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한계선
              박정대

풍경들을 지나서 왔지
지나온 풍경들이 기억의 선반 위에
하나둘 얹힐 때
생은 풍경을 기억하지 못해도
풍경은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아주 머나먼 곳에 당도했어도
끝끝내 당도할 수 없었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풍경처럼 울리며
풍경처럼 살아
풍경, 풍경
생을 노래하지

                          시집[삶이라는 직업] 중에서

 

 

이천이십년 십이월 십삼일.

코로나 확진자가 천명이 넘었다.

눈이,

눈이 내린다.

흑백의 풍경 위에 펑펑 내린다.

이 암울한 세상의 먼지처럼

펑펑~

내린다가 아니라 내렸다.

녹아 버렸다.

찰나에 가까울 시간의 변화에 느린 눈을 끔벅한다.

내일부터는 영하 15도의 한파라는데,

벌써 춥다.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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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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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시집[붉은빛이 여전합니까]중에서

 

 

걷.고.싶.다.

먼 곳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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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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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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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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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시집[수학자의 아침]

일 년 내내 냉장고 문에 적혀있는 시의 구절은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다.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만난 그녀의 시들은 어느새 생활 속에 있다.

여전히 코로나가 진행중인 가난하고 가여운 우리의 추석,

저 하늘이 주는 위로로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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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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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구월의 마지막 날,

지난 봄....... 의 기억이 아릿하다.

허수경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두 계절 내내 (2019년 겨울, 2020년 봄) 끌고 다녔다. 그 결과 겉표지가 살짝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시집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산문집 [가기전에 쓰는 글들],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등을 포함해 지난 일년, 시인과 함께 [너 없이 걸었다]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가,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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