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가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어를 발명했다는 말이 있다. 중세에는 문어와 구어가 분리되어 있어서, 고등교육, 과학, 철학, 신학 등의 학문과 공공 기록 등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라틴어가 쓰였다. 당시에 진지한 주제로 책을 쓸 때는 라틴어로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탈리아어의 표준이 생겼고 이탈리아어 문학이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아 민족문화와 국가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
프루 쇼는 단테가 젊을 때 라틴어로 쓴 [속어론]에 담긴 언어관이 [신곡]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한다. [속어론에서 단테는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해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를 하기 전에 쓰던 언어는 ‘변하지 않는 언어‘였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다. 인간이 감히 신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 벌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가 고정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라틴어는 변하지 않는 언어다. 일반 언중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종교, 학문, 공식 문서 등에만 쓰이는 언어이므로역사적 변화로부터 자유롭고,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라틴어 - P90

는 쓰임 (uso, 관습, 용법)이 아닌 기술(ante, 규칙, 문법)에 지배" 받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며 제멋대로 진화하지 않는다. 라틴어는 파롤보다는 랑그가 훨씬 중요하다. 파롤에 제약이 있어서 랑그의 변화가 없는 화석화된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언어인 라틴어는 바벨탑 때문에 벌을 받기 이전의 언어, 원초적 언어, 언어의 이상에 가까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라틴어는 격변화가 매우 복잡해서 통사적 모호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샤일록이 바라던 기표와 기의가 단단히 결속된 언어. 중세 교회에서 성경의 번역을 막고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도록 했던 것은 죽은 언어를 이용해 의미를 고정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죽은 육신에 단 하나의 의미. 이미 잘라낸 살덩이는 한 가지 의미밖에 담지 못한다-죽음. 더 이상 언어는 증식되지 못하고 의미는 고정되고모호함은 억제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쓰인 [신곡]에서는 단테 - P91

의 달라진 언어관이 드러난다.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편이거의 마무리되고 단테의 걸작이 찬란한 완성을 향해 다가갈무렵인 천국편의 칸토 26에서 단테는 아담을 만난다. 그런데 아담은 우리가 아담의 언어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깨뜨리는 발언을 한다. 아담은 언어는 신이 주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발명한 것이므로 원래부터 고정되지 않았다고, 얼마든지 바뀔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변동성은 더는 죄악의 표지가 아니며, 라틴어의 불변성도 더는 신에게 가까이 가게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제 라틴어의 불변성은 더 높은 가치를 뜻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부여한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단테는 라틴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필생의 역작을 썼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 프루 쇼는 이 선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단테의 "이탈리아어 작품은 그가 라틴어로 쓴 어떤 것보다 더 생동감 있고 표현력 있고, 더 본능적이며 더 다양하고 독창적이었다. [...] 만약 라틴어로 썼다면 똑같은 에너지와 힘, 경이로울 만큼 풍부한 말재간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단테가 언어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용해 대단한 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언어를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 - P92

을 해야 하오?" 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 P93

재작년에 어떤 교육기관에서 번역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챗GPT가 공개되면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많은 사람이 전율하고 번역의 개념이 다시 한번 크게 뒤흔들린 무렵이다. 번역은앞으로 기계가 하리라는 전망이 난무했다. 나는 흔한 통념과달리 번역이 단어를 단어로 옮기는 일만은 아님을 설명하고, 번역이 실질적으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이고 싶었다. 번역 논쟁이나 번역 이론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든, 기계번역이 어떤 메커니즘을 따라 발전하든, 실제로 번역가들이 하는 일은 그와는 매우 다를 때가 많다. 때로 번역은 몸을 완전히벗는다. 살을 베어내고, 비슷한 몸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몸을입는다. 예를 들기 위해 내가 번역하던 에세이의 한 문장을 번역 엔진인 딥엘(DeepL)에 넣어서 번역하고, 딥엘이 내놓은 결과물과 내가 한 번역을 함께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 P95

In the silvery twilight the intricate palms rival the historicbeauty of the surrounding architecture.

TTI 은빛 어스름 속에서 복잡한 야자수가 주변 건축물의역사적인 아름다움에 필적합니다.

TT2 은빛 박명 속 섬세한 야자나무가 주위에 있는 예스러운 건물 못지않게 아름답다. - P96

이 사례로 기계 번역(TT1)이 어떤 면에서 부족한지도보•여주고 싶었다. 일단 기계가 번역한 문장에서 ‘필적하다‘라는단어가 에세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야자수가‘와 ‘필적한다‘가 주술 호응이 잘 안 되기도 하고). 기계 번역이 문체나 장르까지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단어의 어울림 혹은 논리의 문제가 있다. ‘어스름‘은 어둡다는뜻을 가진 단어이니 ‘은빛‘과 어울리지 않는다. ‘복잡한 야자수‘, ‘역사적인 아름다움‘도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은빛 어스름‘은 ‘은빛 박명‘으로,
‘복잡한 야자수‘는 ‘섬세한 야자수‘로 바꾸어 좀 더 잘 어울리게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문제는 기계 번역이 해결하기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기계 번역은 통계를 이용하므로 데이터의 양이 많아질수록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은 더 좋아질 수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아름다움 (historic beauty)‘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단어에서 벗어나ㅡ몸을버리고ㅡ뜻으로 옮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beauty‘라는 명사의 의미를 - P96

가지고 와서 ‘아름답다‘라는 서술어로 삼는 의역을 택했다(그렇게 한 까닭은 「기계 번역 시대의 번역가」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의미에 새로운 몸을 주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사례는 유일한 해결책도 최선의 번역도 아니고, 이 책은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다음 일이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직역에 가까운 첫 번째 번역에서 문학성이 좀 더 느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기계가 나보다 더 문학적이지?

문학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번역하면 사라지는 것이 시"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람들이 번역을 말할 때 흔히 하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번역가는 배신자이자 무언가를 늘 잃어버릴 뿐아니라 문학에 적대적인 존재다. 내가 위의 사례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까닭은 솔직히 내 번역이 조금 자랑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가는 번역을 지적받았을 때 자신의 선택을 옹호할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취약하다. 번역가는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완벽하고 완전한 결과물에 도달할 수 없고, 그 사실을 상기하게 될 때마다 쉽게 의기소침해진다. 그럴 때는 번역에는 정답이 없고 어떤 번역이든 무언가 잃 - P97

기 마련이며, 관점에 따라 좋은 번역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변명처럼 우물거린다.
집에 와서 내 번역이 잃은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그 학생의 말은 직역 대 의역 논쟁의 핵심을 건드린 질문이었다. 단어를 고스란히 번역하는 직역이 만드는 특수한 효과를 나처럼 기이하거나 어색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참신하거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문학성과 광기는 사실 같은 것이니까.
시는 일상 언어에서 벗어나 언어의 한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미치광이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단어는 죽은 은유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쓰는 일상어는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었다. 클리셰다. 언어의 일상적인 쓰임에서 벗어난 언어라야 우리는 문학적/시적이라고 느낀다. 직역 혹은 기계 번역을 거쳐 생겨난 뜻밖의 낯선 표현ㅡ은빛 어스름, 복잡한 야자수, 역사적인 아름다움ㅡ은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언어적 감수성을 자극한다(발터 벤야민부터시작해서 여러 중요한 번역 이론가들이 직역을 주장한 까닭도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것처럼 직역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다듬으면 문학성이 사라진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번역가는 딜레마에 빠진다. 문학적인 미치광이가 될 것인가, 제정신인 직업인이 될 것인가. - P98

번역가가 텍스트의 날뛰는 야생성을 다듬고 길들이는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 까닭은 번역가가 편집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20년간 원고를 교정당하면서 삼가고 자제하는 법을 배웠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는 ‘날개가 일렁인다‘라고 해도 되지만 번역가는 그렇게 쓸 수 없다. 한국어의관례에 따르면 날개는 주로 퍼덕이고, 일렁이는 것은 파도니까. 번역가는 ‘일렁이다‘의 소리가 ‘날‘의 유성음과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소심하게 ‘퍼덕이다‘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창작 원고와 번역 원고를 대하는편집자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작 원고는 언어와 의미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예술적 구조물이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없고, 사소한 부분에도 작가의 미묘한 의도가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조사 하나, 쉼표 하나 바꾸기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번역 원고는 다시 쓰기 수준으로 고치는 경우도 있다. 번역된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에는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다. 어차피 번역된 문장은 정신이 그것과 얽혀 있던 몸 - P99

에서 분리되어 새로이 이식된 몸, 대체된 몸이다. 번역 원고는신성불가침의 원본성도 권위도 없고 원본에서 파생된 2차 생산물일 뿐이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잠정적 상태이므로 거리낌 없이 손댈 수 있다. 번역가들은 다들 이런 길들임에 익숙해서, 고심해서 쓴 표현이 깎이고 살이 베이는 아픔을 피하려고빨간 펜을 내면화하고 편집자에게 넘기기 전에 미리 스스로 글을 다듬는다. 출판 번역가에게 문학적인 미치광이가 되는 선택지는 사실 없다. 그랬다가는 일자리를 잃는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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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다른 언어를 쓰는 국가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는 번역/통역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극에 달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번역/통역가들은 스파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번역/통역가는 적대적인 세력 사이에서 협상을 거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도울 뿐인데,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처럼 여겨지고 모국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일제강점기 때도 역관들은 친일파이자 배신자취급을 받았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통역사들이 숱하게 죽었다. 번역가 수잔 바스넷도 이 죽음을 언급한다. "얼마 전에 한 신문의 짧은 기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시체 몇 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탈레반의희생자였다. 그들은 잔인하게 살해되었고 혀가 잘려 있었다. [...] 희생자들은 모두 통역사로 일했던 사람들이다. [...] 여기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번역가들은 한편으로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invisible) 존재처럼 보이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중요한 존재로 보인다는 것이다." 
뒤집어보면 번역가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까닭은 이들의 손에 막중한 무언가가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대한 원작이든, 국가나 민족의 존속이든, 문화적 정체성이든, 신의 말씀이든. 실제로 역사적으로 번역가들의 손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 P49

이슬람교에서는 경전에 대해 기독교와 조금 다른 입장을취한다. 꾸란은 아랍어로 전달된 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될 수가 - P57

없다. 그래서 외국어로 번역된 책은 꾸란이라고 불리지 않고일종의 해설서로 취급된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성 꾸란의미의 한국어 번역‘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의미만을 번역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랍어 음성에 담겨 있는 신성은 번역이 불가능하고, 음성과 의미가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있으므로, 번역은 절대 원본과 같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실패를 전제한 번역이다.
번역에 가해지는 배신이라는 비난은 ‘충실성‘ 개념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성경처럼 충실성이 특히 중요시되는 텍스트와 관련해 배신을 논할 때가 많다. 그런데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에게 ‘배신했다‘라는 비난이 가해지면서 논란이 매우 흥미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번역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먼저 히에로니무스가 말하는 ‘단어를 단어로‘,
‘의미를 의미로‘가 무슨 이야기인지, 번역의 대상이 되는 문자는 무엇이고 의미는 무엇인지 이제 들여다볼 때가 된 것 같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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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를 분석하는 「바벨의 탑」이라는 글을 썼다. 데리다는 먼저 바벨이 혼란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바빌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Ba‘는 아버지를, ‘Bel‘은 신을 뜻하므로 바벨이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유명사는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속 ‘will‘ 처럼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단어 역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바벨은고유명사면서 다의어다. 바벨은 우리에게 번역을 처벌로서 강제하면서, 동시에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바벨의 자리에 숱한 의미가 겹치면서 단 하나의 적절한, 진실한, 투명한 읽기는 불가능해진다. - P31

번역은 신이 우리에게 지운 짐이자, 바벨 이전의 상태ㅡ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언어로 말하려는노력이다. 혹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여러 갈래로 흩어진 불완전한 언어의 속박을 풀고 순수한 의미를 정제해내는 행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기호도 거치지 않고 바로우리 마음에 와닿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과 오용이 없는 곳. 번역 과정에서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 곳으로.


번역에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기호를 탑처럼 쌓아 올리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피천득 시인이 ‘will‘을 ‘월(意志)‘이라고 번역한 것도 한자리에 두단어 이상을 얹으려고 시도한 작은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 [창백한 불꽃』등의 소설도 썼지만 번역도 많이 했다. 나보코프는 집필 언어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바꾸면서 언어적·문화적 차이에 민감한 언어 감각이 자랐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자기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꾸준히 번역했으며 독창적인 번역론을 펼치기도 했다.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면서 쓴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오네긴]을 원문처럼 각운을 맞춰 번역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직역하되 주석을 달아서 모든 의미와 내포와 배경과 의도와 오류를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나보코프가 번역한 [예브게니 오네긴]은 네 권으로 출간되었다. [오네긴]이 5,446행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운문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뻥튀기다. - P32

튀기다. 200년가량의 본문이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으로 한 권씩 있고, 나머지 두 권은 무려 1,200면에 달하는 주석과 역자해설이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대한 각주가 달린 번역을 원한다. 각주가 초고층 건물처럼 책장 꼭대기까지뻗어 주석과 영원 사이에 텍스트 한 줄이 언뜻 비칠 틈만 남을정도로." 나보코프는 하얀 책장 위에 탑 이미지를 그린다. 번역문에 담을 수 없는 모든 의미를 각주에 쌓아 올린다. 각주는한없이 높이, 영원을 향해 솟구친다. 주석이 설명하는 텍스트한 줄이 탑 꼭대기에 보일 듯 말 듯 비치고, 그 위는 여백무한-신의 영역이다.
각주가 모든 가능성을 다 다루고 있으니 본문은 간결한직역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런 주석과 절대적인 문자적 의미를 원한다. 어떤 삭제도 덧붙임도 없이?"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가장 서툰 직역이 가장 예쁜 의역보다 천 배는 더 유용하다"며 ‘가독성‘이 좋은 번역을 ‘범죄‘, ‘악행‘, ‘횡포‘ 등등 심한 말로 비난한다. 나보코프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는이상"을 위해서라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심지어 문법까지도" 전부 희생시킬 수 있다. 13 드높은 탑의 제단에 나보코프는 모든 것을 바친다. 번역에서 잃은것을 신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충성스럽게 탑을 쌓아 올린다.
자, 나보코프는 잡힐 듯 말 듯한 흰 고래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해서, 결국 잡았나? 탑이 높아질수록, 가능한 한많은 의미를 더할수록, 흰 고래는 점점 시커메지고, 번역이 실 - P33

패했다는 증거는 쌓여간다. 주석의 탑은 번역 불가능성의 웅대한 증거다. 번역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번역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조바심이 탑을 이룬다. 이 탑은 무한의 영역으로 뻗는다. 번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번역은 무한하다.
번역의 탑은 쌓이는 동시에 허물어진다. 주석은
 원문을보충하여 벽돌로 강화하고 역청으로 단단히 만드는 것 같지만, 번역의 탑이 높아질수록 원문은 불완전하며 그 의미는 자명하지 않음이 드러날 뿐이다. 바벨 이후에 그런 자명함은 사라졌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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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니까


동그란 눈알과 동그란 입술이
나란히 벌어질 때까지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이 튀어나올 때까지
뺨이 번질 때까지
휘파람이 될 때까지
숲에서 바람이 새지 않을 때까지
구역을 잃어버릴 때까지

허공을 건너는
긴팔원숭이가 되어

떨어지는 꽃잎들을 받아먹을 것
꽃나무 옆에 게워낼 것
토사물의 울음소리가 될 것

0이 될 때까지 셀 것 - P78

후렴


웅크린 채로 알게 되었죠
상자 속에 있었어요


빛은 언제 출발했는가 - P88

사람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 P133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품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 P134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 P135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사람은 절망하라/사람은 탄생하라: 이상, 「선에 관한 각서 2」에서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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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원은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2년 계간「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가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시작작품상, 시로여는세상작품상을 수상했다. - P-1

시인의 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은 끝내 모를 것인가
끝내 모를 것을 사랑하면 아름다움이 될 것인가

2017년 8월
이원 - P-1

모두의 밖


의자의 편에서는 솟았다
땅속에서 스스로를 뽑아 올리는 무처럼

마주해 있던 편에서는 의자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림자의 편에서는 벽으로 끌어 올려졌다

벽의 편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긁혔다
얼른 감춰야 했다

의자는 날았다 그림자는 매달렸다 속은 알 수 없었다

그림자는 옆을 본 채벽에
의자는 앞을 본 채 허공에 정지했다

의자와 그림자는 모양이 달랐다
의자의 다리 하나와 그림자의 다리 하나를
닿게 한 것은 벽이었다

의자와 그림자의 사태를 벽은 알 수 없었다 - P9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깊은 발은 희망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바닥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실밥 푸는 곳을 모를 테니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식탁 의자에 몸 냄새가 밴 카디건을 걸쳐 
두었지만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다시는 환청과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림자의 무릎 뼈가 미처 펴지지 못했다 해도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달아나는 발목

엄마 아빠 - P12

피가 흩어지는 축제

비명과 꽃잎과 누수를
돌멩이와 비닐봉지의 중력을
나란히 이해해

땅을 오래 두드린 발
열리지 않은 땅
풀들은 담장 위로 위로 솟아오른다

이상한 봄
춤을 추다 발목만 남았어
내용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
온몸에 죽음의 불이 붙었었거든

작은 점 하나가 목젖 부근에
눈물을 참으면 울퉁불퉁하다
지구에서처럼 - P13

홈리스는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다
새들은 허공을 깨고 간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타본 적이 없어도
바다와 하늘이 바로 다음 언덕에서 만나고 
있어도
사방의 벽마다 출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해도

구겨진 틈 아니면 조롱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등 너머에서 붙잡던 목소리를 혀처럼 뽑아 쥐고 
있어도

나는 사람이다
팔다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너는 사람이다
예쁘고 연한 발목을 가졌다 - P14

자를 게 남았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2023년 편도행 화성 정착 프로젝트 공개 모집을 다룬 기사 제목. - P15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텅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 P23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 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 P24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 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 - P25

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 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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