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점 세계사 시인선 128
배한봉 지음 / 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공명을 듣다

                              배한봉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는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집 [악기점]중에서​

 

            

 

바람이 찹니다.

호박잎은 기침하며 돌아눕고 가을

깊어갑니다.

억새는 저 홀로 살과 뼈 버리고 있겠지요.

바람 찬 세상을 넘어 온 세월, 비우고 비우고.......

아름답게 꽉 채운 여백

억새는 흔들리고

공명을 듣습니다.

버리고 버리고........

마침내 채워지는 가을, 그리고 우포늪.

우포늪,

그립습니다.​

배한봉시인은 우포늪 시인이라고도 불립니다.

십년 전에 출간 된 시집이니 시인도,

저도 이제는 쉰 몇,

겨우 쉰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아직도

숨 가쁜 나이네요.

그래도 시월 안에서,

가을 속에서,

광교산 아래에서 당신과 함께합니다.

내내 안녕을. 

 

꽃 속의 음표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 뿜어 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은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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