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가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어를 발명했다는 말이 있다. 중세에는 문어와 구어가 분리되어 있어서, 고등교육, 과학, 철학, 신학 등의 학문과 공공 기록 등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라틴어가 쓰였다. 당시에 진지한 주제로 책을 쓸 때는 라틴어로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신곡]을 씀으로써 이탈리아 문화와 언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탈리아어의 표준이 생겼고 이탈리아어 문학이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아 민족문화와 국가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었다. 프루 쇼는 단테가 젊을 때 라틴어로 쓴 [속어론]에 담긴 언어관이 [신곡]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한다. [속어론에서 단테는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해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를 하기 전에 쓰던 언어는 ‘변하지 않는 언어‘였다는 점을 중요하게 본다. 인간이 감히 신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 벌을 받았기 때문에 언어가 고정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라틴어는 변하지 않는 언어다. 일반 언중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종교, 학문, 공식 문서 등에만 쓰이는 언어이므로역사적 변화로부터 자유롭고,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라틴어 - P90
는 쓰임 (uso, 관습, 용법)이 아닌 기술(ante, 규칙, 문법)에 지배" 받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며 제멋대로 진화하지 않는다. 라틴어는 파롤보다는 랑그가 훨씬 중요하다. 파롤에 제약이 있어서 랑그의 변화가 없는 화석화된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언어인 라틴어는 바벨탑 때문에 벌을 받기 이전의 언어, 원초적 언어, 언어의 이상에 가까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라틴어는 격변화가 매우 복잡해서 통사적 모호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샤일록이 바라던 기표와 기의가 단단히 결속된 언어. 중세 교회에서 성경의 번역을 막고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도록 했던 것은 죽은 언어를 이용해 의미를 고정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죽은 육신에 단 하나의 의미. 이미 잘라낸 살덩이는 한 가지 의미밖에 담지 못한다-죽음. 더 이상 언어는 증식되지 못하고 의미는 고정되고모호함은 억제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쓰인 [신곡]에서는 단테 - P91
의 달라진 언어관이 드러난다.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편이거의 마무리되고 단테의 걸작이 찬란한 완성을 향해 다가갈무렵인 천국편의 칸토 26에서 단테는 아담을 만난다. 그런데 아담은 우리가 아담의 언어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깨뜨리는 발언을 한다. 아담은 언어는 신이 주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발명한 것이므로 원래부터 고정되지 않았다고, 얼마든지 바뀔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변동성은 더는 죄악의 표지가 아니며, 라틴어의 불변성도 더는 신에게 가까이 가게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제 라틴어의 불변성은 더 높은 가치를 뜻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부여한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단테는 라틴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필생의 역작을 썼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 프루 쇼는 이 선택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단테의 "이탈리아어 작품은 그가 라틴어로 쓴 어떤 것보다 더 생동감 있고 표현력 있고, 더 본능적이며 더 다양하고 독창적이었다. [...] 만약 라틴어로 썼다면 똑같은 에너지와 힘, 경이로울 만큼 풍부한 말재간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단테가 언어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용해 대단한 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언어를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언어의 본질은 변화다. 언어는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샤일록이 "맹세, 맹세, 나는 하늘에 맹세했소. 내 영혼이 위증 - P92
을 해야 하오?" 라며 자신의 계약을 신에게 한 맹세에 동일시하며 신성시하려고 하더라도 계약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이다. 그 차이를 통합하고 이해하려면자비가 필요하다. 언어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번역에서 자비 없는 축어역을고집한다면, 어떤 불충도 허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미와 행간의 침묵을 무시한 채 단어만 번역하려 한다면 언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파괴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 P93
재작년에 어떤 교육기관에서 번역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챗GPT가 공개되면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많은 사람이 전율하고 번역의 개념이 다시 한번 크게 뒤흔들린 무렵이다. 번역은앞으로 기계가 하리라는 전망이 난무했다. 나는 흔한 통념과달리 번역이 단어를 단어로 옮기는 일만은 아님을 설명하고, 번역이 실질적으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이고 싶었다. 번역 논쟁이나 번역 이론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든, 기계번역이 어떤 메커니즘을 따라 발전하든, 실제로 번역가들이 하는 일은 그와는 매우 다를 때가 많다. 때로 번역은 몸을 완전히벗는다. 살을 베어내고, 비슷한 몸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몸을입는다. 예를 들기 위해 내가 번역하던 에세이의 한 문장을 번역 엔진인 딥엘(DeepL)에 넣어서 번역하고, 딥엘이 내놓은 결과물과 내가 한 번역을 함께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 P95
In the silvery twilight the intricate palms rival the historicbeauty of the surrounding architecture.
TTI 은빛 어스름 속에서 복잡한 야자수가 주변 건축물의역사적인 아름다움에 필적합니다.
TT2 은빛 박명 속 섬세한 야자나무가 주위에 있는 예스러운 건물 못지않게 아름답다. - P96
이 사례로 기계 번역(TT1)이 어떤 면에서 부족한지도보•여주고 싶었다. 일단 기계가 번역한 문장에서 ‘필적하다‘라는단어가 에세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뜨인다(‘야자수가‘와 ‘필적한다‘가 주술 호응이 잘 안 되기도 하고). 기계 번역이 문체나 장르까지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단어의 어울림 혹은 논리의 문제가 있다. ‘어스름‘은 어둡다는뜻을 가진 단어이니 ‘은빛‘과 어울리지 않는다. ‘복잡한 야자수‘, ‘역사적인 아름다움‘도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은빛 어스름‘은 ‘은빛 박명‘으로, ‘복잡한 야자수‘는 ‘섬세한 야자수‘로 바꾸어 좀 더 잘 어울리게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문제는 기계 번역이 해결하기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기계 번역은 통계를 이용하므로 데이터의 양이 많아질수록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은 더 좋아질 수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아름다움 (historic beauty)‘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나는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단어에서 벗어나ㅡ몸을버리고ㅡ뜻으로 옮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beauty‘라는 명사의 의미를 - P96
가지고 와서 ‘아름답다‘라는 서술어로 삼는 의역을 택했다(그렇게 한 까닭은 「기계 번역 시대의 번역가」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의미에 새로운 몸을 주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사례는 유일한 해결책도 최선의 번역도 아니고, 이 책은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다음 일이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직역에 가까운 첫 번째 번역에서 문학성이 좀 더 느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충격이었다. 어떻게 기계가 나보다 더 문학적이지?
문학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번역하면 사라지는 것이 시"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람들이 번역을 말할 때 흔히 하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번역가는 배신자이자 무언가를 늘 잃어버릴 뿐아니라 문학에 적대적인 존재다. 내가 위의 사례를 학생들에게 보여준 까닭은 솔직히 내 번역이 조금 자랑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가는 번역을 지적받았을 때 자신의 선택을 옹호할 객관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취약하다. 번역가는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완벽하고 완전한 결과물에 도달할 수 없고, 그 사실을 상기하게 될 때마다 쉽게 의기소침해진다. 그럴 때는 번역에는 정답이 없고 어떤 번역이든 무언가 잃 - P97
기 마련이며, 관점에 따라 좋은 번역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변명처럼 우물거린다. 집에 와서 내 번역이 잃은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그 학생의 말은 직역 대 의역 논쟁의 핵심을 건드린 질문이었다. 단어를 고스란히 번역하는 직역이 만드는 특수한 효과를 나처럼 기이하거나 어색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참신하거나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문학성과 광기는 사실 같은 것이니까. 시는 일상 언어에서 벗어나 언어의 한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미치광이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단어는 죽은 은유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쓰는 일상어는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죽었다. 클리셰다. 언어의 일상적인 쓰임에서 벗어난 언어라야 우리는 문학적/시적이라고 느낀다. 직역 혹은 기계 번역을 거쳐 생겨난 뜻밖의 낯선 표현ㅡ은빛 어스름, 복잡한 야자수, 역사적인 아름다움ㅡ은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언어적 감수성을 자극한다(발터 벤야민부터시작해서 여러 중요한 번역 이론가들이 직역을 주장한 까닭도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것처럼 직역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다듬으면 문학성이 사라진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니 번역가는 딜레마에 빠진다. 문학적인 미치광이가 될 것인가, 제정신인 직업인이 될 것인가. - P98
번역가가 텍스트의 날뛰는 야생성을 다듬고 길들이는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 까닭은 번역가가 편집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20년간 원고를 교정당하면서 삼가고 자제하는 법을 배웠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는 ‘날개가 일렁인다‘라고 해도 되지만 번역가는 그렇게 쓸 수 없다. 한국어의관례에 따르면 날개는 주로 퍼덕이고, 일렁이는 것은 파도니까. 번역가는 ‘일렁이다‘의 소리가 ‘날‘의 유성음과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소심하게 ‘퍼덕이다‘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창작 원고와 번역 원고를 대하는편집자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작 원고는 언어와 의미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예술적 구조물이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없고, 사소한 부분에도 작가의 미묘한 의도가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조사 하나, 쉼표 하나 바꾸기도 조심스럽다. 그렇지만번역 원고는 다시 쓰기 수준으로 고치는 경우도 있다. 번역된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에는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때문이다. 어차피 번역된 문장은 정신이 그것과 얽혀 있던 몸 - P99
에서 분리되어 새로이 이식된 몸, 대체된 몸이다. 번역 원고는신성불가침의 원본성도 권위도 없고 원본에서 파생된 2차 생산물일 뿐이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잠정적 상태이므로 거리낌 없이 손댈 수 있다. 번역가들은 다들 이런 길들임에 익숙해서, 고심해서 쓴 표현이 깎이고 살이 베이는 아픔을 피하려고빨간 펜을 내면화하고 편집자에게 넘기기 전에 미리 스스로 글을 다듬는다. 출판 번역가에게 문학적인 미치광이가 되는 선택지는 사실 없다. 그랬다가는 일자리를 잃는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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