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유리창문을 닫으며
한때 학교가 구질구질했었다. 학교 일이란게 온통 치사하고, 쫀쫀하고, 유치하게 여겨졌고 교문 바깥에 더 중요한 일, 더 보람 있는 일, 더 멋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학교 밖을 맴돌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학교 식당에서 몇 백 명도 넘는 놈들 시간 안에 모두 밥 먹여보려고 열심히 줄 세우고 있다. 급식도우미들에게 예쁘고 눈에 띄는 패찰 어떻게 만들어줄까 고민하고 있다. 나 오늘 복도 유리창 문을 닫고 있다. - P26
선생 되고 나서 처음인가 아이들 모두 돌아간 후 어둔 복도 유리창 문을 닫아본 일 목련꽃 흐드러진 봄날이 흘러가고 있다. 내 생애가 흘러가고 있다. - P27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이성부의 ‘벼‘를 가르칠 때마다 그 시절 생각나 얼굴 화끈 달아오른다 대학시절 안으로 문 걸어 잠그고 못까지 꽝꽝박고 플래카드 내걸고 단식 농성했던 본관 201강의실 그때 처음 들었던 이성부의 ‘벼‘, 난 물 한잔에 소금 몇 조각 함께 집어먹으면서 선배가 읽어준 이성부의 ‘벼‘를 처음 알았는데 이제 아이들에게 이성부의 ‘벼‘를 다시 가르치면서 그 시절 되돌아보니 참 부끄러워라 생각해보면 ‘전두환 물러가라, - P38
또는 ‘비상계엄 해제하라‘도 아니고 고작 ‘어용, 무능 교수 물러가라‘로 어쨌든 나를 가르치던 교수들 쫓아내는 일로 문 걸어 잠그고, 밥까지 굶을 일이었을까? 그리고 더욱 부끄러워라 난 그나마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맨 먼저 창문 밖으로 업혀 나와서는 앰뷸런스에 실려가 링거까지 맞았으니 내 젊은 시절 돌이켜보면 모두 부끄러운 일 뿐 세상 고통 혼자 다 짊어진 척 언제나 오만상을 찌푸리고 머리는 어깨까지 덮는 장발에 그나마 잘 감지도 않고 못 먹고 안 먹어 피골이 상접한 채 군대도 거부당할 정도의 몸무게로 - P39
제민천, 시내 삼거리 정자, 순두부집, 중동칼국수, 보문 칼국수, 부흥루, 가는 곳마다 오바이트를 해놓고 세상 걱정 혼자 다하는 척했던 그러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맸던 내 젊은 날 생각해보면 혹시 나야말로 무능 학생 아니었을까? 하기야 나 이성부의 ‘벼‘를 가르치는 지금 내 젊은 날보다 단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 P40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자전거를 타니 차타고 다녔을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차타고 다녔을땐 절대 볼 수 없었던 사물들이 보인다. 부평공원으로 들어가 잠시 달리다 백화점 주차장을 거쳐 내가 다니던 부평서초등학교 앞도 지나 가끔씩 슬쩍 차도로 내려서기도 하면서 용갈비 앞을 지나 안쓰러운 재수생들 드나드는 청솔학원 앞으로 해서 학교에 간다 퇴근길에는 부평 농협에 들러 돈도 찾고, 부평역 근처에 있는 니콘카메라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디카수리도 맡긴다. 사위가 어두워진 날은 번쩍번쩍 경광등을 앞뒤로 달고 집으로 온다 - P93
이른 아침에 삽상한 바람을 맞으며, FM 라디오로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자전거로 출근하는 재미가 쏠쏠해 적당히 땀 흘리며 자전거로 퇴근하는 재미가 참 쏠쏠해 세상에 잠시 눈감고 그래, 이렇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 북이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 P94
겨울, 도봉
이십일년만의 겨울추위가 찾아온 날 난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겨울, 도봉은 비늘눈이 바람에 흩날려 온통 은빛으로 아름다웠으나 내가 겨울, 도봉에 오른 건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므로 눈꽃 피운 나무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도봉을 내려가면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을 것인가 도봉을 내려가면 - P95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싹을 틔우기 위해 100년 동안 기다리는 씨앗도 있는데 아난 고작 몇 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내려가는 길을 배우기 위해 도봉에 올랐다 - P96
광덕산의 진달래
어찌하다 온통 키 큰 나무들 사이에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금이라도 햇볕을 쬐기 위해 키는 크게 잎은 작게 색깔은 여리게 자신의 몸뚱이를 처절하게 바꾸어버린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광덕산의 진달래 - P97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우는 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내 안에 더 집어넣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내려놓기 위해 읽어야 할 반야심경을 더 갖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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