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定都)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 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 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 P59

오히려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지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이에 종로구에서는 바야흐로 주목받는 이 동네 이미지를 부각하기위해 새로운 이름 짓기를 시도하여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났다는것을 내세워 세종마을이라고 명명했고 ‘사단법인 세종마을 가꾸기회도생겨났다. 또 청계천 상류인 이곳 일대를 상촌(上村), 웃대라고 불렀다며새로 지은 한옥문화공간의 이름을 ‘상촌재(上村齋)‘라고 했다. - P61

그러나 세종마을은 동네 이미지에 맞지 않고, 웃대는 어색하여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무리 관(官)이 강조한다고 해도 민(民)이받아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새 시대 사람들이 새롭게 주목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 서촌이니 민의 흐름에 따라 그냥 서촌이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은 국초부터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서촌 지역은 북부(北部) 관할이었고, 이 지역엔 북부의 10개 방중 준수방(俊秀坊), 순화방(順化坊), 의통방(義通坊)이 있었고 나중에 적선방(積善坊)이 추가된 것으로 나온다. 행정구역과는 별도로 경복궁 서쪽 지역은 통상 장의동(壯洞), 줄여서 장동(壯洞)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는 필운대 · 옥류동·청풍계·백운동까지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 명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까 서촌의옛 이름은 장동인 셈이다. - P61

이 통의동 길가에는 녹지공간으로 통의동 마을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진화랑, 아트스페이스 화랑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문화재단인 아름지기가 나온다. 아름지기 건물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종규 교수가 설계한현대식 건물과 그 2층에 김봉렬 교수가 설계한 한옥이 잘 어우러져 건축학도들이 많이 찾아간다. 아름지기 안쪽에는 젊은 관람객들이 많이찾는 대림미술관이 있다.
길가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코오롱빌딩을 지나 고궁박물관과 마주한곳에는 항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들어서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 나오고, 적선골 음식문화거리로 안내하는 골목길을 지나면 이내 광화문에서 사직단으로 뻗어 있는 율곡로와 만나게 된다. - P71

영조는 즉위 전 연잉군 시절 창의궁에서 9년간 살았고 왕이 된 뒤에도자주 찾아왔다. 창의궁은 규모가 아주 컸고 한때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사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1908년 창의궁은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는데 1917년 기록에 의하면 전체(통의동 35번지)가 2만 1,094제곱미터(약 6,380평)였다. 이후 ‘동척 사택 단지‘로개발되면서 2층 양옥들로 가득해 나 어릴 때는 부자 동네로 통했다.
월성위궁은 창의궁 바로 남쪽 적선동에 있었다(적선동 8-4번지). 월성위궁에는 1758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죽은 뒤 사당이 설치되었고 이후아들 김이주, 손자 김노영, 증손자 김정희까지 약 80년간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들이 여기 살았다. 그래서 추사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던 것인데, 1840년 추사가 제주로 유배된 뒤 이 집은 몰수됐다. 이에 월성위궁 터에는 ‘김정희 본가터‘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P75

겸재 정선은 여기에서 52세까지 살다가 지금의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있는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산수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몰락했어도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또 관아재 조영석 같은 문인화가와 이웃에 살면서 학문과 예술을 교감했다. 그뿐 아니라 지수재 유척기 같은 노론의 대신도 가까이 살았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들이 일으킨 문풍(文風)을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고 했다. - P96

겸재가 진경산수를 개척한 결정적인 계기는 35세 때인 1711년(신묘년)금강산 기행이었다. 이때 벗 이병연이 마침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에재직하고 있어서 스승 김창흡, 벗 정동후와 김시보 등 다섯이서 금강산을 유람했고, 그때 받은 자연에 대한 감동을 화폭에 담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牒)〉을 그린 것이 겸재가 진경산수화가로 나아가는첫 출발이었다.
이후 조영석의 증언대로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백악산과 인왕산을바라보며 우리 산천의 생김새를 탐구했고, 그가 그리면서 쓴 붓을 내다쌓으면 무덤이 된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수련과 연찬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 겸재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예술의 자산은 좋은 스승,
벗들과의 어울림, 학문·문학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여행이었다고 할 수 - P96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천 리를 여행하는 것이 문인의 길이라는 것을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 P97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 - P106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50년대에 우리는 언커크가 무얼 하는 기관인지도 모르고 유솜(USOM, 미국 원조단)은 또 무엇인지 모르면서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주는 밀가루와 분유와 우리가 ‘빠다‘라고 부른 마가린을 배급받았다. 아무 반찬이 없어도 밥에 빠다와 간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 고소했다. 학교에서 겨울이면 조개탄 난로 위에 큰 양은주전자로물을 끓여 석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분유덩이를 풀어 마셨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각설탕이 있어 부잣집 아이는 그걸 까서 타 마셨다.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무상 원조했다. 미국은1948년 이후 잉여 농산물이 계속 쌓여 미국 농업에 짐이 되었는데 이를바다에 버리느니 원조해주었던 것이다. 이게 더 싸게 먹혔다고도 한다.
결국 이 식량 원조는 전후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주었다. 밀가루 대량 원조는 쌀 위주의 우리 식생활도 바꾸어 밀가루 음식들이 발전했는데, 자장면이 큰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이 영향이었다고한다. -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져갔다.
이에 반해 면방직·제당·제분의 이른바 ‘삼백(三白)‘ 산업의 기업은 재벌로 성장해갔다. 기업이 원조 물자와 원조자금을 배정받는 것은 큰 이권이었기 때문에 정경유착도 관행처럼 이뤄졌고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 P133

극에 달하면서 결국 1960년 4·19혁명의 한 이유가 되었다.
화재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간 언커크는 1973년 12월 제28차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 결의로 해체됐다. 벽수산장에 화재 잔재가 완전히 철거된 것은 1973년 6월이었다고 한다. - P134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장인 손호연 시인의 한옥은 긴 미음자 집으로아주 단아한 구조인데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가고 싶게 하는 집이다. 필운동 홍건익가옥은 1935년 무렵에 세워진홍건익이라는 상인의 부잣집 한옥이다. 300평 가까운 대지에 일각문·대문채· 행랑채·사랑채·안채·별채 등 한옥의 제 요소가 언덕자락 경사면을 타고 배치되어 대갓집 한옥의 그윽한 멋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세 채의 한옥을 비교해본다는 것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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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그러니까 시는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 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 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

이 슬픔의 앙상한 다리는 어느 꽃술 위에 내려앉았나

내 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 너머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

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 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 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길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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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9~10권으로 서울편을 두 권 펴낸 뒤 여타서울 답사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이미 펴낸서울편은 창덕궁을 비롯한 5대 궁궐과 한양도성, 성균관, 동관왕묘 등조선왕조의 왕실 유적들만을 답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를 진정한 서울답사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양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가 남긴 문화유산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의 문화유산은 개화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많이 사라지고변질되어 의연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현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말하자면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현재진행형인 것이니 이제까지의 답사 유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버릴 생각도 했다.
그러다 5년 전, 서울편 출간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유홍준과 함께하는 서울 답사‘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몇 차례에 걸쳐 사대문 안 곳곳을시민들과 함께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 P4

나는 서울 서촌에서 태어나 거기에 살면서 초·중·고·대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인왕산 밑에 있었고, 중학교는 북악산 밑에 있었다. 인사동은 미술계에 입문한 후 이날 이때까지 나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내 인생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이때 북촌, 서촌, 인사동 등을 답사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이야기를 곁들여주면 답사객들은 문화재에 대한 해설보다도 나의 지난날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듣는 것이었다.
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이리하여 나의 체험적 서울 답사기로 서촌·북촌· 인사동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 막상 글을 써내려가자니 이제까지 답사기 형식과는 전혀다르게 되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나의 이런 개인적 증언이 독자들에게, 또는 답사기로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주저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애초 마음먹은 대로 나의 체험적 이야기로 서울 사대문 안 답사기를 써내려간 데에는 두 가지가 힘이 되었다.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북악산(山명승 제67호)은 높이 342미터의 화강암골산으로 서울의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북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 338미터), 동쪽으로는 낙산(山125미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262미터)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있다. 이들이 서울의 내사산(四山)으로 아늑한 분지를 이룬다. 북악산의 형국을 자세히 보면 마치 벌이 엎드려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이어서 어느 풍수가는 여기서 나오는 기가 서울을 600년 넘게 한반도의 수 - P11

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소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간혹 고려시대 남경의 터가 경복궁 후원(현 청와대) 자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최종현이 『오래된 서울』(동하 2013)에서 고증한 바대로 경복궁 안 서북쪽 모서리(향원정과 태원전 사이)의 빈터라는 설이 훨씬 설득력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 옛날에 비스듬한 평지를 놔두고 가파른 산을 어렵게 깎아 행궁을 지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복궁 뒤 북악산은 자연산림 그대로였다. - P14

내가 지금 북악산과 청와대 답사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청와대는 금단의 구역이고 비공개 사항이 많기 때문에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통령경호실에서 2007년에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 있어 어려움 없이 답사기를 쓰고 있다. 이 - P44

책은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한 이성우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이재직 시절 심혈을 기울여 거의 완벽하게 펴낸 자료집이다.
내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7년 염상국 대통령경호실장이 어느 날 내게 전화해 ‘청와대의 역사유적을 소개하는 책을 준비해왔는데 한번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이리하여 이성우 본부장이 가편집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을 가져왔는데 이를 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약 500면에달하는 이 책은 북악산과 청와대 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실록, 지도, 옛사진, 신문 기사, 청와대 내부 문서 등의 관계 자료를 현장 사진과 함께총망라했다. 그뿐 아니라 낱낱 유적의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고증했다. 그때 나는 이건 학술조사가 아니라 수사관의 현장검증 보고서 같 - P45

다는 감동을 받았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宮)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그런데 이 뛰어난 베테랑 ‘문화재 수사관‘도 확인되지 않는다며 미제처리한 유적이 몇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관저 옆에 있는 침류각(枕流閣) 건물이다. 이 건물은 기역자 형 한옥으로 세벌대 기단 위에 사각주추를 얹어 기둥을 올렸으며, 대들보가 5개인 5량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오른쪽 한 칸은 높은 장초석(礎石)위에 누마루를 설치해 기품이 당당하다. 전후면 중앙에불발기창(실내를 밝히는창)을 두고 아래위로 띠살과 교살로 구성한 창호들도 아주 품격이 높다.
목재를 보면 1900년 전후에 지어진 왕가의 건축인 것이 분명한데 <북궐도형〉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찾아보아도 침류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 건물은 1989년에 관저를 신축할 때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추정컨대 원 건물의 위치는 물길이 흐르는 곁에 있었을 것이분명하다. 우선 건물 이름이 ‘계곡을 베개로 삼는다‘고 ‘침류‘라 했기 때 - P46

문이다. 또 2019년 상춘재 앞으로 옮겨놓은 천록(天祿)이라는 돌조각상은 처음에 침류각의 기단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천록상은 보통 물가에놓이는 조각상으로 이것은 창경궁에 있었던 천록상(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한쌍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괴석받침과 드므까지 갖추고 있었다는것을 보면 궁궐 건축임이 분명한데 어디서 옮겨온 것인지 더욱 궁금하기만 하다. 아무튼 청와대 안에서 가장 볼 만한, 어떤 면에서는 유일하게아름다운 건물이 침류각이다.
고건축은 그 유래가 분명해야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워낙에 아름다워 유래가 불분명함에도 1997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 P47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건물은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정자다. 청와대 관람은 관저 뒤편의 산으로 올라가는 길까지 개방되어 있다. 이 길을따라 올라가면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천하제일복지‘ 암각글씨가 나오는데 그곳에 이르는중간에 아름다운 오운정이 나온다.
이 오운정은 현재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로 아주 멋진 건축이다. 사방 한 칸에 난간이 둘러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푸른색의 네짝여닫이 분합문(分關門) 창살의 가는 살대가 가지런하고, 우진각지붕이겹처마로 길게 뻗어 있어 단아한 가운데 무게감이 있다. 단청도 아름답다. 여기에다 멋들어진 초서로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 글씨로 우남(雲南)이라는 호와 ‘이승만 인(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오운정 또한 제자리가 아니다.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1989년 관저 신축 매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 P48

궁궐지」를 보면 북쪽에는 오운각(閣) 10칸, 동쪽에는 옥련정(亭) 1칸, 서쪽 가에는 벽화실(室) 9칸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북궐도형>에 그려진 옥련정의 평면도를 보면 이 오운정과 일치한다. 그래서나 혼자 생각에 혹시 세월이 많이 흘러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옥련정과오운각을 혼동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게 된다. - P49

오운정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미남불이라 불리우는 경주 방형대좌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이 불상은 본래 경주 어딘가에 있던 것을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가져와 당시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 건물에모셨다가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청와대 자리에 신축될 때 옮겨왔다.
처음에는 저 아래쪽 ‘천하제일복지천‘이라는 샘터 뒤쪽으로 모셔졌는데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본래대좌가 상중하 3단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나 지금은 상단만 남아 있고 팔과 어깨, 등허리에 파손된 부위가 있어 2007년에 보존 처리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원위치는 그동안 경주 남산 불상 계곡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초대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사오의『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1916)에서 경주 도지리(道只里) 이거사(車寺) 터를 말하면서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大正) 2년(1913) 중에 총독 관저로 옮겼다"고 언급한 것이 최근에알려져 현재 이 절터에 온 것이라는 설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불교미술사가 중에는 아직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하니 이거사 터의 발굴 등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 P51

이 불상은 조형적으로 뛰어나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도 실려 있다. 이 도록에서는 소장처를 왜성대라고 했다. 이불상은 상호(얼굴)가 미남형이어서 일찍부터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있었던 듯하다.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에서는 이 석불을 취재하면서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이 불상은 774년에 완공된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 P51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으로 대개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는 늠름한 자세에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후덕한 인간미를 풍긴다. 어깨와 가슴에는 볼륨감이 나타나 있고 옷주름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뚜렷이 나타나 있다. 과연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불상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나타낸 미남불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이 불상은 2018년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되었고, 유물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方形臺座石造如來坐像)〉으로 명명됐다. - P53

윤석열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 국방부 건물로, 관저는한남동으로 옮겨가면서 청와대는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5월 10일부터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되고 있다. 예상한 대로 많은 인파가 몰려 오랫동 - P55

안 금단의 지역으로 있으면서 전 대통령들이 근무하고 기거하던 청와대를 구경하고 있다. 어차피 대통령이 떠난 곳을 국민에게 개방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문부터 열고 보았기 때문에 많은 잡음이 일고 있다. 혹은 청와대 구관을 복원 또는 축소 복원하겠다고 했다가 국민적 반발에부딪혔고, 미술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운을 띄우기도 했지만 그 미술관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최근에는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장소로 제공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문화재청장과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장을 지낸 나로서는 청와대 개방 문제에 대해 개인 의견을 내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 그동안 언급을 자제해왔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로서 한마디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56

56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 - P56

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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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이라고 하면 대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던 곳으로 알고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궐이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원래 이 자리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홍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창경궁·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1593년 의주 - P195

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저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선조가 머물던 건물이 섞어당(昔御堂)이다. 석어당이란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을 이궁(離宮)으로 삼기 위해 공사를벌였으나 1623년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가 공사를 중단시키면서왕가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반정 직후 인조가 임금으로 즉위한즉조당(堂)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옛날을 말해준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 P196

당시 경운궁 주위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공사관 등이 둘러싸고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런 시류에 맞추어 경운궁 돈덕전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속속 세웠다. 이때가 경운궁의 전성기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壽)라는 이름을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 - P196

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갔다.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면 건축이 바뀌게 마련이고, 건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뜻이기도 하다. 덕수궁을 보면 확실히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에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97

2009년 11월 27일 산화신기전 발사 실험에서는 비행중 2단 로켓에해당하는지화통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산화신기전은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며 500~600미터를 비행해 내려가다 지화통에 불이 붙고 지화통은 소발화통이라는 폭탄과 함께 빠르게 날아가 폭발한다.
자격루와 신기전기 화차는 비록 덕수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도 위대한 문화유산들로 조선시대 과학사의 명작이자 큰 자랑이다. 귀중한국보와 보물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덕수궁 답사에서얻는 망외의 ‘득템‘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유물을 이렇게 옥외에전시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비추는 일 없이 덕수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24

그러나 세월은 여러 가지로 고종 편이 아니었다. 1904년 4월 14일, 불행히도 경운궁에 대화재가일어나 중화전, 함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황급히복구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때는 조만간을사늑약을 당하고 마는 시절인지라 국력을 경운궁 복원에 쏟을 수 없어 단층 건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궁궐의 명맥과 명색이 유지되었던 것은 왕조를끝까지 지키려던 고종의 의지 덕이었다.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 P227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화전 곁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에서 시작해야 한다.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칠해지지 않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아 기거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라 옛석(昔) 자, 어거할 어(御) 자를 써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석어당 또한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때 소실되었는데, 사실 궁궐 체제에 꼭 필요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선조가 전란 중에 임했다는 역사적의의를 저버리지 않고 이듬해에 바로 복원했다. 그런 사연이 깃든 석어당 뜰 앞에는 지금도 늠름하게 잘생긴 살구나무 한그루가 마치 역사의상처를 보듬듯 봄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송이를 소담하게 피워내고 있으니, 덕수궁에 와서 석조전, 미술관만 관람하고 무심히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여, 살구꽃 피는 4월 어느 날 이 석어당 노목 아래에서 나의 경운궁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 않으시려는가. - P227

광해군은 선조와 마찬가지로 석어당에 기거하고 즉조당에서 ‘청정(聽政)‘했다. 청정이라! 창덕궁 선정전 답사 때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시대임금의 정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 한 것은 재삼 음미해볼필요가 있다. 청정이라는 말의 뉘앙스때문에 대리청정, 수렴청정이라하면 마치 왕이 주변에서 자문이나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왕이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업무를 보았다는뜻이다. 국무위원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는 통치자가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말뜻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 P235

광해군이 이처럼 새 궁궐 건축에 집착했던 것은 왕의 지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광해군은 자질이 뛰어나고 왕세자로서 임진왜란에 적극복해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직접전쟁을 치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광해군은 왕이 된 후 외교·국방에서남다른 수완을 보여주었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힘겨루기를 하던 당시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적당히 조율하는 ‘주선(周旋)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친명(明) 사대주의 입장이었던서인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 인조반정이고, 인조 때 외교의 균형이 명나라로 기울면서 청나라가 쳐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 P243

그런 광해군이었지만 서출인 데다 둘째 아들로 적통이 아니었고 왕이되는 과정도 험난했기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을 느껴 ‘살제폐모‘를 저질렀고 왕의 권위를 한껏 보여주고자 무리하게 궁궐 신축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가 술사들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현혹되었던 것도그런 정서적 불안 때문이었다. 어머니 공빈 김씨가 해산 후유증으로 일
‘찍 세상을 떠난 것도 그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원인이었다. 치유되지 않는 콤플렉스와 불안한 정서는 광해군 개인과 나라의 불행이 되었다.
이리하여 경운궁, 인경궁, 경덕궁 세 궁궐 공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나라가 온통 공사판이었다. 인력도 달렸고 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다.  - P243

아관파천 후 꼭 1년 만이었다.
그때 고종은 환궁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지난번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덧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신민(臣民)들이 모두 알 것이다. (...) 아! 내가 정사를 잘못해 (...) 오늘과 같은 상황을 야기하고말았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맡은 관리들은 한결같이 몸과 마음을 다하라. (...)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서 건너갈 때 상앗대로 노를 젓는 것처럼 각각 그 힘을 써야 쉽게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해이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다. (...) 나의 신하들 역시 함께 건너는 의리를 생각해서 조금도 해이해지지 말지어다.(조선왕조실록 고종34년(1897) 2월20일자)


엿새 뒤인 2월 26일 고종은 온 국민이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자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 P258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이다. (...)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했으니 (...) 세상에 따로 설명하지않아도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0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개국되었다.
이튿날인 10월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했으며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이라 공포했다. 연호는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었다. 사실 갑오개혁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 때 일련의관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태양력과 함께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양 2년이 곧 광무 원년이 된 것이다. - P262

10월 14일 대한제국은 이 사실을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수립의 의의를 간취하고 있었다.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W. F. 샌즈는 1930년 미국에서 간행된 『조선비망록』(신복룡 옮김, 집문당 199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은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있으나 황제는 누구의 신하가 될 수 없기때문에 황제에 즉위하면 중국, 일본, 러시아 황제와 동등해진다는 전통적 이론에 근거했던 것이다. - P262

광무개혁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제로 나아감으로써 정치적으로 봉건성을 면치 못했던 것은 시대의 한계였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혹자들이말하듯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탈 탓에 우리의 독자적인 근대화가 좌절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단명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 P271

경운궁을 겨우 복원한 고종이었건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18일 강제로 퇴위되어 황태자 대리청정을 발표하고 태황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8월 27일에는 순종이 석조전 뒤에 있던 양관인돈덕전(德殿)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 돈덕전은 1902년에 총해관 터에 지은 양식 건물인데, 고종이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고 수많은 연회도 열었던 테라스가있는 예쁜 2층 벽돌집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헐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근래에 목수현 박사가 돈덕전의 1층 평면도를 찾아내어 문화재청에서 바야흐로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돈덕전이 복원되면 근대국가의 궁궐로서 덕수궁의 면모가 더 확연히 드러나게될 것이다 - P278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은 법궁의 지위를 내주게되었다. 이때 순종이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고종이 기거하는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태황제로 머물고 있던 1910년 대망의 석조전(石造殿)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하고고종의 칭호를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했다. 이 때문에 석조전은 황실의 궁궐로는 사용되지 못했다.
덕수궁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던 고종에게 즐거운 일이란 없었다.
1911년 7월 귀비 엄씨(순헌황귀비)가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고, 9월엔 고종이 육순을 맞이했으나 순종이 그를 알현하러 왔을 뿐이었다. - P279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1월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 대부분을 철거할 계획을 밝히고 이후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 매각했다. 선원전 구역은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에 팔려 나갔다.
1922년에는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도로가 생기면서 귀비 엄씨의 혼전(殿) 등이 도로 건너편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옛 궁궐의 훼철에 박차를 가했다. 1931년에는 덕수궁 부지 1만 평을 대공원으로 건설한다는 계획을발표했다.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33년 일제는 마침내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했다.
석조전에 일본 작품만 전시된 것에 대해 불만이 일어나자 1936년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석조전 서관을 짓고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미술관을옮겨왔다. 그해 9월에 서구식 정원을 본뜬 분수대를 설치하면서 옛 궁궐의 이미지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 P280

잊힌 제국, 대한제국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경운궁과 덕수궁의 한 많은 역사의 여정을 마친다. 덕수궁 답사기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덕수궁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답사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실체를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선포되었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은개국 120주년, 옛날식으로 말하면 2주갑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날 이때까지 이를 기리는 사업을 볼 수 없고 이를 각별히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고종이 1893년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갔다가 한양으로 - P299

환어한 지 5주갑, 즉 300주년이 된 것을 기린 데 비하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이 불과 1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마지막만 떠올릴 뿐 대한제국의 실체를역사의 기억으로 거의 간직하지 못한 채 흔히 구한말(韓末)이라고 칭하면서 조선왕조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로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끝났고 그때부터 대한제국의 13년 역사가 이어졌다.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P300

그리고 내일의 일이란 밀려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 유커(遊客)들이동관왕묘에 열광할 것이라는 기대다. 관왕묘는 중국인을 상대로 할 때더없이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관우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삶과 마음속에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신이다. 중국인들이 행복과 재물을 다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시는 분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모택동도 아니고관왕이다. 중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을 가나 관왕묘가 있다. 어떤 통계에따르면 약 30만 개가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집과 상점에 관우사당을 따로 두고 매일 치성을 드릴 정도다. 새해를 맞이하는 춘절(春節)때 집집마다 붙이는 연화年畵) 중 가장 인기 높은 것도 관우 초상이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관왕묘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은 왕에게 올릴 향 다발부터 찾을 것이다.
더욱이 유커들은 이처럼 연대가 오래되고 품위 있는 동관왕묘와 관우상이 있음에 놀라고 크게 감동하며 한국문화에 친밀감도 느낄 것이다. - P311

고금도 충무사에서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장수 진(陳)이 세운 고금도의 관왕묘는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충무사(忠武祠)‘로 변신해있다. 이곳 고금도는 13척의 배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1598년 2월에 조선군 2천명을 거느리고 진영을 세운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진지는 덕동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명나라 구원군 진린 도독이 전함 수백 척과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 곁의 묘당도(廟堂島)에 주둔하면서 이곳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진린 도독은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향을 받들었다. 이것이고금도 관왕묘의 유래다.
그리고 그해 11월 퇴각하는 왜군을 상대로 한 노량해전에서 조선과명나라 수군은 대승하며 마침내 전쟁을 끝내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순직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고금도 월송대에 안치되었다가 83일 뒤 아산의 묘소로 운구되었다. - P332

진린 도독은 고금도를 떠나면서 남은 재물들을 섬사람들에게 주며 관왕묘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후 현종 때(1666)에는 관왕묘를 동무와 서무를 거느린 품(品)자형 사당으로 중수하고 동무에 진린 도독,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숙종 때 (1710)에는 이이명이 이순신은 벼슬이 비록 정2품에 그쳤지만 그 공로는 건국이래없던 것이었으니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 숭배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향사가 국가적 제향이 되었다. 이때 이이명이 쓴 ‘고금도 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고금도에 관왕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명나라가 구원군을보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사당(묘)이라는 뜻으로 1791년 ‘탄보묘(誕報廟)‘
라는 사액을 내려 묘격을 올렸다. 이와 함께 1792년에는 노량대첩 때 전 - P333

사한 명나라 부총병등자룡(龍)도 함께 향사케 하여 동무에 진린과등자룡, 서무에 이순신을 모시게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가 1922년 유(有) 재산처분령을 내려 훼철 위기를 맞았는데, 고금도 유림이 계를 조직하여 관왕묘와 그 부지 1,550평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무렵에는 총독부의 항왜 유적 파괴 시책 때문 - P334

에 관왕묘에 있던 관우상이 파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관왕묘 또한 훼철될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에도 섬사람들이 기지를 발휘해 관왕묘를 사찰로 쓰겠다며 불상을 모셔놓아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보존했다.
8·15해방 후 1947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기일을 맞아 다시 제향을 올리게 되었고 1953년에는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옥천사를 경외로 옮겼다. 1959년에는 정전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동무에는이순신 장군을 보필했던 이영남(李英男) 장군을 배향했으며, 충무사는1963년 국가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진린 도독이 세운 관왕묘는 이렇게 이충무공 유적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 P335

이리하여 지금의 고금도 관왕묘는 더 이상 관왕묘도, 정조가 내려준단보도 아니게 되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사당인 묘당도는 원래대로 관왕묘로 복원하여 정전에 관왕, 동무에는 진린 도독, 서무에는 둥자룡 장군을 모시고, 여기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덕동리의 옛 이순신 장군 진지에 이순신 장군의 새 사당을 세워 그곳을 충무사로 모시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이 시대의 정신을 담은 멋진 추모시설도 갖추어 고금도가 임진왜란 극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로 다시 태어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역사적 현장이 갖는 공간의 진정성과 원형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화유산보존의기본 방향에 맞다. - P335

첫번째 현장답사 때 우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백남준 살던 집에 들렀다가 박수근 살던 집을 거쳐 동관왕묘에 이르는 답사 코스를 다음과 같이 잡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맑은내다리 - 신발도매시장(상가) - 종로50길 -동신교회 - 문구·완구시장 입구 - 창신시장 입구 - 종로53길 골목길 입구 - 백남준 살던 집 - 동묘앞역 4거리-동대문아파트 - 시즌빌딩(옛 동대문스케이트장) - 박수근 살던 집 - 동관왕묘


가는 길에 만나는 동신교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화백이 다니던 교회인데, 지금은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뒷동산으로 이장된 박수근 화백의 묘소가 처음 포천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교회의 장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얘기로는 김광석, 윤형주, 조영남이 다 이 교회 합창단 출신이라고 한다.
- P366

성균관이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와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크다. 성균관의 대성전과 명륜당, 동무와 서무, 그리고 외삼문까지 일말해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묘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제(釋奠祭)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참뜻이 유형의 문화재에서 무형의 가치를 새가는 데 있다고 한다면 성균관에 절절히 서려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채취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다.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등이성균관 출신이었고,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은 이 학교 교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 P38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아!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길을 갈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그간 80리만 가도 다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 P389

비천당을 둘러보고 다시 명륜당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보아도 넓은 명륜당 앞마당은 은행나무 고목이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손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조경이 되었다는 감동과 찬사가 나온다.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맞닿는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1미터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12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품이 넓다. 그중 동쪽의 나무는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이제는 상처가 회복되었다. 두 은행나무 아래로는 싹이 돋아 한 아름씩이나 되는7개의 ‘싹 나무‘가 주위를 호위하듯이 감싸고 있어 외롭지 않아 보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尹悼)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으면서 기초가튼튼해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고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니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했다고한다. - P404

성균관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 생김새나 둘러보다가 대성전 안을 들여다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나는 대성전에 공자만 모셔져 있는 줄 알았다. 안자, 맹자 등 중국의성현과 정이, 주희 등 송대 유학자를 함께 모신 것까지는 그랬었구나 하는 새로운 일깨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의 위패가 있는 것은 신기했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조광조·이황 · 이이·송시열 등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굉필·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
박세채 등 그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내 지식으로는 학문과 이력을 말하기 힘든 학자들의 위패도 있었다.
"나는 자신의 상식에 큰 회의를 느꼈다. 이른바 ‘문묘배향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을 대성전에 모셨다는 것도 몰랐고, 기실 우리나라 유학을대표하는 18현의 이름도 다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 P446

안회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공자라는 훌륭한 분을 만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배운 결과라는 뜻이다.
요즘 ‘롤모델‘이라는 화두가 유행해 학생들에게 자기 인생의 롤모델을찾아보라는 숙제를 주는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무명자 윤기가 반중잡영 220수를 읊은 것도 따지고보면 평생 성호 이익을 존경해 그 천리마 꼬리를 놓지 않고 실학정신의 자세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외교적 기술보다 한 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나는 슬라이드를 분류하면서 전사청 앞 사진을 보고 잠시 놀란 적이있다. 성균관에 이렇게 예쁜 공간이 있었던가 싶어 다시 확인해보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주 효종대왕 영릉(寧陵)의 재실 같은 분위기가 있다. 사괴석으로 단정하게 쌓은 기와 돌담 양쪽에 나 있는 아담한 문, 그너머로 보이는 전사청의 맞배지붕과 멀리서 고개를 내민 수복청의 팔작지붕, 그 선의 어울림이 높낮이를 달리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참으로 정겨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이다. - P467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홍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은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 P479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 P480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은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화적 변혁이 정조시대에 그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반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미술사로 한정해 말하면, 이 시기엔 중국화풍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매몰되어 있던 종래의 그림 세계가 넓어져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 - P480

산수, 현실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가 탄생했고 회화의 진수를 담아낸문인화풍이 안착함으로써 미술사의 꽃을 피웠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엔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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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 5백만 명, 총인구의 반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울의 국가적 위상이 실로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生作長安草 勝爲邊地花)"고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서울의 힘과 자랑은 문화유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울은 세계굴지의 고도(古都) 중 하나다. 길게는 2천여 년 전에 시작된 한성백제 - P15

500년, 짧게는 조선왕조 500여 년과 근현대 100여 년간의 수도로서 역사의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다. 더욱이 서울은 로마나 아테네처럼 오래된 과거 위에 현재가 그냥 얹혀 있는 도시가 아니고, 중국의 서안시안), 일본의 교토(京都)처럼 수도의 지위를 내준 역사도시도 아니고600여 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이자 고도다.
중국의 북경(北京, 베이징)이 그 유래나 문화유산의 성격에 비슷한 면이있지만 북경은 자금성·천단·이화원 같은 몇 개의 거대한 황실 건축들이도심 속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음에 비해 서울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종묘사직단·성균관 문묘 등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들이여전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도시 공간의 매력은 자리앉음새에서나온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 - P16

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양도성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이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있다.
서울을 그린 또 하나의 고지도는 한양도성의 외곽까지 그린 「경조도(京兆圖)」다. 경조란 서울 지역이라는 뜻이니 ‘수도권 지도‘인 셈이다. 이를 보면 북쪽의 북한산(836미터), 동쪽의 용마산(348미터), 남쪽의 관악산(629미터), 서쪽의 덕양산(125미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外四山) - P17

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성 북쪽으로는 준수하고도 장중한 삼각산과 도봉산이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활모양의 긴 호)를 그리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들판 너머에 관악산이 듬직한 수문장인 양안쪽을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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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옛 지도는 먹으로 산·강·개천·거리 · 건물들을 명확히 표시하여 지도로서 정확한 정보를 드러내주면서 강은 파랑, 산은 초록, 건물은빨강과 노랑으로 채색하여 한 폭의 실경산수화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서분명히 보이듯이 서울에는 산·강·도시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우러져있다.
짙은 녹색의 산줄기는 서울의 골격이 되고, 푸른 물줄기들은 도시의살과 근육이 되고, 붉은색으로 나타낸 촘촘한 도로망은 실핏줄처럼 퍼져있어 마치 산천의 맥박이 뛰는 것만 같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 P18

서울의 경우, 이성계의 명(또는 부탁을 받은 무학(無學) 대사가 조선의도읍으로 정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학대사가 한양정도(定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도 신중했다. 무학대사의 낭만적인 발품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풍수에 높은 안목과 학식 있는 당대의 경륜가들이 총동원되어 검토한 결과였다. 학자마다 여러 곳을 신도읍 물망에 올렸고 공사를 시행에 옮기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마지막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새 도읍지 물색 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건축사에서 그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얼마나 신중한 검토 끝에 한양땅을 서울로 삼았는가를 생각하면 서울 사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모두가 조상들의 그 진지한 노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4

계룡산 신도읍을 포기한 태조는 문제를 제기한 하륜에게 직접 천도할땅을 조사해보라고 명했다. 동시에 고려왕조에서 풍수를 담당했던 기관인서운관(書雲觀)에저장된 비록문서(秘錄文書)들을 하륜이 모두 열람해 참고할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이 대목에서 고려왕조의 국가 기록과소장 도서가 얼마나 잘 관리되어 있었는지와 하륜에 대한 태조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태조의 명을 받은 하륜은 신도의 후보지로 서울 무악산(母岳山, 안산)남쪽, 오늘날 신촌 연희동 일대를 제시했다. 이에 태조는 재위 3년(1394)2월에 권중화, 조준 등 대신들을 현지로 보내 살펴보게 했다. 태조의 명을 받고 현지로 내려간 대신들은 지세와 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으로 불가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태조는대신들의 주장이 워낙 강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P33

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해 도시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 1일에는 신도읍 조성 임시본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청성백(靑城) 심덕부(德)를 책임자(判事)로 임명했다. 고려 말의 문신인 심덕부는 위화도회군의 1등 공신으로 여섯째 아들이 태조의 사위였고, 다섯째 아들은 세종의 장인이었다. 한양신도 건설에는 심덕부 같은 개국공신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해 신도읍 한양 설계에 들어갔다. 당시 국가의 모든 일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조는 아예 한양으로 내려갔다. 태조가 개성을 출발한 것은 10월 25일이었으며28일에 도착했고 한양부 객사를 행궁行宮, 임시 궁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착수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정도전은 종묘사직단·경복궁등 왕실 건축은 물론 도로와 시장까지 신도의 기본 설계를 완성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P35

지금도 한양도성의 성벽 곳곳에는 ‘진자 종면(辰字 終面, 진 자 구역 끝 지점)‘ ‘강자 육백척(六百尺, 강자 구역 600척)‘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郡)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나타내 ‘의령시면 경상남도 의령,
구역의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구역의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 보수공사를 할 때는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 갑자10월일(嘉慶九年甲子十月日, 1804년 10월) 패(牌)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首) 용성휘(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 P38

그리고 한양도성이 완성된 뒤 세종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인 예겸(倪謙)은 한양 도심을 내려다보고 지은 루부(登樓賦)」에서 이렇게 읊었다.


북악산이 뒤에 솟고 궁궐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고 성벽이 사면으로 둘렸네
높은 성벽 서쪽으로 구불구불 둘려 있고
잇달아 휘둘려서 높고 낮게 동편으로 뻗어갔네 - P45

물을 말하노라면 개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은하수가 꽂힌 것 같고
한강수는 넓게 흘러 발해로 들어가니
물고기를 편하게 키워주고 논밭이 기름지게 해주네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에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점은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크게다르다. - P46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가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지 절감할 수 있다. 대한민국 또한 통치에 관한 기록 관리가 대단히 철저하다.
우리가 부르는 문화재 명칭 하나도 정해진 절차를 거쳐 대한민국 관보(官報)』에 고시된다.
1963년 1월 21일, 국가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지정할 때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축성된 한양의 성곽은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이라고 했다. 이것이 지난 50여 년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해온 ‘서울성곽‘이다. 그러다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명칭을 고칠 필요가 생겨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변경했다.  - P47

많은 사람들이 입에 익은 대로 여전히 서울성곽이라 부르고, 나 또한이를 별칭 내지는 애칭으로 사용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서울 한양도성이다. 일반인들은 그게 그거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명칭에는 사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서울성곽과 한양도성이라는 명칭 차이는 이 유적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서울성곽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옛날 전쟁에 대비해서 쌓은 성곽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일본·유럽의 도시에서 볼수 있는 거대한 성곽과 성채를 연상하면서 서울은 성벽이 저렇게 낮고도성의 관문인 숭례문조차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어떻게 전란을 견뎠겠느냐는 둥,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서울을 방어하지 못하고 임금이 맥없이 평안도 의주로 피란 간 것 아니냐는 둥 지레짐작하며 자조() 섞인 비하를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이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들으면 나는 속에서 불같이 화가 치솟는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렇게생각하게 만든 것은 문화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 탓이고 거기엔 이름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 P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P48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이 자리가 도읍지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그가 전제로 내세운 첫마디는 "도성을 쌓으면"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고을이던 한양과 조선왕조가 수도로 건설한 한양의 차이는 도성이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한양도성이 있는 서울과 없는 서울의 역사적 품격의 차이를.


조선시대 전쟁에 대비한 방어체제는 어떻게 한 것인가. 그 답은 바로산성(山城)이다. 본래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는 지형 특성상 전투가 도성이 아니라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시엔 도성 안에서 살다가 전란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는 방식이었다.
한양도성을 비롯해 지금 남아 있는 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은주민의 안전을 위해 도적의 침입을 막는 고을의 울타리 정도였고 전란을 위한 산성은 따로 쌓았다. 그 때문에 삼국시대 이래 전국에 무수히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 P49

서울 인근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행주산성과 아차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삼국시대에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는온달산성·삼년산성·장미산성·견훤산성 등 자못 규모가 큰 산성들이 축조되었다. 태백산·소백산·지리산 같은 명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길목의 야산에 쌓은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이래 중앙집권체제가 견고해 내란의 위협이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중국·일본·유럽처럼 지방에 뿌리내린 호족이 정치·행정·군사에 힘을 행사하는 봉건사회를 경험하지 않았다.  - P49

그러던 어느 날, 거의 기대가 없었는데 북악산이 마침내 개방되어 서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 P58

풍경 뻬레스트로이까ㅡ북악산 개방에 부쳐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꼬바에도 없는 산(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 P64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라,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비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 P65

아,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황지우의 이 축시는 숙정문 입구 서울성곽 안내판 곁에 걸려 있다. 기념식이 있고 얼마 뒤 황지우 시인에게 축시를 써준 것에 감사하니 그는
"내 생전에 어용(御用)시를 쓰리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북악산이날 불러냈네요"라며 그날의 감격을 다시 말했다. - P65

북악산 정상에 다다르면 보이는,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그 넓고 멀고시원한 전망을 내 문장력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한다. 숙정문에서, 촛대바위에서, 청운대에서, 암문 밖에서 보아온 전경들은 세세한 한 것일 뿐그야말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이 통쾌한 전망은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시드니에도, 베를린에도 없는 서울만의 자랑이다.
여기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용틀임하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성곽 라인의 설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자연을 배반하기는커녕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탄을 자아낸다. - P80

서울 사람들은 창의문이라면 몰라도 ‘자문밖‘이라면 금방 안다. 정식동네 이름은 부암동,신영동 구기동·평창동·홍지동이지만 나 어렸을 때는 그저 자문밖이라고 불렀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의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것이다. 올해(2017)로 5회째를 맞이하는 이 동네 축제의 이름도 ‘자문밖축제‘라고 한다.
나는 1955년 4월 1일 서울 청운초등학교에 입학했다(그때는 새 학기가4월에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소풍은 경복궁으로 갔고, 2학년 때는덕수궁, 3학년 때는 창덕궁(그때는 비원이라고 부름)으로 갔지만, 4학년부터6학년까지 3년간은 명색이 고학년이라고 언제나 자문밖 세검정이나 백 - P87

사실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청운초등학교에서 고개만 넘으면 곧 자문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 세검정초등학교 애들은어디로 소풍갈까궁금해했다.
그때 어린 내 눈에 자문밖엔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다. 육중한 바위와세차게 흐르는 계곡, 그리고 능금밭과 자두밭 일색이었다. 당시엔 세검정의 정자도 없었다(지금의 정자는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지금은 개천이 복개되어 도로가 나고 연립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그 당시 세검정개울가에는 엄청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서 모두들 거기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의 소풍이었다.
한길가에는 코 묻은 돈을 겨냥해 광주리 가득 능금과 자두를 담아 팔던 행상이 늘어서 있었지만 나도 내 친구도 시큼한 능금보다는 신나게돌아가는 솜사탕에 손이 먼저 가곤 했다. - P88

서울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예나 지금이나 개나리와 진달래다. 그중에서도 화신(花信)의 전령은 개나리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변화로 올해(2017)는 어느 날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고 말았지만 봄꽃의개화에는 엄연히 꽃차례가 있었다.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2월 말에도 서울의 꽃들은 미동조차 하지않는다. 3월도 중순이 되어야 북한산·인왕산·북악산에 생강나무와 산수유 노란 꽃이 소리 소문 없이 피어나고 금세 시내 곳곳에 개나리가 피기시작한다. 서울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 P117

사람에게 팔자가 있듯이 유물에도 팔자가 있는데 건물의 경우는 반드시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과 팔자가 오래간다는 것이 사람과 다르다. 유명한 대저택이나 별서는 처음엔 상속하지만 대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대에 가서는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된다. 이때 누구를 주인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집의 팔자가 바뀌게된다.
흥선대원군 사후 석파정의 소유권은 큰아들이자 고종의 형님인 흥친왕이재면(李載冕)에게 상속되었고, 그후 손자인 영선군 이준용(李埈鎔),
그다음엔 증손자 이우(李)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8·15해방과 한국전 - P140

쟁을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의 후손은 더 이상 이 거대한 별서를 감당하지 못해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주인이 천주교도였고 건물은 전쟁 후유증이 낳은 고아와 결핵 환자들을 보호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면서 그 팔자가 이제는나라의 운명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물 소유주 입장에선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 더 이상 건물을 헐고 신축하거나 증축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석파정은 다른 주인에게 넘어갔고 2004년에는 소유주의 부채를 집행하기 위해 법원이석파정을 경매에 부쳤다. 두 차례 유찰 끝에 새 주인을 만났으나 또 소유주가 바뀌다가 마침내 새 주인이 나타나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라는 명성을 지닌 석파정을 후광으로 삼아 인근에 서울미술관을 지어서2012년 개관과 동시에 석파정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 P141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의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내가 『명작순례』(2013)에서 해설한적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 P149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승에게서 이런 칭찬을 듣자 석파는 자신의 ‘난화첩‘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더욱 칭찬하여 세상 사람들은 늙은 자신에게난초 그림을 부탁하지 말고 석파에게 구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일침을놓았는데 그 말이 준엄하기만 하다.
아무리 9,999분에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1분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 P149

어렵습니다.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우리는 2퍼센트 부족한 것을 말하지만 추사는 0.01 퍼센트 부족해도완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엄한 가르침을 받은 덕에 석파의 난초 그림은 중국의 명사들까지 받아가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난초 그림을
‘석파 난‘이라고 불렀다. - P150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만나듯 하고

讀己見書 如遇故人
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석파는 그 파란만장한 이력이 말해주듯 술도 잘할 수밖에 없었는데술에 대해서도 높은 경지의 한 말씀을 남겼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아서M. 새클러(Arthur M. Sackler) 뮤지엄에 소장된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10곡 병풍에는 석파가 사용한 문자도장들이 각 폭마다 찍혀 있는데 그중 제4폭에 찍힌 도장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 P151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P152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현진건은 1940년, 친구의 권유로 미두(豆) 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여 파산했고 부암동 집과양계장을 처분하고는 제기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궁핍 속에서 현진건은 결국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향의 문우였던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대구에서 별세했다.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인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문학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P169

빙허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나1943년 4월 25일생을 마친 한국 사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암담한 현실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43년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빙허의 굳은 지조와 그 철저한 문학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 살아 숨쉴 것이다. - P169

현진건의 「빈처」는 작가, 즉 지식인의 자기 독백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내 「운수 좋은 날」에서는 김첨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더군."
"그렇지요. 「운수 좋은 날」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민중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대접받기 시작하던 초창기 작품이지. 현진건은 말로는 프문학에 주저했지만 실제 작품 실천에서는 프로문학을 선도했어요. 방화로 끝나는 「불」은 더해. 민중이 직접 주인공이 되는 소설과 함께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을 그린 일군의 작품이 있는데, 경부선 차중을 그린 「고향」이 대표작이고요. 한중일 세 나라 옷을 걸치고 세 나라 말을 지껄이는껄렁한 노동자에 처음에는 불편해하다가 그 이산의 비극에 공감하며 결국엔 붙잡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잖아. 그렇게 현진건은 식민지의 비극을온몸에 두른 민중을 만났어요." - P171

역시 집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하고 한옥은 사람이 거주할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 허물어져가던 부암정이 좋은 집주인 덕에 이렇게 완벽히 복원되어 부암동이 도성 밖 최고의 별서 지역이었음을 웅변해주고 있으니 한양의 옛 향기를 오히려 여기에서 느낀다는것이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부암정은 살림집이기 때문에 일반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1년에 한 번 ‘오픈하우스 서울‘ 행사를통해 공개된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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