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6
손세실리아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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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신발

            손세실리아

 

등산화 다섯 켤레째다

길 위의 시간을 대변해주는 물증인 셈이다

밑창 닳고 헐거워져 버릴 때마다

한 짝씩 차례로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양이 등 쓰다듬듯 어루만지곤 하는데

별 뜻 있어서라기보다는

길 떠도는 동안 몸 사린 적 없는 충복이자

어디든 군말 없이 따라나서 준 도반이었으니

작별의 예를 갖춤이 도리일 것 같아서다

신문지에 싸서 버리고 새 신을 고르다 생각한다

내 몸도 어쩌면 우주의 얼음 발에 신겨진

한 켤레 신발일지 모른다고

주야로 끌고 다녀 뒤축 꺾이고 실밥 터졌으나

생을 마감 짓는 날까지 벗어던질 수도

새것으로 교체할 수도 없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시집[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 2014)]중에서

 

 

우주의 신발은 헌 등산화 한 켤레를 향한 애틋한 시선에서

‘내 몸도 어쩌면 우주의 얼음 발에 신겨진 한 켤레 신발’로

이어지는 생각이 오롯하게 읽힙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길 위의 시간인 신발, 버릴 때마다 어떻게 했는지?

낡은 얼음 발을 끌고 지금,

생의 어느 구비를 걷고 있는지?

???

손세실리아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습니다.

구년을 기다려 세상에 나온 시집답게

묵직하고 고요하면서 여운 찡한 55편의 시가

오천오백, 아니 오만 오천,

아니, 아니 숫자로는 환산 할 수 없는

눈시울 뜨겁게 만드는 뭉클함으로 다가옵니다.

삶을,

세상을 찐하게 사랑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한번 읽어보실래요.

정말 그런지 확인도 해보실 겸^^

당신의 신발은 발에 꼭 맞아서 당신의 삶,

가는 곳 어디서든 내내 편안하기를,

따뜻하기를... 

 

 

 벌써 작년이 되어 버린 포스팅을 이제야 올린다.

 '은유적 생'의 현장을 떠나오면서 마지막으로 걸어놓고 온 '우주의 신발'

  아직 거기서 찬바람을 부대끼며 펄럭이고 있을 것만 같은 시가 밟힌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눈길 주어 시도 그 사람도 따뜻했으면 싶은 바람이 차운 밤이다.​

  가게 오픈에, 이사에, 정신없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왔다.

  책상 정리를 끝낸 오늘, 비로소 안정 된 공간 속에  들어 앉은 느낌이다.

  올 한 해의 ​시간들은 또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나?

  자신 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는 생의 굽이에서 ​조금 더 몸을 낮추고 볕바라기를 하면서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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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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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김사인

귓 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 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 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중에서​

                         

                          김사인 시인은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서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1981년[시와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했으며, 1982년​부터는평론도 쓰기 시작했다.

                    ​      시집으로 [밤에 쓰는편지] [가만히 좋아하는]이 있고,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등의 편저서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십년째 고양시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 

 

[가만히 좋아하는]과는 다르다.

아니다, 같다.

깊다.

묵직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아껴가며 먹고있다.

어린 당나귀가 당근을 오물오물 먹고 있 듯....

바짝 붙어서

 

 

불길한 저녁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그러면 그렇지 이 나라에

'요행은 없음'

명패를 붙이고 밤이 내리네.

 

유서 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 진술 같은 안개 깔리고

코스모스 길고 여린 모가지 흔들리네

별은 뜨지않네.

 

불가항력의 졸음은 오고

집요한 회유 같은 졸음은 오고

피처럼 식은 땀이 끈적거리네.

 

슬프자, 실컷 슬퍼버리자.

지자, 차라리

이기지 말아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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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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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시인의 따끈따끈한 시의 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출간 되었다.
마구 기대된다. ˝가만히 좋아하는˝의 여운이 생생한데 `귓 속이 늘 궁금했다...`로 시작하는 시집이 두근두근이다.
그의 시는 이렇게 차고 마음 시린날, 따숩고 투박한 손으로 등을 토닥거려줄 것이다.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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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주문했으니 황정은의 전작을 갖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전작하는 경향이 있는 나로선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녀의 책을 처음 만난 건 [白의 그림자]로 였다.

독특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시적 운율이 살아있는 소설을 만나 신선하고 경쾌했다.

무엇보다 어리숙한 듯하면서 매력적인 은교 씨와

순정하고 따뜻한 무재 씨의 대화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책을 덮은 뒤의 여운이 더욱 강렬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어들처럼 한동안 머릿속을 떠다닌 것이다.

그렇게 빠져든 그녀의 신작을 기대하면서

 

˝.......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라면 가마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틈에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어리둥절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은교 씨는요,

하고 무재 씨가 젓가락으로 계란을 자르며 말했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계란 먹을래요?

네.

무재 씨는 반으로 자른 계란을 집어서 내 그릇에 넣어 주고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었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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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점 세계사 시인선 128
배한봉 지음 / 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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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을 듣다

                              배한봉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는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집 [악기점]중에서​

 

            

 

바람이 찹니다.

호박잎은 기침하며 돌아눕고 가을

깊어갑니다.

억새는 저 홀로 살과 뼈 버리고 있겠지요.

바람 찬 세상을 넘어 온 세월, 비우고 비우고.......

아름답게 꽉 채운 여백

억새는 흔들리고

공명을 듣습니다.

버리고 버리고........

마침내 채워지는 가을, 그리고 우포늪.

우포늪,

그립습니다.​

배한봉시인은 우포늪 시인이라고도 불립니다.

십년 전에 출간 된 시집이니 시인도,

저도 이제는 쉰 몇,

겨우 쉰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아직도

숨 가쁜 나이네요.

그래도 시월 안에서,

가을 속에서,

광교산 아래에서 당신과 함께합니다.

내내 안녕을. 

 

꽃 속의 음표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 뿜어 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은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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