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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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들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음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시집 [바람의 사생활(창비)] 중에서

 

      

    

 

    

 

    

    

 

시월입니다.

가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병률시인의 시로 골랐습니다.

시집으로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여행 산문집으로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가 있는데 어느 책이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겁니다.

한 권 읽어 보시지요^^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슬그머니 추억이 밀리고 아련함들도 밀리고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천천히, 천천히 음미하듯 느껴보세요.

마음에도 청명한 가을이 찾아 올 거예요. ^.^;;

광교산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다운 당신,

우리는 항상 응원합니다. 내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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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0-0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이 풍부한 이병률 시인을 저도 좋아합니다.
지금 읽어야겠습니다^^

2014-10-16 14:26   좋아요 0 | URL
시를 읽기 좋은 요즘이예요^^
`끌림`을 들고 기차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이네요. 오늘은~
저는 요즘은 문정희 시인을 읽고있습니다.
 
험준한 사랑 창비시선 249
박철 지음 / 창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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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

                               

                                         박철

 

내가 큰길 놓아두고

샛길 접어듦은 석양에 물든 그대 때문이라

어둠이 오기 전 나는 마지막 태양의 흙냄새

작은 열기라도 잊지 않기 위함이라

내가 멀리 길 떠날 막차를 보내고

어둠을 틈타 한적한 곳 돌아서

샛길, 샛길, 하며 목마르게 걷고 또 걷는 것은

길의 어느 한군데쯤

그대 등 돌려 나를 맞이할까, 두려움이라

 

젊다지만 나는 이미 천상의 인간

그대 거기까지 나를 따라올까

내가 곧은 길 놓아주고

샛길 험한 길 들어섬은 생의 슬픔 때문이라

슬픔만이 우리를 한결로 엮어

어느 무리 멀리 떠난 뒤에도

샛길, 샛길, 하며 한몸으로

걸어갈 수 있음이라

                                시집 [험준한 사랑 -창비]중에서

 

 

 

“팔월, 잦은 빗속에 내내 끌어안고 다니던 시집을 내려놓습니다.

폭우로 쏟아지던 백양사, 그 길 위에서 함께 젖어든 시집.

시집을 펼칠 때마다 하늘 가득 채우던 애기단풍의 별꽃들이 촘촘히 얽혀들었지요.

뜨거운 이마에 서늘하게 얹히던 손의 감촉 같은 시어들,

그 사이로 제가 걸어가야 할 샛길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해야겠습니다.

너무 오래 놀았습니다.

구월이 문 밖에 와 있습니다.

이마, 서늘합니다.”

 

오래 전(2005년) 제 블로그에 올렸던 시와 글을 옮겨봅니다.

하아~! 구월,이어서요.

무조건 가을이니까.......

“샛길, 샛길, 하며 한 몸으로 걸어갈 수 있음이라”

다시 그렇게 샛길을 찾아 걸어가야 할 시간인 게지요.

가을은 산다는 것이 축복임을 알게 해 주는 계절,

생의 구불구불한 샛길,

여기에서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

**농원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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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시집 41
박남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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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중에서

 

 

     

 

 

새벽, 서늘한 기운이 가을을 만나게 해줍니다.

볕은 따가워도 가을,입니다. 살 만 해지는 가을.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자주 다치고 넘어집니다

가을 파씨를 심고 밭에서 내려오는 길,

부추꽃 몇 송이를 모셔왔지요.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어릴 적 텃밭의 솔이 저리 환한 무리의 흰 꽃이라니.......

지나간 세월, 떠난 이들은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요?

오늘도 다친 상처에 쓰라리지만 삶은 또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가을도 환한 목숨, 환한 환생으로 열심히

무탈하게 살아내기를 광교산에서 응원합니다.

**농원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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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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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로부터의 편지

 

                                       윤희상

 

이른 아침부터 언덕을 거닐며 안으로부터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읽고 있다

그리움이거나

미움이거나

목마름이거나 그럴 테지만, 뜨겁다

이내 바람이 불어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이지만,

아픈 것은 마음이다

이제 다치지 않는 바람이 되고 싶다

마다 그런 마음을 드리운 그림자를 물 위로 띄워보지만

아무도 건져서 읽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바람에게로 간다

이미, 풀어내린 긴 나뭇가지의 잎사귀들이

바람 속으로 먼저 들어서고 있다

언덕에서 바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 맡기고 있다

벌써 바람과 함께 놀고 있다

                   시집[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문학동네 2014)]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입니다.

여린 새싹으로, 꽃으로, 푸름으로, 낙엽으로,

겨울 나목까지, 해석 가능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읽고’ 당신을 위로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상처받고 헐떡이는 우리를 달래주는 의연하고 완곡한 문장의 긴 편지.

설마, 받아 읽지 못하나요?

아니겠지요. ^.^;;

시인의 시의 집도 결국은 나무의 목숨,

여름이 시작될 무렵 출간된 따끈따끈한 시 한 편의 편지를 나무와 시인을 대신해 당신께 보냅니다.

시원한 바람 한 줌의 우표를 붙이고 폭염과 폭력의 나날,

건강하게 헤쳐가길 바라는 마음 가득 담았으니 읽는 건 당신의 몫입니다.

**농원식구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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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에서, 나는 이긴 것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이 명량에서 죽었다.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 죽을 때, 적들은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있는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김훈의 [칼의 노래]중에서 

 

 

 

 

 

 

 

 

그를 바라보는 일은 눈물겹다.
그를 수행하는 백성을 바라보는 일은 쓰라리다.

그 바다,
바로 그 바다,
진도의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뼈아프다.

그에게 기대어
간절함의 기도를 얹었던 날들이 아직도 진행형인 이 나라,
이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서럽다.

그런 지도자가 그립다.

그ᆞ립ᆞ다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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