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감시

최윤


아버지는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았던 바로 그 자세로, 등 없는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셨다. 마치 아나운서에게서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까지약간 숙이고, 응접실을 들어서는 나의 기척에도 반응 없이 앉아 계셨다. 프랑스인 아나운서가 프랑스어로 하는 뉴스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것이 분명함에도 넋을 잃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태도가 나와의 맞대면을 피하려는 위선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긴 주말이 시작되고있었다.
나는 목까지 칼칼하게 메어오는 야릇한 회한으로, 이미 흰머리가 온통 뒤덮인 아버지의 뒤통수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혁명 후 루마니아의 다각적인 변화의 전망을 분석하는 전문가의 격앙된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반복돼 그다지 새로울 것도없이, 몇 주일 만에 재빨리 구태의연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였다. - P155

벌써 수차 권했음에도 아버지는 소파를 마다하고 등 없는 의자를 고수함으로써 그러지 않아도 이리저리 부글거리는 내 심사에 불을 질렀다.
아버지가 중공에서 도착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써 심신이 지쳐버렸다. 아무리 밤이 늦도록 뒤척거리면서 아버지가 북쪽으로 사라져버리기 전의 기억을 회상하려 노력해보아야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어찌 태어나기 이개월 이전의 일을 기억하겠는가. 그러나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어머니가 해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아버지의 월북 이후 어머니를 비롯해 집안 식구들이 겪은 쓰라리고 모진 고생담을 마치 내가 스스로 겪은일인 것처럼 착각하는 버릇이 붙어 있었다. 이 막연한 이야기들이 내가주변을 사릴 만큼 컸을 때 드디어 생생한 현실이 되어 더욱 깊숙이 뇌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후부터, 나는 이 일종의 대리 경험의 무게에 눌려, 너무 일찍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사라졌건, 태어난 후에 사라졌건 그건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우리 같은경우에 처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런 종류의 아버지는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일상의 갈피에 끼어들게 마련이다. 내가 비관적일 때 나는 아버지를 모방하려 했고, 낙관적일 때는 열렬히 아버지를 거부했다. - P156

어머니의 연세는 잊어버리고 형제들은 내심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아버지의 재출현 탓으로 돌렸다. 그 내심은 슬픔이 복받치는 순간에 공공연히 발설되어 아버지는 단번에 어머니에게뿐 아니라 우리들에게까지도 파국만 몰고 오는 죽음의 사자로 단정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우리는 아버지를 잊었다.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큰형을대신해 아버지의 초청 절차를 맡은 내가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석 달이나 지나서였고, 그에 대해 아버지는 한참 동안 답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앞으로 쓴, 가위철학적이라고 할 만한 감동적인 어조로 저세상에서의 재회를 약속하는장문의 편지가 서울의 형과 내게 똑같이 도착했다. 아버지가 보낸 최초의 긴 편지였다. 이후 나는 이상하게도 어머니 생전 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답신은 다시 길어지지도 잦아지지도 않았다 - P159

이윽고 여행객들 틈에서 구식 양복에 군청색 솜 외투를 걸치고 귀밑머리를 바짝 깎아 더욱 뾰족해 보이는 얼글을 꼿꼿이 쳐들고 걸어나오는 노인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국제공항을 채운 수많은 환영객의 시전도 잊고 나는 그때 당장에는 난생처음 보다시피 한 노인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 그 자리에서 한바탕 대성통곡을 했다. 뿌리깊은 통한과 원망이 뒤섞인 통곡임에 틀림없었으나, 그것은 아버지를 되찾은 데서 오는 감격이나 본능적인 부자지정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는 이년 이상이나 질질 끌어온 아버지의 여행 초청 문제가 거의 해결되었을 무렵, 그토록 바라던 남편과의 재회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온 까닭이었다. 유복자나 다름없는 나의 출생부터 시작해 늦게까지 독신으로 있는 나의 처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당신의 불찰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각별히 안쓰러워하시며 막내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불편한 말년을 보내시다 끝내는 돌아가시고 만 어머니를 부르며 나는 바짝 마른 노인의 협소한 품안에서 헛몸부림을 쳐댔다.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무리 ‘어머니이‘를 외쳐대고 얼굴을 비벼대보아야 척 와붙지 않는 껄껄하고 스산한 감촉이었다. 쭈글쭈글 주름으로 늘어진 눈꺼풀이 열리고 백태가 한 귀퉁이를 덮기 시작한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리고 또 그려낸 신화 속의 젊은 이하운의 모습을 지워버리는 처참한 눈물이었고,
나는 잠시 어머니가 이런 모습의 아버지를 맞대면하지 않고 눈을 감으신 것이 어머니의 의도적인 결단이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 P163

"... 그러나 네가 어찌 들을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느 누구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빌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니라. 너희 세 형제와 네어미가 내 월북 이후 겪은 수모를 내가 상상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에대해서는 나로서도 할말이 없다. 그러나 너도 이제 세상이 뭔지 알 만한나이에 이르렀으니 얘기한다만, 그 수모의 책임 소재지를 나 한 개인에게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 물론 나는 아비 없이 성장한 경제적이고 심리적인 수모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땅에는없는 네 어미는 알고 있겠다만, 나는 합의하에 내 뜻을 따라, 내 처지의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다시 데리러 올 것을 약속하고 북으로 갔다. 모든일에 어찌 갈등이 없었겠고 철없는 두 아들에, 특히 만삭을 바라보는 아내를 두고 떠나는 심경에 어찌 마음의 찢김이 없었겠느냐. 그러나 뜻없이 건성으로 사는 일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내게는 가장 큰 부끄러움이니 어찌하랴. 용서할 거리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아비는 잘 알고 있다." - P179

아버지의 말씀은 점점 더 내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아버지에 대한 의심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삼년가량이나 기다리면서 아버지가 내게 보일 수 있는 모든 태도를 상상하고 또 상상해본 나였지만 지금 아버지가 펼치고 있는 종류의 말은 너무 뜻밖이어서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아버지 사고의 끄트머리를 따라잡느라 지독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생을 망령에 시달려온우리 가족에 대한 모욕 같기도 하고,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 어느쪽에 발을 디뎌야 할지 곤란한 말씀이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것은 ㅡ내게는 부당하게만 보이는ㅡ 아버지의 당당함이었다.  - P179

"조금 남았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십여 년 전의 어느 
여름, 친구들과 어울려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한 장면이 기이한 선명함으로 다가왔다. 그때도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유학생은 파리 관광안내서에 따라 이곳에 왔고 역시 안내서에 씌어 있는 대로 파리코뮌의 막바지에 이곳에 스며든 국민병을 정부군이 생포 사살해 그 자리에 묻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장소가 된 그 장식 없는 벽 근처로 다가갔었다. 다른 친구들은 꽃다발 하나로 조촐하게 남아 있는 흔적 없는 벽을 기억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되살아오는 우울하고도 적막한 기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가 그 벽 바로 앞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 막 사진을 찍고 났는데 검정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상고머리를 깎은, 비슷한 외양의 세명의 동양인이 그 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 중의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이곳이 불란서코뮌 당시 147명의 위대한 인민혁명 전사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무참히 사살된 역사적인 장소니 동무들 잘 봐두라우."
엉뚱한 장소에서 모국어를 듣는 순간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그늘에앉아 지친 다리를 쉬고 있었던 우리들은 제각기 자신도 모르게 폈던 다리를 모아들였다. 그러고는 그 특이한 사투리와 용어로 우리말을 주고 - P188

받은 사람들을 기이한 동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막 유학생활을 시작한 우리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게 된 북한 사람들이었다. 옆에 있던 유학생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느 누구도 그들 앞에서 입을 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일종의 방어심리와 호기심이 뒤섞인 모호한 표정을 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이 불편한 장면이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에 되살아나는 것은 그 순간 내가 바로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 또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감히 말을 걸거나 다가간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을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미친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더더욱 위축된 채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빨리 설명을 좀 마치고 가버렸으면 하는 마음과 우리들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좀더 머물러 더 떠들어주었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에 묻어오던 그 어색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얼굴 위에서 환각처럼, 기억에도 없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 P189

나는 한바탕 들이닥치는 바람에 오버의 깃을 올릴 생각도 잊고 칠십대의 노인답지 않은 빠른 걸음으로 저만큼 앞서가시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십여 년 전 그 불편하던여름날 이곳에서 아버지 생각을 한 이후부터 줄곧, 행여 아버지를 만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감정의 착각에 사로잡혀 나는 뛰다시피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추우신지 바람에 온통 붉어지기까지 한 얼굴을 돌리시며 아버지께서 다시 물으셨다.
"거참 바람 한번 극성스럽구나. 아직도 멀었냐?"
나는 길 저쪽 끝에서부터 또 한차례 몰려오는 바람을 막을 양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대답했다.
"이젠 거진 다 왔습니다. 아버지." - P190

최윤이 이 단편을 발표하던 1990년 10월은 유럽의 세계사적 변화가절정에 올랐을 때였다. 나는 이 무렵에 베를린의 변화와 통일의 과정을목격했으며 한국 신문에서 여러 갈래의 논쟁이 어지럽게 진행되는 것을 희극처럼 멀리서 바라보았다. 좀 과장된 선배들의 전향 몸짓이 있는가 하면, 이런 변화가 보다 차원 높은 사회주의적 새로운 단계를 위한것이라는 자위적이고 비현실적인 후배들의 교조주의가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평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옆자리에 앉았던 잘생긴 북한 외교관이 순회대사로 아프리카에 간다면서 줄줄이 무너져가던 수교국에서어떻게 밀린 돈과 식량을 받아낼지 걱정하던 모습도 목격했다. 북에서는 그맘때에 굶주림이 시작되었고 광범위한 아사를 불러온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 P196

내가 앞서 다룬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남성 작가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 바로 최윤의 「아버지 감시」다. 어째서 작가는 제목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을 ‘감시‘라고 왜곡시켜 말하는지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단편이 단순하게 이산이라든가, 화해라든가, 무슨 분단 극복이라든가 하는 화두로 시작하는 게 아님을 제목에서 읽을 수 있다. 남과 북의 개인이 만나는 것은 모두 ‘감시와 첩보전‘의 대상이며, 이는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든 코리안의 자의식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망령인 것이다.
가장이 떠나고 원한과 그리움의 복잡한 갈등 속에 있는 어미와 아들들의 내면을 이렇듯 실감나게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 드물고, 아버지와 - P196

아들이 외국에서 만나 한집에서 보내는 며칠이 이렇게 긴장 속에서 밀도 있게 묘사된 것에 나는 놀랐다. 1980년대 전반을 프랑스에서 유학생활로 보내면서 자연스레 ‘한반도에 대한 거리감‘을 갖게 된 작가의 노련한 처리라고나 할까. 이 상징적인 부자의 만남을 통해 작가는 세계 속에서의 분단을 바로 세계사적 변화의 와중에서 능숙하게 포착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탈한 자가 으레 그러듯이 북을 비난하지 않고 젊은 날 이념에 사로잡혀서 갔던 그 길을 개인으로서 견지해가는 의연한 ‘위엄‘을 보인다. 그리고 각기 다른 세계의 삶을 살았던 부자는 화해가 아닌 ‘이해의 길‘로 페르 라셰즈 묘지를 안내하며 따라간다.
나는 최윤의 이 소설에서 경계에 설 수밖에 없는 한 개인으로서의 망명자의 운명을 엿본다. 온전히 바라보는 한반도란 바로 남도 북도 아닌곳에 서 있는 자의 시선이라야 가능하다. 그것이 나의 ‘자기 연민‘을 자극했고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오윤의 판화 <애비>가 생각난다. 아비가 아들의 어깨를 짚고 온 길을 되돌아보던 화면의 불안한 여백 저쪽이. 그리고 문득 ‘무하마드 깐수‘ 정수일의 ‘실크로드‘가 떠오른다. 그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던 만공滿空의 탁본 글씨 ‘世界一花‘도 생각난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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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 이십 년
-1974년 봄, 또는 1973년 겨울

이인성


그때 그가 돌아오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그가 여전히 돌아가려 했던 곳은 어디인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절실함, 그는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문 춘천을 떠나 돌아오기 위해 서울행 직행버스에 앉아 있었다. 탑승대 옆 벽시계의 커다란 분침이 뚝 일 분을 건너뛰어 네시 사십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움직이기시작했고, 그는 또 뜻 모를 조바심을 느꼈다. 종합 정류장을 빠져나온버스는 왼쪽으로 방향을 꺾더니 곧 나타난 다리 위로 올라섰다. 다리 아래로, 반쯤 얼어붙은 너른 물폭의 공지천이 길게 내려다보였다. 깨끗하게 기슭을 다듬은 강둑 가까이 보트 한 척이 얼음 속에 갇혀 있었고, 그안에 두터운 파카옷을 껴입은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헛되이 얼음을 저어 나가려는 것일까? 그 장면을 바라보며 불현듯 꿈터오는 그의상상 속에서, 남자가 말했다. 사랑해.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가피식 대꾸했다. 안 믿어. 순간, 그의 두 손이, 가슴 밑으로 한낱 바늘처럼 날카롭게 관통해들어오는 통증을 움켜잡았다. - P97

헤아릴 수도 없는 작은 소리의 응어리들이 방안에 투영된 창문 앞의 사철나무를 두드린다. 소리는 나무를 물들이고, 불빛은 물기 속에 스며 나무를 드리우고 있다. 그 불빛들은 여기저기 가지의 끝에서나 잎새의 끝에서 다시 뚝 뚝 뚝 떨어져내린다. 방안 창 밑의 깊은 어둠 속으로 불빛들이 스러질 때, 어둠의 우물안에서는 설핏 빛의 소리들이 울려나온다. 창문을 열고, 나는, 그 깊은깊이를 향하여 몸을 기울인다. - P147

나는 물론 이 소설의 이야기꾼이지만, 이 소설에선 이야기꾼으로서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본문 안에서도 여전히 이 책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이름의 존재와 동일한 이인성이고자 하는 것이다. (…) 작가와는 다른 이름으로 무수히 가능한 다른 이야기꾼들이란, 새로운 두께로 겹쳐져, 나로 하여금 바로 나와 또하나의 나사이를 오가게 하는, 그 사이 속에 개입해 들어오는 타인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 이름과 함께, 그는 나를 벗어나 독자적인 주체이자 대상이 될 테지. 나로부터의 분열이든 확산이든, 그때 하나의실체인 그는 이미 그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나는 그를 고스란히나 자신으로 품고 싶다. 원심력의 욕구를 가지고 나로부터 떨어져나가려는 한 의식의 반대편으로 일종의 구심력을 작용시키며, 내가 팽팽하게 둥근 하나의 폭으로 열리도록. (이인성, 「문학에 대한 짧은 생각들) - P154

열거한 기억들이 순서대로 나온다면 독자가 읽기에 얼마나 편하겠는가마는, 마치 손가락 깍지를 마주 끼듯이, 아니 손가락이라기보다는 실뜨기를 하듯이 기억들이 얽혀 있다. 그러고는 이러한 모든 기억의 서사가 끝나고 글쓰는자인 ‘나‘가 나타나 그 드러냄을 위해서 이 대목이 있는 것처럼, 비 내리는 이른 여름 밤의 빗소리를 전한다. 그것도 현재의회상 시점을 밝히려는 목적인 것 같다.
이들 젊은 날의 자잘한 상처를 짚어나가는 잡다한 편린들은 엄살을부리거나 심각하지도 않고, 그맘 때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시시껄렁하게 드러낼지언정 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켜보는 나는 안쓰럽고 어딘가 아프게 느낀다. 도와줄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고 그냥 등뒤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남들도 내게 그러했으리라. ‘한국문학은 1974년에 스물서너 살이 된 한 상처받은 젊은이의 전형적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김현은 쓰면서 그 모습이 성숙하다고 덧붙인다.
심야 공항의 환승구역을 서성대는 여행자가 떠오른다. 그는 불 꺼진쇼윈도 위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지나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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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유리창문을 닫으며


한때 학교가 구질구질했었다.
학교 일이란게
온통 치사하고, 쫀쫀하고, 유치하게 여겨졌고
교문 바깥에
더 중요한 일, 더 보람 있는 일,
더 멋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학교 밖을 맴돌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학교 식당에서
몇 백 명도 넘는 놈들
시간 안에 모두 밥 먹여보려고
열심히 줄 세우고 있다.
급식도우미들에게
예쁘고 눈에 띄는 패찰 어떻게 만들어줄까
고민하고 있다.
나 오늘 복도 유리창 문을 닫고 있다. - P26

선생 되고 나서 처음인가
아이들 모두 돌아간 후
어둔 복도 유리창 문을 닫아본 일
목련꽃 흐드러진 봄날이
흘러가고 있다.
내 생애가 흘러가고 있다. - P27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그 시절 생각나
얼굴 화끈 달아오른다
대학시절
안으로 문 걸어 잠그고
못까지 꽝꽝박고
플래카드 내걸고
단식 농성했던 본관 201강의실
그때 처음 들었던 이성부의 ‘벼‘,
난 물 한잔에
소금 몇 조각 함께 집어먹으면서
선배가 읽어준 이성부의 ‘벼‘를 처음 알았는데
이제 아이들에게 이성부의 ‘벼‘를 다시 가르치면서
그 시절 되돌아보니
참 부끄러워라
생각해보면 ‘전두환 물러가라, - P38

또는 ‘비상계엄 해제하라‘도 아니고
고작 ‘어용, 무능 교수 물러가라‘로
어쨌든 나를 가르치던 교수들 쫓아내는 일로
문 걸어 잠그고, 밥까지 굶을 일이었을까?
그리고 더욱 부끄러워라
난 그나마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맨 먼저 창문 밖으로 업혀 나와서는
앰뷸런스에 실려가 링거까지 맞았으니
내 젊은 시절 돌이켜보면
모두 부끄러운 일 뿐
세상 고통 혼자 다 짊어진 척
언제나 오만상을 찌푸리고
머리는 어깨까지 덮는 장발에
그나마 잘 감지도 않고
못 먹고 안 먹어 피골이 상접한 채
군대도 거부당할 정도의 몸무게로 - P39

제민천, 시내 삼거리 정자, 순두부집,
중동칼국수, 보문 칼국수, 부흥루,
가는 곳마다 오바이트를 해놓고
세상 걱정 혼자 다하는 척했던
그러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맸던 내 젊은 날
생각해보면 혹시 나야말로 무능 학생 아니었을까?
하기야 나
이성부의 ‘벼‘를 가르치는 지금
내 젊은 날보다
단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 P40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자전거를 타니
차타고 다녔을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차타고 다녔을땐 절대 볼 수 없었던
사물들이 보인다.
부평공원으로 들어가 잠시 달리다
백화점 주차장을 거쳐
내가 다니던 부평서초등학교 앞도 지나
가끔씩 슬쩍 차도로 내려서기도 하면서
용갈비 앞을 지나
안쓰러운 재수생들 드나드는 청솔학원 앞으로 해서
학교에 간다
퇴근길에는 부평 농협에 들러 돈도 찾고,
부평역 근처에 있는 니콘카메라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디카수리도 맡긴다.
사위가 어두워진 날은 번쩍번쩍 경광등을 앞뒤로 달고
집으로 온다 - P93

이른 아침에 삽상한 바람을 맞으며,
FM 라디오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자전거로 출근하는 재미가 쏠쏠해
적당히 땀 흘리며
자전거로 퇴근하는 재미가 참 쏠쏠해
세상에 잠시 눈감고
그래,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북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 P94

겨울, 도봉


이십일년만의 겨울추위가 찾아온 날
난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겨울, 도봉은
비늘눈이 바람에 흩날려
온통 은빛으로 아름다웠으나
내가 겨울, 도봉에 오른 건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므로
눈꽃 피운 나무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도봉을 내려가면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을 것인가
도봉을 내려가면 - P95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싹을 틔우기 위해
100년 동안 기다리는 씨앗도 있는데
아난 고작 몇 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 P96

광덕산의 진달래


어찌하다 온통 키 큰 나무들 사이에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금이라도 햇볕을 쬐기 위해
키는 크게
잎은 작게
색깔은 여리게
자신의 몸뚱이를 처절하게 바꾸어버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광덕산의 진달래 - P97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는 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내 안에 더 집어넣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내려놓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더 갖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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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변하셨어요.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분이 자주 우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얼른 고개를 돌리지요. 가장 많이 고갤 돌려야 하는 상대가 나랍니다. 다른 가족들이 직장일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 바쁜 탓으로 아무래도 아버지 곁에 자주 있게되는 사람은 단출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울 적이면 나는 그저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거나, 괜히 소형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거나 그럽니다. 우는 사람 곁에 있기는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힘이들지요. 더구나 우는 사람이 아버지이다보니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아버지의 눈물을 보건마는 그때마다 매번 당혹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내가 허둥거리면 아버지는 이제는 주무시는 척하십니다. 얕게 콧소리조차 내시지요. 방금 울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세잠이 들겠는가만 나는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걸 잘 안다는 듯이 조심조심하는 태가 역력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가만히 여닫고서 병실 바깥으로 나오곤 합니다. - P19

남동생의 종아리를 쪼아서 피를 내곤 하던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큰오빠에게 먹일 오리의 생피를 얻기 위해 희뿌연 새벽에 오리 정수리에 칼을 내리치던 모습도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3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호점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 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먼산은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층층 매사니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 물이 주루루루루루루 저 골 물이 퀄퀄 열의 열두 골 물이 한테로 합수처 천방져 지방져 월턱져 구부져 방울이 버큼져 건넌 병풍석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 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아버지의 탄력 있는 젊은 목에서뿜어올려지던 그 소리들, 부친이 당신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리를 누르고 이 누추한 삶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쑥쑥 발목이 굵어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낡은 가죽 북을 선반에 올려놓았던 건 자식들 앞에선 오로지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겠지요. 그럴 적마저도 탄탄했던 부친의 어깨였는데,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겁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 하시면서요. - P20

칠 년 전이면 오빠가 지금의 제 나이였네요.
어쩌면 그때 그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요? 삶이 가져다주는 것 중엔 우리가물리쳐볼 수 없는 절대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그도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질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눈물이 고이는까닭도 그것일까요? 혹시 오빤 그때 중환자실의 아버질 두고서 옛날의아버지, 그의 종아리에 그토록 모진 회초리질을 하던 부친의 건강한 팔뚝을 그리워한 건 아니었을지요. 생각해보면 부친과 늘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십수 년 전에 이 도시로 떠나온 후론 아버진 시골에 우린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슨 상징처럼요. 언제나 그곳에 계시는 분이었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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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작고한 출판인 나병식이 지하출판으로 이만 부를 찍어 사방에 뿌리고는검거되었고, 나도 서로 말을 맞추고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달쯤 도망다니다가 검거되었다. 그이는 경찰이 운암동 집을 수색하기 직전에 그동안 모아둔 항쟁 자료들을 마당의 창고 슬레이트 지붕 아래 숨겼는데, 방마다 뒤지고 화단까지 파헤쳤지만 다행히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는데, 나병식과 나를 정식으로 구속하지 않고 ‘유언비어 유포죄‘ 정도의 경범죄로 다루더니, 마침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삼세계 문화제‘에 초청받은 나에게 외유하라며 일 년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올라온 아내와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를 사고 밥 한끼 먹고는 공항으로 나갔다.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간나는 망명자 윤한봉과 실로 오 년 만에 상봉했다. 그와 함께 미주 한국청년연합과 재미 한국동포를 조직하기 위하여 13개 도시를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동포 원로들에게 그를 보증해주었다. 미국에서 문화패 ‘비나리‘를 만들고 ‘통일‘을 순회공연했으며, 도쿄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안내로 조성우를 비롯하여 교포 이삼세 청년들과 함께 같은 작업을했다. 그후 우리문화연구소와 문화패 ‘한우리‘를 조직하여 교토와 오사카에 지부를 두었고, 내가 귀국한 것은 일년 만인 1986년 5월 말경이었다. 다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행적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은 면했다. - P88

처음에는 광주를 떠나려고 운암동의 집을 내놓고 둘이서 서울과 수원 등지에 집을 보러 다닌 적도 있었다. 나는 1984년에 장길산을 끝내고는 정말로 광주를 떠나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는 당대에 대한 역사적 책무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창작하는 자로서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사회의 온갖 제약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말 그대로 ‘창작의 자유‘
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광주항쟁을 소설로 쓸 생각은 없었다. 누가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을 소설로 쓰는가. 그 모두가 역사기록과 르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만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쓸 수 없는 것‘과 ‘쓸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자유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한다. 나에게는 세상이 온통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든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 이라든가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동어반복이며 억압이었다. - P89

우리는 너무 현실 자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었고 그 불에 데었다. 나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생생한 기억들과 더불어 여전히 ‘도청‘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아마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앓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이 사라진 빈집을 지키면서 적막 한가운데서 문득 그이가내린 생의 결단이 아니었을까.
그이는 ‘평온‘을 말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무싯날 같은 그런 나날, 그이의 집요한 요구와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법원에 갔고 나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와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얼마 뒤에 그이가 꾸려서 보낸 책이며 물건들을 트럭에 싣고 화가 홍성 - P89

담이 내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가 그냥 예전처럼 작업실을 따로 쓰는 줄 알고 있다가, ‘아마 그 사람은 나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헤어지면서 나를 붙들고 울었다.
어쨌든 나는 1980년에서 1990년대 말까지 국내외에서 소설은 쓰지않고 광주에서 비롯된 ‘사회봉사‘에 바쳤으니 그냥 이름과 몸으로 때운셈이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깊은 회한이 오래갔다. 나의 갑작스런 방북은 ‘무산‘을 뛰어넘으려는 것이기도 했고 그것들의 연원인 분단이라든가, 빨갱이라든가, 사상이라든가 하는 억압을 벗어버리는 어떤 ‘글쓰기의 자유‘를 확보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뒷날 그이가 나를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고 김지하 부인은 내게 전했다. 그후 나는 다른 이와 덧없는살림을 차렸고(이 또한 길게 가지는 못했다), 막내 호섭이가 태어나자마자 방북과 망명생활이 이어졌다. - P90

베를린이나 뉴욕에서 뭔가 어려운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나는 그래도 그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이는 언제나 사려 깊은 대답을 해주었고,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내생각을 잘 아는 동지이기도 했다. 장남 호준이가 ‘전교조 교사들에 호응하여 ‘전고협‘을 조직했다가 구속되고 고등학교를 퇴학 맞았을 때 처음으로 그이는 전화기 너머로 울음소리를 냈다. 당시에 독일 정부와 협의하여 호준이를 초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출국시켜주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와 교도소에 있을 때 그이는 나와 이혼한 처지라 직계가족인 호준이를 앞세워 오 년 동안 나의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석방되어나온 뒤에 아들과 만나서 ‘돌아가도 되겠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게 대답이 없더니 뒤늦게 말했다. "아버지 글쓰실 때의 긴장을 이제는 어머니가 같이 견디지 못하시겠답니다. 편하게 사시도록 놔두세요." 딸은 언젠가 말했다. 지금도 엄마는 꿈에 허둥지둥한다 - P90

고, 밥상 위의 반찬들이 모두 흙이나 재로 변하거나 손님은 잔뜩 왔는데빈 그릇뿐이어서 나의 성난 얼굴을 피하다 잠이 깬다고도 했다. 이게 내가 그이에게 저질렀던 짓들이다. 그이는 언제나 오고가는 사람들에게따뜻한 밥을 해주었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되었고 보통 때도 늘서너 명의 식객이 끊이질 않았다.
어찌 그 모든 것들을 글과 말로 할 수 있으랴. 이 역시 나로서는 소설로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1

홍희담의 「깃발」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것은 1988년 봄이었고 이는 한 해 전에 양김의 분열에 의하여 대선에 실패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직후였다. "5월은 뭔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여전히 벌떡이고 불끈거린다. 아마도 5월 넋이 아직 잠들지 못했나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와 신경증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내뿜는 괴이한 힘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갑자기 자다 벌떡 일어나 밤을 새우며 미치도록 뭔가를 쓰게 만드는....... 그것이 「깃발」이다"라고 그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참에 「깃발」에서 시작하여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문밖에서」 「김치를 담그며, 그리고 중편소설 「이제금 저 달이」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번 읽었다. 마치 퇴색한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다. 마치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시기의 젊은이들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었다. 나는 홍희담의 성정과 말투와 느낌의 결을 알고 있는데다가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까지도 현실 속의 누구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세월을 잘 아는 나로서는 어쩌면 객관적인 견해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 - P91

같다. 나는 그야말로 ‘5월문학의 깃발처럼 뚜렷한 「깃발」을 여기서 언급하려 하면서도 사실은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와 「김치를 담그며」에더욱 애착이 간다. 선연한 색으로 나부끼는 「깃발」의 너무도 뚜렷한 투쟁적 계급성보다는 다른 두 작품에 드러난 항쟁 이후의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일상의 여성성이 더욱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도 「깃발」이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나는 이 모든 중단편들을 ‘광주 연작‘으로 보고 연이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92

「깃발」은 방직공장 여공인 순분과 형자가 중심화자로 5.18 이후 도청에 이르기까지 열흘 동안의 일을 다큐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여공들은 미숙, 영순, 철순 등과 함께 공장에 다니면서 야학에 함께 동참한 동료들이다. 이들은 시내 각처에서 공수부대의 시민 학살과 항쟁의 과정이며 무장시민군의 등장에서 수습위원회의 강온 대립과 도청에서의 최후의 항쟁 등을 각자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지도해주기를 바라던 이들은 야학의 강학이며 운동권 청년인 윤강일 같은 지식인들이었건만, 윤강일은 시위가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 동참했다가총격전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도청에서 항쟁하다 산화하는 여성노동자 형자의 자각의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혁명의 사상을 지녔고, 전사였고, 선진적이었다. 그들이 보통 말하는 무장투쟁, 시가전 등등이 형자의 일상생활을 파고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은 윤강일의 도피로 이미 맛보았지만 역시 지금도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다. (...) - P92

꼬부라져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지식도 없고, 이론도 없고, 운동 논리도 없는 저들은 왜 도청에 들어왔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자부했으나, 지식인을 향한 신뢰의 부분만큼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을 깊이 자책한다. 그녀는 지금 관통한다. 그녀는 바로 그들이었다. 거기에 잠깐 지식인이 끼어들었던 것이며 그것은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이번 항쟁으로 그녀는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 P93

학생들과 지방 향신층 등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의 요청을 받아 ‘무기 반납‘을 추진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도시 하층민, 서비스업 종사자 등 이른바 ‘룸펜프로‘ 계층과 노동자들은 뚜렷한 이론도 없이 총기 반납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민들의 죽음을 더욱 짓밟고 모독하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었다. 몇몇 운동권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이들에 합세하여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도청 사수를 주장하게 된다. ‘지든 이기든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지키다가 끝을내야만 항쟁이 완성되며, 그것만이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홀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이들은 온건파인 전자에 비교하여 강경파로 기억된다. 형자는 말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거야."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 P93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날 밤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었다. 항쟁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서 사망자는 제외하고 부상자와 구속자만을놓고 따져보았는데도 칠팔십 퍼센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원, 세차공, 식당 배달원, 무직, 외판원, 타일공, 양복공, 세탁공, 청소부, 노점상, 점원, 가난한 주부, 운전수, 보일러공, 소상인, 막노동꾼, 고물상, 행상, 용접공, 자개공, 목공, 구두닦이. - P94

도피하고 다니던 윤강일이 돌아왔을 때 예전 여공 제자들은 여전히 품이 넓고 따뜻했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여긴 사람도 없고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그가 말하자 철순이가 말한다. 사람이 없다니요? 쓸 만한 사람들은 다들 감옥에 갔거나 잠수탔거나 죽었잖아? 죽은 사람은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상원이가 죽었잖아? 순분이 말한다. 그 외에 어떤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세요?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 그제야 이름 없이 죽은 형자의 죽음을 순분이 말해준다. 죽었다구? 언제 어디서? 마지막 날 도청에서요. 시체는 찾았니? 못 찾았어요. 여공들은 잠든 수배자를 위하여 그의 아침 준비를 해놓고 제각기 돈을 털어 봉투에 넣어두고 출근한다. 안개 낀 이른 아침, 자전거를타고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길을 메운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 - P94

히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데가 점점 크게 드러나기 시작한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체제를 ‘87체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가장 큰 약점으로 진작부터 광주에서 드러났음에도 1987년 6월항쟁을겪으면서 ‘7월 8월 노동자 투쟁‘과 만나지 못했던 정치적·제도적 한계를 표현하는 용어다. 이 소설의 계급성 당파성이 교과서적인 면이 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재 군부에 의한 학살과 항쟁이라는 모순이 증폭된 상황에서 사회적 조건이 명료하게 드러난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소 거칠고 관념적인 곳은 있으되, 우리가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적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를 이 소설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 P95

그이가 소설가 남편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1976년 서른두살이었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04년 예순 살이었으니 광주에서 그이는 한평생을 보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셈이었고, 내가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과 대면하고 세계를 겪어가는 동안 그이는 ‘빈터‘에 남아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남겨진 이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뒷마무리까지 해냈다. 이것이 내가 문학과 인생에서 놓친 부분이며 그이가 채워놓은 부분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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