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세 번째 봄이다.
최은미의 <여기 우리 마주>는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첫 번째 봄의 이야기다. 처음 읽을 때는 생생한 감정선이 살아났는데 이만큼 지나고 나니 당시에 비해 어마 무시한 확진자 숫자들이 비현실적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을 상상하지 못했듯, 그때의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게 향하던 표창 같은 비난들이 섬뜩하다. 우리들 마음이 다 그러했음에.

살구 꽃이 피었는데, 연락 없는 그들에게서는 소식이 왔을까?
모두 조금은 평안한 세 번째 봄이었으면.


맘 카페에 들락거리는 그 마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구차하고 혼해서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힘내라는 댓글 딱 하나만 보고 내리려고 올리는 글들, 아무리 억지스러운 얘기를 올려도 수십만의 회원 중에 한 명은 호응을 달아주는 사람이있었다. 거기선 모두가 거침없었다. 재판관과 상담사와 의사와 친구 역할을 돌아가며 했다. 당장 이혼하세요. 안 봐도 뻔해요. 그런엄마 그냥 차단하세요. 그걸 왜 참으세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에궁, 토닥토닥. 하트를 날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격하게 껴안는 브라운과 코니, 즉각적인 공감과 위로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글을 내린다. 하지만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 앞에선 에어 프라이어에 뭘 해 먹을까만 얘기하는 것이다.
- P23

돌담 불빛을 따라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윤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유치도 다 안 빠진 것들이" 하며 조금 웃었다. 비슷한 길이로 자른 두 윤이의 머리카락이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며 멀어졌다. 지금은 유치도 다 안 빠진 저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는 영구적으로 써야만 하는 이를 가지고 살아가겠지. 지금보다 기다란 팔다리로 허우적거리면서 누군가한테 다가가고, 멀어지고, 사랑이 가져오는 것들을 모른 채로 사랑하고, 알고도 사랑하면서, 윤이들이시기마다 겪어갈 상실감의 무늬들을 생각하자 가슴 제일 깊은 곳이 아려왔다.
- P37

휴대폰으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진아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볼 생각이었다. 처음엔 진아씨, 라고 썼다.
지우고 다시 지나씨, 라고 썼다. 하지만 지나라고 부르자 아무 말도 써지지가 않았다. 내가 진아씨한테 갖고 있던 어떤 느낌도 살아나지 않았다. 세 살 윤이들을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같이 뛰던 사람, 잠들기 전에 한 번씩 내 집 쪽을 살펴봐주던 사람, 작은 쪽지 하나도 그냥 버리지 못하던 사람, 폭염과태풍을 함께 겪은 사람이 진아이지 어떻게 지나란 말인가. 하지만 그 사람은 착한 모범생이던 시절에도 김팀장이던 시절에도 산모님이자 윤이 어머니일 때도 은행에서도 운전면허 시험장에서도
지나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 P43

"살구꽃이 피면 톡 하겠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기약만 있다면 더 오래도 기다릴 수 있다고, 겨울이 다가온
창밖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 P45

그리고 병원이 있다.
병원에 가던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땐 5월이었다. 4월도황금연휴도 다 지난 5월, 병원까지는 자차로 팔 분이 걸렸다. 종합병원 앞 사거리, 병원 지하주차장, 병원 엘리베이터, 발열 체크대,로비에서 웅성이던 사람들, 지금도 나는 그 봄에 내가 받았던 질문들을, 혹은 받지 않아도 됐던 질문들을 떠올린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아이들 교과서가 일제히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지던 때, 우리의 봄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수미의 딸이 새경프라자에 와서 울던 그날부터?
수미는 자신의 재난지원금을 나에게 와서 썼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수미를 만날 수 없다.
- P51

수미는 늘 여러 탕을 뛰었다. 서하를 내 홈 공방으로 처음 보내던 무렵에는 은채가 다니는 미술학원의 차량 기사를하고 있었다. 그때도 수미는 선 캡을 쓰고 있었다. 패딩 모자를 쓰는 한겨울을 빼고 수미는 늘 선 캡을 쓰고 다녔다. 각도를 조금만조정해도 코까지 빠르게 가려버리는 선 캡. 들키기 싫으면 고개만살짝 숙여도 되는 선 캡. 자기는 편할지 몰라도 주위 사람들은 속터지게 만드는 선 캡. 정수리가 뻥 뚫린 선 캡을 쓰고 어딘가를 빠르게 걸어가는 깡마르고 키 큰 여자가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수미일 것이다. 12인승 스타렉스에 아이들을 태우고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 여자가 선 캡을 쓰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수미일 것이다. 진료소에 갈 때도 수미는, 선 캡을 썼을 것이다.
- P57

죽음, 남편의 사망, ‘남편과 ‘사망‘을 연결시키다보면 그날이 떠오른다.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열어보던 임신 막달의 어느날이. 남편 몸의 각종 수치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건 무엇이까. 이 남자가 쓰러지면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망한다는 공포였을까? 분명한 건 남편의 혈관 수치에 일희일비하며 야채주스를 갈아바치는 여자들을 내가 오랫동안 혐오해왔다는 것이다. 남편을 죽여야 할 때 죽이지 못하는 여자들, 죽여 마땅한 순간에 남편을 빠는 여자들, 남편을 죽이는 대신 애를 잡는 여자들, 정말이지 좆같은 여자들. 좆빨러라는 욕을 먹어도 싼 여자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자기혐오가 아니다. 좆빨러가 되지않으려고 피오줌을 싼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나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낮에 대해서. 눈을 붙여도 잠들 수 없는 밤에 대해서. 남편과 노동을 나누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뺏긴 채로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는 다른 여자들‘과 ‘편하게 사는 다른 여자들을 가위눌리듯 떠올리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를 욕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떻게 다시 고립되어갔는지, 그 외로웠던 봄에 대한 얘기를. - P72

곧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잘 참아왔다. 이전의 일상을 이제는, 정말이지 이제는 반토막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차로 개학이 연기되었을때, 2차로 연기되었을 때, 3차 연기, 다시 4차 연기, 일정표에 쓴 개학/ 개학/ 개학/ 개학이 네 번 다 무효가 돼도, 어쨌든 지나왔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 진단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아침밥/설거지 학교 온라인 수업/ 점심밥/설거지 / 학원 온라인 수업/ 저녁밥/설거지로 하루가 가도 어쨌든 지나왔다. 2020년 5월 4일, 교육부는 5월 13일부터 순차적인 등교 개학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교과서를 다시 학교로 보낼 수 있었다. 이제 학모들은 미회신 알림 11 / 미확인 알림 39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혼자 있는 아이에게 배달의민족으로 밥을 시켜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마침내,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너네들이 클럽에서 처놀지만 않았어도,
- P77

건물 외벽 사이 주차공간만한 어둑한 바닥에 접이식 의자 하나가 놓여 있던 것이 떠오른다. 전자 문진대 앞에서 모든 문항들에사실 그대로 답을 하자 내겐 위험 대상‘ 이라고 체크된 출입증이나왔다. 진료소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몇 개의 질문을 더 거친 뒤 나는 그 의자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검체를 채취하기 전, 아주 잠깐 나는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중앙 출입구에서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줄지어 선 택시들과 막 들어오고 있는 마을버스, 주차 꼬깔콘,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센터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나는스물두 시간 전에 수미가 이 의자에 앉아 이 풍경을 봤을 거라고생각했다. 딱 십 초만, 이 의자가 저 풍경들로부터 나를 가려주는 - P88

곳에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흰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다가와 말했다.
십초면 됩니다. 마스크를 내리고 고개를 젖히세요."
면봉이 콧구멍을 지나 비인두에 닿았을 때,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고였다.

여덟 시간 뒤 나는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고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수미는 기정시 67번 확진자가 되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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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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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자마자 ˝오늘은 열심히 해야지˝ 라고 매일 다짐하는 나를 만난다. 오늘의 권남희가 되기까지의 고군분투와 인내와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좋은 번역자가 글을 잘 쓴다는 것 또한 진리다. 무엇보다 책 표지의 서재 사진이 압권. 그래서 낚였고 유쾌하고 흡족한 낚임이었다. 좀 얇긴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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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사오년도 더 전 ‘국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국수‘ 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흔이라는 오묘한 나이를 소설을 쓰면서 건너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과 감사는 제게 실과 바늘처럼 한묶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의도도 있지만, 제 의도를 넘어서는 그 어떤..… 흐름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가 저를,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의자 위에 데려다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벽이 간직한 신비를 깨달은 것은 마흔이 되어서입니다.
  자명하지만, 그 신비를 제대로 모르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싶습니다.

  한편의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그 흐름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제 의지대로 소설이 쓰이고 제 인생이 전개되었다면, 기쁨과 감사를 몰랐을 것입니다.

  요즘은 틈틈이 얼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얼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오래 실어증에 걸렸다. 말을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중얼거려봅니다.



   새벽, 김숨의 국수를 꺼내 읽는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장들이 꾹꾹, 마음을 눌러와서 툭툭... 털어 버리려 읽고는 한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읽고나면 어김없이 황폐해지는 단편들 사이에 길을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게 된다. 그게 김숨의 힘일까?
   진달래가 지천인 산길을 걷는 내내 끈같은 국수의 면들이 발을 칭칭 감왔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모금 두어 모금 서너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한덩어리로 뭉쳐야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르튼 발뒤꿈치 같을 덩어리가 밀크로션을 바른 아이의 얼굴처럼 매끈해질 때까지 이기고 치대야 하는 시간이지요. 여무지게 주물러야 하는......
- P49

소금알들이 마침내 녹아든 물을 조금씩, 인색하다 싶을 만큼 조금씩 부어가면서 밀가루를 뒤적뒤적 섞어줍니다. 밀가루가 축축이젖어들고 엉기면서 손가락에 들러붙습니다. 손아귀에 잡히는 대로밀가루를 주물럭거려 덩어리를 만듭니다. 손가락 마디들이 구근처럼 불거지도록 꾹꾹 눌러가면서 .… 껌처럼 덩이져 양푼에 들붙으려는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긁어가면서 .... 그래요. 언젠가 저에게이러한 시간이, 반죽의 시간이 찾아오리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굼뜬 손가락들을 오므리고 펴길 반복하면서 견뎌내야 할 반죽의 시간이 말이에요. 오후의 빛이으깨진 홍시처럼 널린 부엌 창.… 그 창을 무심히 등지고 앉아서이렇게 .
- P51

반죽이 겨우 한덩어리로 뭉쳐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반죽이 너무 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죽을 국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넣어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벌써 이십구년 전이던가요? 당신이 우리와 살러 왔을 때 꼭 지금의 내 나이였으니 말이에요. 마흔 셋이던 당신은 일흔두살이, 열넷이던 나는 마흔세살이 되었으니....  - P53

혀에 이미 암이 상당히 퍼져 절제가 불가피하다던 의사의 설명을 당신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당신이 서너 젓가락이라도 국수를 건져 먹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꺼내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 꾹

반죽에 찰기가 붙어서인지, 한덩이의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응어리를 주무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단단하고 차지게 맺힌응어리와 한바탕 씨름이라도 하는 듯해요.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이기나 한번 해보자. 괜한 오기까지 뻗치는 게... 약이 오를 대로오른 내 손가락들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매달릴수록 이놈의 응어리는 더 차져만 가지 뭐예요. 그런데요… 글쎄 이놈의 응어리와 달리 말이에요, 제 안에서는 뭔가가 풀리는 것만 같아요. 이놈의 응어리처럼 뭉치고 맺힌 뭔가가 … 응어리라고밖에는 별달리 설명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 뭔가가 부드럽게.…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 P61

한시간이면 될까요. 숙성을 위한 시간으로 말이에요. 안달복달들복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은 차져지고 부드러워질것입니다. 반죽이 이느정도 치대지면 당신은 그것을 비닐에 싸고양푼째 보자기로 덮어서는 밀쳐두었지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때때로 반나절이 훌쩍 지나도록 잊은 듯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이 저 스스로 깊고 원숙해진다는 걸 당신은 잘 알아서였겠지요. 숙성의 시간을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침잠의 시간… 단절의 시간..… 내적 고요의 시간… 성찰의 시간……… 과학적으로 밀가루 반죽의 경우 네다섯시간이 숙성 시간으로 적당하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실온이 아닌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설명도요. 네다섯 시간이라.… 그렇지만 그렇게나 긴 시간 반죽을내버려둘 여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 P63

그러고 보니 국숫발이 모양으로만 보자면 끈 같기도하네요. 가늘고 기다란 게 하얀 운동화 끈 같기도.… 혹 당신이뽑아낸 국숫발들은 끈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자식이란 끈 대신밀가루로 반죽을 개어 끈들을 만들어냈던 게 아닐까요. 그 끈들이허망하게 불어터지고 늘어지는 게 싫어 꾸역꾸역 당신의 입안으로말아넣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결코 국숫발을 이로 끊어 먹지않는다는 걸, 내가 눈치 챈 게 언제였던가요. 당신은 건져올린 국숫발을 이로 끊지 않고 어떻게든 끝까지 젓가락으로 끌어올리고...당겨올리고… 말아올려 입속에 들게 했지요. 미끌미끌 늘어지는한가락까지. 그런 국숫발을 내가 숟가락으로 죄다 뚝뚝 끊어버렸으니…… 죄…. 서운하세요?  - P69

간신히 걸쳐 있던 한가락의 국숫발마저도 흘러내립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혀가 국숫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듯해서나는 숟가락을 집어듭니다. 국숫발들을 뚝뚝 끊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당신이 내게 처음 끓여준 국숫발들을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냈듯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때 심정과, 지금 국숫발을 뚝뚝 끊어내는 심정은 분명 다르겠지요. 뚝뚝..… 뚝.
- P81

노인은 간장에 조린 우엉 같은 골목을 두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노라도 젓듯 왼팔을 허우적거리면서, 과장되게 휘저어대는 왼팔과 달리, 사십도 정도 허공으로 들린 오른팔은 의수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노인은 성급히 발을 내디뎠고, 그녀는 노인이 저러다 앞으로 꼬꾸라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두 발을 부단히 엇갈려 내는데도 보폭이 짧아서인지 노인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대여섯발짝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 걷던 그녀는 갑갑함을 느끼다 못해 결국 걸음을 빨리해 못 본 척 노인을 휙 지나쳐버렸다. 골목 끝에 거의 이르러 그녀가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을때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노인이그 골목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디서도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지 이십분쯤 지나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선풍기를 주워들고 돌아왔다.
- P135

그녀는 뚜껑을 꼭 닫고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밤새 틀어놓는다해도 오리 뼈 고는 냄새가 뿌리 뽑히지 못하리라는 걸 알지만 환풍기를 틀었다.
그녀는 노인의 영정사진을 한번 바라본 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인을 찾기 위해, 그녀가 노인을 찾아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202호 여자가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 P157

마다하지 그의 손가락 마디만큼 벌어진 입에서 피어오르던입김이 차츰 옅어졌다. 보랏빛과 푸른빛, 노란빛, 자줏빛 그리고 또다른 그 어떤 빛이 한꺼번에 그의 이마에서 감돌았다. 빛깔들은 뒤섞여 기묘한 빛을 발했다. 검보랏빛인 듯, 검푸른빛인 듯, 검노란빛인 듯, 검자줏빛인 듯, 혹은 그 어떤 빛인 듯한 신비로우면서도 섬뜩한 그 빛은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어느 결엔가 바짝 다가온 개가 그런 그의 얼굴 위로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개를 쫓아버리지도 덥석 끌어안지도 않았다. 개가 큼큼 내뿜는 콧김에 그의 머리카락 몇올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금이빨을 팔러 가자...… 그는 개를 끌고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전선줄처럼 가늘고 검은 골목들을 지나고, 젖은 낙엽이 날리는횡단보도를 건너, 셔터가 굳게 내려진 가게들을 지나… 사내는은수저와 금이빨이 널린 보자기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를기다리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는데도 순대국집은 간판을 노랗게밝히고 있었다.
"금이빨을 팔러 왔소."
"입을 벌려요."
"거참, 늙은이더러 자꾸만 입을 벌리라고 하는 구만."
"입을 벌리리니까요."
- P193

고갯길 정점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그물처럼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그물에 걸려 끌어올려지듯 그녀는마저 고갯길을 올랐다.
" "섬이었지.…그녀의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거칠어진 숨소리와 뒤섞여고갯길 정점에 떠돌았다. 그녀의 모습은 이미 고갯길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숲 저 너머 차를 그득 실은 카페리가 막 석모도를 떠나 강화도로향하고 있었다.
- P230

환갑이 낼모레인데 돼지를 떼로 생매장할 구덩이나 파고 있다.
불현듯 자괴심이 복받쳐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저 밥벌이야, 밥벌이 .…..… 그렇지만 누굴 위한 밥벌이인가? 그것은 언제부던가 그가 스스로에게 자조적으로 묻곤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시방 누굴 위해 돈을 벌고 있나…… 도대체 누굴 먹여 살리려고 ...
오십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는 돈을 벌어도 신이 나지 않고 허무감만 들었다. 그나마 지갑에 만원짜리 몇장 들어 있다는 안도감, 그것 말고는 정말이지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날마다일이 있는 것도, 쓰고 남을 만큼 벌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일거리가 갈수록 줄어들어 만원짜리 한장, 천원짜리 서너장으로 일주일 넘게 버티는 날도 많았다. 더구나 지금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월세 보증금 천만원과 통장에 넣어둔 백여만원이 고작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에 올 때 그의 지갑에는 오천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네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보다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301

아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구덩이를 향해 서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좇는 사이에아들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없었다. 다급히 아들을 찾는 그의 눈에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재구가 아니라 저 자식이었나?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재구인지 청년인지 형 혼란스러웠다. 재구여도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는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목에 둘러진 수건이 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마침내 돈사에서 돼지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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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개인적으로 이 챕터에 울컥했다. 가끔 즐겨보는 프로그램인지라 뜨끔하기도 했고.

 

  연말 TV 예능 프로그램 시상식에서 아버지들이 아이를돌보는 리얼리티 쇼가 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시대에 아이 돌보는 즐거움을 전파하는 것이 이 쇼가 상을 받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쇼를 보지 않는다. 육아가 거의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떠맡겨지는현실에서 아버지가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불편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런데 그보다 큰 이유는 거기 나오는 집들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어린이들도 이 쇼를 본다. 세트장‘이 아닌, 유명 연예인의 실제 집과 거기 살고 있는 다른 어린이를 본다. 대수롭지않게 보아 넘기는 어린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어린이에게는 그 집이 꿈속의 것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 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만일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런 생각화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 주면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나도 TV가 환상을 판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화려한 것을보여 줘야 한다면 차라리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면 좋겠다. 어느 집 넓은 거실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환상 아닐까. p101,102



어린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 집에 빗댄 설명을 종종 한다.
단어를 벽돌로, 문장을 벽으로, 문단을 방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문단에는 하나의 생각만 들어가야한다는 것을 잠자는 방, 부엌, 화장실을 구분하는 데 비유하면 설명하기가 좋다. 집의 크기나 식구 수에 따라 방의 개수가 달라지듯이, 글도 상황에 따라 단락 수가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어린이들이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있게 내 경험을 덧붙인다.
"지금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야. 그런데 선생님은 전에방이 한 개인 집에서도 살아 봤어. 모두 집이야.  - P97

"아니, 선생님이 어렸을 때는 네 식구가 방이 한 개인 집에서 살았어. 나중에는 혼자서 방이 한 개인 집에서 산 적도있고, 그런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글도 비슷해, 한단락으로 쓰더라도 내용이 잘 정리되면 좋은 글이 돼."
짐짓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 다음 주제를 설명하고 글쓰기를 시작하게 했다. 칠판에 그린집 그림을 지우고, 뒷짐을 딱 지고, 어린이들 주변을 한 바퀴돌았다. 나의 한 부분이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 P103

5년은 어린이의 발달 단계에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를 만든다. 뭘 해도 언니가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게다.
가 우리 언니는 워낙에 손이 야무져서 만들고 그리는 건 무엇이든 잘했고, 나는 그쪽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만들기 숙제를 할 때마다 언니 손을 빌리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혼자힘으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아 별수 없었다. 그럴 때 옆에서 얼쩡거리면 거치적거린다고 혼나고, 그러다 물도 쏟고종이도 찢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른들이 언니에게는참으라고 하고, 나에게는 말 잘 들으라고 하니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이지 은지가 너무나 이해가 간다. 은빈이는 너무한다!
- P107

우리가 조금씩 가까워진 건 언니가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난 뒤의 일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 결혼을준비하면서였다. 언니는 내가 결혼할 때 혼자서 친정 역할을 다 해 주었다. 친척들에게 연락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댁에 이것저것 챙기는 것까지, 나는 언니 손을 빌렸다. 어렸을 때처럼 별수 없었고, 어렸을 때와 다르게 조금도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5년 차이는예전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지붕아래 나는 혼자 있지 않았다. 언니한테 미안하고 고마워서그때 나는 여러 날 잠을 설쳤다.
- P110

선생님은 어린이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만나는 전문가이고, 때로는 유일하게 만나는 지식인이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자기가 아는 가장 친절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들은 밀려드는 크고 작은 업무 때문에 어떤 부분에는 소홀할 수 있다. 어린이와 밀착한 생활을 하는 만큼 사적으로 감수할 일이 많으니, 때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한계로 어린이나 보호자를실망시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선생님들의 실수에 너무 엄혹한 것이 아닐까? 한 명의 노동자이기도 한
‘교사‘ 에게 ‘스승‘ 의 모습만을 요구하는 것 아닐까? 특히나특수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그 길에 들어선 것 자체를
‘헌신에 대한 약속‘으로 여기고 그분들의 희생을 당연하게여기는 것은 아닐까?
- P118

그때 나는 『말하기 독서법, 원고의 개요를 잡고 작업 일정을 세운 참이었다. 독서교실 수업과 글쓰기를 나란히 하려니 ‘아이고, 당분간 큰일 났구나‘ 싶었다. 시간도 에너지도..
넉넉하게 필요했다. 그중 시간은 차라리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있었다.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지만, 노는 시간을 줄이고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에너지, 생산적인 힘이었다. 글을 쓰다 막힐 때나 쓰기에 지쳤을 때 어떻게 창의성과 집중력을 유지할까.
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것을 배워 보기로 한것이다. 일이나 글쓰기 말고 완전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지금껏 매워 보지 못한 것. 읽고 쓰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 피아노였다. 집 앞 피아노 학원 간판에 ‘성인 취미반‘ 이라고 적힌 것을 눈여겨보았던 터였다. 동네 사람으로서 선생님과 안면도 있었다.  - P130

"어린이들이 훨씬 유연하기는 해요. 대신에 어른은 음악을 조금 더 알아서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요. 이 곡이 어떤곡인지, 대강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니까요."
힘이 되는 말씀이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일이 더 좋아졌고 귀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더 밝아졌다. 전에는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연주가이제는 ‘훌륭하다!‘ ‘황홀하다!‘ 하는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게 바로 문제예요, 선생님, 제 귀는 그걸 아는데 제 손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손보다 귀가 더 괴로워요. ‘
그럴 때 선배님들의 조언을 다시 떠올린다.  - P137

나는 웬지 조마조마했다. 혹시 주이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게 이상하다거나 오히려 기분 나쁘다고각하면 어떡하나 하고,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어?"
"뭐라고 해야 하지? 위로가 됐어요. 그런 날은 운이 좀 좋은 것 같아요."
"위로가 됐어요"라고 할 때 주이는 오른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이 이따금 생각난다. 평소 주이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린이에게는 어른들이 환경이고세계라는 사실을 그날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네 식당에서 어린이 둘과 함께 와서 식사하는 어머니에게 사장님이 "아기들 덜어 먹을 그릇 따로 드릴까요?"라고먼저 물어보시는 것을 보았을 때, 아파트 1층 현관으로 자전거를 끌고 다가오는 어린이를 보고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가 자동문이 닫히지 않게 붙잡아 주시는 아랫집 할머니를보았을 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이들에게 세상에대한 좋은 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보는 듯하다.
어린이도 어른에게 호의를 베푼다.  - P146

돌려서 말하려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쓰기로 했다. 이상하게 들릴 것 같지만 할 수 없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쓰고 나니 후련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나더러 각박하다고 한다면 다른 어떤 오해를 받을 때보다도 억울할 것 같다. 나는 마음이 아주 헤프다. 누구든 무엇이든 좋아하기를 잘하고, 그러기 시작하면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한정 없이 마음을 준다.
그 마음을 늘 돌려받는 것도, 애초에 그러기를 바라고 주는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상처도 받지만 그럴 때 상대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 나의 덕이라면 덕이다.  - P149

어린이는 이성으로 가르친다! 이것이 나 자신의 사훈이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적 정서적성장을 돕고, 좋을 때 좋게 헤어지는 것. 직업 윤리와 진실한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고도 성과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생각하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노력한다. ‘사랑‘이란 내가 다루기에 너무 크고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르니 늘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 P151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주제넘는 일로 느껴진다. 신성하게 여긴다거나 금기시한다거나 해서는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더 많이 알거나, 차라리 더 적게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 생각을 하지않으려고 노력했다. 걷고, 영화를 보고, 반찬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또 걷고, 씻고, 음악을 듣고, 걸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써 보기로했다. 이 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는있을지, 다 모르는 채로,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죽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 P158

 힘들었던 어느 시기를 뭉뚱그려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마음이 물러서 그런 건지, 실제로 그럴 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삼십 대의 나는 힘 쓸 일, 감정 쓸 일이 많았다. 내내 퍼석한 얼굴로 사는 나를 보다 못한 선배 언니가 밥을 사주다가 드라마 대사를 빌려서 물어 주었다. 너도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지? 그랬다. 무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아침에는 죽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죽고 싶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죽겠다는 것은,
- P159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 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이유는 충분하다. 가해자의 잔인한 범행을 나는 ‘악‘이라는 개념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악행의 기승전결은 전혀 알고 싶지 않고,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러니까 칼국수를 먹다가, 빨래를널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생각하는 것은, 다섯 살 어린이의 삶이다.
모든 인간이 소중하다거나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은 소중한지 아닌지 따질 수 없는 존재라고 배웠다.
- P162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섯 살 어린이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목소리는 어떨까. 자꾸 그런 생각이 난다. 그 어린이의 삶을 떠올리려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만화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생각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그런 것이 존재했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차마 혼자서라도 궁금해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감히. 또 생각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살고 싶었을까, 죽고 싶었을까..
혼자 밤 산책을 하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이 울었다. 우는것도 자기만족인 것 같아서 참으려고 걷기 시작한 건데 소용이 없었다. 세상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 P163

그런데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아있는 어린이들이 있지 않나.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야나 하나가 경멸해도, 나 하나가 사랑해도 세상은 그대로 있고 누군가는 살아 있다.
다섯 살 어린이에게는 삶이나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그 어린이는 다른 사람의 의지로 인해 죽었다. 나는 삶을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나처럼 선택의 순간을 가졌는 아니든 간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나아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니까. 나아가려면 외면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려면 맞서야 하니까. 삶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어린이의 명복을 빈다. 떠나던 순간에 인간은 상상할 수없는 자비로운 손길이 함께했기를 마음 깊이 빈다. 천국이꼭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는 어린이가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껏 뛰놀며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있으면 좋겠다.
- P164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엄마‘ ‘남의 집 아빠‘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떤 어린이의 ‘남의 집 할머니‘도 될 수 있다. 어린이의초콜릿을 지퍼백에 넣어 주고, 어머니에게 어깨를 빌려 드리면서 나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양육자가 아니어도 ‘남의 집어른‘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엄마가 된 친구와 나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끝까지 제대로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친구 역시 아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나의 삶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우리 자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예전처럼 서운하지 않다.
언제든지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잘 보이는 곳에 내가 가있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 어른은 그런 데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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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들 



  채 여물지 못한 달빛이 모슬포 골목마다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은 칠월 칠석

  길의 끝에서 혹은 시작되는 곳에서
  덩굴손이 깍지 끼어 부여잡은 푯말 하나
  백조일손묘역 3.3km
  양민학살터 3.8km
  동서남북 불어온 바람이 달빛에 부서지다 다시 돌아와
  그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빛이 보이는 부분을 오늘이라, 하면
  희미한 윤곽만으로 모양새를 갖춘 삭은, 어제였나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육십갑자의 끄트머리
  어둠 속 내버려진 영혼들이 웅크려 있다
   남루한 형색의 눈이 퀭한 사내들
  우회도로도 없는 흙먼짓길을
  겉옷 하나 달랑 걸쳐 입은 몸으로 
  맨발 끌며 또 끌었으리 

  오작교도 없었던 반백년의 시간 동안
  내버려진 채 웅크린 그들의 그림자는 어디,   
  오늘 같은 날 달이 만든 내 그림자를 보며
  달의 뒤편을 생각하는 것은 서늘한 일이다

정군칠 시집[물집]중에서


4.3의 아침, 오랜만에 [물집]을 읽는다.
모슬포의 거친 바람이 바다를 거쳐 섯알오름을 휘돌 듯 가슴에도 지나간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격벽들이 세상과 제주 사이에 있다. 세상의 모든 ‘갈라치기‘에 있다. 분노의 표적이 필요한 이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우리안에 갇히고 오래 굶은 사자떼와 함성으로 즐기는 무리를 보고 있는 세상, [갈라치기]가 존재하는 한 4.3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허방이다.
연두, 연두. 이 아름다운 봄날, 진달래꽃빛도 설운 핏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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