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N) 육지 사람들은 맨날 봐도 똑같은 이 바다가 뭐가 좋다고 구경하려는오는지 서울이 재밌지, 이 시골이 대체 뭐가 좋다고?! 무공해? 청장: 연라 지루해... (하고, 바다를 향해, 침을 작게 뒷 밑고, 속상한, 씩씩대며, 동아서며) 다 더럽히고 싶다.
* 점프컷 - 오일장 가는 길》영주, 땀이 잔뜩 난 속상한 얼굴로 빠르게 걸어가며, 할머니나 이름들이게 계속 건성으로 투덜대듯 일일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하는 인사가 바쁜* 점프컷 - 섭섭오일장 입구 》일 시작하는 풍경 보이는 손님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영주, 섭섬오일장 입구에서부터 계속 진성으로 인사하는 짜증 나는 그런영주의 그림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들리는,
(장사 물건 정리하는 가는 영주 보며) 저거 호식이 몰래미 아니?
(할망1 옆에서 장사하는 가는 영주에게) 요즘도 전교 1등 햄시냐? 어멍도이시 잘도 요망지게 커부런(기억이 안 난다는 듯 어멍이 어시 (없어)?
(크게 말하는) 영주 애기 때 도망가게 몰린?
(가면서, 그 소리 다 듣는, 싸증 난, 다른 장사꾼들에게 인사하며, N) 나를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촌동네.. 도망치고 싶다! 하루 종일 인사만하다목 떨어지겠네. 지겨워.
* 점프컷 - 할망장터 >춘희, 잡은 소라, 전복, 물미역, 해삼 등을 컬러풀한 소쿠리에 조금씩 담아서 진열하고, 쪼그려 앉아서 멍게 손질하는,
옥동, 그 옆에서 각종 곡물과 뿌리채소류를 소쿠리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가, 달이, 커피 들고 뛰어와, ‘커피 배달이요!‘ 하고, 준희 옥동에게 주면, 두사람, 커피 받고, 옥동, 달이에게 돈 주려 하면,

선아
(한라산 보며) ...와..!
동석
(한라산을 보며, 투박하게) 나중에도 뭔가 사는 게 답답하면, 뒤를 봐 이렇게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 (옥동생각하며) 그저 바다만 바보처럼.
선아
(차분히 보면)
동석
(옥동 생각에 맘이 불편해, 답답하고 투박하게, 미간을 찡그리고 한라산만 보며) 울 엄마 얘기야. (답답한, 남일처럼 툭툭, 너무 무겁지 않게) 아버지가 배 타다 죽고, 동이누난 물질하다 죽고, 엄마 말 바다만 봤어. 바로등만 돌리면, 내가 있고, 이렇게 한라산이 턱하니 있는데.. 이렇게 등만 돌리면, 아버지 동이누나 죽은 바다도 안 볼 수 있는데 그저 맬 바다를 미워하면서도 바다만.. (하고, 선내로 가는)
선아
(한라산 보다 가는 동석을 보며, 편안하게) 나중에... 우리 열이 오면 같이한라산 가자?
동석
(가며, 투박하게) 나중은 나중에 얘기해, 지금 말고. 말했잖아. 난 나중은 없다고, 바람 분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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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 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병률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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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보는 것과는 다른.
활자 중독이 맞다.
슬프다.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는 것, ()들 때문에 슬프다.





한수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은희 못 보는 참담한)

은희
(맘 아픈, 눈물 나는, 눈물 닦고, 모질게, 그러나 맘 아픈) 니가 날 친구로생각해시민(했으면), 첨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니, 이혼이니, 그런 말을 한 순간... 넌 날 친구가 아닌, 그냥 너한테 껄떡대는 정신 빠진 푼수로 본 거라? 기지? 내 감정을 이용한 거라, 기지(그렇지)?

한수
(은희 보는, 울 것 같은, 참고, 맘 아픈, 고개 끄덕이고, 낮게) 그래.. 이용할수 있다면, 이용하고 싶었어.... 우리 애, 보람일 나처럼... 돈 때문에 지 꿈을 포기하게 하기 싫어서... 꿈 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아니까.

은희
(꿈 없이 산다는 말에 맘이 아픈, 참고, 가만 눈물 그렁해 보며) 나는 오늘, 지금.. 평생 친구 하날 잃언... (너무 맘 아픈 눈물 참고,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수건 들어, 얼굴을 파묻고, 잠시 울고, 이내 나오다, 바닥의 한수가족사진 펜던트를 들어, 보고, 한수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아 술 따라 마시고, 창가 보며, 한수에게, 낮게) 가

한수
(그런 은희를 보다, 펜던트를 집어 옷에 넣고, 은희 보며, 진심으로, 눈가붉어...너한테 왜 첨부터 돈 빌려달란 말을 안 했냐고?

은희
(눈물 그렁해, 속상해, 화나 보면)

한수
(눈물 그렁해, 차분하게) 세상 재밌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너한테 맬 죽어라 생선 대가리 치고, 돈 벌어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너한테 기껏 하나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좋은 추억... 돈 얘기로.. 망쳐놓고싶지가 않았어.

은희
(맘 아픈, 이해가 되는 속도 상한)

한수
(애써, 맘 다잡고, 눈물 흘리려 하며, 맘 아픈 진심) 그래도 너무 미안하다. 친구야 (하고, 맘 아프지만, 담백하게 일어나, 나가는)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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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부끄러움이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제주어를 모르면서 제주 배경이야기를 쓰겠다고 한 것(어이없고 감사하게도, 대사 대부분은 배우들이 직접 제주어를 공부해 연기한 것이다), 임신 중단 경험은커녕 고민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영주와 현의 이야기를 섣불리 선택한 것, 친구와 틀어진 인연을 바로잡지 않고 흘려보낸 일이 흔했으면서 미란과 은희에겐 굳이굳이 관계를 이어가라 등 떠밀어종용한 것, 영옥 정준 영희의 이야기를 써놓고도 장애인과 그의 가족들의 아픔을 여전히 잘 모르는 것, 자식을 잃은 춘희 맘을 내 어머니를 통해 보았으나, 그건 남의 집 불구경만큼이나 피부에 와닿지 않는 아스라한 정도쯤.
으로 수십 개의 변명도 마구 튀어 오른다.  - P4

이런 부끄러움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수십 개의 변명도 마구 튀어 오른다. 드라마는 수기가 아니지. 작가는 관찰자지. 하지만, 나는 한수처럼 가족 때문에 남에게 눈치 보며 손 벌려 빚을 얻어봤고, 은희처럼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봤고, 영주와 현이처럼 부모 가슴에 팔뚝만 한 대못을 박아봤고, 내 선택이 누군가에겐힐난거리가 되었던 일도 겪어봤고, 자식은 아니었지만 가족 때문에 부모 때문에호식처럼 가슴치며 제 뺨 치며 울어도 봤고, 인권처럼 부모가 죽고 나서야 철이들었고, 선아처럼 우울증을 앓진 않았지만 공황장애로 부지불식간 땅이 꺼지는공포를 수시로 당하는 형제를 수년간 곁에서 지켜봤고, 동석처럼 날 낳아준 사람을(내 경우는, 아버지였지만), 이 갈며 수십 년간 자다가도 미움에 눈을 부릅떠봤고, 옥동처럼 글자도 모르는 열두 살 때부터 남의집일을 했던, 별것을 넣지 않고 된장 하나로도 된장찌개를 기막히게 끓이는 어머니도 두어봤다. 관찰과수기와 해결될 수 없는 논란거리들이 마구 뒤엉켜버렸다. 글 쓰는 내내 일필휘지는 꿈도 못 꾸고,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지우고의 반복과 부끄러움과 변명 - P4

만이 함께했다. 삼십 년 가까이 글 써도 노하우라곤 없는, 늘 전작을 뛰어넘어야한단 과제가 장애물이, 페널티가 되는 그래도 시간이 가고, 끝을 맞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곧 이 드라마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건 더더욱 다행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드라마를 보며 더 즐겁고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하고, 나는 쉬어야 할때가 왔으니. 이 대본집은 그냥 기록일 뿐, 두고두고 남겨지기 위함은 아니다. - P5

전엔 글 쓸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젠 쉴 때도 살아 있는 걸 느껴보려한다. 이런저런 모양의 구름이 시시각각 떠도는 하늘과,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청춘들을 노인들을 노동자를 꽃잔디 보듯, 가만 긴 시간 보며 멍 때리고도 싶고, 주목처럼 근사하지 않은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 플라타너스의 허리나 발꿈치 정도를 만져보고 싶고, 때론 우러러보고, 기대보고도 싶다. 나는 글 쓰기 위해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므로 <우리들의 블루스>가 나를또 한 뼘 키웠다. - P5

이 드라마는 인생의 끝자락 혹은 절정, 시작에 서 있는 모든 삶에 대한 응원이다. 응원받아야할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때론 축복아닌 한없이 버거운 것임을 알기에, 작가는 그 삶 자체를 맘껏 ‘행복하라!‘ 응원하고 싶다.


낼모레 죽을 거라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일흔 중반의 옥동,
청소년기 어머니의 재가로 상처받고 이후 첫사랑부터 만나는 여자들에게 족족 채이고 가진 것이라곤 달랑 만물상 트럭 하나와 모난 성깔뿐인 마흔 초반 솔로인 동석,
남편은 물론 자식 셋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 자식마저 이제 곧 보낼 처지인 오래 산 게 분명한 죄라는 걸 증명하는 일흔 초반 춘희,
하루 이십 시간 생선 대가리를 치고 내장을 걷어내 평생 형제들 뒷바라지하고도 기껏 생색낸다는 말을 듣는 오십 줄의 처녀 은희,
수십 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이 앙다물고 버틴 삶인데 그로 인해 이혼을당하고 자식마저 양육할 수 없단 판결을 받은 선아,
가난한 집안에서 홀로 잘나 대학을 나왔지만 그래봤자 월급쟁이 인생에, 골프선수 꿈꾸는 능력 좋은 딸이 있지만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고 다리가 꺾여 첫사랑을 속이고 돈을 빌리려는 삶 자체가 초라한 기러기아빠 한수, - P14

해녀로 물질하며 깡 좋아 먹고사는 것은 두려울 것 없지만 사랑하는 남자가선뜻 결혼하자고 프러포즐 해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평생 혹 같은 다운증후군언니를 가진 영옥과큰 욕심 없이 남들 다 서울로 갈 때도 고향 제주와 가족들 지키겠다며 선뜻 배꾼으로 남아 고작 욕심이라곤 사랑하는 여자와 제주 이 바닷가에서 단둘이 오손도손 소박한 신혼을 꿈꾼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야멸차게 거부당한 정준에게도배 속 아이라도 애 죽이는 게 어디 쉬운가? 자신들도 애 낳는 게 무섭지만 나 - P14

름 고심해 애 낳기를 결정했는데, 고등학생이 무슨 애를 낳고 키우냐? 학교와남들도 모자라 아버지들에게까지 손가락질받는 영주와 현이에게도,
자식 잘못 키웠다 욕하는 남들은 그렇다 치자, 죽자사자 키워놓은 자식에게마저도 아버지가 해준 게 뭐 있냐? 이제부터 내 인생 간섭 마라! 온갖 악담을 듣고 무너지는 아버지들 방호식과 정인권은 물론,
부모 형제 남편 자식에게까지 맘적으로 버려지고 오갈 데 없어 죽고 싶은 맘으로 마지막 실오라기라도 붙잡듯 찾아온 베프(미란의 입장에선) 은희에게 위로는커녕 귀찮고 이기적인 년이란 소릴 들은 미란과어느 날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엄마와 아빠를 떠나 낯선 제주 할머니 집에 떨궈진 일곱 살 은기까지.
작가는 무너지지 마라, 끝나지 않았다. 살아 있다. 행복하라, 응원하고 싶었다.


따뜻한 제주, 생동감 넘치는 제주 오일장, 차고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14명의시고 달고 쓰고 떫은 인생 이야기를 옴니버스라는 압축된 포맷에 서정적이고도애잔하게, 때론 신나고 시원하고 세련되게, 전하려 한다. 여러 편의 영화를 이어보는 것 같은 재미에, 뭉클한 감동까지, 욕심내본다. - P15

이동석 (남, 사십 대 초반, 트럭 만물상)

제주 태생. 엄마 집이 있지만, 가지 않고, 트럭 하나에 의지해, 야채며 옷가지,
살림살이 등을 되는 대로 싣고 제주 인근 흩어진 섬들을 오가며 섬사람들에게장사해 먹고, 잠도 트럭에서 잔다. 섬마을 할머니 손님들과 시장서 일하는 초등학교 선배 은희, 인권하고나 웃고 농담을 주고받을까 대개는 별말이 없고 투박하고, 거칠다. 남들은 그를 두고 태생이 거친 놈이라 하지만, 모르는 소리. 그 역시 남들처럼 평화롭고 싶었고, 깔깔대고 웃고 싶었고, 해맑게 장난치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다. 누나 동희가 가난에 떠밀려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해녀가 되어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바다에서 지랄 같은 전복 따다 죽지만 않았어도(파도에 떠밀려 온 누나의 시신, 그 손엔 머리통만한 튼실한 전복이 쥐어져 있었다. 저놈이 누날 죽었군. 그는 이후 전복을 안 먹는다), 엄마 옥동이 배꾼인 아버지가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서 죽자 기다렸단 듯이 아버지 친구인 선주에게 재가만 하지 않았더라도, 제 엄마 옥동을 식모라고 부르고, 자신을 그지새끼라고 부르는 이복형제(제 또래와 한 살 위인 형이 있었다)들에게 허구한 날 죽게 맞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참 지켜주고 싶었던 첫사랑 그 기집애가 내 순정을 열여덟 그때, 서른둘 그때, 두 번씩이나 작신 짓밟아버리지만 않았어도.. 과연 내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일까?  - P16

민선아 (여, 삼십 대 후반)

서울 태생. 말수 적고 차분하다. 태훈은 그녀의 웃음이 이뻐 반했다지만, 자신은 모르겠다. 어려선 웃음이, 애교가 많았던 것도 같다. 엄마가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는 일곱 살 유치원을 마치고 나온 선아를 엄마가다짜고짜 차에 태웠다. 아빠에게 간다고 했다. 대체 아빠가 어딨다는 건지, 아빠는 벌써 한 달도 넘게 집에 오지 않았는데.. 엄마는 성인오락실(도박장) 앞에 차를 세우고 선아에게 말했다. ‘오락실 들어가서 아빠한테 집에 가자 그래‘ 선아는엄마가 시키는 대로 오락실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 자욱한 그곳에서 아빠가 배팅에 열을 내며 오락기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선아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엄마,
아빠 여깄어!‘ 근데 엄마 차가 없다. 엄마 차가 있던 자리엔 덩그러니 선아의 짐가방과 아빠의 짐가방만이 놓여 있었다. 선아는 그렇게 엄마에게 버려졌다. 아빠는 이후 선아와 살아보려고 애썼다. 엄마처럼 밥도 해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일도 하고. 그런데 뭐든 실패했다. 그러다 아버지 고향인 제주 삼촌네로 갔다.  - P18

정은희 (여, 사십 대 후반, 생선가게 운영)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4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모슬포시장에서 가장 돈이 많은 장사꾼에 억척스럽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흥도 많지만, 자수성가한 까닭에 세상에서 자신이 젤 잘났단 생각도 많다(현재 제주시와 서귀포, 모슬포점에 생선가게 운영, 그리고 이십 대에 산 서귀포 땅에 건물이 올려지면서, 동네에서 준갑부가 되었다). 아직도 처녀. 그녀의 삶은 늘 생선처럼 비리고, 생선대가리 치는 것만큼잔인했다. 딸년은 중학교만 나와도 된다는 아버지에게 반항해 16살에 농약을마실 때까지만 해도 농약은 미란의 아이디어였다. 제 집의 농약을 물에 두어 방울 타주며, 너는 이걸 마셔라, 나는 니네 집에 가, 니가 고등학교 못 가 농약 먹어 눈이 뒤집혔다고 할 테니. 은희는 미란이 시키는 대로 농약물을 마셨고, 미란에게 이끌려 온 아버진울며 은희를 업고 뛰었다. 미란이 은희 아버지 뒤를 쫓아 뛰며, ‘다 아저씨 잘못이다, 은희는 죽을 거다, 이 동네에서 고등학교 못 가는 애는 은희밖에 없다, 은희는 살아나도 챙피해 못 살 거다‘, 울며 악담을 퍼부으며 쇼를 했다. 작전은 성공. 고등학교 입학, 미란과는그렇게 절친이 됐다. 젠장할, 이 기억만 없었어도 코 푼 휴지처럼 버려버릴 년인데..)  - P25

최한수 (남, 사십대 후반, 모슬포농협 지점상)

어려선 가난이 싫어 욱하고 괜한 쌈질도 했지만, 다 지난 일, 지금은 세상 누구보다 성실하다. 돈 아끼려 혼자 밥해 먹고 술 담배 안 하고 집안 살림도 잘하고 누가 봐도 선한 웃음에 포근하고 성실한 샐러리맨, 아내와 자식 사랑이 끔찍하다. 2남 3녀 중 장남,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그가 초등학교 때 막내가 두 살때 도랑에 빠져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남의 집 땅에 깨농사를 지어 살림을 건사했다. 그는 공부를 잘해 서울로 유학을 갔다. 동생들은 그의 뒷바라질 위해 허리아픈 어머니 봉양을 위해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육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일찍이 일자릴 찾아 나섰다(큰어동생만 제주에 남아, 남편과 성실히 일해 현재 말 농장을 하며 잘산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막노동하며 혼자사는 막내가 모시고 산다), 동생들은 그가 대학을 나오면 퍽이나 잘될 줄 알았을 거다. 자신들의 삶도 다 돌봐주고, 어머니도 잘 모시고.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리 녹록한가. 그는 대학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장학금을 매번 받지 못했고(제주 우등생은 서울에선 그저 그런 위치란 걸 대학가 알았다), 대학 일 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미진과 결혼해선 맞벌이를 해 학자금 융자 결혼자금 융자받은 거 갚기에 허덕였고, 딸 보람이가 골에 재능을 보이고부터는 더더욱이 사는 게 팍팍했다. 보람이는, 어려서 자신의 골프채를 갖고 놀더니(그에게 골프는 고객 관리차 배운 거지, 허영은 없었다) 남다른 끼를 발휘해 초등학교 때는 전국에서 개최하는 모든 경기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는 아내 미진과 딸을 골프 유학을 위해 해외로 보내고 기러기아빠가 됐다(사실 그는 보람이가 골프를 그만뒀으면 했다. 근데 어린 놈이 일주일을 굶어가며, 유학을 보내달라고 떼쓰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가 포기할 수가 없게됐다. 투자한 게 얼만데, 가능성만 있다면, 죽기 살기로 해봐야 하지 않나. 만약 보람이가 박인비처럼 된다면! 그의 동생들, 그의 어머니의 삶도 하루아침에 보상되지않을까. 근데, 미국으로 간 보람이는 중학교 땐 승승장구하더니 고등학교 들어서서 갑자기 성적이 곤두박질쳐 현재는 프로 2부에 있다. - P27

방영주 (여, 열여덟 살, 고등학생)

제주생, 영주는 제주가 갑갑하다. 거친 바람도, 사시사철 생선반찬도 싹 다 지겹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동네가 진저리 난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빠가 원래 망나니였단 얘기, 결국 엄마가 애 버리고 도망갔단 얘기를 모두가 알고 있는 건지. 집밖에 나서서 학교에 갈 때까지 인사만 백번 해야 하는 이 촌바닥.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다. 그리고 곧 그날이 다가온다.
이제 곧 스무 살이고, 1년만 더 버티면 서울대 의대 입학! 제주완 안녕이다! 다들 영주가 바득바득 서울대에 가려는 이유가 그곳으로 도망간 엄마 때문이라고추측하지만, 그건 자신을 모르는 소리. 영주의 솔직한 맘은 서울대 합격이라는합당한 이유로, 아빠와 멀어지고 싶었다. 어려선 아빠에게마저 버려질까 두려워 언제나 완벽한 딸이려고 노력했고, 커가면서는 딸 하나 잘 키우려고 갈수록궁상맞아지는 아빠가 보기 싫어 밖으로 나돌았다. 허술한 아빠 백업하느라 영주 자신도 고생깨나 했는데, 아빠가 딸 독립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니심사가 뒤틀린다. 잘됐지 뭐, 대학 가면 각자 살면 되겠네?! 서울대가 허무맹랑한 꿈은 아닌 게, 영주는 부동의 전교 1등(가끔 현이가 1등을 할 때도 있지만)이다.
그렇다고 타에 모범이 되는 학생은 아니고, 뒤에선 호박씨 까고 잘 노는 날라리다. 반장인 게 학생부에 유리해서 하는 거지, 뒷골목 우두머리가 제 옷이다.  - P33

정현 (남, 열여덟 살, 고등학생)

제주생, 사람들은 나약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현은 거칠고 힘만 센 게 강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하단 평가도 못마땅하다. 느긋하고, 생각이 많고, 섬세할 뿐. 부모가 초등학교 때 이혼한 후 마초 같은 아빠와 단둘이 살며, 아빠에게 매일같이 ‘이 샌님 새끼!‘란 말을 귀에 인이 박이게 들었지만, 현은 속으 - P34

로 코웃음을 쳤다. 자칭 남자라고 하는 아빠가 늘 시끄럽고 쌍욕을 입에 달고살고 새끼가 아니면 문장을 잇질 못하는 아빠가 현이 눈엔 그저 무식해 보였다. 아빠는 순대장사가 자랑스럽다고 하지만 그것도 현이 눈엔 자기 위안 같았다. 제주 오일장을 다 돌며 생고생하는 것에 비해 버는 건 푼돈이고, 볼품없고,
냄새나고, 춥고 더울 때에도 난장에서 일하는 게 뭐가 좋아. 게다가 시장에만 가면 눈치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 자랑을 하는 통에 장 볼 때 아니면 시장에안 간다. 너무도 비루한 아빠 인생에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결국은 엄마도 그런 아빠에게 지쳐 떠났으니까. 그래서 현은 아빠가 남자답지 못하다며 깔아뭉개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근데, 영주가
‘너 맨날 여기서 나 기다리지, 이 샌님아‘ 했을 땐 넘어가지 못했다. 어디서 그런용기가 나왔는지, 샌님이란 말에 발끈해선, 대뜸 몸을 뻗어 키스해버렸다. 당황한 영주가 ‘너 지금 무슨 뜻이야?‘ 했을 때에도, 담담하게 ‘좋다는 뜻이다‘ 해버렸다. 그때 알았다. 아빠 말이 틀렸네, 나 샌님 아니네. 키스도, 자자는 말도, 영주가 예쁘단 말도, 사랑한단 말도 현이가 먼저 했다. 이상하게 영주 앞에서만큼은초인적인 힘이 생겨났다. 친구들도 어딘가 달라졌다고 했다.  - P35

정인권 (남, 사십 대 후반, 오일장 순대국밥집 운영)

욱하는 성질에 말도 거칠지만, 그건 못 배워 그런 것일 뿐, 천성은 그렇지 않다. 나름 인정도 많고, 의리도 있다. 호식에게까지 줄 의리는 없지만. 제주 지역오일장에서 순댓국을 팔고, 오일장이 없는 날은 가내수공업(도축장 가서 내장 받아와 손질하고, 부속 야채들 장 보고, 다듬고, 순대를 삶아내는 것까지 오롯이 그의 몫이다)으로 순대를 만들어, 근처 순대국밥집에 순대를 공급한다. 그가 첨부터 고단하고 성실한 이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다. 대대로 그의 집안은 오일장에서 순댓국을 팔아왔다. 그의 부모도 당연히 그랬다. 가난의 대물림, 아무리 순대를 팔고 썰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 형편. 그는 어릴 때 그 가난이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깡패가 됐다. 주먹이 세고,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맷집과 독종 기질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근접을 못 했다. 덕분에 서귀포 제주시 일대 나이트클럽 기도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승승장구처럼 보였다. 멋진 오픈카도 타봤으니... (아내,
현이엄마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으로, 죽어라 그를 쫓아다녔던 순정 많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냥 동거해 살았는데, 아내가 그 몰래 결혼 신고를 하고 애(현이)를 낳아 살고 있 - P39

방호식 (남, 사십대 후반, 얼음가게 운영)

살갑고, 인정 많다(인권에게 거칠지만). 가파도 출신. 부모님은 보리농사로 겨우 먹고살았다. 아래로 여동생 셋이 있지만, 모두 중졸, 그만 남자라는 이유로 서귀포에서 학교를 다녔다. 은희와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님에게 인사하러 함께가파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은희는 결혼을 물렀다. 결혼하면 먹여 살려야할 가족이 더 느는 거네, 현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나 같아도 싫다, 너같이 가난한 새끼.‘ 옆에서 인권이 아프게 찔렀다. 그렇게 호식의 마음에 가난이 사무쳐 한탕의 유혹이 자라난 걸 그땐 몰랐다. 다시 여잘 만나 결혼해 애까지 낳고 그럭저럭 살면서도, 돈 좀 모인다 싶으면 주식으로 날려먹고, 사업에 투자했다 날려먹고, 그러다 결국 도박에까지 손을 댔고, 그 일로 인권에게 죽도록 맞으면서도 호식은 정신을 못 차렸다. 어차피 끝난 인생이란 생각이 더더더 그를 막다른 길로이끌었다. 근데,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오니, 세 살배기 영주가 울며 하는 말, ‘엄마 도망갔어, 잡아와!‘ 호식은 그때 잠깐, 영주를 두고 도망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엎어져 잠을 잤는데, 일어나 보니, 영주가 빈 밥솥을 긁고 있었다. 정신이드는 순간이었다. 저 앨 살려야 한다. 근데, 어떻게 살리나, 일을 해야 돈을 벌 텐데 애를 맡겨둘 데가 없으니. 그는 눈이 펄펄 오는 날, 영주를 데리고 깡패질 하던 인권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 P42

양달이 (여, 스물아홉)

두 살 터울 농아 동생 별이 (수어로 대화하거나 말을 크게 해 대화한다)와 시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고, 해녀 일(이제 1년 됐다. 초보), 은희네 생선가게 일, 영옥의 실내포장마차 일 뭐든 다 한다. 부지런하고 밝다. 선한 부모님 두 분은 모두 농아로 푸릉마을의 돌담 쌓는 일을 한다. 동갑내기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정준 동생 기준이 자길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고등학교 때 자신의친구랑 사귄 걸 알아 맘이 안 간다. 세상에서 부모님 담으로 별이가 젤 좋고, 별이와 노는 게 늘 신나고 재밌다. 남들은 별이랑 언제나 같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니, 자매라도 적당히 놀라 하지만, 달이는 결혼해도 별이랑 앞뒷집에 살 생각이다. 문제없다. 그러나 정말 문제없을까. 가끔 혼자 있고 싶어지는 마음은 대체 뭔지.. 어쨌든 그 맘은 혼자만 알았으면 한다. - P48

양별이 (여, 스물일곱, 커피장사)

상냥하고, 맑은 웃음만큼 생각도 밝고 긍정적이다. 달이별이란 카페를 내고싶은 게 꿈이다. 시간나면 그래서 달이와 함께 카페 보러 다니는 게 취미다. 둘은 쌍둥이처럼 행동도 웃음도 하는 짓도 닮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농아라고 왠지 불쌍한 눈빛이지만, 그건 괜한 걱정. 별이 자신은 농아라서 별로 불편한 게없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달이성(언니)이 있으니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충분히행복하다 여긴다. 근데 기준이가 짜증 난다. 달이를 빼앗아 갈까 봐서가 아니라,
달이가 물질하느라 바다 들어가는 게 늘 걱정인데 (그래서 달이가 바다 들어가면 늘함께 나가, 달이가 물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달일 좋아하는 기준도 바닷일 하는선원인 게, 맘에 안 든다. 달이의 짝은 육지에서 일하는 남자였으면 좋겠다. 바다에서 일할 거면 차라리 묵직한 정준 오빠 같은 사람이거나. - P48

박기준 (남, 스물아홉, 정준의 배에서 같이 일한다)

어려선 양아치 같았지만, 지금은 맘잡고, 형 일을 돕는다. 물론 맘 잡은 지 일년도 안 됐지만, 어려선 일 안 하고 술이나 먹고 돈이나 쓰러 다니고 여자들이나따라다녔다. 그러다 정준이가 기준이 땜에 속상하단 얘길 들은 동석이가 반 죽게 자신을 패며 말했다. 다시, 노는 거 눈에 띄면 죽는다. 그래서, 정준의 배에 올랐다. 첨엔 동석이 무서워 그랬지만, 지금은 정준이가 존경스러워 일한다. 근데형이 속을 알 수 없는 영옥일 좋아하다니, 별로다. 그리고 달인 자신이 자길 좋아한다 여기지만, 사실과 다르다. 난 별이가 좋다. 근데, 왠지 말을 못 하겠다. 사랑은 성격도 변하게 하는 건지, 부끄럽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 P49

용어정리

씬 장면(Scene)이라는 의미.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동이나 대사가 한 씬을 구성한다.

C.U
클로즈업, 배경이나 인물의 일부를 화면에 크게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점프컷
연속성이 없는 두 장면을 붙이는 편집 방식이다.

인서트
화면의 특정 동작이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화면 인서트 화면이 없어도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으나 인서트를 삽입함으로써 상황이 명확해지는 한편 스토리가 강조된다.

(E)
대사와 음악을 제외한 효과음(Effect)을 뜻하며, 보통 등장인물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는 경우에 사용한다.
- P50

플래시백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인과를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하고,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플래시컷
화면과 화면 사이에 들어가는 순간적인 장면, 극적인 인상이나 충격 효과를 주기 위해 삽입되는 매우 짧은 화면을 지칭한다.

F.I.
페이드인(Fade-In). 어두웠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F.O.
페이드아웃(Fade-Out), 화면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장면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N)
내레이션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나타낸다

몽타주
따로따로 편집된 장면들을 짧게 끊어서 붙인 화면을 말한다.

(O.L)
오버랩(Overlap), 현재의 화면이 사라지면서 뒤의 화면으로 바뀌는 기법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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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짐을 챙기던 중 벽장 안에서 세 개의 물건을 발견했다. 이브라힘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기와 녹음의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 노트, 티베트 사자의 서 영역본이었다.
그것들을 벽장 안에 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브라힘은 청록색 눈을 가진 아랍인 청년이다. 그를 만난 기간은 고작 보름에 불과했지만 그는 나에게 한없이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듣기만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녹음했다. 녹음은이브라힘 몰래 이루어졌다. 이야기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할지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이브라힘의 이야기는 전생의 기억에 관한 것으로, 대단히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P7

예루살렘의 성스러움은 본래 유대인의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였고, 시온이었으며, 하느님의 동산이었다.
이 거룩한 도시에서 파괴와 멸망과 재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파괴와 멸망의 폐허 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유대인의 상상은 황홀하게 피어올랐다. 그들은 세계의 종말과 구원이 예루살렘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 곁에 묻히는 것은 신의 자리 밑에 잠드는 것이었다. - P17

예루살렘은 무슬림에게도 성스러운 도시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내려온 곳이예루살렘 모리야 산의 석회암 언덕이었다. 그 커다란 회백색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다. 무함마드는 회백색 바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천국으로 올라가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무슬림에게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는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유일신이 지상으로내려보낸 예언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상이자, 최초의무슬림이라고 무함마드가 주장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 P17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서 발아한 쌍생아였다. 하지만 유대교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부정당한 그리스도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했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주님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게 참혹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를 무함마드보다 낮은 예언자로 간주하는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남이 네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기도하라..... 예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리스도교의 분노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뺨을 때리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남을 핍박하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인류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이 모순 속에서 예루살렘은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 P18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평안했다. 가족의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보다. 고통에 울부짖는 부상자들보다. 그들의 고통을 피투성이 손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느끼는의사들보다 죽은 그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은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아우성인데, 좁고 어두운 복도는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묘실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등을 벽에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동안 누적된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가 시체가 되어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이 가슴을 날카롭게 그었다. 전쟁을쫓아다닌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의감각은 늘 생경했다. - P24

2003년 4월 9일 미 지상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십사 년 독재체제가 마침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후세인의 동상들을 무너뜨리고, 후세인의 궁전과 은행, 정부 건물을 습격했다. 습격은 약탈로 이어졌다.
공공건물과 일반 주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물관과 도서관이불타거나 파괴되었다.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과 문헌들이 훼손되고 약탈당했다.
미군은 그들의 약탈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약탈의 현장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미군들을 보고 있노라면 약탈행위를 바그다드 점령에 대한 환영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생각마저 들었다. - P34

나는 병원 창틀에 놓인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이상스러운한 인간을 생각했다. 죽지 않는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형상은 영원을 견디지 못한다. 신이 영원한 것은 형상이 없기때문이다. 인간이 영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육체라는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형상은 우주의 한 파편이다. 우주의 한 파편일 뿐인 인간에게 불멸은 헛된 꿈이다. 그런데 이브라힘은 말했다.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죽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죽음에 에워싸인 전쟁의 도시에서. - P35

시아파 민병대가 알 킨디 병원을 접수한 것은 병원이 막 이사를시작할 때였다. 이라크 인구 2,400만 명 가운데 60퍼센트 이상을차지하는 다수 세력임에도 후세인 체제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시아파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공공건물에 민병대를 파견하고 부서장을 임명하는 등 새로운 정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시아파에게 병원은 중요한 공공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장검과 라이플총으로 무장하고 병동을 돌아다니는 민병대의 모습은 어느새낯익은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후세인도 싫지만 미군도 싫다고 했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
"지난번 전쟁 때도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소."
민병대 대장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랬다. 1991년 1월 17일에 시작되어 2월 28일 작전이 종료된 그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88,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일곱 배를 웃도는 양으로, 전폭기의 출격 횟수는 11만 회였다. 그중에서 정밀탄을 사용한 것은 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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