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 5백만 명, 총인구의 반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울의 국가적 위상이 실로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生作長安草 勝爲邊地花)"고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서울의 힘과 자랑은 문화유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울은 세계굴지의 고도(古都) 중 하나다. 길게는 2천여 년 전에 시작된 한성백제 - P15
500년, 짧게는 조선왕조 500여 년과 근현대 100여 년간의 수도로서 역사의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다. 더욱이 서울은 로마나 아테네처럼 오래된 과거 위에 현재가 그냥 얹혀 있는 도시가 아니고, 중국의 서안시안), 일본의 교토(京都)처럼 수도의 지위를 내준 역사도시도 아니고600여 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이자 고도다. 중국의 북경(北京, 베이징)이 그 유래나 문화유산의 성격에 비슷한 면이있지만 북경은 자금성·천단·이화원 같은 몇 개의 거대한 황실 건축들이도심 속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음에 비해 서울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종묘사직단·성균관 문묘 등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들이여전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도시 공간의 매력은 자리앉음새에서나온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 - P16
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양도성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이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있다. 서울을 그린 또 하나의 고지도는 한양도성의 외곽까지 그린 「경조도(京兆圖)」다. 경조란 서울 지역이라는 뜻이니 ‘수도권 지도‘인 셈이다. 이를 보면 북쪽의 북한산(836미터), 동쪽의 용마산(348미터), 남쪽의 관악산(629미터), 서쪽의 덕양산(125미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外四山) - P17
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성 북쪽으로는 준수하고도 장중한 삼각산과 도봉산이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활모양의 긴 호)를 그리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들판 너머에 관악산이 듬직한 수문장인 양안쪽을 지켜주고 있다. . 서울의 옛 지도는 먹으로 산·강·개천·거리 · 건물들을 명확히 표시하여 지도로서 정확한 정보를 드러내주면서 강은 파랑, 산은 초록, 건물은빨강과 노랑으로 채색하여 한 폭의 실경산수화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서분명히 보이듯이 서울에는 산·강·도시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우러져있다. 짙은 녹색의 산줄기는 서울의 골격이 되고, 푸른 물줄기들은 도시의살과 근육이 되고, 붉은색으로 나타낸 촘촘한 도로망은 실핏줄처럼 퍼져있어 마치 산천의 맥박이 뛰는 것만 같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 P18
서울의 경우, 이성계의 명(또는 부탁을 받은 무학(無學) 대사가 조선의도읍으로 정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학대사가 한양정도(定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도 신중했다. 무학대사의 낭만적인 발품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풍수에 높은 안목과 학식 있는 당대의 경륜가들이 총동원되어 검토한 결과였다. 학자마다 여러 곳을 신도읍 물망에 올렸고 공사를 시행에 옮기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마지막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새 도읍지 물색 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건축사에서 그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얼마나 신중한 검토 끝에 한양땅을 서울로 삼았는가를 생각하면 서울 사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모두가 조상들의 그 진지한 노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4
계룡산 신도읍을 포기한 태조는 문제를 제기한 하륜에게 직접 천도할땅을 조사해보라고 명했다. 동시에 고려왕조에서 풍수를 담당했던 기관인서운관(書雲觀)에저장된 비록문서(秘錄文書)들을 하륜이 모두 열람해 참고할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이 대목에서 고려왕조의 국가 기록과소장 도서가 얼마나 잘 관리되어 있었는지와 하륜에 대한 태조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태조의 명을 받은 하륜은 신도의 후보지로 서울 무악산(母岳山, 안산)남쪽, 오늘날 신촌 연희동 일대를 제시했다. 이에 태조는 재위 3년(1394)2월에 권중화, 조준 등 대신들을 현지로 보내 살펴보게 했다. 태조의 명을 받고 현지로 내려간 대신들은 지세와 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으로 불가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태조는대신들의 주장이 워낙 강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P33
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해 도시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 1일에는 신도읍 조성 임시본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청성백(靑城) 심덕부(德)를 책임자(判事)로 임명했다. 고려 말의 문신인 심덕부는 위화도회군의 1등 공신으로 여섯째 아들이 태조의 사위였고, 다섯째 아들은 세종의 장인이었다. 한양신도 건설에는 심덕부 같은 개국공신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해 신도읍 한양 설계에 들어갔다. 당시 국가의 모든 일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조는 아예 한양으로 내려갔다. 태조가 개성을 출발한 것은 10월 25일이었으며28일에 도착했고 한양부 객사를 행궁行宮, 임시 궁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착수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정도전은 종묘사직단·경복궁등 왕실 건축은 물론 도로와 시장까지 신도의 기본 설계를 완성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P35
지금도 한양도성의 성벽 곳곳에는 ‘진자 종면(辰字 終面, 진 자 구역 끝 지점)‘ ‘강자 육백척(六百尺, 강자 구역 600척)‘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郡)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나타내 ‘의령시면 경상남도 의령, 구역의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구역의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 보수공사를 할 때는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 갑자10월일(嘉慶九年甲子十月日, 1804년 10월) 패(牌)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首) 용성휘(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 P38
그리고 한양도성이 완성된 뒤 세종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인 예겸(倪謙)은 한양 도심을 내려다보고 지은 루부(登樓賦)」에서 이렇게 읊었다.
북악산이 뒤에 솟고 궁궐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고 성벽이 사면으로 둘렸네 높은 성벽 서쪽으로 구불구불 둘려 있고 잇달아 휘둘려서 높고 낮게 동편으로 뻗어갔네 - P45
물을 말하노라면 개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은하수가 꽂힌 것 같고 한강수는 넓게 흘러 발해로 들어가니 물고기를 편하게 키워주고 논밭이 기름지게 해주네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에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점은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크게다르다. - P46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가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지 절감할 수 있다. 대한민국 또한 통치에 관한 기록 관리가 대단히 철저하다. 우리가 부르는 문화재 명칭 하나도 정해진 절차를 거쳐 대한민국 관보(官報)』에 고시된다. 1963년 1월 21일, 국가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지정할 때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축성된 한양의 성곽은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이라고 했다. 이것이 지난 50여 년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해온 ‘서울성곽‘이다. 그러다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명칭을 고칠 필요가 생겨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변경했다. - P47
많은 사람들이 입에 익은 대로 여전히 서울성곽이라 부르고, 나 또한이를 별칭 내지는 애칭으로 사용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서울 한양도성이다. 일반인들은 그게 그거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명칭에는 사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서울성곽과 한양도성이라는 명칭 차이는 이 유적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서울성곽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옛날 전쟁에 대비해서 쌓은 성곽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일본·유럽의 도시에서 볼수 있는 거대한 성곽과 성채를 연상하면서 서울은 성벽이 저렇게 낮고도성의 관문인 숭례문조차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어떻게 전란을 견뎠겠느냐는 둥,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서울을 방어하지 못하고 임금이 맥없이 평안도 의주로 피란 간 것 아니냐는 둥 지레짐작하며 자조() 섞인 비하를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이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들으면 나는 속에서 불같이 화가 치솟는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렇게생각하게 만든 것은 문화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 탓이고 거기엔 이름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 P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P48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이 자리가 도읍지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그가 전제로 내세운 첫마디는 "도성을 쌓으면"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고을이던 한양과 조선왕조가 수도로 건설한 한양의 차이는 도성이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한양도성이 있는 서울과 없는 서울의 역사적 품격의 차이를.
조선시대 전쟁에 대비한 방어체제는 어떻게 한 것인가. 그 답은 바로산성(山城)이다. 본래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는 지형 특성상 전투가 도성이 아니라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시엔 도성 안에서 살다가 전란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는 방식이었다. 한양도성을 비롯해 지금 남아 있는 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은주민의 안전을 위해 도적의 침입을 막는 고을의 울타리 정도였고 전란을 위한 산성은 따로 쌓았다. 그 때문에 삼국시대 이래 전국에 무수히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 P49
서울 인근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행주산성과 아차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삼국시대에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는온달산성·삼년산성·장미산성·견훤산성 등 자못 규모가 큰 산성들이 축조되었다. 태백산·소백산·지리산 같은 명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길목의 야산에 쌓은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이래 중앙집권체제가 견고해 내란의 위협이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중국·일본·유럽처럼 지방에 뿌리내린 호족이 정치·행정·군사에 힘을 행사하는 봉건사회를 경험하지 않았다. - P49
그러던 어느 날, 거의 기대가 없었는데 북악산이 마침내 개방되어 서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 P58
풍경 뻬레스트로이까ㅡ북악산 개방에 부쳐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꼬바에도 없는 산(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 P64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라,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비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 P65
아,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황지우의 이 축시는 숙정문 입구 서울성곽 안내판 곁에 걸려 있다. 기념식이 있고 얼마 뒤 황지우 시인에게 축시를 써준 것에 감사하니 그는 "내 생전에 어용(御用)시를 쓰리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북악산이날 불러냈네요"라며 그날의 감격을 다시 말했다. - P65
북악산 정상에 다다르면 보이는,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그 넓고 멀고시원한 전망을 내 문장력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한다. 숙정문에서, 촛대바위에서, 청운대에서, 암문 밖에서 보아온 전경들은 세세한 한 것일 뿐그야말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이 통쾌한 전망은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시드니에도, 베를린에도 없는 서울만의 자랑이다. 여기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용틀임하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성곽 라인의 설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자연을 배반하기는커녕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탄을 자아낸다. - P80
서울 사람들은 창의문이라면 몰라도 ‘자문밖‘이라면 금방 안다. 정식동네 이름은 부암동,신영동 구기동·평창동·홍지동이지만 나 어렸을 때는 그저 자문밖이라고 불렀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의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것이다. 올해(2017)로 5회째를 맞이하는 이 동네 축제의 이름도 ‘자문밖축제‘라고 한다. 나는 1955년 4월 1일 서울 청운초등학교에 입학했다(그때는 새 학기가4월에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소풍은 경복궁으로 갔고, 2학년 때는덕수궁, 3학년 때는 창덕궁(그때는 비원이라고 부름)으로 갔지만, 4학년부터6학년까지 3년간은 명색이 고학년이라고 언제나 자문밖 세검정이나 백 - P87
사실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청운초등학교에서 고개만 넘으면 곧 자문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 세검정초등학교 애들은어디로 소풍갈까궁금해했다. 그때 어린 내 눈에 자문밖엔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다. 육중한 바위와세차게 흐르는 계곡, 그리고 능금밭과 자두밭 일색이었다. 당시엔 세검정의 정자도 없었다(지금의 정자는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지금은 개천이 복개되어 도로가 나고 연립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그 당시 세검정개울가에는 엄청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서 모두들 거기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의 소풍이었다. 한길가에는 코 묻은 돈을 겨냥해 광주리 가득 능금과 자두를 담아 팔던 행상이 늘어서 있었지만 나도 내 친구도 시큼한 능금보다는 신나게돌아가는 솜사탕에 손이 먼저 가곤 했다. - P88
서울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예나 지금이나 개나리와 진달래다. 그중에서도 화신(花信)의 전령은 개나리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변화로 올해(2017)는 어느 날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고 말았지만 봄꽃의개화에는 엄연히 꽃차례가 있었다.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2월 말에도 서울의 꽃들은 미동조차 하지않는다. 3월도 중순이 되어야 북한산·인왕산·북악산에 생강나무와 산수유 노란 꽃이 소리 소문 없이 피어나고 금세 시내 곳곳에 개나리가 피기시작한다. 서울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 P117
사람에게 팔자가 있듯이 유물에도 팔자가 있는데 건물의 경우는 반드시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과 팔자가 오래간다는 것이 사람과 다르다. 유명한 대저택이나 별서는 처음엔 상속하지만 대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대에 가서는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된다. 이때 누구를 주인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집의 팔자가 바뀌게된다. 흥선대원군 사후 석파정의 소유권은 큰아들이자 고종의 형님인 흥친왕이재면(李載冕)에게 상속되었고, 그후 손자인 영선군 이준용(李埈鎔), 그다음엔 증손자 이우(李)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8·15해방과 한국전 - P140
쟁을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의 후손은 더 이상 이 거대한 별서를 감당하지 못해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주인이 천주교도였고 건물은 전쟁 후유증이 낳은 고아와 결핵 환자들을 보호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면서 그 팔자가 이제는나라의 운명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물 소유주 입장에선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 더 이상 건물을 헐고 신축하거나 증축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석파정은 다른 주인에게 넘어갔고 2004년에는 소유주의 부채를 집행하기 위해 법원이석파정을 경매에 부쳤다. 두 차례 유찰 끝에 새 주인을 만났으나 또 소유주가 바뀌다가 마침내 새 주인이 나타나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라는 명성을 지닌 석파정을 후광으로 삼아 인근에 서울미술관을 지어서2012년 개관과 동시에 석파정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 P141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의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내가 『명작순례』(2013)에서 해설한적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 P149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승에게서 이런 칭찬을 듣자 석파는 자신의 ‘난화첩‘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더욱 칭찬하여 세상 사람들은 늙은 자신에게난초 그림을 부탁하지 말고 석파에게 구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일침을놓았는데 그 말이 준엄하기만 하다. 아무리 9,999분에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1분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 P149
어렵습니다.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우리는 2퍼센트 부족한 것을 말하지만 추사는 0.01 퍼센트 부족해도완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엄한 가르침을 받은 덕에 석파의 난초 그림은 중국의 명사들까지 받아가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난초 그림을 ‘석파 난‘이라고 불렀다. - P150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만나듯 하고
讀己見書 如遇故人 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석파는 그 파란만장한 이력이 말해주듯 술도 잘할 수밖에 없었는데술에 대해서도 높은 경지의 한 말씀을 남겼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아서M. 새클러(Arthur M. Sackler) 뮤지엄에 소장된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10곡 병풍에는 석파가 사용한 문자도장들이 각 폭마다 찍혀 있는데 그중 제4폭에 찍힌 도장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 P151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P152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현진건은 1940년, 친구의 권유로 미두(豆) 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여 파산했고 부암동 집과양계장을 처분하고는 제기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궁핍 속에서 현진건은 결국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향의 문우였던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대구에서 별세했다.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인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문학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P169
빙허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나1943년 4월 25일생을 마친 한국 사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암담한 현실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43년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빙허의 굳은 지조와 그 철저한 문학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 살아 숨쉴 것이다. - P169
현진건의 「빈처」는 작가, 즉 지식인의 자기 독백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내 「운수 좋은 날」에서는 김첨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더군." "그렇지요. 「운수 좋은 날」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민중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대접받기 시작하던 초창기 작품이지. 현진건은 말로는 프문학에 주저했지만 실제 작품 실천에서는 프로문학을 선도했어요. 방화로 끝나는 「불」은 더해. 민중이 직접 주인공이 되는 소설과 함께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을 그린 일군의 작품이 있는데, 경부선 차중을 그린 「고향」이 대표작이고요. 한중일 세 나라 옷을 걸치고 세 나라 말을 지껄이는껄렁한 노동자에 처음에는 불편해하다가 그 이산의 비극에 공감하며 결국엔 붙잡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잖아. 그렇게 현진건은 식민지의 비극을온몸에 두른 민중을 만났어요." - P171
역시 집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하고 한옥은 사람이 거주할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 허물어져가던 부암정이 좋은 집주인 덕에 이렇게 완벽히 복원되어 부암동이 도성 밖 최고의 별서 지역이었음을 웅변해주고 있으니 한양의 옛 향기를 오히려 여기에서 느낀다는것이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부암정은 살림집이기 때문에 일반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1년에 한 번 ‘오픈하우스 서울‘ 행사를통해 공개된다. - P1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