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들은 정말지도력도, 군사적 재능도, 단순한 상식도 없는 것인가? 그러나 병사들은 자기들을 곤경에서 구해준 이 유일하게 현명한 결정이 만족스러웠기에 더이상 지문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했다. 장군들부터 졸병들까지모두가 파리 가까이 가면 다시 강군이 되리라고, 바로 거기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동이 트자마자 부지에를 떠나 르센으로 행군해야 했다. 이내 병사들이부산하게 움직였고, 나팔소리가 울렸으며, 명령이 교차했다. 후미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벌써 군사 장비 마차와 병참 장교 마차가 선두에서출발했다.
- P131

가로질러 불토부아로 이동했으며, 3군단은 연락망을 확보하기 위해 왼쪽, 즉 벨빌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이옥고 106 연대가 뫼즈강을 향해 음울한 행군을 시작했을 때, 모리스는 연로한 데로 부인의 얇은 커튼에 비친, 방안을 끝없이 오가던 황제의 음울한 그림자를 다시 떠올렸다. 아! 대패가 확실한데도 왕조의안녕을 위해 사지로 급파되는 이 절망의 군대여, 이 파멸의 군대여! 진격하라, 진격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빗속으로, 진창 속으로, 전멸을향해!
- P147

병사들은 길 양쪽 가장자리로 열을 지어 걸었고, 장교들이 두 대영 사이로 지나갔다. 랭스에서 야영한 다음날 샹파뉴에서 병사들이 했던 즐거운 행군, 농담과 노래로 떠들썩했던 행군,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 격퇴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배낭을 가볍게 들어올렸던 행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 분노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소총과배낭을 저주했고, 지휘부를 더이상 믿지 않았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채 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가축떼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그저 앞으로옮길 뿐이었다. 이 가련한 군대는 자기들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 P153

장은 다시 수통을 채우러 갔고, 그 물을 단숨에 마셨다. 실은 그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너무 굶주려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 다시 행군! 힘내, 모리스, 동료들을 따라잡아야 해!"
모리스는 장의 품에 몸을 맡겼고, 어린아이처럼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어떤 여자의 품도 그의 가슴을 그렇게 따듯하게 덥힌 적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한 존재로부터 포근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은 그에게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 더욱이 그의 가슴과 맞닿아 있는 한 존재가 애당초그가 혐오했었던 무지렁이 농부라는 것이 이 순간 우정과 감사를 한없이 증폭시켰다. - P172

이것이야말로 원초적 우정, 일체의 문화와 계급 이전의 우정, 자연이라는 적의 위협 앞에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하나로 결합한 두 인간의 우정이 아닐까? 그는 장의 가슴속에서 인류가 뛰는소리를 들었고, 구원자인 장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한편 장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과 달리 천부적 재능과 지성을 갖춘 친구를 보호한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무시무시한 폭력과 강간을 당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뒤로 그는 자신에게는감정이 없다고 믿었고, 인간이란 모두 고통의 원인이므로 사악하지 않은 인간들조차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슴속에 우정이 흘러넘쳤다. 굳이 포옹할 필요도 없었다. 그토록달랐음에도 둘은 서로에게 깊이 감동했고, 내면에서 진정으로 교감했다. 레미로 가는 이 끔찍한 도로 위에서, 두 남자는 서로에게 기대며 마침내 연민과 고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 P173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선부른 결정이에요. 언젠가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야. 이, 사랑해요,
삼다.
그는 입맞춤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하늘이 내려준 지복에,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다고 여긴 행복한 삶을 더이상 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으로 그를 꼭 껴안았고, 되찾은 보물인암, 이제 아무도 자기한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자기만의 보물인 양 그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퍼부었다. 잃어버렸던 그를 되찾았어, 또다시 그를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야.
- P200

대니의 짙푸른 경사지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왼쪽 창의 구릉지대도 화염에 휩싸이 있었다. 땅에서 솟은 듯한 대포들은 발이 늘어나는 벨트 같았다. 누아에서 1개 포병대가 발랑을 폭격했고,
바들랭쿠르에서 1개 포병대가 스당을 공격했으며, 마르페 아래 프레누아에서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1개 포병대가 도시 위로 쏘아올린포탄은 7군단이 포진한 플루앙고원에서 폭발했다. 바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언덕들이, 푸른 계곡을 닫으며 언제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언덕들이 돌연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요새로 변한 채 스당의 성채를 파괴하는 모습을 단말마적 고통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벽토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총탄 한 발에 경계벽 너머 그의 집 전면 모서리가 떨어져나갔다. 그가분노하며 소리쳤다.
"우리집을 박살낼 작정이군, 날강도 같은 놈들이!"
바로 그때 그의 등뒤에서 퍽하고 물컹한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앳된 얼굴의 이 병사는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첫 사망자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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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보건실에 비치된 생리대도 차마 부끄러워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희 생리대도 없다며, 온 세상이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어쩐지 죄스러웠다.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가난을 체험하러 나온 사장 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오만한 사람이 ‘해봤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딱 그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영역의 가난에 대해서 더 겸손해야 했다. 더 살펴야 했다. P238


   벌써 오래 전에 마친...책이다.
   호평 일색이어서 구입했던 산문집인데 나에겐 많이 아쉬웠다. ˝골목˝을 갖지 못하고 살아서 그랬을까? 우리가 한 때 후일담, 후일담하던 아류로만 읽혀서 씁쓸했다.

   그러나 뒤쪽으로 갈수록 저렇게 빛나는 페이지들이 있어서 초반의 아쉬움을 뛰어넘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욕한 순간을 맞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린 나를 서늘하게 떠올리게했다.

  곧 사라질 ˝여가부˝, 도대체 ‘뭣이 중한디!!‘ 묻고 싶다.






그런 내게 『못나도 울 엄마』는 현실이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소공녀』 속의 인자한 부자 아빠 대신 『못나도 울 엄마』 속의 괴팍한 할머니가 내 부모라고 나타난다면 나는 과연 작정한 대로 키워준 부모와 이별할 수 있을까.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게 있어 책은 꿈이고 판타지였다. 책을 많이 읽으면 성공한다거나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믿음을 가졌던 적은 없다. 그런 건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오히려 나는 책에 있는 텍스트와 현실을 자주 혼동했다. 나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어떤 동물들처럼 현명할 것이고, 『십오 소년 표류기』의 소년들처럼 고난에 빠져도 맞서 싸울 것이며, 『작은 아씨들』의 베스처럼 끝내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의연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책에 있는 권선징악의 세계, 주인공은 끝내 승리하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미래는 마땅히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나는 늘 안전했다. 그런데 미래가 결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면? 책이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 P30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말 알기는 알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철거 지역에 살았으니 철거민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인기척을 내는 일 말고 철거민으로서 애써본 적도 싸워본 적도 없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 건 내 부모였고, 내 형제였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심정 같은 처지였을 수는 없다. 아무도 못 본 꽃을 내가 본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르포인 『4천원인생』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이 지나갔다. 아, 이건 내가 겪어본 삶이다, 싶다가 바로 그 말을 삼켰다. 그 삶을 겪은 건 내가 아니라 내 가족이고 내 친구였다. 유통 업체에서 일해본 적은 있었지만, 아르바이트였다. 연말 대목에는 보수가 많다고 해서 나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열두 시간 가까이 서 있어야 하는 육체노동과 마냥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에 질려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일을 했다. 등록금을 생각하면 그 정도 힘든 걸로 그만둘 수 없었다. 방학 동안 여행 다니는 친구들과 견주면 나는 내가 위기의 이십 대인 척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돌아갈 학교가 있는 ‘대학생 알바‘일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 동갑내기 점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 나도 유통 업체 노동자의 삶을 알아,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 가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 P45

비교적 쉼터에서 가까운 텃밭을 분양받았는데도 소금기만 없다면 그 밭을 가는 동안 흘린 내 땀으로 물을 줘도 될 지경이었다. 잡초는 또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내 밭의 잡초만 열심히 뽑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농사를 포기한 사람들의 밭에서 원래 심은 농작물과 알아서 뿌리내린 잡초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뤄 오가는 길에 발목까지 잠겼다. 내가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해 텃밭을 가꾸는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 잡초가 숲이 되도록 버려놓은 텃밭 주인들에게 미움이 절로 솟았다. 글은 당연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흙내 나는 소설은커녕 ‘텃밭일기‘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달아놓은 메모장도 한 문단을 채우지 못했다.
그 농사의 마지막은 사십 도가 넘는 고온이 계속되던 날 중 하루였다. 가을 농사를 위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땅주인의 요청에 따라 텃밭 정리를 해야 했다. 지열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지주를 뽑아내고 남은 작물을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는 이 밭에 오지 않으리라, 적어도 가을에는 오지 않으리라, 이를 박박 갈았다. 고작 세 평 밭을 정리하면서 애초에 내가 꾸었던 꿈을 하나하나 반성했다. 삶이라니, 땀이라니, 땅에 대한, 농사에 대한 이해라니, 그 무엇 하나 가당한 것이 없는 오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농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농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땅을 대한다는 건, 삶을 이해한다는 건, 폼으로 낭만으로 자랑삼아 될 일이 아니었다. P148,149
- P148

고통은 왜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하는가.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 건 기금을 모집할 때만이 아니다. 공적 기금이나 후원이 필요한 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고통이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결핍과 아픔과 절망을 누군가의 특정한 이름으로 노출하고 공감을 얻는 사회를 두고 ‘고통의 포르노‘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고통의 증명‘을 강박처럼 요구하는 사회는 맞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기근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전쟁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학대가 있고, 세상 어딘가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과 연대가 가능할 수는 없을까.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고 돕는 사람들의 연대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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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들 창비세계문학 88
에밀 졸라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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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이 책을 마친 소감이다. 세상의 속물이란 속물들의 집합소인 ˝집구석들˝은 신랄하고 빡치는 독설가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환청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뼛속까지 그득한 욕망 덩어리들은 현재 진형형으로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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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가 알을 보호하면서 가슴에 품은지도 꽤 여러 날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는 어쩌다가 자기 몸에서 몇센티미터라도 알이 멀어져 갈라치면 그의 털북숭이 다리로 알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에게는 불편한 날들이 계속 될 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하얀 껍질에 푸른 반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생명도 없고 깨지기 쉬운 돌 조각 같은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이렇게열심히 돌보고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때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질 못해서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소르바스는 꼴로네요의 명령에 따라서 식사나 용변 보는 일 외에는 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그 칼슘 껍데기 안에서 진짜로 갈매기 새끼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양쪽 귀를 번갈아가며 알에다 대보기도 했다.  - P75

소르바스는 무엇 때문인지 배가 근질근질 가려워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라서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갈매기알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노란 주둥이 같은 뾰족한 물체가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소르바스는 앞발로 알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갈매기 새끼가 주둥이로 구멍을 뚫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소르바스는 드디어 그 구멍으로 물기에 촉촉하게 젖어 있는 하얀색 갈매기 머리를들여다볼 수 있었다.
새끼 갈매기가 종알거렸다.
소르바스는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채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자기 피부 색깔이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동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자신의 피부색이 엷은 자줏빛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느꼈다.
- P79

소르바스는 작고 귀여운 아기 갈매기를 혀로 열심히 핥아주었다.
그는 어미 갈매기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꽤나 안타까워했다. 만일 인간들의 부주의 때문에 죽은 어미 갈매기의 활강술을 이아기 갈매기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팔자로 태어났다면, 어미 갈매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져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때 꼴로네요가 제안했다.
아기 갈매기가 우리의 보호 아래 자랄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니 아기 갈매기의 이름을 ‘행운아‘ 라는 뜻의아포르뚜나다‘ 라고 짓도록 하지."
"고등어 아가미 같은 훌륭한 생각이군! 멋진 이름이야! 나는 언젠가 발트 해에서 보았던 멋진 돛단배를 아직도 기억하지. 그 배 이름이 바로 ‘아포르뚜나다‘ 였어. 온통 하얀색이었지."
"이 녀석은 나중에 커서 한가락 할 놈이 틀림없네. 출중한 인물이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이 녀석 이름도 백과사전의 ‘이부분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걸."
- P109

아포르뚜나다는 눈물을 흘리며 마띠아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털어놓았다. 소르바스는 아기 갈매기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때까지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넌 갈매기란다. 그건 침팬지의 말이 옳아. 그러나 아포르뚜나다,
우리 고양이들은 모두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아주 예쁜 갈매기지 .
그래서 우리는 너를 더욱 사랑한단다. 네가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했을 때,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지. 네가 우리처럼되고 싶다는 말이 우리들을 신나게 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우리와는 달라. 하지만 네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도하지, 우리는 불행하게도 네 엄마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너는 도와줄 수 있단다 - P117

"날아라!"
아포르뚜나다는 곧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찰나의 일이었다.
당황한 고양이와 시인은 최악의 경우까지도 생각했다. 조바심이 났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고개를 쭉 내밀어 난간 끝을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아기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그대로 떨어지던 아기 갈매기가 날개를 쫙 펴고 주차장 위를 힘차게 날고 있었다. 그리고는산 미겔 성당의 맨 꼭대기까지, 아니 탑 위에 달린 팔랑개비까지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아포르뚜나다는 아무도 없는 함부르크의 상공을 혼자서 쓸쓸히날고 있었다.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저 멀리 있는 항구의 기중기들과 선박들의 마스코트 위를 자유자재로 날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되돌아와서 산 미겔 성당의 종루 주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소르바스! 자, 봐요! 이제 날 수 있어요!"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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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날개를 자랑하는 갈매기 켕가는 선박의 깃발들을 관찰하는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깃발들 하나 하나가 서로 다른나라의 언어들로 쓰여졌으며, 같은 물건이라도 나라와 언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란 꽤나 복잡한 동물이야! 우리 갈매기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말 한마디면 다 통하는데 말야."
켕가는 같이 날고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말야. 그렇게 복잡한 데도 사람들이 서로서로 이해하고 말이 통할 수 있다는 건 더 희한한 일이지."
동료 갈매기도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해안선 저 멀리로 진녹색 풍경이 보였다. 드넓은 초원이었다. 바람을 타고 느릿느릿 돌고 있는 풍차 날개가 보였고, 방파제 아래에서는 양 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윽고 선두 갈매기는 무리에게 하강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앞다퉈 하강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청어 떼 위로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우며 돌진했다. 한류성기류를 탔기 때문에 하강 속도가 더 빨랐다. 거의 120마리에 달하는갈매기들은 마치 떨어지는 화살처럼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갈매기들이 잠수할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었다. 갈매기들이 수면으로 다시 올라올 때는 모두가 입에 청어 한 마리씩을물고 있었다.
- P12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는 모처럼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4주 동안은 내 세상이다! 그러나 이웃집에 사는 소년의 친구가 매일을 것이다. 소르바스에게 통조림 먹이도 주고 작은 자갈이 깔린 고양이 집을 깨끗이 청소해주러 말이다.
어쨌든 이제는 의자와 침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리 뒹굴 저리뒹굴 게으름피우고 농땡이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발코니에 나가 지붕에도 기어오르고 그곳에서 늙은 밤나무 가지로 뛰어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마당까지도 내려갈 수 있다. 안마당은 동네의고양이 친구들과 종종 만나서 놀던 곳이었다. 결코 지루하지 않을거야. 결코!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는 신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으로 수 시간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르바스는 마냥 즐거워할 수 있었다.
- P25


켕가는 힘없이 물 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일생중 가장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죽음의공포에 떨면서 자문해 보았다. 혹시 죽음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모습의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고기 밥이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질식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굶어 죽는것이 아닐까? 그는 죽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통 전체를 뒤흔들어댔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기름에 젖은 날개가 몸에서 떨어진 것이다. 은빛 깃털은 검은 농축 물질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날개는 최소한 펼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래, 여기서 빠져나가서 높이, 아주 높이 나는 거야. 그러면 석유가 햇빛에마를지 누가 알아?"
켕가는 한 가닥 희망을 찾은 듯 혼자 중얼거렸다.
    - P30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갈매기도 소르바스의 말을 인정했다.
"보아하니 몰골이 꽤나 엉망진창이군, 온몸에 묻은 게 뭐니? 악수가 심한데!"
소르바스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검은 파도에 휩쓸렸어. 바다의 재앙 덩어리 말야. 나는 곧 죽게될 거야."
갈매기가 처량하게 읊조렸다.
"죽는다고? 그런 소리 마. 너는 단지 피곤하고 약간 지저분할 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런데 이왕이면 동물원으로 날아가는 게 어떻겠니? 동물원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아. 거긴 너를 도와줄 수의사들도 많아."
소르바스가 말했다.
"그럴 수가 없어. 이게 내 생애 마지막 비행이었어."
갈매기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면서눈을 지그시 감았다.
- P36

고양이 네 마리는 오래 된 밤나무 밑에서 구슬픈 기도를 올렸다.
곧이어 가까이 있던 다른 고양이들과 강 건너 저편에 있던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이에 합쳐졌다. 뿐만 아니라 개들의 울부짖음과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들, 그리고 등지에 있는 참새들이 구슬프게 우짖는소리와 개구리들의 서글픈 울음소리, 심지어는 침펜지 마띠아스의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까지도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와 합쳐졌다.
함부르크에 있는 모든 집 안의 등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 날밤 항구의 주민들은 밤새 궁금해했다. 함부르크의 동물들을 갑자기사로잡아버린 저 이상한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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