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E


매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세계적인 거장, 1936년 알바니아 남부의 기이로카스터르에서 태어났다. 알바니아 최고의 명문 티라나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26세 때 발표한 처녀작 죽은 군대의장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등장으로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알바니아의 정치적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산독재정권하의 조국 알바니아의 혼과 집단기억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리는그의 작품들은 마르케스의 그것에 비견되며, 전제주의와 유토피아의 위험을 고발하는 헉슬리와 오웰의 뒤를 잇는 반(反)유토피아 가계의 후예로 꼽히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 우화와 신비에 싸인 놀라운 이야기로 세계적 작가의 자리를 굳혔으며, 1990년 독재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이래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 실존의 비극적 상황을그려낸 대표작 부서진 사월은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는 죽은 군대의 장군」 「광기의 풍토」서류」 「꿈의 궁전, 아가멤논의 딸」 「후계자」 등이 있다.



이십대의 청년 조르그는 몇 날 밤을 매복한 끝에 원수의 가족 중 한명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다. 그의 임무는 마침내 완수되었다. 그러나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알바니아의 관습법 ‘카눈‘에 의해 이제는 그 자신이 복수의 희생양이 될 차례다. 작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그조르그의 한 달이 채 못 되는 휴가를 긴장과 초조, 전율, 때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변주하며 긴박하게 그의 뒤를 좇는다.




그조르그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비켜섰다. 크루쉬크들은 비로부터 총을 보호하기 위해 총신이 아래쪽을 향하게 들고 있었다.
그조르그는 신부의 혼수가 들어 있을 알록달록한 옷보따리를 살펴보면서, 신부의 부모가 넣어주었을 혼수 탄약통‘이 어느 은밀한 구석, 어느 상자 속, 어느 호주머니 속, 어느 수놓은 조끼 속에들어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것은 신부가 남편한테서 도망치려고할 경우, 남편이 사용할 권리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 생각에 겹쳐오랜 병치레 끝에 결국 혼사를 치를 수 없었던 그의 약혼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혼례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볼 적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그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위안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기나긴 여생 동안 과부로 지내느니, 그가 이제 곧 그녀와 만나게 될그곳에 먼저 간 것이 그녀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인 듯 싶었던 것이다.  - P38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섰으며, 누구도 피해자가 쓰러진 방향을 변경할 수 없듯, 또옛 카눈의 법칙들이 결코 수정될 수 없듯, 그 일에 대해 터럭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드림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은 너무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에, 때로 그조르그는 그것을 상상하는 게 두려웠다. 그는 일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으며,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할지라도, 그런 삶은 그렇기 때문에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복수와는 상관없이 사는 몇몇가족들을 애써 떠올렸으나,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행복의 징후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위험과 관계없는 그런 삶으로는 생명의 값어치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삶이덜 행복하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대로 복수가 들어온 가정들에서는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한 듯 다른 가정들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으며, 그러한 가족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고, 그러한 가정의 소년들은 소녀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었다.  - P47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두려운 것, 위엄 같은 것이생겨났다. 그것을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가슴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심장이 그렇게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때문에 상처받기 쉬울지는 몰라도 공격에 극도로 민감하고, 크고작은 모든 사물들-나비, 나뭇잎,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벌판, 혹은 오늘 내리고 있는 비만큼이나 처절하게 내리는 비-에 대해서도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심장 위로 쏟아져내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의 심장은 그것을 다 견뎌낼 것이며,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P48

그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런 바람 이상으로그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기묘한 인상에 더욱 놀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턱이 조금씩 형태가 변해가는 같았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목젓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그들은 추운 겨울밤 내내 그날 분의 꼴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그것을 되씹기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복수를 한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나흘이오, 댁은요?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거친 모직 외투에서 조금씩조금씩 흘러나왔다. 검은 바퀴벌레와도 닮은 그들의 이야기는 슬금슬금 기어다니다가 서로 부딪치기도 했다. 삼십 일간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겁니까?
난 그동안 뭘 할까? - P87

문이 열리더니 한 낯선 사내가 들어왔다. 한눈에 그가 멀리서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두세 차례 무심한 불빛이 그를 비추었다. 불빛은 그가 진흙투성이에, 후줄근하게 젖은 모습까지 알아볼 수있을 정도로 비추더니 그를 다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쳤다.
깜짝 놀란 듯한 그 남자는 구석 쪽으로 가더니 나무 밑동 곁에자리를 잡았다. 그조르그는 불과 몇 시간 전, 그곳에 들어왔을 때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기 위해 곁눈으로 계속 그를 살폈다. 그 남자는 두건이 달린 망토를 벗더니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그의 사연은, 겉으로도 보이는 것처럼,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이 묻혀 있었다. 아직은 그의 목구멍에서 한참 먼 곳에 묻혀 있었다. 혹 그의 이야기가 아직 그의 육체와 일체가 되지 않았다면, 표면에, 그러니까 막 살인을 저지르고 꽁꽁 얼어, 완수하지 못한어떤 것을 이루고 싶기라도 한 듯 무릎 주위에서 신경질적으로떨리고 있는 두 손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 P88

"손님은 정말 반신의 존재야. 그리고 처음 온 자가 돌연 손님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神性)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강화시켜주지 어느 집 대문을 몇 차례 두드리는 것만으로 하루아침에 신적인 지위를 획득한다는 사실은 신성을 한층 진실되게 해주지.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손이 우리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며 그 순간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물, 범할 수 없는 지배자, 입법자, 이 세상의 불꽃으로 변하는 거지. 이런 변신의 돌연성이야말로 신성의 특성이라 하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의신들은 가장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지 않았어? 바로 그런 식으로 손님은 알바니아인의 대문 앞에 출현하는거지. 다른 모든 신들처럼 그는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어. 그는 운명이라 해도 좋고 숙명이라 해도 좋을 왕국에서 곧장 그리로 온거야 몇 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全) 세대의 생존이나소멸이 좌우될 수 있지. 산악 지방 알바니아인들에게 손님은 그런 존재라구." - P117

"그래서 베사로 결속된 손님이 불행을 당하는 것은 알바니아인으로서는 불행 중의 불행, 일종의 세상의 종말이 되는 거지."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의 손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치욕 중의치욕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아버지나 아들의 피의 회수는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손님의 피는 그렇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알바니아인의 집은 신과 손님의집‘이라는 그 굉장한 격언의 의미였다.
그녀는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 산들을 바라볼 때 세상의 종말이라는 시각보다 더 적절한 시각은 갖기 힘들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 P118

"햄릿은 분명한 동기에 의해 살인으로 내몰렸다고 말해야겠지. 그런데 그는 - 베시안은 손으로 그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ㅡ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동기, 때로는 그의 시대 너머에 존재하기도 하는 동기에 자극을 받은거야."
디안은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주의 깊게듣고 있었다.
베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명령에 따라 죽음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거인 같은 의지가 필요할 거야. 실제로 그런 명령은 때론이미 죽고 없는 세대들을 포함하여, 실로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하니까." - P172

창 너머에는 고뇌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오한이들 정도로 추웠지만 캄캄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작고 연약한 빛을 애타게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불빛을 찾았다. 불빛은 저 아래, 같은 장소에, 깊은 심연 속에, 너무도 약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어서 어둠에 삼켜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했다. 한동안 그녀는 어둠의 심연 속에 있는 한 점 가느다란 그 붉은불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원시의 불, 지구의 속살로부터 한줄기 약한 섬광이 비친, 천년의 마그마에서 분출한빛 같았다. 혹은 지옥의 문으로부터 나오는 빛 같기도 했다. 돌연참을 수 없이 강렬하게, 이 지옥을 거쳐갔을 남자의 영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조르그, - P193

그는 죽음의 메커니즘이 태곳적부터 그곳에 밤낮없이 돌아가는 고대의 물레방아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피의관리인으로서 그것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추방됐다는 느낌을 가시게 하는 데 일말의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층 낯선 모습으로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지도와 장례 식사 때 펴놓는 식탁보 사이의 그 무엇 같은 차가운 평원을 마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장서실의 창가에 서서, 죽음을 부르는 지역의 지도를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엄정한 순서에 따라고원지대의 비옥한 대지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 P221

그조르그는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는 그곳에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위해 무란의 돌멩이들을 뽑아 사방으로 내던진 후, 그 위로 몸을날리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맹렬히 길 위에서 돌멩이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는 돌멩이를 하나 발견했고, 손의 살갗이 반쯤 벗겨지기라도 한듯 익숙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무덤 위에 던졌다.
돌멩이는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두세 차례 굴러가다가 다른 돌멩이들 사이에 끼어 멈추었다. 그조르그는 다시 움직이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그곳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그 자리에 영원전부터 그렇게 던져져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서 있는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P236

그조르그는 그 지역을 여러 날째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여정은 자주 바뀌었다. 길을 따라 있는 주막들, 낯선 얼굴들. 그는 자기 마을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라프쉬가, 특히 겨울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없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원 지대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그들의 고장에서 중심부로 끊임없이 물밀듯 몰려들어오고, 또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쪽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갔고 어떤 사람들은 내려갔다. 대부분은 같은 마을을 지나면서도 올라가기도 하고내려가기도 했다. 그것이 하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결국 사람들은 현재 있는 곳이 출발한 지점보다 더 높은 곳인지 아니면 더낮은 곳인지 분간할 수 없어 당황해했다. - P241

이따금 그조르그는 날짜의 흐름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서는시간의 흐름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나날들은 어느시간까지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복숭아 꽃잎 위에서한동안 바르르 떨다가 갑자기 굴러떨어져 부서지고는 마침내 죽고 마는 물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월이 왔다. 그러나 봄은정착하기가 매우 힘든 모양이었다. 이따금 알프스 산자락에 드리 - P241

워진 푸른 띠를 볼 때면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되었다. 드디어 사월이 왔군요, 주막에서 서로 소개를 하면서 길손들은 그렇게 말했다. 올해의 봄은 너무 늦게 찾아온 감은 있었지만 환영을 받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휴전 날짜의 종료에 관한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충고 전부는 아닌, 그렇다고 충고의 일부도 아닌, 단지 "얘야" 하던 그 말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월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사월은 두 동강 나 반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에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배낭 속에 빵과 소금이없을 때조차 결코 이야깃거리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는 길손들의이야기에 그는 열심히 귀를 귀울였다. - P242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마."
물론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무언가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만일 무언가가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 고원 지대에 있을때에 가능한 것이며, 일단 아래로 내려가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둠이 완전히 깔려 있었으며, 그는 더이상 그녀의 얼굴을 분간해낼 수 없었다. 그는 두세 차례 창가로 몸을 기울였으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 뒤 달이 길에 밝은 빛을 드리우자, 그는 차창에 이마를 붙였다. 차디찬 차창의 요동이 그의 머리로, 이어 전신으로 전달됐으나, 그는 한동안 그런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 P253

그들은 마을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파를 내려준후 걸어서 노파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어 마차는 주술이 걸린 것 같은 그 돌의 세계를 가로질러 다시 여정에 올랐다. 아, 저벽들 속에 사람들이 있다니! 수줍은 가슴을 지닌 처녀들과 신부(新婦)들까지 있다니! 라고 베시안은 생각했다. 한순간 그는 저딱딱한 외관 뒤로 끊어질 듯 팽팽하며, 베토벤의 리듬으로 벽을울려대는 생명의 맥박을 감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외부의 벽들과 총안들, 그리고 그 위로 스치는 희미한 햇살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돌연 그는 속으로 외쳤다. 저런 것들이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네 아내의 뻣뻣한 태도에나신경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는 갑자기 속에서 울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며, 이번에야말로 견딜 수 없는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태도, 그녀의 무력감, 그녀의 수수께끼에대해 속 시원한 해명을 요구할 생각으로 불쑥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 P262

마차가 그 불길한 마을을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아내와의 해명을 뒤로 미룬 이유는 오직 두려움 때문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두렵다구, 그런데 이 두려움의 실체는 과연 뭐지?
그가 느끼고 있는 죄의식은 그들의 여행중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사실 그런 죄의식은 훨씬 오래전에 잉태된 것이었으며, 아마도 그가 이 여행을 계획했던 것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디안의 해명이 그의 죄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는 두려움이 그를 전율케했다. 아니다. 그녀가 이 ‘십자가의 길‘을 지나는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그녀가 미라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이 나았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말을 그녀에게서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 P264

"당신의 책들,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이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에왔소, 십중팔구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어떤 젊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당신은 그것이 살인의 미학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오. 당신은 내게 러시아 위선자들의 궁전에서 상연되던 연극을 연상시키오. 그곳의 무대는 수백 명의 연기자들이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넓은 반면, 객석은 오직 왕가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당신이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그 위선자들이란 말이오. 한 민족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 P294

그리고 그녀가 그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보다 더 한층 믿기지 않는 일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이 그녀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근방을 헤매는 것을 보았는지도 모르지만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의 행방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곳까지 갔으며,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녀 자신조차 어떻게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몇 마디나마 고원 지대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로 판단해보건대, 그녀는 아마도 그 순간 완벽한 초월의 경지, 그러니까 탑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이아니라, 그 문까지 걸어간다는 것도 대단찮은 일로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겪은 것 같았다. - P298

그는 폭포를 두고 돌아서기가 힘들었다. 직사각형을 펼쳐놓은듯한 길은 한없이 뻗어 있었으며, 그 끝은 주홍빛으로 얇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남아 있었다. 베사가 끝나면, 그는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그는 되뇌었다.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시간으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남았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는다시 되뇌었다. 구름층의 으깨어진 장미들은 이제 약간 어두워져있었다. 그조르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지! - P312

이따금, 그를 두렵게 만드는 마음의 평정이 찾아오면, 그는 고원 지대에 그만큼의 조공(租貢)을 지불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 그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요정과 오레이아스들에 대해, 그가 들어앉아 유혈이 낭자한 사람들이 벌이는 연극을 보았던 극장의 작은 박스 좌석에 대한 조공을.
그러나 벌은 아무 데서든, 예컨대 티라나에서도 그에게 닥칠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각했다. 고원 지대는 아주 멀리까지, 나라 전체에, 모든 시대에 그 파장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투 소매를 올리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오였다. - P314

그조르그는 고개를 들고 구름층 밑으로 보이는 태양의 자취를더듬으며 생각했다. 정오로군. 그의 베사는 이제 종료되었다.
그는 대로를 따라 펼쳐진 황무지로 천천히 올라섰다. 지금부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사방 풍경은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카눈에 대한 위반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지였다. 멀리 경작지와 몇 그루의나무가 보였으나, 그의 주변에는 자그마한 동굴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몸을 숨길 만한 덤불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피신처를 발견하면 즉시 그곳으로 가서 숨어야지. 그가 그렇게 몸을 노출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숨을 만한 곳을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듯,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야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 P315

베시안은 집으로 아내의 빈 껍데기만 가져가고, 진짜 그녀는 산중 어디엔가에 놓아두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이제 한 달 전, 그들의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헐벗은 황무지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라프쉬를 보기 위해, 아마도 마지막으로 그곳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산들이 침묵 속에서천천히 줄을 지어 지나갔다. 희끄무레한 안개가 연극이 막 끝난무대 위로 드리워지는 커튼처럼 산들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 P325

같은 순간, 그조르그는 한 시간 전에 들어선 ‘깃발들의 대로‘
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대기 속에서 처음으로 석양의 서늘한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는 도로의 한쪽으로부터 몇 마디 짧은 말소리를 들었다.
"그조르그, 인사말 좀 전해주렴, 제프 크리예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어깨에서 소총을 내리려 했으나, 그의동작은 그 끔찍한 이름의 나머지 절반인 ‘키크‘라는 음절과 뒤섞였다. 그 음절은 어수선하게 그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그조르그는 땅이 앞뒤로 흔들거리다가 격렬하게 뒤흔들리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그조르그는 고꾸라졌다.
한순간 세상은 아주 고요해진 것 같았다. 이어 고요한 침묵 사이로 그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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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시렸다. 게다가 저린 다리를 조금이나마 움직일라치면발 아래 돌 틈새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러나사실 신음은 그의 내부에서 일고 있었다. 그는 큰길이 끝나는 지점, 즉 경사지 뒤쪽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장시간을 부동자세로 있어보긴 난생처음이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아니, 그보다는 바짝 경계심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소총을 뺨에 대고 전방을 겨누었다. 곧 날이 저물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슴푸레한 빛때문에 소총의 가늠쇠조차 더이상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 P7

그날 늦게 소(小)휴전이 끝나기 몇 시간 전에, 크리예키크 가가 대(大)휴전에 동의했다. 마을의 원로 중 한 명이 베리샤 가의집으로 와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그조르그가 이를 기회삼아 그릇되게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원로 대표가 떠나자, 그조르그는 매우 낙담하여 집 안 구석에처박혀 있었다. 앞으로 삼십 일간은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후로는 죽음이 사방에서 그를 노릴 것이다. 이제 그는 박쥐처럼 태양과 밝은 달과 횃불을 피해 어둠 속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삼십 일간이라・・・・・… 그는 혼잣말을 했다. 하여간 그는 강도처럼 어둠을 틈타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다녀야 할 것이다. 저 아래, 한길의 경사지에서 쏘았던 한 발의 총알이 돌연 그의 삶을 두동강 내버린 것이다. 한편에는 이때까지 살아온 이십육 년간의삶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날, 3월 17일부터 시작된 삼십 일이 놓여 있었다. 그 다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는 박쥐 같은 삶이 찾아오리라. - P26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에게 사월은 늘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다. 사월은 뭔가 마무리되지 않는 달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사월의 사랑은..... 그의 마무리되지 못할 사월은…… 어쨌든 더 잘됐지 뭐. 그는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형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 잘됐다는 것인지, 일 년 중 이 시기에 피를 회수한 것이 그렇다는 것인지. - P27

그에게 삼십 일간의 휴전이 주어진 것은 불과 삼십분 전이었는데, 그는 벌써 그의 삶이 두동강 났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삶이 원래부터 그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지루할 만큼 더디게 흘러간 스물여섯 번의 삼월과 스물여섯 번의 사월, 또 그만큼의 겨울과 여름으로 이루어진 스물여섯 해라는 한 토막과, 절반의 삼월과 절반의 사월을 지닌, 서리 반짝이는 두 개의 부러진 가지 같은, 눈사태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맹렬한 넉 주간의 짧디짧은 나머지 한토막.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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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쉬스마레프 
1973년 4월 11

친애하는 호시노씨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호시노 씨가 우리 집에 묵을 수 있는지를놓고 아내와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몇 월에 올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6월과 7월이면 여기에서는 순록을 돌보며
거의 마을에서만 시간을 보냅니다. 7월 10일부터 15일까지는 순록 뿔을 자르고 소유자 표시를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언제쯤 도착할지 정확히 알려주면 도움이될 것 같습니다. 놈에서 쉬스마레프로 오는 교통편도 수배해놓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럼 이만.

클리포드 웨이오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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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호박 조각 하나가 국물과 함께 입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호박은 제대로 익지도 않았고 간도 덜 배어 있었다. 호박 조각뿐이아니었다. 된장찌개 국물은 뜨거워서 쉽게 입을 대기도 어려운데 국물 속의 건더기는 어느 것 하나 간이 제대로 배어 있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간이 덜 배어 맛이 없는 된장찌개, 일없이 뜨겁기만 한 된장찌개를 후후 불어서 억지로 식혀 가며 오로지 저녁 야근을 위해 빈배를 조금씩 채워 나갔다.
어쩌면 요즘 내 사는 꼴이 이 뜨거운 된장찌개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겉으론 바쁜 척 열을 내며 살지만 기실은 뜨거운 국물속의 간이 배지 않은 건더기 같은 생활, 또는 일상. - P14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신문 속의 그림 ‘아기업은 소녀‘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미 세상을 뜬 지오래인 어떤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그림이었다.
내 지나온 삶의 내력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볼 때, 나는 그림과는 애당초 사돈네팔촌만큼보다도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그 그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그림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그 그림에 자꾸 마음이 끌리는지 모르겠다.
사무실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그 이유를 알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그 그림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오늘 저녁까지 마쳐 놓아야 할 일들이 내 책상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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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일본 전쟁성의 작전 명령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강간과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소‘에서의 규제된 섹스를 옹호했다.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들까지 끌려왔다. 납치당하거나 간호 병동이나 공장에서 일한다고 속아 오거나 부모로부터 계약노동자로 팔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진 곳은때로는 하루에 50명까지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유곽이었고, 그곳에 여러 달, 심지어 여러 해 동안 붙들려 있었다.
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가 300만 일본군의 접대를 강요받았다. 전후에 일본 관료들이 문서를 파기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여성은 후퇴하는 군대에 살해당했다. 일본 군인의 폭력 때문에 생긴 합병증이나 성병으로 죽은 여성도 많았다. 자살한 여성들도 있었다.
1993년 UN의 세계여성인권침해법정 Global Tribunal on Violations ofWomen‘s Human Rights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미 90퍼센트의 ‘위안부‘가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매춘부‘라불리며 사회적으로 외면당했다.
일본은 침묵했다. 관료들은 위안소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여성들이 매춘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츰 증언에 나서는 용감한 생존자들이 늘어났다.
1993년 일본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사과로 과거의 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거의 5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뒤에도 후임 총리 중 하나인 아베 신조는 그를 비난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생존자들에게 10억 엔을 지급한다는 한국과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은 옛 식민 권력에게더 강력한 사과를 요구하며 여성들은 수요일마다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모여 ‘사과하라!‘ 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라고 외치고 있다.
일본은 계속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일본 공영 방송 NHK 편집자들은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에 이들을 ‘전시 위안부라 불리는 사람들‘로 묘사해야 했다.
2018년 10월 일본의 도시 아소카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안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 것에 항의해 샌프란시스코와의자매도시 관계를 끊었다.

★ 옮긴이-당시 일본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중언 이후 진행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담화‘에서 위안소 설치 및 관리에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며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표현했다.
★★ 옮긴이 -2015년 12월 아베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여 한국 정부가 위안부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진상 규명과 역사 교육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지않은 정부 사이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P 248, 249




1997년 사라예보의 조사기록센터가 발표한 사상자 보고서인보스니아 사망 보고서 The Bosnian Book of the Dead>는 9만 2207명의 사망자 가운데 40퍼센트가 민간인이라고 기록한다. 사망자의 3분의 2가 무슬림이었다.
그리고 강간이 있었다. 강간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그 누구도 진짜로 알 수 없지만 2만~6만 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추정된다. 대부분이 보슈나크인(무슬림)이지만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도 있고, 더러 남자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나이는 6세부터 70세까지이고 반복해서 여러 차례 강간당했으며, 몇 년 동안 붙들린 경우도 많았다. 많은 여성이 강제로 임신당했고 임신 중지가 불가능할 때까지 붙잡혀 있었다. 여성들은 소유물처럼 취급되었고 강간은 공포와 굴욕,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보스니아전쟁에서 강간에 쏠린 관심이었다. 구유고슬라비아에서 전쟁 도구로 쓰이는 강간의 확산과 강간 수용소에 갇힌 여성들의 이야기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아무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사에서 최초로 기자와 역사학자들이 인종청소와 제노사이드를 수행하는 무기로서 강간과 성폭력의 사용을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 P190

약국을 찾아그날 밤은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저는 세 번 끌려가서 강간당했어요. 처음에는 경찰서 지하실로 저를 끌고 가더군요.
거기에는 큰 안락의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있었고 벽 중간쯤까지나무판이 눌려 있었어요. 밀란 루키치 Milan Lukić와 그의 사촌인 경찰스레도예 루키치 Sredoje Lukić가 보였어요. 비셰그라드는 작은 도시여서 바로 그 사람들을 알아봤죠. 저는 밀란 루키치를 매우 잘 알아요.
우리가 과거에 그의 가족을 도운 적이 있거든요.
그는 초승달 모양의 칼을 뽑더니 제게 옷을 벗으라고 했어요.
저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자가 칼을 제 코 앞에 들이대더군요.
시키는 대로 바지와 셔츠를 벗고 속옷만 입고 서 있었어요.
두 번째는 치료 시설에서였어요.
세 번째는 고등학교 건물에서였고요.
세 곳 모두에 저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많았어요.
그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여러 장소를 사용했어요. 경찰서, 지역 스포츠 센터, 심지어 아동 보호 시설까지요. 우리를 투르크인이라 불렀어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희는 이제부터 투르크인이 아니라 세르비아인을 낳게 될 거야‘ - P200

법원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희 회원 중에는 20명의 가해자에게 50~100번 강간당한 여성들이 있어요. 헤이그 재판소 시절에는모든 것을 한 번만 진술하면 됐는데 여기에서는 가해자 한 사람이재판을 받을 때마다 증언을 하면서 그 모든 일을 다시 겪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원하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해요.
회원 중에 지금까지 열 명이 자살했고 많은 여성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우리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있지만 법정에 갈 힘을 내지 못한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증언하지 않으면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되잖아요. 이 남자들은 우리 안의 아름다웠던 모든것을 빼앗아갔어요. 과거를 지우고 이 고통을 끝낼 마법의 지팡이는없어요. 정말입니다. 제가 강간당하고 나서 처음 비누를 손에 넣었을 때 피가 날 정도로 저를 씻고 또 씻어봐서 알아요. - P208

보스니아에서는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가해자의 변론 비용은 정부가 지불하지만 우리는 법정 부담금을 우리 돈으로 내야 해요. 그리고 피해자 보상은 여전히 없지요.
가해자가 특정 액수의 돈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려도 그들은 대개 모든 것을 가족에게 이미 양도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돈이 하나도 없어요. 민사법원으로 가면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는데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지요.
배상금이 지불된 경우는 제가 알기로 딱 한 건밖에 없습니다.
가해자가 덴마크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보스니아에 돌아온 거예요. 우리가 그를 찾아냈어요. 그는 아버지를 묻는 순간에 체포당해서 전시 강간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지요. 그는 희생자에게도 배상했고, 형기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도 돈을 냈어요. 4만3000유로로 오명을 씻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법이 바뀌어서 전범들이 돈으로 형량을 치를 수 없게 됐어요. 이제 우리는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법을 개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 P209

그녀는 감자를 키운 덕택에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사라예보에 살지만 주말마다 비셰그라드에 가요. 거기에 텃밭이 있어서 감자와 당근, 콩을 키워요. 제 땅에서 온전히 저 자신으로있는 게 좋아요.
우리 아이들이 다 살아 있으니 저는 아내이자 어머니, 할머니로서 무척 뿌듯합니다. 손주가 다섯이 있어요. 둘은 대학에 다니고 하나는 간호사로 일하고, 가장 어린 손주 둘은 학교에 다닌답니다. 저는 손주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애써요. 전쟁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손주들에게는 주고 싶거든요.
큰 손녀는 열아홉 살이에요. 제 딸이 강간당했을 때와 같은 나이이죠. 저는 손녀에게는 이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나 믈라디치가 재판을 받을 때 제가 그 남자와 논쟁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손녀가 집에 와서는 대학에서 다들 그렇게 용감한 할머니가 있어서 좋겠다고 말했다더군요." - P211

심지어 바키라의 강간범 밀란 루키치가 강간 수용소로 사용했던악명 높은 빌리나블라스 스파호텔마저 다시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모르는 관광객들은 1992년에 호스로 피를 씻어내야 했던 로비로 들어와 사람들이 처형당했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그러나 트립어드바이저 사이트에 올라오는 가장 큰 고객 불만은 불결한 객실이다.
루키치는 감옥에 있고 에스토니아로 이송됐다. 2011년에는 그의 회고록이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에서 발표되었다.
헤이그 구치소에 수감된 다른 죄수들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정치인들에게 영웅으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극우 세르비아 민족주의 정당의 대표였던 예순여섯 살의 보이슬라브 셰셀 Vojislav Sešelj은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고 거의 12년간 복역한 뒤 2014년 세르비아로 돌아와서 리얼리티 텔레비전 쇼의 스타가 되었다. 2018년 그의무죄 방면 판결이 뒤집힌 뒤 그는 이렇게 으스댔다. "나는 나 때문에일어났다는 그 모든 범죄가 자랑스럽고 그 범죄들을 기꺼이 다시 저지를 것이다. 우리는 결코 대세르비아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P214

1995년 7월 믈라디치의 군대가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했을 때 네덜란드 부대는 맡은 임무를 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난처를 찾아 군 기지로 몰려온 2만~3만 명의 민간인조차 보호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몇천 명을 기지 안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뒤에는 문을 닫아걸었고, 결국 모든 민간인을 세르비아군에게 넘겨주었다. 세르비아군은 파란 헬멧을 쓴 네덜란드 군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람들을분류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을 그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남편과아들들이 오른쪽으로 보내지는 동안 노인, 아이들과 함께 왼쪽으로가라는 지시를 받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의 모습을 격납고들은 마음 아픈 이야기를 전하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제 아들의 손이 제 손에서 뽑혀나갔어요." 한 여성이 영상에서말했다. "아들은 끌려가면서 자기 가방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자들이 끌려가고 난 뒤 더 많은 비명이 들렸다. 젊은 여성들이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 P221

"그들은 임신 상태인 그녀를 강간하면서 여덟살짜리 딸이 그 광경을 지켜보게 했대요. 딸 앞에서 여러 남자에게강간당한 거죠. 그러고 나서 이 강간범들은 딸에게 그들과 엄마의성기를 씻으라고 시켰답니다. 나중에 이 여성은 34주에 조산을 했는데 아기가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어요. 딸은 학교를 마치지 못했고성관계가 무척 문란해서 세 사람의 서로 다른 남자에게서 다섯 명의아이를 낳았다더군요.
듣기 힘든 이야기였어요. 그 남자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손상시켰어요. 이 여성이 자신의 트라우마야 어떻게든 견딘다 해도 눈이먼 아들과 부서진 딸은.…….
그녀는 강간당했던 이야기를 여러 해 동안 하지 않았어요. 그일이 일어난 뒤에 집이 불에 타 없어져서 살 곳도 없었고 아이들을부양하느라 힘들게 지냈으니까요.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덜 중요해 보였던 거죠. 많은 여성이 수치심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 P225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강간이 전쟁 무기로 이용된다는 것에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90년대 보스니아전쟁 기간이었다. 강간수용소가 처음 보도됐을 때 충격의 물결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고 푸른 하늘이 화창한 시월의 어느 날 나는 에스반 열차를 타고 동베를린이었던 트렙타워파크역에 도착했고 계단을 내려가 여행자 카페와 유리 지붕 달린 유람선이 있는 슈프레강을 따라 걸었다.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니 회색 석조 아치와 통로가 나왔다. 통로를 따라가니 슬퍼하는 어머니 러시아의 동상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흰자작나무 길을 걸어 망치와 낫이 그려진두 개의 거대한 붉은 화강암 깃발 사이에 있는 단에 올라섰다.  - P232

소비에트 병사의 청동상이었다. 그는 으스러진 하켄크로이츠를 밟고 서서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작은 독일 소녀를 안고 있353었다. 높이 10미터에 무게가 70톤쯤 된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럴 의도로 만들어진 동상이었다. 트렙타워파크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공세였던 1945년 봄 베를린 진격전에서 목숨을 잃은 8만 명의 소비에트군가운데 7000명이 마지막 안식처로 잠들어 있는 곳이다.
나는 노랗게 물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힌 그 모든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 그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내, 딸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조깅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유모차를 밀며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한무리의 여행자가지나갔다. 공원은 분주한 도로 곁에 있었지만 분위기는 조용했다.
계단을 올라가 동상의 기단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종교 프레스코화처럼 선명한 붉은색과 금색 모자이크로 한 무리의 사람을 묘사한 벽화가 있었고, 바닥에는 줄기가 긴 빨간 장미와 카네이션들이놓여 있었다. 벽화 위에는 러시아어와 독일어로 선언문이 쓰여 있었다. "소련인들이 파시즘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구했다." - P233

다시 벤치로 돌아와 나는 소녀를 안고 우뚝 서 있는 병사를 응시했다. 이 청동상이 전달하려는 영웅적 이미지와는 관계없이 많은독일 여성은 이 기념비를 ‘무명 강간범의 무덤‘이라 부른다. 이 묘석에 새겨진 전투와 해방의 장면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붉은군대가 독일의 수도로 진격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량 강간 현상‘이라고 표현한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Antony Beevor에 따르면 베를린에서는여성 세 명에 한 명꼴로 많은 여성,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강간당했고, 전체적으로는 ‘최소한 200만 명‘이 강간당했다.
앤터니 비버는 그의 책 《베를린: 몰락, 1945 Berlin: The Downfall,
1945》를 쓰기 위해 일기장과 군인들의 편지, 공산당 정권의 기록을샅샅이 뒤지면서 발견한 사실에 충격을 받고는 이렇게 썼다. "많은 면에서 베를린 여성과 소녀의 운명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주리고 고통받은 병사들의 운명보다 훨씬 비참했다." - P234

침묵, 불처벌, 부정,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프가니스탄부터 짐바브웨에 이르기까지 내가 취재한 모든 곳에서 여성이 군대에 강간당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나는 이 장의 첫머리에서 전시 집단강간이 세계 언론의 광범위한 관심을 받은 최초의 전쟁으로 보스니아 전쟁을 언급했다. 그러나내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자 전시 집단강간을 표현한 아주 많은재현물이 있었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18 전시실만 가도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의 그림 <사빈느 여인들의 강간The Rape of theSabine Women>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가 높은 단에서 지켜보며 지시하는 동안 치마가 들춰지고 가슴이 노출된 반쯤은 벌거벗겨진 고통스러운 표정의 여성들이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있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 P241

전쟁에서 강간의 사용은 "분쟁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존재해왔다"라고 1998년 UN 여성기구United Nations Women의 보고서는 선언했다.
rape(강간)라는 영어 단어는 중세 영어 rapen, rappen (유괴하다,
강탈하다, 채가다)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훔치거나 붙잡거나 쟁취하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rapere에서 유래한다. 마치 여성이 재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표현은 오랜 세월 남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인이 여성들에게 저지른 집단 강간에 대해 썼다. "포키스인 몇이 쫓겨가다가 산 근처에서 붙들렸고 몇몇 여자는 너무나 많은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잇따라 강간을 당한 나머지 죽었다."
구약성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투를 다루며 강간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명기》 21장 10~14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적과 대적하여 전쟁에 나갈 때 ...… 포로 중에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면 …... 그녀에게 가서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있다." - P243

1975년 프랑코가 노환으로 죽은 뒤 스페인은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길을 닦는 과정에서 과거를 지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1977년 스페인 의회는 ‘망각협정 Pact of Forgetting‘에 동의했고 사면법을 통과시켜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했다. 숙청도, 진실위원회도 없었고, 역사책에 아무 언급도 없었다. 시인 페데리코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cia Lorca를 포함해 세비야 주민 5만 4000 명의 처형에 책임이 있는 데 야노 장군은 바로 그 도시에 있는 마카레나성당 특별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스페인내전이 시작되고 얼마 뒤 난징의 강간이 일어났다. 2차청일전쟁 기간에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한 일본제국군이 자행한 잔학 행위였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여섯주에 걸친 학살에서 일본군은 집마다 돌아다니며 열 살 소녀까지 찾아내 아주 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2만~8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진술에 따르면 많은 여성은 강간당한 뒤 살해되었고, 다리가 벌려지고 질에 나무막대와 잔가지, 잡초가 꽂힌 채버려져 있었다. - P247

1938년 일본 전쟁성의 작전 명령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강간과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소‘에서의 규제된 섹스를 옹호했다.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들까지 끌려왔다. 납치당하거나 간호 병동이나 공장에서 일한다고 속아 오거나 부모로부터 계약노동자로 팔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진 곳은때로는 하루에 50명까지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유곽이었고, 그곳에 여러 달, 심지어 여러 해 동안 붙들려 있었다.
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가 300만 일본군의 접대를 강요받았다. 전후에 일본 관료들이 문서를 파기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여성은 후퇴하는 군대에 살해당했다. 일본 군인의 폭력 때문에 생긴 합병증이나 성병으로 죽은 여성도 많았다. 자살한 여성들도 있었다.
1993년 UN의 세계여성인권침해법정 Global Tribunal on Violations ofWomen‘s Human Rights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미 90퍼센트의 ‘위안부‘가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매춘부‘라불리며 사회적으로 외면당했다.
일본은 침묵했다. 관료들은 위안소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여성들이 매춘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츰 증언에 나서는 용감한 생존자들이 늘어났다. - P248

1993년 일본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사과로 과거의 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거의 5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뒤에도 후임 총리 중 하나인 아베 신조는 그를 비난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생존자들에게 10억 엔을 지급한다는 한국과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은 옛 식민 권력에게더 강력한 사과를 요구하며 여성들은 수요일마다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모여 ‘사과하라!‘ 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라고 외치고 있다.
일본은 계속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일본 공영 방송 NHK 편집자들은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에 이들을 ‘전시 위안부라 불리는 사람들‘로 묘사해야 했다.
2018년 10월 일본의 도시 아소카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안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 것에 항의해 샌프란시스코와의자매도시 관계를 끊었다. - P249

★ 옮긴이-당시 일본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중언 이후 진행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담화‘에서 위안소 설치 및 관리에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며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표현했다.
★★ 옮긴이 -2015년 12월 아베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여 한국 정부가 위안부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진상 규명과 역사 교육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지않은 정부 사이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P249

1974년 키프로스 침략과 점령에 참여한 터키군도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광범위한 강간으로 악명이 높았다. 25명의 소녀가 터키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고 터키군 장교들에게 신고했다가 그 장교들에게 다시 강간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병사들과 비밀경찰들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가게와 가정집을 약탈하고 유정에 불을 질렀으며왕궁 바닥 곳곳에 배설물을 문대고 쿠웨이트라는 이름을 긁어내어쿠웨이트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그러나 당시 수천 명의 쿠웨이트 여성과 필리핀 가정부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은 훨씬 덜 알려져 있다. - P251

"전쟁은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어난다."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이 1959년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에서 쓴 구절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양한 방식으로도 일어나며 어쩌면 죽음이 최악이 아닐 수도있다.
나는 더 많이 읽고 더 조사하고,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역사에 대해 배워온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됐다. - P251

1976년부터 1983년까지 7년에 걸친 군부독재 기간에 수천 명의 아르헨티나 남자와 여자가 ‘사라졌다.‘ 나중에 ‘더러운 전쟁‘이라불리게 된 이 시기 동안 공식 자료에 따르면 1만 3000명, 인권단체에 따르면 3만 명 이상이 사라졌다.
스포츠클럽과 버스 터미널, 군사학교, 심지어 서커스장까지 약600곳이 감금 수용소로 개조되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그곳으로 끌려가 고문받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시체들은 비밀 매장지에 버려졌고, 많은 사람이 비행기에 줄줄이 실려 플라타강이나 대서양에 산채로 던져져 죽었다.
납치된 사람 중 30퍼센트 정도가 여자였고 몇몇은 모니카처럼임신한 상태였다. 그들은 출산 때까지 감금 수용소의 특별실에 살려둔 다음 출산 뒤에는 이른바 죽음의 비행기에 실렸다. 태어난 아기들은 부모의 혈통을 전혀 모르는 아기 없는 부부에게 주기도 했고, 그들의 어머니를 살해한 군사경찰이나 비밀경찰이 데려다 키우는섬뜩한 경우도 있었다. - P254

고문자들이 임신한 수감자를 출산할 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아기를 빼앗았다니 디스토피아 소설에나 나옴직한 사악한 일이었다.
사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시녀 이야기》에 포함된 몇몇 실제 사례를 제공했다"고 썼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기들을 받아낸 의사나 산파, 아기들에게 세례를 준 신부, 그 일에 공모한 모든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러나 억압자 중에는 그들이 한 일을 이념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친부모의 ‘불경한‘
좌파 신념을 물려받지 않도록 공산주의자로부터 아이들을 구해 ‘품위 있는 가톨릭 가정‘에 건네준 행동이었다고. - P262

경악할 만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아르헨티나는1978년 월드컵을 주최했으며 스코틀랜드부터 스웨덴까지 여러 축구팀과 팬을 초청했고 우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와 결승전을 펼친 모뉴멘탈 경기장은 ESMA에서 1.6킬로미터 정도밖에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호르헤 아코스타를 비롯한 장교들은 얼마전까지 고문하던 여성들에게 키스를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한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아코스타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하고 외치며 방에 들어왔어요.
내가 방문한 많은 장소와 달리 이곳에서는 적어도 이제는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층 홀에는 유죄판결을 받은 가해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영상이 벽에 투사되고 있었다.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Kirchner대통령의 촉구로 사면법을 폐지했다. 살인적 억압을 자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소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267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들을 조심해, 네그리타. 그들에게 상처받을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이 동성과 관계한다는 말을 그에게 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라시엘라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희는 강간당했지만 부역자들이라고 비난받았어요. 마치 제가 아코스타의 여자 친구였던 것처럼요. 우리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죠. 아무도 저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어요."
‘30년에 걸친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사진가이자 기록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홀로 살았다. "친구 중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늘 불을 켜두고 잤지요."
결국 동료 한 사람이 실종자들에 대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ESMA에서 목격된 사람들의 명단을 만드는 수요 모임에 가보라고권유했다. "그 모임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늘 아팠어요." - P274

그때부터 엘레나에게 악몽이 시작됐다. 한때 라팜파에서 밀의여왕으로 뽑힐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엘레나는 수용소 사령관 두란 사엔스Durán Sáenz의 눈에 띄었다. 국경일이던 6월 20일 그는 그녀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강간했다. "그는 [이튿날 밤까지] 저를발가벗긴 채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고 그 침대에 묶어 놨어요."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임신 4개월째였고 눈으로도 분명 상태를 알 수 있었어요. 임신한 여자를 강간하다니 사디스트적인 짓이죠……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의 쾌락과 야만적인 의식 같은죄악에 이용되었어요."
"저는 두란 사엔스의 소유물이었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적절한 단어를 쓰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그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어요. 누군가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가 동의했다는 뜻이지요."
엘베수비오에서는 강간이 흔했다고 엘레나는 말했다. 그녀는또한 악명 높은 술꾼이자 호색한인 프랑코 루쿠 Franco Luque 중령에게도 강간당했다. 보초병들은 여성 수감자들의 몸을 자주 더듬었다.
그들은 기니피그 한 마리를 키웠는데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막대에묶은 다음 다리 사이에 그 기니피그를 집어놓곤 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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