌다. - P219

골드러시의 꿈에 이끌려 이 북쪽 끝까지 찾아온 각양의 사람들. 혹은 먼 옛날 알래스카가 아직 여명기일 때 북을 향해 끝없이 항해한 베링이나 쿡처럼 북극 탐험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알래스카 자연과 만났고, 꿈이 꺾였고, 좌절했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 땅에서 계속 살아온 에스키모와 극북 인디언들…… 그들도 아득히 먼 옛날 마지막 빙하기에 물이 빠진 베링 해를 건너 이 땅에 찾아왔다.
그 끊임없는 관계 끝에 지금 내가 알래스카에서 숨을 쉬고있다. 어느새 나에게 알래스카라는 땅이 지닌 특수성은 희미해졌다. 이 땅에서 살며 관계를 맺어가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다.

어느 여름의 해 질 무렵, 매물로 나온 숲에서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 있으니 밑천도 없는데 갑자기 꿈이 부풀었다. 볼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바람이 정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알려주었다. 고민하지 마, 마음 가는 대로 나아가! - P220

북극해에서 정면으로 내달려오던 바람은 이제 미친 듯이 불어대고 있었다. 걸리는 것 전혀 없는 알래스카 북극권의 대지에15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내 텐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마치 이바람에 혼자 맞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알루미늄 센터폴은 활처럼 휘어지고, 텐트는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5월의 알래스카 북극권. 나는 캐나다 북극권에서 넘어올 카리부 떼의 계절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광활한 대지에서 카리부 떼의 계절이동을 만나겠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계산에 넣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도박이 아닐 수없다. 그해의 적설량, 추위의 정도, 눈이 녹는 시기 등이 복잡하게 작용하여 어느 날 갑자기 카리부 떼는 겨울철 서식지를 떠나긴 여행길에 오른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알래스카 북극권으로 넘어와서 새끼를 낳는 것일까? 나는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뒤 이 광활한 알래스카 북극권 속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P256

빗물 한 방울도 허투루 하지 않고 희박한 수분과 지표의 온기만으로 살아가는 지의류. 가혹한 극북의 툰드라에서 피어나려고 하는 작은 꽃.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겨울 내내눈구덩이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봄을 기다리는 회색곰.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태어나 필사적으로 일어서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카리부 새끼. 이는 헤아릴수 없는 강인함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곳의 생태계는미묘한 균형으로 유지되는 참으로 연약한 자연이다. 단순한 먹이사슬이 대표하듯이, 지구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자연일것이다. 사슬 하나만 끊겨도 사슬 전체가 회복할 수 없는 파국에 이르고 만다.

카리부의 주요 먹이인 지의류는 공해 기준의 바로미터일 정도로 대기오염에 약하다. 게다가 그 생장 속도가 매우 느려서한 번 파괴되면 불과 몇 센티미터 자라는 데만 50년에서 1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는 카리부의 생존을 위해서 광활한 땅이필요한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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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북극권에 봄의 징조가 나타나는 6월이 되면 카리부를 촬영하기 위해 해마다 꼭 들어가는 브룩스 산맥의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서 제고 리버라는 강이 북극 평원으로 흘러든다. 최근 13년 동안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에스키모 마을은 브룩스 산맥을 넘어 2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카리부 떼는 매년 반드시 그 계곡을 지나간다. 이 이름 없는 계곡이 아마 알래스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일 것이다. 그곳에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질 듯한 풍경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지만 그와 반대로 만물이 내게 속한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이끼 낀 바위, 툰드라에 솟아오르는 작은 언덕, 계곡을 지나가는 극복의 바람……
낚시꾼에게 자신만 알고 싶은 소중한 강이 있듯이 나에게 그계곡은 나만 알고 싶은 소중한 장소였다.

카리부는 극복의 방랑자다. 어느 날 갑자기 툰드라 너머에서나타나 바람처럼 툰드라 저편으로 떠나간다. 아무도 그들이 간곳을 쫓아 뒤따를 수 없다. - P84

알래스카에 이주하고 두 번째 맞는 봄, 나는 이 계곡에서 처음으로 카리부의 계절이동을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하얀 눈밭인 그 위를, 긴 선을 그리며 행진하는 카리부 떼. 그때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야생동물의 모습을 엿본 것만 같았다. 이는 카리부의 장관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북쪽으로 향해 가려는 카리부의 의지와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신기한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광활한 땅을 실감했다. 인간과 관계가 없는 세계가 지닌 생생하고 드넓은 공간에 감동받았다. 그경험은 내가 알래스카라는 땅에 뿌리내리기로 결심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도 이 계곡에서 처음 봤다.

베이스캠프에서 북극 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봄소식에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는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설원 곳곳에 까만 흙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느 날 갑자기반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강이 성난 파도처럼 움직인다. 순식간에 남쪽에서 찾아온 뇌조, 검은가슴물떼새, 수많은 도요새, 물 - P85

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기 그지없던 툰드라가 마치 되살아난 듯 화려해진다.
강둑을 산책하다 보니 해마다 야생 크로커스가 꽃피는 장소가 있었다. 나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연보라색의 그 꽃을 좋아한다. 거기 그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됐다. 한달이나 혼자서 캠프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이누그러졌다.
나는 그 꽃을 보며 카리부의 이동을 봤을 때처럼 한없는 신기함을 느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 꽃은 매년 봄이 되면 땅끝과도 같은 그 계곡에서 봉오리를 맺는다. 자연이란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도 그것은 여전히 흥미롭고 변함없이 신기했다.

5년 전 알래스카에서 죽은 카메라맨 친구의 재를 동료와 함께 가문비나무 아래에 묻은 적이 있다. 매킨리 산에 가까운 이글바레이라는 계곡이었다. 재를 묻은 작은 언덕에서 가문비나무숲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 P86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유기물과 무기물, 삶과 죽음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언젠가 내 육체가 사라지면 나도 내가 좋아했던 장소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고 싶다. 툰드라의 식물에게 약간의 양분을 주어 극복의 작은 꽃을 피우게 하고, 매년 봄이 되면 아득히 먼 저편에서 카리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런 것을 나는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 P87

몇 년 전 나와 똑같은 말을 한 친구가 있었다. 도쿄에서 바쁜편집자 생활을 보내던 그는 간신히 일을 마무리하고 나의 알래스카 여행에 동참했다. 남동알래스카의 바다에서 고래를 쫓는여행이었다.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였지만 운 좋게도 그는 고래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보트 가까이에 나타난 거대한 혹등고래 한 마리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할 말을 잃게 만드는압도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일이 바빴지만 알래스카에 오길 정말 잘했어. 왜냐고? 내가 도쿄에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보낼때에도 알래스카의 바다에서는 고래가 솟구쳐 오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정말 좋아."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일상에 쫓길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유구한 자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아니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어쩐지 살아가는 힘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P91

인간에게는 분명히 두 개의 소중한 자연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관계를 맺는 친근한 자연. 그것은 길가의 풀꽃이거나 근처에 흐르는 강물일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일상생활과 관계가 없는 아득히 먼 자연. 그곳에 갈 필요는 없다. 그냥 그곳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우리에게 상상력이라고 하는 풍요로움을 건네주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를 본 내 친구는 지금 어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 P92

길고 혹독한 겨울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겨울이 없으면 봄소식이나 해가 지지 않는 여름, 또 아름다운 극북의 가을에 대해 이토록 고마운 마음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면 사람들이 꽃에 대해 이 정도로 강렬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눈이 녹으며 일제히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식물들이 긴 겨우내 쌓인 눈 밑에서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도 어둠 속에 잠긴 겨울 동안 꽃에 대한사랑을 키우는 것 같다.

돌고 도는 계절, 끝없는 저편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문득 멈춰 설 수 있다. 그 계절의 색이 우리에게 한번뿐인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겨울을 보낸 후 느끼게 되는 자연의 풍부한 혜택에 대한 강렬한 마음..... 아메리카 붉은 다람쥐도 우리와 똑같이 긴 겨울을넘겼다. - P115

첫눈이 내린 날,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마음이 들 것이다. 잠깐 지나가는 극북의 여름 동안 사람들은 너무 분주하게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지친 것이다. 그리고 겨울 소식은 무슨 이유인지 사람의마음에 기분 좋은 단념을 심어준다. 그것은 어딘지 비가 오는날 집에 있을 때 느끼는 마음과 닮았다. 이제부터 길고 어두운계절이 시작될 텐데 첫눈을 보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은 그런까닭이 아닐까?

그리고 눈은 참으로 따뜻한 존재다. 생물들은 생존을 위해서눈에 적응했고 또 생존하려면 눈이 필요했다. 담요처럼 땅을 덮어주는 눈이 없으면 그 밑에서 겨울을 넘기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혹한의 겨울을 살아낼 수 없다.

겨울의 따뜻한 온기는 우리 마음에도 전해진다. 무기질의 하얀 세계는 사람의 마음에 불을 밝혀 희미한 상상력까지 내어준다. 눈이 없는 겨울의 경치만큼 추워 보이는 것은 없지 않을까?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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