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Maria Mies, 1931~

독일 쾰른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오랜 기간 인도에서 작업하였고,
197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사회과학연구원〉에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60년대 말부터 여성운동과 여성연구를 활발히 해오고있다. 페미니스트, 환경과 세계 개발문제에 대해 여러 책과논문들을 써 왔다. 주요한 관심은 방법론과 경제학에서대안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1993년 가르치는일에서 퇴임한 뒤부터,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아틱(Attac)의 여성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아탁>의 회원이다. 저작으로 인도여성과 가부장제』(Indian Women and Patriarchy, 1980), 『에코페미니즘』(창비, 2000, 공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동연, 2013, 공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갈무리, 2014) 등이있다.

옮긴이 최재인Jaein Choi, 1966~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19세기 후반 아프리카계미국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여성과인종, 계급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서양여성들 근대를 달리다』(공저), 여성의 삶과 문화』(공저),『다민족 다인종 국가의 역사인식』(공저), 동서양 역사 속의다문화적 전개양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아름다운외출』, 『유럽의 자본주의』, 『히스토리』(공역) 등이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축적이 나의 주된 이론적 작업이기 때문이기도하고, 1986년에 했던 생각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자연에 대한 폭력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왔다. 이런 폭력의 형태는 내가 1986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더 가학적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폭력의 결과로는 기후 변화를 개선할 수 없고, 지구의 자원고갈과 원자력으로 인한 오염을 회복시킬 수가 없음을 오늘날 우리는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패러다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패러다임은 끝없는 자본축적을 추구하는데, 이는 진보와 "좋은 삶"의 전제조건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 P5

내가 오래전에 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에 몇 가지가 좀 더 추가되었을 뿐,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뭘 더 말해야 하는가.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더 악화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 책이 나온 이래 24년 동안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내 분석이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이전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고, 이 파괴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방법에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비전과 전망을 갖고 있는가? - P5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보면, 가난한 국가나 부자 국가나 상관없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지 않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혀 평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몇몇 여성이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국가나정부의 수장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목표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체제를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체제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된 여성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
1980년 무렵 유럽과 미국의 페미니스트는 왜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자본가나 남성에게 여성의 노동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짜의 선의" 혹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가정주부는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완전히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임금을 받지 않으며, 그녀의 노동시간은 계산되지 않고, 의료보험도, 노령연금도 없다.  - P6

동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식민지민과 자연이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산"을 아주 적은 비용으로 전용했다.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멕시코 같은 국가에서 젊은 여성은 서구 시장에 공급할 의류 등을 세계에서 가장 싼 임금을 받고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여성 노동이 남성의 노동보다 가치가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국가에서도 여성 노동은 더 저렴하다. 이곳에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다. 오늘날 이런 심한 착취는 폭력 및 가장 잔혹한 노동환경과 결합되어 있다. 이런 노동환경은 그들의 생명까지 위협한다.
최근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의류공장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화재가 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화재로 수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다. 이런 생산관계로 이익을 챙기는 자는 대기업, 유명한 국제기업이며, 이 중에는 한국 기업도 있다. 이회사들은 국제노동기구의 노동법도 의식하지 않는다.  - P7

오늘날 사실상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는 세계적 자유시장이 빈곤을 없애고,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와계급 사이의 불평등을 없앨 것이며, 자본재와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세계를 개방하겠다고 설교한다. 신경제 주창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창출할 것"이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의 주요 원리는 세계화, 자유화, 사유화, 일반 경쟁이다. 이런 원리는 국가가 자국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이를 이윤을 추구하는 초국적 기업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새로운 원리는 노동권, 환경보호법, 여성과 아동의 보호, 노동 안정성, 일자리 안정성 등을 포기하게 만든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철도, 우편, 전화통신 등 중요한 서비스업들이 사유화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경제원리는 세계적 합의 아래 자리를 잡았고, 세계무역기구WTO는 이런 합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 P9

나는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는 최소한 5천년의 역사를가진 것으로 전 세계의 모든 ‘위대한 문명들과 문화들을 관통하며 조직했다.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여성이 함께 했던 ISS의 ‘여성과 개발 프로그램 과정에서도 이 체제의 역사적 유구함과 지리적광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체제가 여러 문화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부는 다른데보다 좀 더 잔인하다. 이는 구조상 지금도 여전하다. 이 프로그램의 학생들이 이를 이해해 가면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다. "문화는 다르지만, 투쟁은 함께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문제는기원과 다양함에 상관없이 보통의 시공간을 곧장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해주면서, 동시에 이런 문제를 던져 준다. ‘이런 반여성적인 체제를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P18

이런 현상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는 통념과 다르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자본의 축적 또는 지속적인 성장은 거대한 인간적 그리고 인간 이외의 요소들이 식민화되는 조건 아래에서나 가능했다. 여성,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과 토지가 지금까지의 주된 식민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본축적과정의 지하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우리는 빙산의 비유를 사용했다. 자본과 임금노동이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보이는 일각이었다. 여기서 임금노동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고, 노동계약으로 보호받는 노동이다.
그러나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만들어 낸 생산은 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 P23

한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 남성의 주목을 받기까지는 어느 정도의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남성이 읽기 시작하자 여기에서도 평가는 거부 아니면 찬사로, 극단화되었다. 분명히 이 책은 독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감정과 신념을 건드렸고, 이에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당혹‘Betroffenhein을 만들어냈다. 내가 운동 초기부터 당혹이라는 용어를사용한 것은 페미니스트 연구와 일반적으로 실증주의적 주류 연구의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는 태도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어 ‘당혹‘Betroffenheit은 영향을 받고 관심을 둔 상태만이 아니라, 고심하면서 무언가 하려는, 행동하려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이 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 P24

선진공업화된 사회들에서 사는 사람들은 음식이 여전히 땅에서나오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토지가 식량 생산과 식량 안보의 기초라는 사실을 잘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토지는 ‘저개발국가들에게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개발‘ 사회에서도 토지에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다른 충분히 성장한 경제 모델을 보지 않는 한,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패러다임을 꿈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 그들 자신의 창의성과 에너지를 발달시켜 줄 과정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된 집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안정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나는 자급적 삶에 대한 전망이 더 나은 대안이며, 이 대안은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을 선진공업화된 세계의 사람들에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고있다. 대안은 없다는 티나TINA 증후군에 사로잡히는 대신, 하늘에서떨어지는 초인을 기다리거나 기술을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여기며 기다리는 대신, 자급적 삶이라는 대안SITA, Subsistence Is The Alternative[자급이 대안이다)을 가능한 지향점으로라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P35

여성해방운동은 생태운동, 대안운동,
평화운동 등 가장 광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또한 가장 논란이 많은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그 존재 자체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생태문제‘, ‘평화이슈‘, 제3세계의 종속 문제에 대해서는 침착하게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토론을 이끌어갈 수 있어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남성과 그리고 많은 여성이 늘 지극히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각각의 개인에게 이는 민감한 이슈이다. 이는 여성운동이 다른 운동들처럼 국가나 자본가 등 외부의 적이나 기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직접 민중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 P46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이를 피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남녀관계의진정한 본질을 스스로 인식해가는 것은, 돈벌이와 권력놀음과 욕망이 난무하는 냉정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지대로 남아있는 마지막 섬을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 이슈를 자신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속박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서 자신도 공범자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관계로 가고 싶다면 이제껏 해온 공모행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는 이 체제에서 특권을 가진 남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에 물질적 존재 기반을 두고 있는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스트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한 침묵의 공모를 과감하게 깨뜨리려는 이들이고, 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은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 지배 체제에 ‘성차별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일정한 이름을 부여하며 목청을 높이는 것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양면성을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분열을 강화시킬 뿐이다. - P47

대신 서구와 비서구 여성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크게 강조된다. 오늘날 이런 식민 관계는 국제노동분업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 관계는 백인 페미니스트의 의식에서도 종종 사라지곤 한다. 이 백인 여성의 삶 수준은상당 부분 온존하고 있는 식민지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백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도 이를 종종 망각한다. 이들이 ‘흑인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고 해서 이들이 자동적으로 흑인 세계에 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Amos &Parmar, 1984 참조). 흑인 여성 역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따라, 식민지와 계급을 따라 구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구분은 성과 인종을 논할 때 자주 망각된다. 현 시점에서 ‘흑인‘, ‘갈색‘ 혹은 ‘황색‘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키는 이들에게 큰 희망이다. ‘흑인 세계‘에 사는 흑인 여성 중 일부는 ‘백인 세계‘에 사는 일부 백인 여성보다. 그리고 특히 백인 세계와 흑인 세계에 사는 대다수의 흑인 여성보다 나은 삶 수준을 누리기도 한다. 우리가 도덕주의와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표면 아래를 보는 것, 성적·사회적·국제노동분업의 상호작용을 물질적이고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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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지은이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 Snyder

1969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 중유럽 및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현재 예일대학 역사학과교수이며, 빈 인문학 연구소 종신 연구원, 미국 홀로코스트기념관 양심위원회 위원이다. 런던정경대, 바르샤바 유럽대학 등에서 강의한다. 2000년대까지 주로 역사학자로 활동해왔지만 2010년대 들어 정치, 보건, 교육 분야에 관심을기울이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으며, 2020년 페이스북을모니터링하는 독립 단체 ‘리얼 페이스북 오버사이트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시카고트리뷴』 『네이션」 「뉴욕리뷰오브북스』 『타임스리터러리서플먼트」 「뉴리퍼블릭」 등에 기고 중이다.
주요 저서로 한나아렌트상(2013)을 수상하고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피에 젖은 땅과 블랙 어스Black Earth』가있다. 스나이더는 두 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동유럽의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와 스탈린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제시한다. 또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악마성의구현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파괴된 지대에서 국적을 박탈당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 학살극으로 그린다. 새롭게 발견된 광범위한 문서와 증언에 기초한 이 책들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20세기의 비극에 대해 완전히 새롭고충격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최근 저서로 트럼프 집권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폭정On Tyranny』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그 밖의 저서로 토니 젓과 공저한 20세기를 생각한다Thinking the Twentieth Century』, 러시아, 유럽, 미국 정치를 분석한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Road to Unfreedom』 등이 있다.
랠프월도에머슨상, 라이프치히 도서상, 미국문예아카데미문학상, 카지미에시모차르스키 역사상, 프라킨 국제문학상,
안토노비치상 등을 수상했고, 카네기 펠로십을 받았다.

스나이더는 1930년에서 1945년까지 발트해 연안국들, 벨라루스,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탈린의 인위적 기근에서1945년 죽음의 행진, 그리고 대규모 인종 청소까지 수많은 유혈이 빚어진 이 경계지역들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적 아집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입었다.
_앤터니 비버, 텔레그래프, ‘올해의 책‘

우크라이나 기근,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숙청, 소련 포로들의 의도적 아사, 전후의 인종 청소, 이 모든 일에 대해 스나이더는 같은 현상의 다른 면들을 드러냈고,
이로써 큰 기여를 했다. 다른 이들처럼 나치의 잔혹함이나 소련의 잔혹 행위를 따로 연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본 것이다. 스나이더는 이 두 체제를 면밀히 비교검토하기보다 두 체제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은 서로 더 잔혹해지도록 부추겼고, 그에 따라 각각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집단 학살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_앤 애플바움, 「뉴욕리뷰오브북스」

자국의 역사를 꽤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스나이더의 통찰과 비교·대조의 놀라움 앞에서는 전율하게 된다. 스나이더의 꼼꼼하고 의미심장한 책은 ‘스탈린이 더 나쁘냐, 히틀러가 더 나쁘냐‘ ‘소련의 우크라이나 학살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중 뭐가 더 중대한 범죄냐‘ 같은 무미건조하고 정치관이 일쑤 개입되는 물음에명확하고 통렬한 해답을 준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 배경을 설명하고, 기록한다. 두전체주의 제국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들의 죽음을 더 나은 미래로가는 필연적인 단계로 간주했다. 스나이더의 책은 어떤 일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동정심과 공정성, 그리고 통찰을 더해 설명해낸다._이코노미스트』

의도적인 집단 학살, 그 하나하나의 공포가 생생히 드러난다. (・・・) 스나이더는 희생자, 집행자, 증인들 개개인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이야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끌어간다. 뉴욕타임스북리뷰』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동유럽에서 1400만 명이 학살당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사이의 유럽은 어디서, 어떻게, 왜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를 기록했다. 이를 들여다보면 현대 유럽과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나이더는 중대한 공헌을 한 가지 했다. 그는 죽어간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아준 것이다. 그들을 단지 희생자로만 치부한 것이 아니라.
뉴리퍼블릭』 편집자들이 뽑은 2010년 최고의 책

티머시 스나이더의 연구는 세세하고 완전하다. 그의 서술은 힘이 넘친다. 스나이더는 독일과 소련의 대량학살을 들여다보며, 핵무기가 나타나기 전 20세기에 자행된 총력전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가를 제대로 파헤친다. 그 필수적인 작업은이제껏 터부로 남아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대부분의 전쟁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도 승자가 한 것이 대다수다. 외교와군사 작전은 대체로 서방 국가들이 주도한 것처럼 혹은 미국·영국·소련이라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동맹국들이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활약한 것처럼 그려진다. 그과정에서 홀로코스트는 전쟁과 별개의 이야기이며, 대량학살과 인류의 비극이라는 차원에서 접근된다. 『피에 젖은 땅』은 그런 관점을 뒤흔들어놓는다. () 스나이더는 이 책의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로, 더 광범위한 유럽 분쟁의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려 했다. 그것은 곧 그 의미의 복원이었다. 상당한 논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가도 시도 못 할 과제이지만, 유대인들의 고난을 평가절하하는 일 없이 ‘피에 젖은 땅」은 나치의 학살 기계, 그 전모를 포착해냈다.
월스트리트저널」

히틀러와 스탈린이 어떻게 서로의 범죄를 가능케 하고,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땅에서 1400만 명의 목숨을 앗을 수 있었는가? 예일대학의 역사학자가 필생의 작품으로 써낸 이 책은 읽고 또 읽을 가치가 있다._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분명 우리는 모두 알아야 한다. 모두 이해해야 한다. 모두 실감해야 한다. 스나이더의 책은 막대한 상세 자료와 소름 끼칠 만큼 노골적인 묘사로, 이 암울하지만 투명한 폭로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시대에 관한 한 이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덴비, 「뉴요커」

이 놀랍고 가슴 아픈 역사책은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숨져간 1400만 명의 학살을 다룬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만이 아니었다. 330만 명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강제한 기근으로 숨졌고, 많은 폴란드의 엘리트 또한 숙청되었다.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 다수는 히틀러에 의해 굶어 죽었다._
파이낸셜타임스』

의도적 대량학살에 있어 히틀러와 스탈린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범죄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많은 지식을 쌓아왔지만, 그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면도 있다. 적어도 이 두 거물 독재자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우리는 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폴란드와 러시아 서부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서 벌어진최악의 공포를 미처 알지 못했다. 따라서 티머시 스나이더는 「피에 젖은 땅에서20세기 중반 유럽이 겪은 악몽을 제대로, 확실하게 제시해보려 했다.
_인디펜던트』 ‘올해의 책‘

꼼꼼하게 조사 연구를 했고 (・・)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고쳐주는 『피에 젖은 땅』은 너무나 큰 가치를 지닌 책이다. (・・・) 역사 지리학에 있어서 강력하고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애덤 호치실드, ‘하퍼스매거진」

수백만 명의 동유럽인이 독일과 소련, 유럽사 최악의 살인 정권들 사이에 갇혔다.
그들의 이야기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놀라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 『피에 젖은땅은 훌륭한 필치와 명료성과 뛰어난 가독성을 갖춘 책이다. 이 책은 놀라운 최신의 통계 자료도 많이 갖추고 있는 한편, 심금을 울리는 개인사도 담고 있다. (・・・)그중 일부는 익숙하지만, 대부분은 새롭다. 스나이더는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홀로코스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만큼 동유럽을 새롭게 바라보는 중요 인물이다 () 스나이더는 새로운 사고와 조사 결과를 산더미처럼 제시한다. 그 다수

가 처음 보는 것들이다. 참으로 대단한 학술적 연구이며, 여러 신화의 파괴이자 유럽 역사를 새롭게 다시 보는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 "뉴스테이츠먼,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은 대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잔혹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을 연대기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새롭게 구축해내고, 그리하여 이 역사적 사건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_주이시 포워드』 2010년 5대 논픽션‘

「피에 젖은 땅」의 첫 장을 읽으면, 아니 아무 곳이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으면,
야심찬 두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의 비이성적인 타락 행위에 전율하며 내용에 빠져들 것이다. () 흥미진진하고, 놀랍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희생자가 쓴 일기,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신문기사, 개인의 편지 등에서 수없이 추려냈다. (…) 스나이더는 이런 단편적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 히틀러와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해 경고 섞인 고발을 하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삼국에 살았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풀어나간다.
_<킨들 데일리포스트>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들판의 밀은남김없이 징발된 뒤였다. 그 무자비한 물자 징발은 유럽의 집단학살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때는 1933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의도적으로 기아의 늪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그 소년은 결국 죽었다. 우크라이나 동포 300만 명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하에서 그녀를다시 만날 거야." 어느 소련 젊은이는 자기 아내를 생각하며 이렇게말했다. 그 말은 들어맞았다. 그는 그녀 다음 순서로 총살되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스탈린의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 다른 70만명과 함께였다. "그놈들은 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어느 폴란드 장교의 일기는 이렇게 중단되는데, 1940년에 그가 소련 - P5

비밀경찰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무렵, 폴란드를 동시 침공한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에게 희생된 20만폴란드인의 한 사람이었다. 1941년 말, 러시아의 레닌그라드에서, 어느 열한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낡은 일기장에 마지막 말을 이렇게다. "이제 타냐만 남았어." 히틀러가 스탈린을 배신하고, 그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농성 끝에 굶어 죽은 400만 명의 소련인에 포함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는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가벨라루스에서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죽기 전에 인사해. 나 무서워. 그들이 아이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있어."
그녀 외에도 독일군이 가스나 총탄으로 죽인 유대인은 500만 명 이상이었다. - P6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 전쟁(1941~1945) 동안, 사상 초유의 대학살이 이들 지역을 덮쳤다.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인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었다. 1400만명이 겨우 12년 동안, 1933년에서 1945년까지 학살되던 때는 히틀러 - P6

와 스탈린 둘의 집권기였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의 조국이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전쟁보다는 잔혹한 정책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악의 살육전이었다. 그리고 참전 군인들의대략 절반이 바로 이곳, 블러드랜드에서 쓰러졌다. 그렇지만 1400만명의 희생자 가운데 전사한 병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은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아무도 무장하지 않은 채였고, 대개 모든 재산을 몸에 걸칠 것조차 빼앗긴 상태에서 숨을 거뒀다. - P7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지켜봤던 독일계 유대인 대부분은 천수를 누렸다. 독일계 유대인 16만5000명을 학살한 일은 분명 끔찍한 범죄이지만, 유럽 유대인 전체가겪은 비극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홀로코스트 전체 희생자의 3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1941년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야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아낸다‘는 히틀러의 비전이 유럽 유대인의 가장 큰 두 분파와 연결되었다. 그의 유럽 유대인박멸의 꿈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이 홀로코스트를 들여다보면, 독일은 더 많은 학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유대인들만 없애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와 소련이라는 나라도 아예 뿌리 뽑기를 원했고, 그 지배 계층을 박멸함은 물론, 수천만 명의 슬라브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도 학살하려 했다. 만약 독일의 소련 침략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첫 겨울철에 3000만 명의 민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고, 수천만 명이 추방 혹은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 계획이 실현되진 않았지만, 독일의 동방 점령 정책의 근간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했다.  - P8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꺾었고, 그리하여 스탈린은 수백만 명으로부터의 감사와 함께 전후 유럽 질서에서 중요한 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히틀러의 그것과 맞먹는 규모다. 그리고 비전시 학살만 따져보면 한수위일 정도다. 소련을 방위하고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스탈린은1930년대에 수백만 명의 아사와 75만 명의 총살을 지휘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타국민을 죽인 정도에 전혀 뒤지지 않을 강도로 자국민을 죽였다. - P9

이 책은 한 정치적 대량학살의 이야기다. 1400만 명의 희생자는 모두 소련 또는 나치의 살육 정책으로 생명을 잃었으며, 그 둘 사이의전쟁으로 숨진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들의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갔다. 또 20만 명은 1939년에서 1941년사이, 즉 독일과 소련이 ‘동맹국으로서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던 시기에 죽었다. 1400만 명의 학살은 때로 경제 계획의 일환이었거나 혹은경제 문제 때문에 가속이 붙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결코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일은 아니다. 스탈린은 1933년 배고픈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강제 징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히틀러도 그보다 8년 뒤, 소련 전쟁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끊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300만 명이상이 죽었다.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시기에 숨져간 수십만 명의 소련 농민과 노동자는 스탈린의 명확한 지시에 따른 희생자였으며, 그것은 1941년과 1945년 사이에 히틀러의 명확한 지시대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총과 가스에 희생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0

블러드랜드는 유럽 유대인이 살던 땅 모두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제국이 차지하려 했던 모든 땅, 베어마흐트와 붉은 군대가 싸운 모든땅,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와 독일의 친위대ss가 힘을 집중시켰던 모든 땅이 피로 물들었다. 떼죽음이 일어난 땅은 대체로 블러드랜드에 포함된 땅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의 정치 지형에서, 블러드랜드는 폴란드, 발트 연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소련의서쪽 변경지대를 의미했다. 스탈린의 죄악은 흔히 러시아에 지은 죄악으로 여겨지며, 히틀러의 죄악 역시 독일에 대한 죄악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련의 가장 심한 만행은 비러시아 변경지대에서 저질러졌고,
나치 역시 독일 바깥에서 살육의 대부분을 자행했다. 20세기의 공포는 집단수용소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다.
대량학살의 장소와 방식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우리가 20세기의 공포를 보는 시각을 오도한다. - P12

1940년대에 시안화수소는 살충제로 쓰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는 내연기관에서 만들어졌다. 소련과 독일은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던 기술인 내연기관, 철도, 화약무기, 살충제, 철조망 등을 써서 대량학살을 했다.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엔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그 엄청난 숫자에 질려, 우리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개인성을 생각못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그녀의 레퀴엠』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하지만 명부는 사라졌고, 아무 데서도 볼 수 없군요." 역사학자들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명부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동유럽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덕분에, 그들의 마지막을 다룬 문서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희생자들이 남긴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놀랄 정도다. 가령 키예프의 바비 야르에서 나치에게 생매장될 구덩이를 스스로 파야 했던 젊은 유대인여성의 회상, 빌뉴스 근처 포나리에서 마찬가지로 죽어간 사람의 말,
트레블린카에서 살아남은 수십 명의 증언도 있었다. 우리는 애써 수집된 뒤 묻혔다가 다시 발견된 바르샤바 게토"의 문서보관소도 봤다.
1940년 카틴 숲속에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과 함께 남긴 일기장들도 찾아냈다. 그해에, 독일군의 살육 과정에서 생매장되려고 실려가던 폴란드인들이 버스에서 던진 쪽지들도 찾아냈다.  - P17

소련과 나치 체제를 비교하며 1951년에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그 실재성 자체가 "그런 체제들이 비전체주의적 세계 속에서 이어진다는 데 근거한다"고 썼다.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도 1944년 모스크바에서 같은 말을 더 쉬운 표현으로 남겼다. "여기서는 사람이 진실과 거짓을 판정한다. 진실이란 그저 힘의 조성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힘의 구도에 저항하는 진짜 역사일까?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역사 자체를 쥐고 흔들려 했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국가였고, 그 지도자들은 역사의 ‘과학자로 자처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전면적인 변혁의 종말론적 버전이었고, ‘의지‘와 ‘인종‘이야말로 과거의 유산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실행에 옮긴 근거였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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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 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 노동자의 지위에 엄청난악영향을 주는 조항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의결했다. 민주노총이 노동법 날치기 무효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다. 공안당국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체포조를 투입하는 등초강경 대응에 나섰지만 하루 최대 35만 명 넘게 참여하는 등 파업은더욱 확산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대학교수와지식인, 각계각층 단체의 노동법 재개정 요구 서명발표가 줄을 이었다. 농민들은 쌀과 음식을 싣고 와 농성 노동자를 격려했으며 대학생과 시민들의 격려 방문과 파업을 지지하는 신문광고가 줄을 이었다.
해외교민들도 정부를 규탄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를 벌였다. 내가 있던 독일 마인츠대학교 한국 유학생들도 돈을 모아 『한겨레에 총파업 지지 생활광고를 냈다.
- P272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성숙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통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야당과 언론의 입을 막거나 시민들의 기본권행사를 제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정부와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해고제를도입하는 등 노동법을 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지위를 현저히 약화시켰다. 1996년 정부여당이 날치기 처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정리해고제 반대 파업을 경찰력으로 해산하고 주동자를 구속했지만 대규모 파업이나 시민사회의 연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구제금융을 제공한 IMF가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요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합의하려고 노력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등 정리해고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벼랑 끝에 몰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정부를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은 것이다. - P273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평검사들과 치열한 공개토론을 함으로써 대통령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 - P273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지않았다. 자신의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에게 사과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폐기를 주장하며 서울도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이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사고가났을 때도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했다. 한나라당과민주당이 손잡고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육탄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권했다. 국회에 탄핵권이 있고, 탄핵을 의결해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남아 있는 만큼 헌법 절차에 따라 다투는것이 옳다고 했다.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과 다른 견해를 밝혀도 문제 삼지 않았다. - P274

2004년 봄의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현직 대통령의 편이 되어 자발적으로 전국적 · 동시다발적 · 연속적 집회시위를 벌인 적은 그전에도 없었고 그후에도 없었다. 탄핵규탄 촛불집회의 투쟁대상은 야당이었다. 임기가 넉 달밖에 남지 않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뽑은 임기 5년 대통령의 직무를 겨우 1년 만에 정지시킨 사건에 대해국민들은 분개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얻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함으로써 대통령 탄핵은 야당이 국회의헌법적 권한을 오남용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촛불시위는 국회가국민의 주권을 부당하게 침해한 데 대한 항의였으므로 헌법을 지키는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 P275

는 민주화운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 발병 확률은 매우낮았다. 문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완화하는 결정을 내린 과정이었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공론화 과정도 없이,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그런 결정을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다른 일도 모두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중생들이 광화문 인근에서 작은 촛불집회를시작했을 때 그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별로 없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는 재야, 학생운동, 시민단체, 야당 등전통적인 민주화운동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젊은 어머니들과 직장인 - P275

들에게 번져나가 거대한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집회시위로 확산되었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동원한 경찰의 진압과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경찰차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거짓 사과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지만,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예IN고했다.
2013년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다. 이번에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 국정원과 기무사,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이 불법 개입한 것을 규탄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기관을 정치적으로사유화해서 같은 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온라인 심리전을 벌인 조직범죄였다. - P276

지금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의 시대다.
2008년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박근혜 정부 역시 국가운영의 많은 분야에서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정책과 행태를 보이는데, 그 기반은 불합리한 제도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대 보수언론과 재벌, 공안세력이 반복 주입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시민들의 의식이 그 기반이다. - P276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삶의 실험도 다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주지 않는 한, 각자의 개성을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고유한 개성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자 개인과 사회 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인 개별성을 잃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지만 우리는 둘 모두를 해냈다.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자유는 개개인의 생활방식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반공 난민촌‘이었던 대한민국은 사회 전체가 ‘병영‘과 비슷했던산업화시대를 통과해 각자의 개성과 문화적 다양성이 발현되는 민주화시대의 ‘광장‘으로 바뀌었다. 지난 55년 동안 대한민국이 겪은 사회문화적 변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P279

앞에서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동력이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만든 것도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욕망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망이었다. 자아를 실현하려면 ‘살아가는 방식‘ life style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라이프 스타일은 신념이나 이상의 선택과 같은 추상적 · 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설계하는 개인적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언제 잠들고 깨어날지,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입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며 무엇으로여가를 보낼지, 결혼을 할지 말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 종교를 믿을지, 믿는다면 어떤 종교를 어떻게 믿을지,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지, 어느 정당을 지지하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지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라이프 스타일은 그 사람의 신념과취향, 개성과 욕망을 드러낸다. - P279

지금 광장에서 살고 있다. 병영시대 정부가 한 일의 목적과 방식, 결과가 다 나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괜찮은 방법으로 훌륭한 목적을 제대로 이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쁜 방법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 목적과 방법, 결과가 모두 추악한 것도 많았다. 국가의명령에 복종하면서 병영사회의 양지에서 살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 병영의 담벼락을 허무는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박해받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맨손으로 정부와싸우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대통령의 신민이 아니라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담벼락은 결국 무너졌고 병영은 서서히 광장으로바뀌었다. - P280

저출산 현상은 산업화에 따른 출산율의 자연적 감소와 정부의 강력한 출산억제정책의 합작품이었다. 정부는 출산율 억제를 정책 목표로 설정했으며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방법을 동원해 그 목표를 달성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는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1960년대에는 6남매, 7남매가 보통이었다. 셋 이하면 자손이 귀하다고들 했다. 남아선호 사상이 만연한 가운데 노동시장은 고학력 사무관리직과 저학력 생산직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공부를 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는 전통적인 의식이 더욱 강고해졌다. 돈이 없어서 자녀들을 다 공부시킬 수 없는 부모들은 아들 교육에 집중했다.  - P287

오늘날은 정부가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마음대로 제약하지 못한다. 정부는 2003년 전북 부안군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을 지으려 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와 부산 천성산 터널 공사는 자연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와 스님들의 강력한 반대투쟁 때문에 장기간 지연되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가는 평택 대추리, 해군기지를 세우는 제주 강정마을, 한전이 고압선 송전선을 설치한 경남 밀양시 상동면에서도 지역주민들과 시민단체들이 길고 끈질긴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영시대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을 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았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갈 위
‘험을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대들 만한 토지소유자는 별로 없었다. 정부는 여론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린벨트를 지정했다. - P307

국민교육헌장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말씀‘이었다.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것은 곧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1978년 송기숙, 명노근, 이홍길, 홍승기 등 전남대 교수 열한 명은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에서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며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를 인간화·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제정경위와 선포절차, 내용 모두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다. 초안은 서울대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정부는 관련 교수들을 전원 해직하고 송기숙 교수와 성명서를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연세대 성내운 교수를 구속했다. 이런 일로 대학교수들을 구속한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국가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들다니! 물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초등학교 교과서와 정부 공식 행사에서 사라졌다. - P311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인가?
그 판단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헌법이 국민 각자에게 준 것은 교육, 근로, 납세, 국방의 의무뿐이다. 그런데 교육과 근로는 권리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는 결국 소득을 얻으면 법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으며 우리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그와 다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지 말지는 각자 선택할 문제다. 할 마음은 있지만 공개적으로 고백하기가 쑥스러우면 맹세를 하지 않아도된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할 권리를 보장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맹세하게 한다. 나는 이것도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 P312

로기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며 주관적이다. 야간통금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구속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즐거운 추억으로간직하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다가오면 버스와 지하철이 북새통을이루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자기 발로 파출소나 경찰서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전 4시가 지난 다음 귀가해야 했다. 술집과 학원은 심야영업을 할 수 없었고 기업은 철야작업 야간교대를 하기 어려웠다. 국제선 항공기가 통금 때문에 김포공항에 내리지 못하고 일본이나 홍콩으로 회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남자들은 교외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막차를 일부러 놓치는 것을 ‘작업의 정석‘으로 삼았다. 부처님 오신 날, 크리스마스, 12월 31일만 예외였다. 사람들은 단순히 밤거리를 걷고 싶어서 시내로 나갔다. 중학생 시절 크리스마스이브 때 대구 시내 동성로에 나갔다가 어른들 어깨 틈에 끼어발을 땅에 딛지도 못하고 둥둥 떠다녔던 기억이 난다. - P316

이것은 주민등록제도 도입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디지털 부작용이다. 2014년 1월에 터진 농협카드, 롯데카드, 국민카드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인터넷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남의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차제에 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다시 만들고 국가기관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거나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촌 문명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제도를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주민등록번호는 대한민국의 진화과정에 병영국가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화석이라 할 수 있다. - P320

2006년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학교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판매가 금지되었던 책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스무 권을 발표한적이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 (영희), 신동엽전집』(신동엽), ‘순이삼촌(현기영),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빨치산의 딸』(정지아), 사회주의 인간론 (에리히 프롬), 『무림파천황』 (박영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민중항쟁의 기록』(황석영),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민중항쟁 참가자들이 쓴 항쟁기록을 소설가 황석영이 손질해서 출판한 책이다. 1980년대 중반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회자되었던 이 책은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린 최초의 공개 출판물이었다. 금서가 된 바람에 더 유명해진 무협소설무림파천황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한 이유는 좀 우습다. 정와 사파의 대결을 변증법으로 설명한 딱 한 쪽 때문이었다. 그때 공안당국자들은 변증법을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 P321

유신시대에는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법무부,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방부, 내무부 등 유관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금서목록을 정했다. 명분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온서적과 미풍양속을해치는 음란서적을 규제하는 것이었지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당국자들의 눈에 거슬리는 모든 서적이 판금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들어보자. 『길을 묻는 그대에게」(김동길), 『지성과 반지성』(김병익), 『이성과 혁명』(허버트 마르쿠제), 『전환시대의 논리』(영희), 학교는 죽었다』(라이머), 『죽으면 산다』(장준하),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순 - P322

이삼촌』(현기영), 『해방의 길목에서 (박형규)가 포함되었다. 수필, 문학평론, 철학, 르포르타주, 소설, 사회비평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판매 금지한 것이다.
누가 어떤 절차를 거쳐 금서를 정하는지, 그 결정이 문제가 있을 경우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23

전두환 정부는 유신시대에 만든 금서목록에 『김형욱 회고록』 (박사월), 『혁명의 연구』 (에드워드 H. 카),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이야기 경제학』(김수길), 『변증법이란 무엇인가』(황세연), 『겨레와 어린이」(이오덕 외) 등 더 많은 책을 추가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파악한 판매금지도서목록은 노태우 정부까지다. 이때는 레닌, 마오쩌둥, 스탈린 등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책과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역사서, 북한 주체사상과 관련된 책을 대량으로 판매 금지했다. 1980년대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을 한 이른바386세대 청년들이 그런 책을 탐독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노 - P323

무현 대통령 때는 정부 차원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에 공개된 국방부의 장병 금서목록에서 보듯 개별 국가기관의 목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23권의 국방부 금서목록에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북한의 우리식 문화』(주강현),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전상봉),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노암 촘스키), 『미군 범죄와 한미 SOFA』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소금꽃 나무』(김진숙),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김남주 평전』(강대석), 『대한민국史』(한홍구), 『세계화의 덫(하랄드 슈만 외),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방부 금서목록에 오른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국가의 사상통제에 대한 시장의 반격이었다. - P324

민주화 이후에도 방송 사전심의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1993년가수 정태춘 씨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음반을 제작·발표함으로써문화관광부가 자신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투쟁을 하면서사전심의를 강제한 ‘음반 및 비디오물에 대한 법률‘에 관한 위헌심판제청을 재판부에 냈다.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4집 앨범 ‘컴백홈‘에 수록된 <시대유감>에 대해 공윤이 가사 수정을 지시하자 서태지가 가사 전체를 삭제하고 연주곡만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검열에대항한 사건이 일어났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팬들은 표현의 자유를 빼앗은 공윤에 비난을 쏟아부었다. 결국 공윤은 1996년 6월 사전심의제를 폐지했고 넉 달 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 위반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 P328

이어령, 현승종, 양주동, 구상, 박종홍 등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과문인들이 고전독서운동에 힘을 보탰다.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지원이 시작되면서 고전독서운동은 암기능력을 테스트하는 경연대회로 변해버렸다. 1968년 11월 제1회 대통령기쟁탈 전국자유교양대회가 열렸고 정일권 국무총리가 시상을 했다. 마치 고교야구대회나 전국체전을 할 때처럼 전국 학교와시도에서 선발한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독후감을 쓰고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대회 전성기였던 1974년에는 전국 학생의 90퍼센트가 지역예선에 참가했다. 육영수 여사는 해마다 입상자를 청와대로 초대해다과를 베풀었다. 1975년 마지막 대회를 할 때까지 연인원 1,900만명이 참가했고 협회는 132종 800만 부의 고전을 보급했다.  - P330

병영국가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다. 국가가 특정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강제하면 국민이 아프고 불편하다. 원하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회의가 생긴다.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적은 북한만이 아니었다.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같은 소위 ‘국외공산계열‘도적이었다. 그 나라들의 국가이데올로기가마르크스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라고 선동했다. 그래서 병영국가 권력자들은 노동자를 북한과 ‘국외공산계열의 잠재적 협력자로 보았으며 그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거나 단결하지 못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서 특별한 관심이란 철저한 감시와 무자비한 억압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은 심리적고통뿐만 아니라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하는 ‘물리적 고통‘도 겪어야 했다. - P331

자주적인 노동조합연합체는 광장의 시대가 열린 후에야 비로소탄생했다. 1995년 11월에 출범한 민주노총이 그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항의 총파업을 치르면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한 민주노총은 산하에 16개 산업별 노조가 있는데, 거대한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이 속한 금속노조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공운수연맹 등이 핵심이다. 민주노총은 1997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 10여 년 동안 조직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만성적인 정파갈등과 대기업 노동조합의 자기중심적행태 등으로 대중의 신망이 크게 하락했으며 2008년 이후에는 정부의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탄압에 직면했다.
권력자는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한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격의 각인을 남긴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 지위도 권력도 없는 사람이 역사에 자신의 인격을 각인하기도 한다. ‘영원한 청년 노동자 또는 ‘노동열사‘ 전태일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 P332

스님도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현대사에 인격을 각인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가톨릭과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다. 전태일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1970년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껴안은 채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 그는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전신에 3도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타계할 때까지 40년 세월을 ‘노동자의 어머니‘ 로 살았다. - P334

전태일이 청원한 것은 하루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매주 일요일을 쉬게 하며,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고, 시다의 급여를 50퍼센트 인상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 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들은 이 요구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짓밟았다. 전태일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분신을 결심했다.
전태일 이전에도 전태일 이후에도 억압과 착취에 항거하면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에 전태일만큼뚜렷한 각인을 남기지는 못했다. 전태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린여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다.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 가운데 급여수준이 가장 높은 재단사였다. 다른 유능한재단사들은 돈을 모아 양복점을 내고 사장이 되는 것을 꿈꾸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이 많았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다.  - P335

그런데 전태일을 분신하게 한 것은 어떤 이념이 아니라 어리고 약한 이옷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는 그 자신도 어리고 약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어리고 약한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가 더 어리고더 약한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 행위가 수많은 국민의 영혼을 울렸다. 그는 한국 사회가 빈곤과 억압, 착취와 인권유린에 고통받는 거대한 노동자 집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드러내 보였으며, 대한민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었다.
분신 소식을 들은 대학생들이 평화시장으로 달려왔다. 조영래, 장기표 같은 사람들이었다. 반독재 ·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던 대학생과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이후 노동운동, 노학연대와 청년지식인들의 노동현장 투신, 노동운동의 정치적 진출, 민주노총의 탄생은 모두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곧바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P336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88년 7월, 문송면이라는 열다섯 살 소년이 사망했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서울에는야간학교에 다니게 해주는 공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인 충남 서산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왔다. 그런데 영등포구 양평동 공장에 취직해온도계에 수은 넣는 일을 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손발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을 알 수없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 진단을 받았고 넉 달 뒤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 산업보건 현실과 노동행정의후진성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때는 직업병 전문병원이 없었다. 회사는 문송면 군의 병이 회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재신청서 날인을 거부했다.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요양신청서를 반려해버렸다. - P337

문송면군 사망 직후였던 1988년 7월 원조가족협의회‘가 발족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비롯한 환경단체와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여기에 결합했다. 박영숙, 노무현 등 야당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부는 정부의 무관심에 격분한 원진 피해자들이 88올림픽 성화 봉송로를 막으려고 하자 비로소협상에 응했다. 원진레이온은 몇 년 후 폐업했지만 이 투쟁은 그 후10여 년 더 지속되었다. 문제의 설비를 중국 기업에 팔아치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 원진재단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치료와 재활을 돕기 위해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 원진복지관을 지었다. - P338

다시 19년이 지난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스물세 살 여성 노동자 황유미 씨가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3년부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한 황유미 씨는 2년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에 숨졌다. 1년 전에는 같은 공정에투입되었던 동료 한 사람이 림프구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는 2000년 이후최소한 여섯 명의 백혈병 환자가 생겼다. 화성공장과 온양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삼성반도체는 백혈병의 업무연관성을 부인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은 극히 형식적인 역학조사를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서를 냈다.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노동자 다섯 명의 산재신청 승인을 거부했다. 백혈병이 직업병이라는 의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거부 사유였다.  - P339

황유미 씨 사건으로 출발했던 대책위원회는 2008년부터 다른 반도체 회사의 직업병 피해자 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반올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있다. 반올림에 직업병으로 제보를 해온 사람은 2013년까지 모두171명이었고 그중 7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루게릭, 다발성경화증 등 병명은 다양했지만, 모두 암이 아니면희귀질병이었고 환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39명이 산재보험보상을 신청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단 세 사람만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질병 원인을 입증하기 어렵다"라며 모두 기각했다. 반올림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진행과정은 1988년 문송면 군과 원진레이온 사건 때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투쟁의 대상이 글로벌 기업집단인 삼성그룹 소속 최첨단 기업이라는사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여러 시민단체, 자발적 후원자가 되어준 시민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5월,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황에서 뒤늦게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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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시어머니가 고관절이 부러져 입원하셨다. 연락을받고 황급히 달려가서 병실 문을 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생리적 반응에 나조차 당황스러웠다. 늘 세로로 서 계시던 분이 가로로 누워 있으니 낯이 설고 며칠 사이 확 쪼그라든 모습에 안쓰러움이 치밀기도 하였지만, 실은 울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심장계 질환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엄마가 다만 일주일이라도 앓다가 돌아가셨으면이별을 예비했을 텐데 싶어 두고두고 한스러웠다. 입원실에 누워 계신 시어머니를 보는 순간 느닷없이 엄마의 얼굴이 개입한거다. 효심 아니라 통한, 이 눈물의 사회학은, 엄마 장례식장에서 배운 것이기도 하다. 엄마 친구분이 하도 넓게 울어 이제 고만 우시라고 했더니 그러셨다. "니 엄마 가엾어 우는 게 아니다. 내 설움에 우는 거지." - P134

그 후로 종종 목도했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시청분향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들려왔다.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기 설움 토해 내는 갖가지 궁상과 청승의 사연들소방 호스보다 긴 눈물의 행렬들. 고역의 시절을 살아 내느라지친 민초들은 광장에 마련된 공식 초상집에 와서 꺼이꺼이 울다가 가곤 했던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친절한 복희씨》에서눈물에 담긴 미묘한 복합 감정을 멋진 문장으로 정리했다. 첫사랑이었던 그에게 청첩장을 건네니 그 남자가 울더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우는 건 아니다."
- P135

투명한 눈물의 속사정은 이리도 복잡하다. 2011년 9월 31일 향년 여든한 살로 영면에 드신 이소선 여사의 생애 마지막두 해를 그림자처럼 붙어서 기록한 태준식 감독의 제작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더 놀다 가지‘라는 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주 찾아뵐게요‘를 수없이 반복하며 나오던 창신동 골목에서전체의 그림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조직과 효율이라는 몸에밴 그동안의 작업 관성을 버리고 작업했다." 따뜻하고 사려 깊은 감독의 눈길이 고맙고도 궁금했다. 그의 가슴에는 어떤 큰 - P135

트 비애의 강물이 있어 한 삶을 이리도 고요히 받아 낸 걸까. 덕분에 나는 이소선 여사의 삶에 나의 삶을 비춰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는 게 힘든데 그 힘듦에서 어떻게 재밌고 값지게 살아야할까, 삶의 기본값으로 주어진 설움과 청승을 어떻게 품고 갈까,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아주 구체적으로는 어디에 돈과 시간을 써야할까를 생각했다.
이소선 여사는 생전에 집회 현장에서 연행이나 구류로 끌려간 횟수만도 250회가 넘는다는데, 어째서 영화에는 억척스러운 투사가 아닌 다정한 선녀가 노니는가. 마음이 너르고 곧고성정이 귀엽기까지 한 어머니의 영혼을 빌리고 싶다. 남의 입에 밥 들어갈 끼니를 걱정하느라 입술이 부르트고 주름이 늘고검버섯 피어난 어머니의 생은 얼마나 시적인가. - P136

낮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_허수경의 시 <시>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에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의 시 거룩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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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p224

어린 시절 우리에게 ‘박정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통령‘과 뜻이같은 보통명사였다. 박정희는 곧 대통령이고 대통령은 박정희여야만 했다. 대통령을 다른 이름과 연결하거나 박정희라는 이름에 대통령을 붙이지 않는 것은 모두 불경스러운 행위였다. 내가 첫돌이 되기전에 권력을 잡았던 그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대통령이었다. 우리 세대는 유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시작을온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보냈다. 우리들각자의 개인사에는 많든 적든 대통령 박정희의 인격과 취향이 각인되어 있다.
1961년 5·16에서 1972년 10월 유신까지 민주화운동의 목표는박정희 정권 타도라기보다는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정부는 언제나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하지만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4·19혁명의 봉화를 올렸던 고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자라나 대학생과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이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전위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91

민주화운동의 후위後衛는 수십 년 구절양장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야당이었다. 운동의 주력은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었다. 전위는 강력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에 맞서 싸움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주력을 형성하면 싸움이 커졌다. 야당은 투쟁의 성과를 챙기고 뒷수습을 했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대隊伍는 4·19 때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같은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과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 P191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 P192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 P194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 - P198

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2억 달러로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 P199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월 20일,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 - P204

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월 18일 100만 명의 청중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 - P205

정선거 감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8퍼센트,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퍼센트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 P206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P209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은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월 2일 서울대 - P212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월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그러나 2006년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 P212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
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 P212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년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 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 P217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7년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 P218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년 8월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YH무역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이런 상황에서 자꾸
‘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선포했다. - P219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 - P221

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 P222

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 - P224

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군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 P225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 - P225

운데서 누군가 ‘십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 P227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내가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5월 14일과 15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벌어진 대학생거리시위를 정밀하게 기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 - P227

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5월 13일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김‘이 이끈 여야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월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 P228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월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대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 - P228

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월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복학생 형들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나는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해산하도록 한 다음 밤이 깊을 때까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 P229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밝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 - P229

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을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던 정치인 김대중 씨도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정부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 P230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安일 것이라고 우리는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월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사단 등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 P230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컸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 P232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 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을 발표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 P233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표했다는 신군부의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 - P233

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ㅏ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 P234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 P235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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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라는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 - P235

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 P236

6월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 - P255

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년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 P257

지도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 P257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가늠할 수 없었다. - P258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죄를 완전히 면책받은 것은 아니었다. - P258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 P259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월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의 강경대응과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9월까지 지속되었다.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국민의 관심은 정치에 집중되었다. - P259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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