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베티 프리단도 매 맞는 아내였다. 그녀는 여성운동 집회에 나가 연설할 때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때린 얼굴의 푸른 멍을 짙은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얼마전 여성 연예인의 가정폭력 피해 사건이 충격을 준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남편에게 10~20여년 동안 구타당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정폭력은 계급 문제로 인한 억압이 아니라 성별 권력 관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해자가될 수 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더 큰 피해자라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바로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사회적 권력보다도 성별 권력이 더 압도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P118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P119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 P125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매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 찍힌다. 가정폭력은 인정되지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 P127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進步) 않고 멈춘다면(守舊),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것은 폭력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 P130

문제는 ‘아들들‘이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자신들에게가했던 억압 논리와 규범을 다른 진보 세력(대표적으로 여성주의 진영)에게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70~80년대에 보수 세력은 부정부패와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너희들.
한국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 가라."는 식으로 탄압했다. 이런 인식체계 안에서 민주화운동은 ‘친북‘을 의미했고, 이 같은 논리는 오랜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수 세력이 마음 놓고 휘두르는 칼이다. <100분 토론>에서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일부 발언은 그들이 폐지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논리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 P133

일제 시대 ‘군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물론 바람직한일이지만, 이는 여성의 성 피해가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 시대 ‘군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여성은물론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본다. 즉,
전시 성폭력을 여성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기능하게 된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 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P141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 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문제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 라는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 있으면, "여자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 P143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 라는 말은, 당위적인진리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희망적 가치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인간의 범위는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차별주의,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 중심주의,
이성애주의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표준적 인간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몸이 인간을 대표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탈락한 타자(他者)로 간주된다. 흔히, 흑인은인간과 동물의 중간으로,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존재로 ‘다루어진다‘. - P151

인간과 인간 아님의 경계는 한 사회의 지배 규범에 의해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가 친미 반공 국가 건설을 위해다수의 제주 도민을 학살한 제주 4·3 사건에서 우익 테러 조직인서북청년단이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한 것이나, 아내폭력 가해자들이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주장하는 사례 등은 가해자가피해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 P152

임으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성 기관을 모두 가진
‘자웅동체‘ 인간인양성구유자(性具有者)의 존재는, 인간이 원래부터 양성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성별 구분은 계급. 인종·학력·성격· 사회적 지위 등에서 여성과여성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클 경우와 모순된다. 모든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인데, 인간을 성별이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여성‘, ‘흑인‘으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이다. 동성애 인권운동가들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차이‘는 성별 구분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남성, 여성으로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성애 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 P153

인권 이론에 대한 여성주의의 가장 큰 공헌은, 국가 권력으로부
‘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근대적 인권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까지 비정치적인 공간으로 간주되었던 ‘사적인 영역에 인권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인권의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여성주의 인권은 기존 공적 영역에서 ‘국가 대 개인의 억압뿐만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억압도 중요한 인권 문제로 보며 일상을 정치화했다. 사실, 기존의 인권 범위는 대단히 협소한 것이었다. 인구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에의해 차별받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고통은 더욱 심각하다. 일상의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 학벌·나이·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 침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 P164

않기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 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 P171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몸은 단순히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몸은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으로 간주된다. 몸은 존재를 담아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것이다. - P177

이 같은 인권, 평등 개념의 재구성은 성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
한 조건에서 달리기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인권운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인권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인권 개념을문제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운동‘ 과정이기도하다. 인권운동은 인권 개념의 운동을 낳고, 동시에 새로운 개념은인권 운동을 발전시킨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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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4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 이 책에는 내가 그간 겪은 ‘책, 글쓰기, 공부와 여성/아줌마‘와 관련해 차별, 편견, 무시, 경멸, 혐오당한 일화는 쓰지 않았다. 남들이 봐도,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화가 무궁하다.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하루에 한 건 이상 겪었다. 너무 많아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누가 믿을까 싶어서 쓰지 않았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5

정찬의 [새의 시선]의 인용 부분 때문에 [정희진처럼 읽기]를 펴게 된 저녁,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이 무겁게 남았다. 나한테 책 읽기는 무엇일까. 책을 생각하면 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이름을 알게 되고 한글을 뗀 내가 교과서 외에 첫 그림책을 만난 아홉 살의 도서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지독했던 페인트 냄새처럼 여전히 나한테 강렬하고 지독한 냄새로 따라다니는 책은 내게 무엇일까.

'숨쉬기'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기가 책에서 오고 책을 통해 숨을 쉰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책' 없는 나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으니. 읽기보다는 사들이고 쌓아두면서도 흡족하던 때, 이건 지적 허영심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이 꽤 많이 꽂혀있지만 이 정도의 허영은 스스로에게 허락하기로 한지 오래되었다.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고도 책에 대한 허기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친구들 집에 쌓아둔 책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좀 먹고산다는 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전집들이 몇 질씩 꽂혀있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친구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책이 가득한 책방의 로망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Y네 집의 책방은 여전히 로망이다. 지역 유지에다 손꼽히는 재력가였던 그 친구의 집에는 별채가 있었다. 별채에는 '식모 언니'방이 있고 벽마다 종류별 책으로 가득한 책꽂이가 천장에 닿아 있었다. 언니 오빠들도 많았고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그 집에는 다양한 책들이 도서관보다 많았다. 툇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마당을 뒤덮은 포도나무 덩굴을 벗어난 햇살이 발목을 간지럽히던 아른아른한 그림자의 풍경과, 그 시간, 그 여유가 열두 살의 봄으로 나를 데려간다. 집에 돌아가면 4년째 앓고 계신 아버지가 야윈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를 기다리시고, 농사 일하랴 집안 살림 챙기랴 종종걸음으로 바쁜 엄마는 도와줄 손길이 간절한 걸 알면서도, 털고 일어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책 속으로 빠져들던 갈래머리의 내가 거기 있다. 저녁밥 때가 오기 전에 일어나서 어스름 저녁 시오 리 길을 타박타박 걷노라면 배는 고프고 검어지는 산모퉁이 커다란 바위는 신성한 기운으로 무서워 걸음은 자동 빨라진다.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오늘도 늦었다고 엄마의 큰 손은 어김없이 등짝을 후려치고 욕을 한 상 푸짐하게 차려주셨다. 그 친구의 집에서 간식으로 내어주는 처음 보는 과일도, 가사 일을 돌보는 식모 언니도,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 친구가 과외 선생과 함께 치는 피아노도, 레이스 가득하고 질감 좋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친구의 엄마도, 마당에서 탁구를 치며 환하게 웃던 친구의 오빠들도 부럽지 않았다. 오로지 책방, 책방만이 부러웠고 그 책방의 책들을 다 읽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책장의 한 칸도 채 읽지 않았는데 그 집에 돈 빌리러 오신 초라한 엄마와 마주친 이후로는 그 친구네 집에 가지 않았다. 돈 빌리러 오는 양수장 집 딸인지도 모르고 왜 안 오는지 묻는다는 친구 엄마의 전언에도 '나한테 삐진 거냐'라는 친구의 채근에도 그 친구의 집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포도나무는 베어지고 그 자리엔 등나무가 심기고, 별채는 허물어지고 장미 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중학생이 되어서 듣고 그 풍경이 아련해졌다.

돌아보면 그립고 평온한 봄밤이었다. 그 봄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평온한 저녁은 맞을 수 없었다. 평생을 가정에 소홀하고 가족에게는 무능한 분이었지만 지역의 한량이었던 아버지가 떠나시자 우리들은 순식간에 '애비 없는 자식'들이 되어버렸다. 특히 엄마는 많은 것을 놓아버리셨는데 '장남'에게 아버지를 대신할 관심과 책무와 의존과 기대를 고스란히 전가했다. 스물다섯의 우유부단하면서도 나르시스 청년에게 넘겨진 일곱 식구는 너무 과한 무게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와 의존은 제왕적 권력의 힘으로 작용했고 뭐든 할 수 있게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대서 발전해서 노름에 빠졌던 것이다.

내 유년은 끝나버렸다. 어두운 십 대의 터널이 시작되었다. 온통 회색이었고 절망이었고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애증의 '엄마'만 아니라면 모든 걸 놓아버릴 수 있었고 놓아버리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올가미가 항상 목에 걸려 있었다. 앎에 대한 갈망은 지속되는 목마름이었고 책은 유일한 샘물이 되어주었다.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살지 못했으리라.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책을 읽고 있으면 다른 세상, 다른 곳에서 사는 나를 꿈꿀 수 있었고 그 꿈이 나를 살게 했다.

[아주 친밀한 폭력].

오랫동안 무거운 마음에 밀어두고 밀어두었던 책이다. [아주 친밀한 폭력]의 그 '아주 친밀한'의 시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른 척하고 싶었다. 잊고 싶었다. 그러나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에 용기를 냈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책 속의 얘기만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고, 내 주변에서도 흔하고 나에게도 흔痕이다.

노름에 빠진 장남은 돈이 되는 무엇이든 가져가느라 눈이 벌게져갔고 엄마는 포기와 의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선다'라는 말을 수없이 주입했다. '돈 내놓으라'라는 협박의 강도가 세질수록 더 이상 돈 한 푼 빌릴 데도 없는 엄마는 비굴해져갔고 그런 엄마를 밀쳐버린 것은 엄마를 향한 폭행의 시작이었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라고 주정하기가 일쑤였고 자신의 인생을 저당한 동생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와 내 동생은 꼼짝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 꼴이 되었는지를 듣고 또 들어야 했다. 울분으로 똘똘 뭉친 막내 오빠는 집을 떠났고 객지로만 떠돌다 우연히 집에 들른 둘째 오빠는 엄마한테 패악질 하는 것을 보고 죽여버리겠다고 부엌칼을 휘두르다 만류하는 엄마 때문에 대성통곡을 쏟아내고는 그 길로 집을 떠나 다시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프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툭하면 코피를 흘리셨지만 여전히 들에서 허리가 꺾이도록 일을 하고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장남의 노름 돈을 대고 우리를 학교에 보냈다. 코피가 잡히자 두통이 덮쳐서 엄마의 이마에는 흰 머리띠가 자리 잡았다. 병원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겨우 침을 놓는 집에 저녁마다 찾아가 침을 맞으셨다. 중 2, 열다섯 살의 나는 저녁마다 엄마를 모시고 침쟁이 집 어둑신한 골방을 찾아갔다. 이불 바늘만 한 침들을 꽂고 잠드신 엄마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다가 부축하고 돌아오던 깜깜한 길들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그 가을, 친구 하나는 집에 있던 농약을 마셨다. 선배 오빠가 변심했다고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재주 많고 착하던 동네 오빠는 겨울마다 찔레 열매에다 청산가리를 넣어서 꿩을 잡고는 했는데 그 청산가리를 마셔버리고 고통 속에서 하루를 소리 지르다 떠나갔다. 좋아하던 동네 언니와 결혼을 집안에서 반대했다는 이유였다. 총각은 무덤도 쓰지 못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다 묻는 거라고 내가 즐겨 걸어 다니던 둑에 몰래 묻었다. 살짝 튀어 올라온 그곳을 지날 때마다 풀피리를 불던 그 오빠가 생각나서 결코 밟지 않으려고 길 끝으로 걸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때 나는 게오르규의 '25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심훈의 '상록수'와 삼중당 문고판에서 이광수의 책들을 읽고 다시 친구들의 책장을 뒤졌다.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집에 들인 양장본 전집들에서 '전쟁과 평화', '죄와 벌'을 읽어 치웠다. 돌아보면 조판 엉망, 번역 엉망의 해적판들이 포장만 그럴싸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나를 살게 한 책은 앞 뒷장이 찢겨서 나중에 다시 읽고서야 제목을 알게 된 '25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레마르크의 '개선문'이었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나 '개선문'의 [조앙 마두]에게 빠졌다. 그런 세월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그 시절을 통과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 어떤 위무보다, 그 무엇보다 그 시절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폭력의 세월을 견디다 결국은 엄마와 동생을 두고 도망쳤다. 고등학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으므로.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나는 체벌이 싫다. 너무너무너무 싫다.

학교에서 손바닥을 자로 맞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가 동생하고 싸운다고 호박 들기 벌을 내리는 것도 실어서 다시는 동생하고 싸우지 않았고 맞기 싫어서 공부를 잘해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키가 크다고 차출당한 배구부에서는 이유도 모른 채 단체 기합을 받거나 탱자나무 몽둥이로 맞았다. 코치가 때리고 선배들이 돌아가며 때리고. 배구는 하고 보니 매력적인 운동이었지만 맞는 거 싫어서 안 한다고 그만두었지만 집안에서 이뤄지는 폭력에는 답이 없었다. 맞는 동안 나는 점점 졸아들어서 먼지가 되어가고 맞다 보면 맞는 이유도 불분명해져서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있으니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된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가정 폭력 생존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작품이며,

신혜수의 번역문을 다듬어 수정했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다양한 문화적 구조들을 생산해 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교의례, 민족 문화, 전통, 놀이 따위로 정상화, 합리화, 일상 문화화되었다. 이는 여성 폭력을 은폐하고 해결을 지체시켜온 사회 구조로 작용해 왔고 특히 ‘아내 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수천 년 동안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피해 여성의 폭력 해석, 수용 방식을 통해 폭력의 발생과 지속 구조를 알아보고자 한다. 아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폭력을 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가족 구조와 가족 내 남성과 여성의 관계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폭력 당하는 현실이 부정의 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폭력을 남성의 정당한 자원으로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제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폭력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몸이 경험하는 육체적 고통을 상대화하고 다른 종류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폭력을 수용한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5

남편의 폭력은 아내를 훈육하려는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의 많은 폭력은 이보다 훨씬 더 도구적이다. 남편은 폭력을 통해 자기이해(利害)를 실현한다. ‘맞을 짓‘에 대한 성별적 적용은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남편이 ‘맞을 짓‘을 해도 아내가 맞게 된다. 어떤 남편들에게 폭력은 생활 방편이다. 가정만 유지한다면 아내의 경제력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 폭력은 남편이 ‘노상(언제나 하는 일)‘로서 직업이자 노동이 된다. 이때 아내는 가족을 벗어나길 바라지만,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 관계의 유지를 위해 서건 청산을 위해 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6

여성의 탈출 의지는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산소화하였다. 또한 피해 여성의 공포심, 자기방어, 저항 행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성별 규범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가족 제도 아래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247

첫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언니 한 명은 애인이 있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면 왜소하고 성말라 보이는 남자가 껌을 씹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그 언니를 보면 날름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그 언니는 아기 팔뚝보다도 가늘게 마른 몸이었는데 일요일에 쉬고 나오면 멍투성이였다. 이유는 넘어졌거나 부딪혔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알았다.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는 남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가 툭하면 맞고 있다는 것을.

또래의 멋쟁이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미모며 몸매며 애교도 뛰어났지만 화장도 잘했다. 화장의 변신술을 그녀를 통해서 보았을 정도다. 주말이면 곱게 화장하고 잔뜩 들떠서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고는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었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약속에 늦었다고 길에서 막무가내로 때려서 팔이 부러졌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거의 45년 전 이야기다. 아마 그들은 그 남자들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혼해서도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좋아해서 놓아주지 못하고 사랑해서 놓을 수 없다는 흔하디흔하고 뻔한 이유들이다.

사귀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같이 공부를 했고 같이 많은 길들을 걸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이야기했고 암담했던 지난 시절들을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씩 길 위에 있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은 공원의 미끄럼틀 밑이 비를 안 맞게 하는 것도 알았고, 팔달산에 그렇게 많은 오솔길들이 있는 것도 그 아이를 통해서 알았는데 만날수록 헤어져야 할 시간에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스무 살, 남자와 자버리는 일은 너무 두려운 미래였다. 그 거듭되는 거절에 결국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 당했다. 너무 놀라서 아픔도 느끼지 못했는데 찰칵, 칼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골목에서 순간적으로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문소리가 나자 칼을 거두고 돌아서서 씹어뱉듯이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공부나 하라면서 뛰어가 버렸다. 다행인지 그 이후로 다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히 자주 마주치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한 번씩 생각해 본다. 그 아이와 밤을 같이 보냈다면 나는 영영 그와 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맞고 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위가 꼿꼿해진다. 체할 것 같다. 저녁밥(밥보다는 국수나 수제비였을 때가 훨씬 많았지만)을 먹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장남'이 들어오면 위부터 뒤틀려서 꼭 체하고는 했다. 쳇기는 설사로 이어지고 몸살을 앓고서야 끝이 났다. 그 이후로도 자주 체한다. 조금만 불편한 자리에서 식사만 해도 밥알이 차곡차곡 얹히는 기분이 든다. 이 이야기를 풀어 놓는 지금도 쳇기가 명치를 누른다.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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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30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95년에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영화 <301.302>에서 주인공황신혜 분)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으로 거식증에 걸리고, 또 다른 주인공(방은진 분)은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강박적으로 음식만들기에 열중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성적 고통이 식욕 문제로 드러나는 현실을 빼어나게 재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식욕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은 폭식을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여럿이 모여 먹고 마신다. 하지만 여성에게 폭식은 수치로 여겨지기때문에, 먹더라도 밤에 혼자 먹는다. 또한 남성의 식욕은 성욕과 무하지만, 여성의 식욕은 곧 성욕으로 유추된다. 여성들, 특히 젊은여성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머니나 친구 등 주변 여성들이 나서서 협박에 가까운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식욕과 성욕은모두, 혐오스런,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성인 것이다. - P99

남성 중심 사회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여성의 상황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신호로 파악하고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으로 본다. 여성의 섭식 장애는 지극히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여성과여성성을 비하하고, 여성에게 이중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의 허기, 남성의 이중 메시지로 인한 무기력 같은정치적 허기를 신체적 허기라고 착각하기 쉽다. - P101

나의 타자가 내가 되어서는 해결이 어렵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아름다운 몸은 자기사랑의 수많은 열매 중 하나일 뿐이다. - P102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 이 말은 이미 북한에핵이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이러한 명명에서 문제 집단은 전쟁을일으키려는 미국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것으로 가정된 북한이 된다. 대개의 사회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문제에 관련한 논쟁도 그 논의 구도 자체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양성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 P103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가지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P103

스와핑 비난의 근거인 ‘일부일처제의 신성성‘은, 대한민국이 마치 일부일처제 사회인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나 일부일처제가실현된 사회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부계 가족의 영속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만 강요된 규율이었다. 일부일처제 현실은 가면극일 뿐이다.
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기 위해 성매매, 축첩, 혼외정사등 다양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실질적인 일부일처제가 가능하려면, 모든 정치·경제 권력의 반 이상을 여성이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 - 현재 한국 사회 - 에서는 남성은 언제 어디서든한 명 이상의 여성을 취할 수 있다. 이때 여성은 교환가치로서, 남성 간에 유통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 P104

이러한 논리 역시, 마치 모든 사람에게 프라이버시 권리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다. 가정이 사적인 공간일까?
아마도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에게 가정은노동의 공간이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영역이다. 여성이 타인을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남성과는 반대로 가정 밖으로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성생활은 프라이버시 영역일까? 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나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공적인 이슈이며,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스와핑 실천의 ‘급진성‘에 비하면,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사유는너무나 가난하고 상상력이 없다. 스와핑이 아니라 스와핑에 대한해석이, 내겐 더 위험스러워 보인다. - P105

서구에서 혼외의 사랑은 대체로 이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그들의 ‘외도‘는 가족에 역기능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도는 가정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집 밖 사랑은자본주의 유지에 봉사하는 가족 제도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가족 이기주의에 별로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순기능적이다. 사람들은 ‘외도‘의 즐거움으로 가족 제도의 고통과 지루함을 견딘다.
한국 남성들의 혼외의 성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성매매의 성격이 강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은 강력한 가족주의 사회지만, 당위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오하고 신화화할 뿐이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은 친밀성과 자발적인 상호 보살핌의 공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도구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는 남성이 희생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이 자녀 교육의 성공. 즉 출세 지상주의와 경쟁 논리로 가득찬 공적영역에 얼마나 종속적인지를 보여준다. - P107

 준이혼 상태의 부부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거의 수위에 다다를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결혼이 법적 · 인신적 상호 예속이라는 보험료를 내는, 외로움에 대한 장기 보장성 보험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성과 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과 실천은 가족의틀을 뛰어넘고 있다‘. 연애가 대중화, 민주화된 지 오래고, 성은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연애에 대한 열망과 다양성에비해 이를 수렴할 제도는 탄력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고민과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다. 변화하는 사람들의 몸과 감정을 제도에 맞출것이 아니라, 기존 가족 제도 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산,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 P108

사랑이나 친밀성이 공감과 연민에 근거한다면, 비슷한 경험과 조건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예성의 오르가슴이 20분이고 남성은 5분이라면, 20분은 20분끼리 5분은 5분끼리 섹스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 아닐까? 그러므로전혀 다른 세계, 즉 극도로 성(차별화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섹스 트러블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냐 이성애냐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누가 정하는가가 진짜 문제 (질문)거리다. 또한 똑같은 인간을 다른 종(늑대, 여우.….)으로 분류하여, 다르게 취급하는 성별 제도가 앞에 말한 모든 문제들의 근원일지 모른다. - P110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건조하게 다시 쓴다면, "고정 관념이 사실을 만든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분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 인식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은 늘 ‘내가 본 것을 믿을 것인가, 남성이 말한 것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가정폭력의 실태와 대책‘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women)은 공적인 문제,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선정적인 이슈, 지면 편집 용어로 말한다면 ‘쉬어 가는 코너‘ 쯤으로 여겨진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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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여 년 전부터 대학과 시민단체, 정부기관과 노동조합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고 있다. 상담, 인권, 사회운동, 폭력, 섹슈얼리티(sexuality), 탈식민주의 등 기존의 분과 학문 체계를 횡단하는다양한 주제들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강의한다. 내 강의에 대한 반응은 크게 ˝어렵다˝, ˝재미있다˝ 두 가지다. 어려운 것과 재미있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연속선의 감정인데,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강사와 소통이 된 ‘알아듣는 순간, ‘난해함‘이 쾌락으로 변하는 것을경험한다.
흥미로운 것은, 내 강의를 쉽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주로 전업주부, 폭력 피해 여성, 저학력 생산직 기혼 여성 노동자 등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침묵을 강요받아 온 여성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선생님이 너무 겁이 많다. 더 쎄게 해달라˝며, 내게 (표현의 급진성이 아니라) 인식론적 급진성을 요구한다. ˝여성주의는 중산층 지식인 중심이라 ‘민중 여성‘들이 모르는 이야기만 한다.˝라고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제도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해 온 여성들일수록 내강의를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설명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자크라캉(Jacques Lacan, 1901~1981,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한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지배구조, 혹은 계급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문화적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본질적인 성별 정체성은 없으며, 정체성은행위 중에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이론에 깨달음의 무릎을 치고, 앎이 주는 환희에 박수를 보낸다. 여성의경험이 그 자체로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 삶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여성주의 사상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직 종사자나 이른바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내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박사 학위를 소지한 어느 50대 남성은내 강의를 듣고 ˝뇌가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고, 어느 노동운동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내용과 비슷한 이메일도 종종 받는다. 그들에게 내 강의가 어려운 것은, 내가 관념적이거나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현학적으로 말해서가 아닐 것이다.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물론 나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매번 그런 충격에 휩싸이며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 통용돼온 지식과 언어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목소리인, 여성의 목소리는 존재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사실, 여성주의는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 무전제의 전제에서 출발하지도 않고, 그 어떤 전제도 없는 청중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청중은 없기때문이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4~, 서구 전통 철학의
‘남근이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역사를, 정치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위험한 여성 - 젠더와 한국의민족주의>라는 책을 보면, 인식 주체로서 여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p 32~34


˝제도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해 온 여성들일수록 내 강의를 좋아한다.˝ ㅡ > 바로 나다. 정희진을 좋아하는 저학력 생산직 여성.
지금은 돌봄노동자로 늙어가면서 언젠가는 돌봄을 받게 될 아줌마. 밑줄 가득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 하품만 하고있는.
책이 처음 나온 지 27년, 세상은 여전하다.
여성의 목숨은 여전히 파리보다 못하다.




내 경험에서 보면 여성운동(여성학)이 여성학(여성운동)에 대해품고 있는 상호 ‘편견‘, ‘선입견‘, ‘오해‘, ‘고정 관념‘, ‘불신‘, ‘무시‘, ‘분노‘ 또한 만만치 않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여성운동가(여성학자)가 여성학자(여성운동가)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 관념역시, 남성(사회)이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 P35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 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인 유대인 출신의 여성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P36

사회운동 중에 여성운동만큼 편견에 시달리는 운동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예 여성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여성운동에 대한 비난은 장애인운동이나 노동운동, 평화운동,
반미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말들이다.
평화운동을 ‘먹고 사는 게 해결된 한가한 사람들의 운동‘, 장애인운동을 ‘중산층 지식인들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노동운동가들은 노동 의식만 있지 사회의식은 없다. 이런 말을들어본 적 있는가? 여성운동가에게 사회 의식이 없다는 말은, 여성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지 사회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여성 의식은사회 의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P38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P44

물론 이것은, 학문이 어렵고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한 기존 학문은 지배 계급의 도구였다.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P45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
성별 제도로 인한 성역할은 대칭적이지 않다. 남성의 성역할은남성의 모든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남성은 젠더를 경험하지않기 때문에 (성별 제도로 인해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성역할과 노동자 · 시민·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갈등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남성 중에서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있듯이 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안(못) 하는 사람도있듯이, 모든 여성이 어머니의 의무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전쟁에는 미달하되전쟁만큼 사망률이 높은 유일한,
위험한 사회 활동일 뿐이다. - P53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가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며느리로서 성역할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을 때 발생한다. 성역할 불이행이 ‘맞을 짓‘이 된다는 사실은, 이 노동이 여성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몇 해 전 경제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돈을 벌러 나간 사이 아버지가 우는 아들을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사건 그 자체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당시 여론이아버지의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동정과 아이를 돌보지 않은 어머니의 비정함에 대한 비난에 집중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 여성에게 요구한 것은, 돈은 벌되 갓난아이를 업고직장에 나가서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라는 것이었으리라ㆍ - P60

그렇다면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바친 인생만큼 우리 사회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존중하는가. 우리 기억 속의 아릿한 상처와 안쓰러움으로 남아 있는 헌신과 희생을 다한 어머니와, 음식점에서 떼를지어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하철에서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뻔뻔스러운 여성들, 오형근의 사진 작품에 나오는 촌스럽게 화장한 얼굴, 문신한 눈썹, 뚱뚱하고 나이 든 추레한 여성,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물건 값을 깎아대며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써대는 여성들은 우리들 각자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인가? 젊은 여성을 포함하여 그 누구라도 ‘아줌마!‘라는 단 한마디로 손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
"아줌마 주제에…………." 라는 말에 대응 논리를 잃고 주눅드는 여성들은 누구인가?
‘탈특권화된‘ 아줌마와 ‘특권화된‘ 어머니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욕망을 드러내며 집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 P63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공공 장소에서 자기 욕망으로 젖가슴을 드러낼 때 그녀는 필시 몸을 파는 여성이거나 ‘미친 년‘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성스럽고 숭고하다.
우리 사회의 아줌마에 대한 혐오 담론은, 그들이 모성(남을 보살핌)과 섹슈얼리티라는 핵심적인 여성성을 상실한 집단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다. 젊음과 미모라는 여성의 가치를 상실한, 섹슈얼리티가 이미 훼손된, 따라서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아무나 건드릴수 있지만 스스로 성적 욕망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집안의 정숙한중산층 여성이 아니라 집 밖에서 노동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에서기인한다. - P64

어머니 억압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20배는 더 오래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희망과 자신에게 부과된 희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훌륭한 언어는 아니지만 내게언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쾌락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 (물론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겠지만) 내게 언어를 가르쳐준 아버지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상대화시켜준 여성주의 지식인들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어버리고 어머니의 젖이라는 흰색 잉크로 어머니에 대해 다시 써야 한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딸은 어머니를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고스스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사회는 여성과 어머니를 분리하고,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 - P65

페미니즘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사람들도 소품종 대량 생산 사회보다 다품종 소량 생산 사회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5학년 남자 어린이가 별뜻 없이, 또래 여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하느님이 나는 진흙으로 직접 만드시고, 여자는 내 갈비뼈로 만든 거 알아?" 그러자두 명의 여자 아이들 말이 걸작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근데, 누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니?", "그러니까, 너는 질그릇이고 나는 본차이나(Bone China)네!" 여성주의는 남자 어린이의 말이 틀렸다고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 어린이들의 재치 있는 대응대로, 다른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그러한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 P70

나혜석과 동시대에 삶을 마감한 화가 이중섭은 말년에 가족과 헤어져 정신분열로 자해를 거듭하다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그러나 이중섭의 죽음은 나혜석처럼 ‘시대를 앞서간 자의 비참한 말로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여겨진다. 나혜석의삶은 죽음으로 환원되었지만, 이중섭의 죽음은 삶으로 환원된다.
나는 나혜석의 삶이 행복했다고 본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평가할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시대의 지배 규범에 삶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한 여성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가 되거나 정신병원에서 죽는다는 신화 ‘나혜석 콤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똑한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일 뿐이다. 여성들을 겁먹게 하는 것은 나혜석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남성 사회의 해석이다.
대개 ‘위대한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여성의 삶을 전유하고싶은 남성의 시선, 욕망일 뿐,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살기 위해서, 현실을 바로알기 위해서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 P71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의 관점은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왔고, ‘피해‘ 집단도 가장 광범위하다. 또한 성차별은 다른 사회적억압의 모델을 제공하여, 사회적 약자는 여성으로, 강자는 남성으로 성별적으로 재현된다.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중요한 모순이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 P72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미술 작품 제목을 보자. 로댕의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앵그르의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다. ‘유관순 언니‘가 아니라 ‘유관순 누나‘이다. 이처럼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 - P73

이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성차별적 언어들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단지 개별단어의 표현만 아니라 문장 구조, 사유 방식의 변화까지 동반하는 새로운 삶의양식이다. 대개 남성들은 인과 관계나 의사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 익숙하지만, 여성들은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말하기 방식 (rapport-talk)에 능하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말하기 방식은 열등하거나 비논리적, 사적이라고 비하되어 왔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 방식‘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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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건 2008년 초판 9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다. 여러군데 접히고 밑줄 가득한 책을 다시 읽는데 감회가 새롭다.

일반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집단 성폭력 같은 트라우마(끔찍한 정신적 외상)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사이에서 분열한다.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청자(者)를 위해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실천인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목격자로서 자아를 조절해야 했던 나의 괴로움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아니, 정희진도 못 쓰는 얘기가 있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책 그리고 평소 내 이야기가 그에겐 이미 충분히 시끄러웠나 보다. "지금까지 이야기도 부담스러운데, 이것도 다 쓴 게 아니라구? 그럼,
얼마나 더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냐?"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 P10

어떤 사람에게 절절한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사람들은 표준이나 평균을 현실이라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평균이라는 것은 현실에서는실제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제(인종주의, 계급차별……) - P10

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육안이 되어 버린그 색안경을 벗어야, 여성의 현실이 보인다. 눈을 감아야 보인다.
나는 갑자기 색안경이 벗겨져서 눈이 먼 상태인데, 그는 이제 다보이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나 그만 보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 말도못했는데, 내가 연단으로 나오는 사이, 세상은 내가(여성이) 말하려고 폼 잡는 것 자체에 이미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평소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동료라고 믿었던 그에게마저 그런말을 들으니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나를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단 말인가! - P11

내가 경험한 이 삽화들은 앎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P11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지식은 목격에 관한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설명 가능성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목격은 언제나 해석적인, 우발적인, 예약된, 속기쉬운 참여입니다. 목격이란 증언하는 것이고,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입니다". - P12

때문에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편안할 수는 더욱이 없다. 다른(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사람은 고민하는 자를 능가하지 못하는 법이다.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한다. 남성의 경험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불일치한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갈등 없이 수용된다. 하지만 - P12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제공한다.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 문제(젠더)‘를 알아야 한다.
여성 문제는 곧 남성 문제다. 여성이라는 타자의 범주가 존재해야남성 주체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보편과 특수라는 이분법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젠더는 특수한 문제도, 소수자 문제도 아니다. - P13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사고는 낡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현실을 파악하기에도, 변화시키기에도 불가능한 체계 (paradigm)이다.
기존의 모든 국가, 공동체, 종교 등 정치적 행위자의 갈등은,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제 더 이상 남성의 시각으로는 성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빈부 격차, 환경 파괴, 폭력, 인종 증오, 근본주의 같은 인류가 직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남성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다. 이분법 사유에서는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他者)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타자성(他者性)은 동일성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우월한 것만이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2, 3, 4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 P13

사실, 앞에서 내가 사용한 ‘색안경‘, ‘렌즈‘, ‘본다‘와 같은 비유는시각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언어다. 만난다는 것이 반드시 본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제 한번 보자." 이 말은 ‘볼 수 없는시각 장애인을 배제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세요?", "살펴 보니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기를 ‘보세요".…………… 이처럼 비(非)시각장애인의 언어에서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이 보는 것이며 어떻게 아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촉으로 색깔을 본다.
어떤 사람은 읽지 않고 경험으로 안다. 비시각장애인이 보고 있는세계는 인간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 P14

이 말은 그리 큰 실례가 되지 않는 평범한 인사말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같은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 방식을 반영한다. 질문내용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물음에는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 P16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 + 장애‘ + ‘여성‘인가? 장애 여성은 일주일에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가? 이런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고, 가장큰 피해자가 가장 올바르다는 논조의 질문은, 정치적으로 아무런의미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다. 여성주의 장애운동 단체인 ‘공감‘에서 일하는 친구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감‘에서 레즈비언 인권 운동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강좌에 참석한중증 장애 여성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생각했는데, 그런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가해자(이 경우에는 동성애혐오증)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복잡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7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여성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미 체계 중 하나이며, ‘여성주의자‘ 역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성으로 간주되지만, 미국에 가면 여성이라기보다는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 P17

여성주의는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른 사회적 모순과 성차별의 관계에 주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그 어느 정치학보다도 다른 사회적 차별에 매우 민감하며, 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여성 억압은 젠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고통,
사회적 불평등은 계급, 민족 등 어느 한 가지 사회적 요인만으로는설명 불가능하다. 계급이든, 민족이든, 젠더 모순이든 모두 다른 사회문제와 관련성 속에서 작동한다. - P21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꼴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 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어떻게 전체 운동이 따로 있고, 부분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 P22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P23

대화는 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한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는말이 필요 없는 관계, 연인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 이와 대조적으로 ‘동무‘란 무엇보다 말이 중요하고, 또 말이 통하는 관계를 향한지속적인 노력이라는 김영민의 말처럼, 나 역시 말을 만들어 가는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친구들은 변한다. 그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그들을 떠나기도 한다. 결국, 성장하면 분리되는 거니까. 그래서 매번 감사한 이들이 다르다. 나는 복이 많아서, 나와 말을 만들어 가는 관계일 뿐 아니라, 머리부터 빠져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깊은, 누구나 빠지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지금은 윤정숙 선생님, 베이컨 신부님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두 분 모두 내겐 치열하고 뛰어난 ‘적대자‘들로서, 나를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숙시키는 이별하고 싶지 않는 친구들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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