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짐을 챙기던 중 벽장 안에서 세 개의 물건을 발견했다. 이브라힘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기와 녹음의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한 노트, 티베트 사자의 서 영역본이었다.
그것들을 벽장 안에 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브라힘은 청록색 눈을 가진 아랍인 청년이다. 그를 만난 기간은 고작 보름에 불과했지만 그는 나에게 한없이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듣기만 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녹음했다. 녹음은이브라힘 몰래 이루어졌다. 이야기하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할지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이브라힘의 이야기는 전생의 기억에 관한 것으로, 대단히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P7

예루살렘의 성스러움은 본래 유대인의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시였고, 시온이었으며, 하느님의 동산이었다.
이 거룩한 도시에서 파괴와 멸망과 재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파괴와 멸망의 폐허 속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유대인의 상상은 황홀하게 피어올랐다. 그들은 세계의 종말과 구원이 예루살렘 언덕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 곁에 묻히는 것은 신의 자리 밑에 잠드는 것이었다. - P17

예루살렘은 무슬림에게도 성스러운 도시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내려온 곳이예루살렘 모리야 산의 석회암 언덕이었다. 그 커다란 회백색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이다. 무함마드는 회백색 바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천국으로 올라가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무슬림에게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는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유일신이 지상으로내려보낸 예언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조상이자, 최초의무슬림이라고 무함마드가 주장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 P17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서 발아한 쌍생아였다. 하지만 유대교는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부정당한 그리스도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했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주님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들에게 참혹한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한 어머니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를 무함마드보다 낮은 예언자로 간주하는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남이 네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기도하라..... 예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리스도교의 분노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뺨을 때리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남을 핍박하지 않고는 제국이 될 수 없다. 인류의 모순은 여기에 있다. 이 모순 속에서 예루살렘은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 P18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평안했다. 가족의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보다. 고통에 울부짖는 부상자들보다. 그들의 고통을 피투성이 손과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느끼는의사들보다 죽은 그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은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아우성인데, 좁고 어두운 복도는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묘실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등을 벽에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동안 누적된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가 시체가 되어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이 가슴을 날카롭게 그었다. 전쟁을쫓아다닌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의감각은 늘 생경했다. - P24

2003년 4월 9일 미 지상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사담 후세인의 이십사 년 독재체제가 마침내 무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후세인의 동상들을 무너뜨리고, 후세인의 궁전과 은행, 정부 건물을 습격했다. 습격은 약탈로 이어졌다.
공공건물과 일반 주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물관과 도서관이불타거나 파괴되었다.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과 문헌들이 훼손되고 약탈당했다.
미군은 그들의 약탈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약탈의 현장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미군들을 보고 있노라면 약탈행위를 바그다드 점령에 대한 환영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생각마저 들었다. - P34

나는 병원 창틀에 놓인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이상스러운한 인간을 생각했다. 죽지 않는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형상은 영원을 견디지 못한다. 신이 영원한 것은 형상이 없기때문이다. 인간이 영원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육체라는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형상은 우주의 한 파편이다. 우주의 한 파편일 뿐인 인간에게 불멸은 헛된 꿈이다. 그런데 이브라힘은 말했다.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죽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죽음에 에워싸인 전쟁의 도시에서. - P35

시아파 민병대가 알 킨디 병원을 접수한 것은 병원이 막 이사를시작할 때였다. 이라크 인구 2,400만 명 가운데 60퍼센트 이상을차지하는 다수 세력임에도 후세인 체제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시아파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공공건물에 민병대를 파견하고 부서장을 임명하는 등 새로운 정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시아파에게 병원은 중요한 공공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장검과 라이플총으로 무장하고 병동을 돌아다니는 민병대의 모습은 어느새낯익은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후세인도 싫지만 미군도 싫다고 했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
"지난번 전쟁 때도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퍼부었소."
민병대 대장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그랬다. 1991년 1월 17일에 시작되어 2월 28일 작전이 종료된 그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88,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핵폭탄의 일곱 배를 웃도는 양으로, 전폭기의 출격 횟수는 11만 회였다. 그중에서 정밀탄을 사용한 것은 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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