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산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

먼 산 가차운 산
무더기째 가슴을 포개고 앉은
무심한 산만큼도 벗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승사람일 적
우리만큼 미련퉁이였을
그가요 살아 세운 허술한
집에서 여즉
그와 삶을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요
점심밥만큼 서늘한 설움이
장한 바람에 키를 낮추는데 - P15

낫을 겨누어 베허버리는 건
누워 앉은 무덤입니다. - P16

신원경


산소에 갈 때마다 저 둥근 무덤 속에 친밀한 육체가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몸이 흙을 껴안고, 시간과 함께 서서히 허물어져 마침내 형체를 잃으며 우리를 떠난다는 것이. 그럼에도 우리는 무덤 속에 사랑하는 이가 잠들어 있기를 바란다. 그가 유독 좋아했던 사과 한 알을 들고 함께 나눠 마실 막걸리를 뿌린 뒤, 잠든 조카가 무사히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두 번씩 절을 올린다. 돗자리 위에서 우리는 슬픔과는 영무관한 이야기를 한다. 작년의 농담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자리를 턴다.
지난해에 가지치기했던 나무는 이전과 동일해져서 우리는 꼭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다. 산소에 다녀오면 큰아버지는 한동안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산 자의 몸에 붙어온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그 얼굴들을보고 온 날이면 무덤보다도 할 말 없는 사이가 친밀하지 않은 사이는 아니라고 이해한다. - P17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 P18

유계영


모든 존재의 고통이 ‘나‘의 고통 위로 쓰러지는 일.
이것이 시인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인간의 살해 역사가 ‘나‘의 전쟁이 아닐 리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리가 이미 죽은 자들의 고통에 휘말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허수경의 첫 시집은 먼데서 시작하는 듯 보이지만 시의 현장은 먼 데가 아니다. 시인은 죽은 존재들을 다시 낳고, 그들을 위해 쓸쓸한 밥상을 차리고, 사랑을 나누며, 그들의 고통과 회복에 현재 시제로 가담한다. 언제나 과거의 말단에 서 있는것. 시인의 시간만 그러하진 않을 것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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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내가 이 집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창밖의 초록을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이 집 말고 다른 집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날 날씨가 그렇게 화창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그날 공인중개사는 ‘이 집을 마음에 들어한 다른 부부가 오늘 오후 가계약 여부를 알려주기로 했다‘며 두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곤 ‘여기 집주인이 건물도 많고 신용이 확실한 분이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공인중개사 말이니까. 말 그대로국가가 인증한 사람이 보증하는 곳이니까 괜찮으리라 믿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호는 지금 내 옆에 있을 텐데,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한 번도입 밖에 내본 적은 없지만 지수는 수호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 집이 좋다고 한 사람도, 이 집에 살자고 한 사람도 자기였기 때문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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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을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 P175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희주도 그랬을까? 요즘 내가 느끼는 걸 희주도 체감할까?‘
부하 직원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거나 몸이 쇠해질 때마다 기태는 희주 생각이 났다. 이제 와 뭔가 의지하고 싶다거나 자기연민이 들어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쩐지 희주라면 이런 자신을판단하거나 혐오하기 이전에 이해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연애 시절 대화가 가장 잘 통했던 사람도 희주였고 살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도 희주였다. 그런데 우리는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희주의 안부가 궁금할 때 기태는 종종 차대표의 SNS 계정에 들어갔다. 게시물을 잘 올리지 않는희주에 비해 차대표는 자기 매체를 부지런히 운영하고 활용했다. 가끔은 차대표의 계정에서 희주의 소식을 더 자주 확인할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단둘일 때보다 여럿이 함께일 때가 많았지만 기태는 둘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운이랄까 성적 긴장이 신경쓰였다. 특히 희주 쪽에서 좀더 적극적이었는데, 아는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는 암시와 암호를 볼 때 그랬다.  - P176

나를 향해 활짝 열린 로버트의 동공을 보자 내 눈동자도 거기호응하듯 크게 벌어졌다. 실은 며칠 전 나는 화면 속 로버트의 얼굴을 보고 작게 동요했다. ‘저 남자, 날 감상하고 있어‘란 자각이 들어서였다. 로버트는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편에 속했는데도 그런 감정이 전해졌다. 동시에 ‘오랜만이다‘ 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담긴 호감과 호기심 그리고 성적 긴장을 마주하는 것은. 그런데 그게 전혀 느끼하거나부담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런가?
스스로를 의심했다. 헌수와 헤어진 뒤 누군가와 정신적으로도또 육체적으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인지, 성적 주체가 되는 기쁨인지, 성적 대상이 되는 설렘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섞인 총체적인 무엇일지 몰랐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대상과무관하게 외국어 수업에는 어느 정도 성애적인 측면이 있었 - P233

다. 일말의 더듬거림과 망설임, 지연과 기쁨, 찰나의 교감, 수치심과 답답함, 긴장과 해소,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 실수와용서 등이 그랬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응. 나 잘 지냈어. 당신은?
-나도.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더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그런데 한국어로 ‘안녕‘은 뭐라 그래?" 같은 말과 몇몇 감상을. 얼마 뒤 로버트는 그 큰 눈으로 화면 속 슬라이드 교재를 훑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 P234

별생각 없이 대꾸해놓고 방금 전 문장이 후 어떤 유혹처힘 들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내가 로버트의 시선을 의식해 생긴 긴장이었다. 에코스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신뢰와 유대가 쌓이는 경우는 흔했다. 나 또한 샌드라나 로즈와 겪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로버트로 바뀌자 그 공기가 좀 달라졌다. 어쩌면 온갖 풍부한 감정이 담긴 인간의 눈을 너무 오랜만에봐서 그런지 몰랐다. 뇌를 다쳐 일상적인 의사 표현이 어려웠던 내 어머니도 얼마간 나와 눈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그 안에는 어떤 미안함이나 고마움보다 의심과 비난이 자주아른거렸다. 음식. 그래. 엄마는 자기 음식을 제일 좋아했지. 다른 사람 칭찬은 잘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는 누굴 만나든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더불어 그걸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배역을 떠넘기는 데 능숙했다. 심지어 그게 딸이라 해도, 언젠가 헌수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엄마는 거의 재난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자기 딴에는 조실부모한 사람을 위로하려 한 말이었겠지만, 늘 그렇듯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감각에 몰두하는 거였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두 눈으로 내게 가장 많이 보낸 메시지는 ‘미안해‘도 ‘고마워‘도 아닌 ‘두려워......‘였지. - P235

일년 뒤 어머니마저 폐암 진단을 받는 바람에 오 년간 또 어머니를 간호해야 했다. 대학 시절을 포함해 거의 십 년가량을가족 간호로 보냈지만, 대학 졸업 즈음 어머니가 떠나고 졸지에 고아가 돼 병역을 면제받았다. 언젠가 침대에서 헌수는 "그십년 중 이 년 정도는 엄마가 나 빼준 거라 생각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헌수가 그런 농담을 하기까지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현수와 헤어지고, 육 인용 병실 보호자용 침대에 혼자덩그러니 누워 있을 때면 더러 헌수와 함께 <러브 허츠>를 듣던 아침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이모 이름을 보고 불길한 표정을 짓던 내 모습과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눈으로 지켜보던 현수 얼굴도. 그때만 해도 그게 우리 관계의파열음이 될 줄 몰랐는데. 이제 와 헌수 말을 빌리자면, 그런일은 ‘그냥‘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앞에서 매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까? 마치 살면서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사람들처럼. - P250

병실에서 혹은 쇠락한 고향 골목에서 홀로 어둠과 마주하며나는 종종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자꾸자꾸 잃는 과정에서,
물수건으로 엄마 뒤를 닦고 엄마 눈을 본 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던 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때, 그러지 못했으나 거의 그럴 뻔했던 때를 떠올렸다. 어려서부터 가족 간병을 경험한 헌수는 어쩌면 그게 뭔지 너무 잘 알아서, 그걸 다시 겪을엄두가 안 나서 나를 떠난 걸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 쪽에서 먼저 정중하게 도망친 거였지. 물론 칼같은 이별은 아니었고 그뒤 몇 번의 재회, 몇 번의 잠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먼저 안녕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제 다시는못 볼 사이가 됐다는 걸 알았다.  - P251

ㅡ.....
ㅡ나는 늘 부러웠거든 자기 부모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ㅡ......
현수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지만 아마 헌수 마음속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해선 안 되는말, 할 수 없는 말 등이 뒤엉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좋은부모‘나 ‘그렇지 않은 부모‘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지몰랐다. 마치 내가 나의 삶에 계속 놀라게 되면서부터 다른 사람 삶도 잘 판단 않게 된 것처럼. 당연한 얘기지만 긴 시간 엄마 옆에 머물며 내가 가장 그리워한 사람은 헌수였다. 나와 결혼할 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고독을 겪은 사람이라 그랬다. 헌수와 헤어지고 이 년 뒤 엄마 병실에서 쪽잠을자는데 만취한 헌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보호자용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고 슬며시 병원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동화에 집중했다. 헌수는내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다 엉뚱하게도 우리가 <러브 허츠>를 들은 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만약 지금 너를다시 만난다면 네가 틀렸다고, 이건 ‘안녕‘이 아니라 ‘암 영‘이라고 고쳐주는 대신 그래, 가만 들어보니 그렇게도 들리는것 같다고, 콘크리트 보도에 핀 민들레마냥 팝송 안에 작게 박 - P252

힌 한국어, 단순하고 오래된 ‘안녕‘이란 말이 참 예쁘고 서글프다 해줄 텐데"라며 작게 훌쩍였다. 그러곤 그런 스스로가 창피했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통화가 끝난 뒤에도 병실 복도에 한참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P253

나는 로버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력도 안 될뿐더러 지금 내 마음을 어색하게 번역했을 때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누락과 손실이, 하찮은 세부하나하나가 내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으로 느껴질것 같아서였다. 기쁨이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슬픔은 달랐다. 고통만큼은 내 슬픔의 언어, 감정의 뿌리, 모국어로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국어로 말한들 과연 그게 온전히 전해질까?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고작 이렇게 말했다. - P253

로버트의 순수하게 활짝 벌어진 동공을 보자 내가 생각보다 이 이별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그래서 그 일부를 한동안 내준 로버트가 필요 이상으로 소중하고 친밀하게 다가왔는지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캐나다에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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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네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평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지금보다 십오 분 더 멀어져서? 정말 그것 때문에? 순간 손에 쥔휴대전화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올 때 편의점에서 맥주 좀 사다줘.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정류장을 한 - P130

참지나 있었다. 내년 봄, 남편과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여기서 얼마나 더 멀어지는 걸까? 옮기시는 곳이 어디든 4월까지는 과외를 하겠다‘고 말해야 했던 게 아닐까? 내가 경제적으로가장 쪼들렸을 때조차 시우네만은 수업료를 안 올렸는데, 그때 그냥 오만원 더 올려 받을걸…… 누가 누굴 걱정한 거지? 나는 발길을 돌려 정류장으로 돌아갈지, 이대로 그냥 좀더 걸을지 고민했다. - P131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 P141

다시 어두워진 현관 한쪽에서 종이상자를 가만 내려다봤다. 집 우후, 집 주宙. 옛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큰 집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떤 존재들은 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못할까. 실은 돌아왔는데, 몇 번 돌아왔었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우리가 깜빡하고 닫아놓은 문만 한참 바라보다 떠난건 아닐까? ......사실 남편과 타임머신 대화를 나눴을 때 나는 남편이 우리만 아는 그때, 우리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어쩌면 나를 배려해 일부러 엉뚱한 소리를 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왠지 그게 순도 높은 진심 같아, 앞으로도 같은 답을 할 것 같아 가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그 낯선 당혹 앞에서 나는손에 쥔 책을 다시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할지 몰라 불 꺼진 현관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2021년 어느 가을밤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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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책길에서 혼자 해변에 서 있는 갈색 말을 만났을 때는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말은해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갈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검고 아름다운 눈은 깊이를 알 수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사로잡혔다. 난생처음 말을 ‘응시‘하면서 ‘경이‘를 느꼈다.
응시는 바라봄과 다르다. 정신과 시선을 하나의대상에게 집중하는 일, 내 앞의 대상에 대해 탐구하려는 태도, 감성과 이성을 동원해 의미를 알려는 시도다. 비인간을 응시하며 경이를 느끼는 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닐 테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 날개를 펼치고 유유히활강하는 독수리, 초원에 앉아 바람을 맞는 여우를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경이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경이는 신비화와 다르다. 모르는 대상을 모르는채로 남겨두는 것이 신비화라면 경이는 지적 충동과 관련된 언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대상에깊은 첫인상을 받아, 그 인상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파악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경이라고 했다. 경이는 경외와 다르다.  - P187

가끔, 해변에 혼자 서 있던 말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린다. 깊고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 앞에서나는 내 앞의 생명체를 ‘노동하는 동물‘이나 ‘착취당하는 동물‘로 보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그 시공간에 머무르는 타자, 나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존재로 보았다. 내가 말을 바라보고 말이 나를 바라본다. 응시를 주고받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때 내가 어떤질문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간은 비인간을 어떻게 공동의 세계에 초대할 수 있는가?‘ 나 또한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동료로 상상하지 않았기에, 예기치 않은 이 질문은 비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것이었다. - P195

인간의 필요와 이익이 최우선 순위가 되고 동물과환경을 단순한 자원으로 여기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이상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종간 연대가 우리의 실천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물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수없다. 또한 인간이 중심이라는 오랜 관념이 무너진시대에, 우리는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새롭게 사유할 수밖에 없다. 관계 없는 권리와 권리 없는 관계가아닌, 철저한 이용과 완전한 분리가 아닌, 관계를 전제로 관계를 가능케 하는 관계의 가능성을 상상하기. 이것이 나에게는 응시-경이의 순간에서 비롯한 사유와 정동이 남겨준 과제이자, 응시에서 시작해 응답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 P198

어느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뒷목과 오른쪽 견갑골에 날선 통중이 들이닥쳤다. 몇 년 주기로 찾아오던고질병, 경추추간판탈출증 Cervical HIVD이 급성으로악화된 것이었다. 예전처럼 병원에 다니고,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병행하고, 휴식을 취하면 나아지려니 생각했다. 무심코 나쁜 자세를 오래 유지했거나, 원고를 집필하느라 몸을 혹사한 탓이라고 짐작했다.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통증은 목에서 어깨, 등, 팔, 손목까지 퍼져나갔다. 뒷목과 견갑골에는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이, 팔에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이지속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하루종일 누운 채로 시간을 견뎠다. 너무 오래 누워 있어 등과 허리가짓눌렸지만 자세를 바꾸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에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나에게만 멈춰버린 시간을 체감했다. 잠에서 깨는 일이 다시 고통에 갇히는 일처럼 느껴져 아침마다 눈물 - P205

이 흘렸다.
MRI를 포함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끔찍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공황증세가 찾아왔다. 네 번이나 발작을 일으킨 날도 있었다. 예고없이 몰려드는 공포와 오작동하는 내면의 경보, 울음과 비명, 식은땀, 어지럼증, 경련, 과호흡, 몸부림이 반복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상태에 빠지자 우울과 비관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영원히 이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원인은 불분명했다.
경추디스크가 돌출한 데 더해 흉추 1번디스크가 추가로 손상된 것을 확인했지만, 거동을 불가능하게할 만큼 결정적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의학적 진단과 체험된 고통 사이의 괴리는, 통증을 증명하는 - P206

일의 불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말은 ‘너는 네가 호소하는 것만큼 아프지 않다‘는 부정으로 들렸고, 나는 ‘언어화할 수 없는 통증‘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신경차단술과 재활치료를 병행하며 와병생활을한 끝에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이 경험은 나에게 깊은 파장을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불안속에 살아왔다. 언제 통증이 다시 나를 덮칠지 몰라서, 그 통증이 나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파괴할지 몰라서, 무엇보다 내가 통증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할지 몰라서.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고 통증이 다시찾아올까봐 불안해할 때도 나는 이 경험을 어떻게언어화할지 고심했다. 메모장에는 ‘뒷목을 도끼로내리치는 느낌‘ 같은 문장이 적혀 있지만, 이는 증상을 진부하고 과장된 비유로 기술한 것뿐이다. 통증을 쓰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각자의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진실을 각인시키는 것 말고, - P207

고통을 말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글의 서두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내가 느낀 통증을 ‘충분히‘ 묘파했는가? 아니다. 비명과 신음, 호소와 울부짖음이 ‘충분히‘ 드러났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언어에 저항하고, 언어를 적극적으로 분쇄하는 문제‘임을 ‘충분히‘ 보여주었는가? 아니다. 이 통증이 제3자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전환되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통증을 쓰는 일은 ‘불충분함‘과의 고투다. 이 글은 시작부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실패가 곧 이 글 전체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고통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고 어떻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통증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럼에도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내가 사용한 표현들 ㅡ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ㅡ은 얼마나 전형적인가? 게다가 이 표현은 내가 칼로 쑤셔지거나 전류가 흐르는 경험을 한 적 없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지도 않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불타는 듯한 통증, 쥐어짜는 듯한 통증, 살이 에이는 통증, 온몸을 휘감는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얼얼한 통증...... 고통의 - P208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이에게는 이 모든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
이 불충분함 속에서 ‘솔직함‘과 ‘정직함‘이라는 또다른 문제가 출현한다. 솔직함이 통증을 날것의 언어로 쏟아내려는 충동이라면 정직함은 어디까지 드러낼지, 어떻게 드러낼지를 질문한다. 솔직함의 극단이 비명이라면 정직함의 극단은 침묵이다. 전자는과잉되어 본질을 잃고 후자는 정제하다못해 회피한다. 결국 통증에 대해 쓰려는 자는 두 원칙 사이에서균형을 잡는 데 실패한다. 언어는 아슬아슬한 균형속에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영문학자 일레인 스캐리는 말한다. 환자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현존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곧 ‘확신하기‘이다. 그러나 타인의 통증은 붙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통증에 관해 듣기‘는곧 ‘의심하기‘이다. 통증은 상호 간에 공유될 수 없는 감각이다. 부정될 수도, 확증될 수도 없는 무엇이다. - P209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장르로서의 에세이는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상처 입은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글쓰기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저마다 아픈 시대에 자신의 아픔에 집중하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 부담을 지우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지나친 동일화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지, 타인의 고통이 불러낸 나의 고통을 느끼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고통을 쓰는 나와 읽는 나는 모두 고통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아픈 몸과 정신에 대해 쓰는 일은 책임을 수반한다. 나의 아픔을 말하는 글이 아픈 타자에게 어떻게번역될까? 고통의 문장은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어떤 관계를 만들어낼까? 나의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지 않고, 누군가의 정신적 외상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까지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쓰지 않음을 선택하는 일이나, - P213

‘솔직한 글‘이라는 말에는 때로 환상이 덧씌워 있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타인의 벌거벗은 자아와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그렇다. 그러나 에세이는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재현하는 장르‘라기보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과 솔직할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글쓰기‘에 가깝다.
때로 글을 쓰는 이는 에세이라는 영토에서 자기고통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치에놓인다. 전자가 머뭇거리는 글쓰기라면, 후자는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복잡한 자리다. 고통의 재현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에 의한 구성이다. 아픔은 그 자체로 중립적 경험이 아니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주체(누가 말하는가?)와 해석되는 대상(누구의 고통인가?) 사이에 권력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에세이는 ‘솔직함‘을 명목으로 자신(그리고 연루된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발설하는 장르가 아니라, ‘정직함‘을 윤리의 기준으 - P214

로 삼는 장르여야 하는지 모른다. 솔직함이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굴복한다면, 정직함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남길지스스로를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이는 나의 고백에 연루된 타인의 비밀을 동의 없이공개하는 것이나, 누군가의 ‘기억되지 않을 권리‘를침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이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무엇일 때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 유보한 채 기다리는 것도 정직함의 한 방식일 것이다. 고통에 관한 증언이 폭력이나 분출이 되지 않도록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경계에서 타인을 상상하는일, 에세이의 균형은 솔직함이 아니라 그 상상력에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세이의 정직함이 유보와 미완에 있을 때, 에세이스트는 맴돌고 서성이고 에두르는 가운데 실패한 언어와 불완전한 사유를 낳는다. 내가 추구하는 에세이즘"이 사실의 나열이나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과 ‘머뭇거리며 말하기‘라면, 에세이스 - P215

트로서 나는 단호한 증언자이기보다 흔들리는 기록자다. 내가 쓰는 에세이의 가능성은 모이고 흩어지는 단상에, 그것을 꿰어맞추려는 ‘시도""에 있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한순간도 공유하지 못한다해도, 언어화될 때 형태를 가지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정직하게 시도되어야 한다. 닿지 못할 것을 각오한 글만이 누군가에게 닿고, 실패할 것을 예감한 글만이 끝까지 읽힐 것이다.
네번째 책의 작가 소개글에 이런 문장을 썼다.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소망한다." 내가 고통을 말해야 한다면 연결을 위한말하기여야 할 것이다. 더 솔직하게 아픈 글로써가아니라 닿지 못한 자리에서 허정대며 시도하는 이야기, 아픈 내가 아픈 당신의 곁에 설 때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고요로써 가능한 것. 불충분함과의 고투 - P216

에서 패배하고 피하면서 언어의 고갈을 경험하고경험하면서 다시 모두가 아픈 시대에 나의 아픔을쓰는 일에 대해 질문하면서 나는 머뭇거리며 쓴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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