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책길에서 혼자 해변에 서 있는 갈색 말을 만났을 때는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말은해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커다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갈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검고 아름다운 눈은 깊이를 알 수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사로잡혔다. 난생처음 말을 ‘응시‘하면서 ‘경이‘를 느꼈다. 응시는 바라봄과 다르다. 정신과 시선을 하나의대상에게 집중하는 일, 내 앞의 대상에 대해 탐구하려는 태도, 감성과 이성을 동원해 의미를 알려는 시도다. 비인간을 응시하며 경이를 느끼는 것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닐 테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 날개를 펼치고 유유히활강하는 독수리, 초원에 앉아 바람을 맞는 여우를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경이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경이는 신비화와 다르다. 모르는 대상을 모르는채로 남겨두는 것이 신비화라면 경이는 지적 충동과 관련된 언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대상에깊은 첫인상을 받아, 그 인상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파악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경이라고 했다. 경이는 경외와 다르다. - P187
가끔, 해변에 혼자 서 있던 말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린다. 깊고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 앞에서나는 내 앞의 생명체를 ‘노동하는 동물‘이나 ‘착취당하는 동물‘로 보지 않았다. 나와 함께 그 시공간에 머무르는 타자, 나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존재로 보았다. 내가 말을 바라보고 말이 나를 바라본다. 응시를 주고받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때 내가 어떤질문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간은 비인간을 어떻게 공동의 세계에 초대할 수 있는가?‘ 나 또한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동료로 상상하지 않았기에, 예기치 않은 이 질문은 비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것이었다. - P195
인간의 필요와 이익이 최우선 순위가 되고 동물과환경을 단순한 자원으로 여기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이상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종간 연대가 우리의 실천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동물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수없다. 또한 인간이 중심이라는 오랜 관념이 무너진시대에, 우리는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새롭게 사유할 수밖에 없다. 관계 없는 권리와 권리 없는 관계가아닌, 철저한 이용과 완전한 분리가 아닌, 관계를 전제로 관계를 가능케 하는 관계의 가능성을 상상하기. 이것이 나에게는 응시-경이의 순간에서 비롯한 사유와 정동이 남겨준 과제이자, 응시에서 시작해 응답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 P198
어느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뒷목과 오른쪽 견갑골에 날선 통중이 들이닥쳤다. 몇 년 주기로 찾아오던고질병, 경추추간판탈출증 Cervical HIVD이 급성으로악화된 것이었다. 예전처럼 병원에 다니고, 물리치료와 도수치료를 병행하고, 휴식을 취하면 나아지려니 생각했다. 무심코 나쁜 자세를 오래 유지했거나, 원고를 집필하느라 몸을 혹사한 탓이라고 짐작했다.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통증은 목에서 어깨, 등, 팔, 손목까지 퍼져나갔다. 뒷목과 견갑골에는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이, 팔에는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이지속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하루종일 누운 채로 시간을 견뎠다. 너무 오래 누워 있어 등과 허리가짓눌렸지만 자세를 바꾸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에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나에게만 멈춰버린 시간을 체감했다. 잠에서 깨는 일이 다시 고통에 갇히는 일처럼 느껴져 아침마다 눈물 - P205
이 흘렸다. MRI를 포함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끔찍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공황증세가 찾아왔다. 네 번이나 발작을 일으킨 날도 있었다. 예고없이 몰려드는 공포와 오작동하는 내면의 경보, 울음과 비명, 식은땀, 어지럼증, 경련, 과호흡, 몸부림이 반복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상태에 빠지자 우울과 비관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영원히 이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원인은 불분명했다. 경추디스크가 돌출한 데 더해 흉추 1번디스크가 추가로 손상된 것을 확인했지만, 거동을 불가능하게할 만큼 결정적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의학적 진단과 체험된 고통 사이의 괴리는, 통증을 증명하는 - P206
일의 불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말은 ‘너는 네가 호소하는 것만큼 아프지 않다‘는 부정으로 들렸고, 나는 ‘언어화할 수 없는 통증‘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신경차단술과 재활치료를 병행하며 와병생활을한 끝에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이 경험은 나에게 깊은 파장을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불안속에 살아왔다. 언제 통증이 다시 나를 덮칠지 몰라서, 그 통증이 나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파괴할지 몰라서, 무엇보다 내가 통증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할지 몰라서.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리고 통증이 다시찾아올까봐 불안해할 때도 나는 이 경험을 어떻게언어화할지 고심했다. 메모장에는 ‘뒷목을 도끼로내리치는 느낌‘ 같은 문장이 적혀 있지만, 이는 증상을 진부하고 과장된 비유로 기술한 것뿐이다. 통증을 쓰는 일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각자의육체 속에 갇혀 있다는 진실을 각인시키는 것 말고, - P207
고통을 말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글의 서두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내가 느낀 통증을 ‘충분히‘ 묘파했는가? 아니다. 비명과 신음, 호소와 울부짖음이 ‘충분히‘ 드러났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이 언어에 저항하고, 언어를 적극적으로 분쇄하는 문제‘임을 ‘충분히‘ 보여주었는가? 아니다. 이 통증이 제3자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로 전환되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통증을 쓰는 일은 ‘불충분함‘과의 고투다. 이 글은 시작부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실패가 곧 이 글 전체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고통은 왜 이야기되어야 하고 어떻게 이야기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통증 앞에서 언어는 언제나 실패한다. 그럼에도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내가 사용한 표현들 ㅡ "칼로 쑤셔대는 듯한 날카로움"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찌릿함ㅡ은 얼마나 전형적인가? 게다가 이 표현은 내가 칼로 쑤셔지거나 전류가 흐르는 경험을 한 적 없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하지도 않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 불타는 듯한 통증, 쥐어짜는 듯한 통증, 살이 에이는 통증, 온몸을 휘감는 통증, 욱신거리는 통증, 얼얼한 통증...... 고통의 - P208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이에게는 이 모든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 이 불충분함 속에서 ‘솔직함‘과 ‘정직함‘이라는 또다른 문제가 출현한다. 솔직함이 통증을 날것의 언어로 쏟아내려는 충동이라면 정직함은 어디까지 드러낼지, 어떻게 드러낼지를 질문한다. 솔직함의 극단이 비명이라면 정직함의 극단은 침묵이다. 전자는과잉되어 본질을 잃고 후자는 정제하다못해 회피한다. 결국 통증에 대해 쓰려는 자는 두 원칙 사이에서균형을 잡는 데 실패한다. 언어는 아슬아슬한 균형속에 파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고통에 대해 쓰려고 한다.
영문학자 일레인 스캐리는 말한다. 환자에게 통증은 논박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현존이어서 ‘고통스러워하기‘는 곧 ‘확신하기‘이다. 그러나 타인의 통증은 붙잡히지 않는 것이므로 ‘통증에 관해 듣기‘는곧 ‘의심하기‘이다. 통증은 상호 간에 공유될 수 없는 감각이다. 부정될 수도, 확증될 수도 없는 무엇이다. - P209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장르로서의 에세이는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정신적 고통에서 비롯하든) 상처 입은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글쓰기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저마다 아픈 시대에 자신의 아픔에 집중하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 부담을 지우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지나친 동일화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지, 타인의 고통이 불러낸 나의 고통을 느끼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고통을 쓰는 나와 읽는 나는 모두 고통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아픈 몸과 정신에 대해 쓰는 일은 책임을 수반한다. 나의 아픔을 말하는 글이 아픈 타자에게 어떻게번역될까? 고통의 문장은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어떤 관계를 만들어낼까? 나의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상처를 헤집지 않고, 누군가의 정신적 외상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까지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쓰지 않음을 선택하는 일이나, - P213
‘솔직한 글‘이라는 말에는 때로 환상이 덧씌워 있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타인의 벌거벗은 자아와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그렇다. 그러나 에세이는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재현하는 장르‘라기보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과 솔직할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글쓰기‘에 가깝다. 때로 글을 쓰는 이는 에세이라는 영토에서 자기고통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치에놓인다. 전자가 머뭇거리는 글쓰기라면, 후자는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복잡한 자리다. 고통의 재현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에 의한 구성이다. 아픔은 그 자체로 중립적 경험이 아니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주체(누가 말하는가?)와 해석되는 대상(누구의 고통인가?) 사이에 권력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에세이는 ‘솔직함‘을 명목으로 자신(그리고 연루된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발설하는 장르가 아니라, ‘정직함‘을 윤리의 기준으 - P214
로 삼는 장르여야 하는지 모른다. 솔직함이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굴복한다면, 정직함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남길지스스로를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이는 나의 고백에 연루된 타인의 비밀을 동의 없이공개하는 것이나, 누군가의 ‘기억되지 않을 권리‘를침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이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무엇일 때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 유보한 채 기다리는 것도 정직함의 한 방식일 것이다. 고통에 관한 증언이 폭력이나 분출이 되지 않도록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경계에서 타인을 상상하는일, 에세이의 균형은 솔직함이 아니라 그 상상력에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세이의 정직함이 유보와 미완에 있을 때, 에세이스트는 맴돌고 서성이고 에두르는 가운데 실패한 언어와 불완전한 사유를 낳는다. 내가 추구하는 에세이즘"이 사실의 나열이나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말하지 않음‘과 ‘머뭇거리며 말하기‘라면, 에세이스 - P215
트로서 나는 단호한 증언자이기보다 흔들리는 기록자다. 내가 쓰는 에세이의 가능성은 모이고 흩어지는 단상에, 그것을 꿰어맞추려는 ‘시도""에 있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한순간도 공유하지 못한다해도, 언어화될 때 형태를 가지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정직하게 시도되어야 한다. 닿지 못할 것을 각오한 글만이 누군가에게 닿고, 실패할 것을 예감한 글만이 끝까지 읽힐 것이다. 네번째 책의 작가 소개글에 이런 문장을 썼다.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소망한다." 내가 고통을 말해야 한다면 연결을 위한말하기여야 할 것이다. 더 솔직하게 아픈 글로써가아니라 닿지 못한 자리에서 허정대며 시도하는 이야기, 아픈 내가 아픈 당신의 곁에 설 때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고요로써 가능한 것. 불충분함과의 고투 - P216
에서 패배하고 피하면서 언어의 고갈을 경험하고경험하면서 다시 모두가 아픈 시대에 나의 아픔을쓰는 일에 대해 질문하면서 나는 머뭇거리며 쓴다. - P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