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4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 이 책에는 내가 그간 겪은 ‘책, 글쓰기, 공부와 여성/아줌마‘와 관련해 차별, 편견, 무시, 경멸, 혐오당한 일화는 쓰지 않았다. 남들이 봐도,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화가 무궁하다.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하루에 한 건 이상 겪었다. 너무 많아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누가 믿을까 싶어서 쓰지 않았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5
정찬의 [새의 시선]의 인용 부분 때문에 [정희진처럼 읽기]를 펴게 된 저녁,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이 무겁게 남았다. 나한테 책 읽기는 무엇일까. 책을 생각하면 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이름을 알게 되고 한글을 뗀 내가 교과서 외에 첫 그림책을 만난 아홉 살의 도서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지독했던 페인트 냄새처럼 여전히 나한테 강렬하고 지독한 냄새로 따라다니는 책은 내게 무엇일까.
'숨쉬기'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기가 책에서 오고 책을 통해 숨을 쉰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책' 없는 나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으니. 읽기보다는 사들이고 쌓아두면서도 흡족하던 때, 이건 지적 허영심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이 꽤 많이 꽂혀있지만 이 정도의 허영은 스스로에게 허락하기로 한지 오래되었다.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고도 책에 대한 허기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친구들 집에 쌓아둔 책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좀 먹고산다는 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전집들이 몇 질씩 꽂혀있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친구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책이 가득한 책방의 로망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Y네 집의 책방은 여전히 로망이다. 지역 유지에다 손꼽히는 재력가였던 그 친구의 집에는 별채가 있었다. 별채에는 '식모 언니'방이 있고 벽마다 종류별 책으로 가득한 책꽂이가 천장에 닿아 있었다. 언니 오빠들도 많았고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그 집에는 다양한 책들이 도서관보다 많았다. 툇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마당을 뒤덮은 포도나무 덩굴을 벗어난 햇살이 발목을 간지럽히던 아른아른한 그림자의 풍경과, 그 시간, 그 여유가 열두 살의 봄으로 나를 데려간다. 집에 돌아가면 4년째 앓고 계신 아버지가 야윈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를 기다리시고, 농사 일하랴 집안 살림 챙기랴 종종걸음으로 바쁜 엄마는 도와줄 손길이 간절한 걸 알면서도, 털고 일어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책 속으로 빠져들던 갈래머리의 내가 거기 있다. 저녁밥 때가 오기 전에 일어나서 어스름 저녁 시오 리 길을 타박타박 걷노라면 배는 고프고 검어지는 산모퉁이 커다란 바위는 신성한 기운으로 무서워 걸음은 자동 빨라진다.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오늘도 늦었다고 엄마의 큰 손은 어김없이 등짝을 후려치고 욕을 한 상 푸짐하게 차려주셨다. 그 친구의 집에서 간식으로 내어주는 처음 보는 과일도, 가사 일을 돌보는 식모 언니도,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 친구가 과외 선생과 함께 치는 피아노도, 레이스 가득하고 질감 좋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친구의 엄마도, 마당에서 탁구를 치며 환하게 웃던 친구의 오빠들도 부럽지 않았다. 오로지 책방, 책방만이 부러웠고 그 책방의 책들을 다 읽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책장의 한 칸도 채 읽지 않았는데 그 집에 돈 빌리러 오신 초라한 엄마와 마주친 이후로는 그 친구네 집에 가지 않았다. 돈 빌리러 오는 양수장 집 딸인지도 모르고 왜 안 오는지 묻는다는 친구 엄마의 전언에도 '나한테 삐진 거냐'라는 친구의 채근에도 그 친구의 집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포도나무는 베어지고 그 자리엔 등나무가 심기고, 별채는 허물어지고 장미 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중학생이 되어서 듣고 그 풍경이 아련해졌다.
돌아보면 그립고 평온한 봄밤이었다. 그 봄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평온한 저녁은 맞을 수 없었다. 평생을 가정에 소홀하고 가족에게는 무능한 분이었지만 지역의 한량이었던 아버지가 떠나시자 우리들은 순식간에 '애비 없는 자식'들이 되어버렸다. 특히 엄마는 많은 것을 놓아버리셨는데 '장남'에게 아버지를 대신할 관심과 책무와 의존과 기대를 고스란히 전가했다. 스물다섯의 우유부단하면서도 나르시스 청년에게 넘겨진 일곱 식구는 너무 과한 무게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와 의존은 제왕적 권력의 힘으로 작용했고 뭐든 할 수 있게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대서 발전해서 노름에 빠졌던 것이다.
내 유년은 끝나버렸다. 어두운 십 대의 터널이 시작되었다. 온통 회색이었고 절망이었고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애증의 '엄마'만 아니라면 모든 걸 놓아버릴 수 있었고 놓아버리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올가미가 항상 목에 걸려 있었다. 앎에 대한 갈망은 지속되는 목마름이었고 책은 유일한 샘물이 되어주었다.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살지 못했으리라.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책을 읽고 있으면 다른 세상, 다른 곳에서 사는 나를 꿈꿀 수 있었고 그 꿈이 나를 살게 했다.
[아주 친밀한 폭력].
오랫동안 무거운 마음에 밀어두고 밀어두었던 책이다. [아주 친밀한 폭력]의 그 '아주 친밀한'의 시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른 척하고 싶었다. 잊고 싶었다. 그러나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에 용기를 냈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책 속의 얘기만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고, 내 주변에서도 흔하고 나에게도 흔痕이다.
노름에 빠진 장남은 돈이 되는 무엇이든 가져가느라 눈이 벌게져갔고 엄마는 포기와 의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선다'라는 말을 수없이 주입했다. '돈 내놓으라'라는 협박의 강도가 세질수록 더 이상 돈 한 푼 빌릴 데도 없는 엄마는 비굴해져갔고 그런 엄마를 밀쳐버린 것은 엄마를 향한 폭행의 시작이었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라고 주정하기가 일쑤였고 자신의 인생을 저당한 동생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와 내 동생은 꼼짝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 꼴이 되었는지를 듣고 또 들어야 했다. 울분으로 똘똘 뭉친 막내 오빠는 집을 떠났고 객지로만 떠돌다 우연히 집에 들른 둘째 오빠는 엄마한테 패악질 하는 것을 보고 죽여버리겠다고 부엌칼을 휘두르다 만류하는 엄마 때문에 대성통곡을 쏟아내고는 그 길로 집을 떠나 다시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프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툭하면 코피를 흘리셨지만 여전히 들에서 허리가 꺾이도록 일을 하고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장남의 노름 돈을 대고 우리를 학교에 보냈다. 코피가 잡히자 두통이 덮쳐서 엄마의 이마에는 흰 머리띠가 자리 잡았다. 병원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겨우 침을 놓는 집에 저녁마다 찾아가 침을 맞으셨다. 중 2, 열다섯 살의 나는 저녁마다 엄마를 모시고 침쟁이 집 어둑신한 골방을 찾아갔다. 이불 바늘만 한 침들을 꽂고 잠드신 엄마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다가 부축하고 돌아오던 깜깜한 길들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그 가을, 친구 하나는 집에 있던 농약을 마셨다. 선배 오빠가 변심했다고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재주 많고 착하던 동네 오빠는 겨울마다 찔레 열매에다 청산가리를 넣어서 꿩을 잡고는 했는데 그 청산가리를 마셔버리고 고통 속에서 하루를 소리 지르다 떠나갔다. 좋아하던 동네 언니와 결혼을 집안에서 반대했다는 이유였다. 총각은 무덤도 쓰지 못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다 묻는 거라고 내가 즐겨 걸어 다니던 둑에 몰래 묻었다. 살짝 튀어 올라온 그곳을 지날 때마다 풀피리를 불던 그 오빠가 생각나서 결코 밟지 않으려고 길 끝으로 걸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때 나는 게오르규의 '25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심훈의 '상록수'와 삼중당 문고판에서 이광수의 책들을 읽고 다시 친구들의 책장을 뒤졌다.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집에 들인 양장본 전집들에서 '전쟁과 평화', '죄와 벌'을 읽어 치웠다. 돌아보면 조판 엉망, 번역 엉망의 해적판들이 포장만 그럴싸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나를 살게 한 책은 앞 뒷장이 찢겨서 나중에 다시 읽고서야 제목을 알게 된 '25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레마르크의 '개선문'이었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나 '개선문'의 [조앙 마두]에게 빠졌다. 그런 세월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그 시절을 통과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 어떤 위무보다, 그 무엇보다 그 시절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폭력의 세월을 견디다 결국은 엄마와 동생을 두고 도망쳤다. 고등학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으므로.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나는 체벌이 싫다. 너무너무너무 싫다.
학교에서 손바닥을 자로 맞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가 동생하고 싸운다고 호박 들기 벌을 내리는 것도 실어서 다시는 동생하고 싸우지 않았고 맞기 싫어서 공부를 잘해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키가 크다고 차출당한 배구부에서는 이유도 모른 채 단체 기합을 받거나 탱자나무 몽둥이로 맞았다. 코치가 때리고 선배들이 돌아가며 때리고. 배구는 하고 보니 매력적인 운동이었지만 맞는 거 싫어서 안 한다고 그만두었지만 집안에서 이뤄지는 폭력에는 답이 없었다. 맞는 동안 나는 점점 졸아들어서 먼지가 되어가고 맞다 보면 맞는 이유도 불분명해져서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있으니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된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가정 폭력 생존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작품이며,
신혜수의 번역문을 다듬어 수정했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다양한 문화적 구조들을 생산해 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교의례, 민족 문화, 전통, 놀이 따위로 정상화, 합리화, 일상 문화화되었다. 이는 여성 폭력을 은폐하고 해결을 지체시켜온 사회 구조로 작용해 왔고 특히 ‘아내 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수천 년 동안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피해 여성의 폭력 해석, 수용 방식을 통해 폭력의 발생과 지속 구조를 알아보고자 한다. 아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폭력을 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가족 구조와 가족 내 남성과 여성의 관계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폭력 당하는 현실이 부정의 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폭력을 남성의 정당한 자원으로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제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폭력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몸이 경험하는 육체적 고통을 상대화하고 다른 종류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폭력을 수용한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5
남편의 폭력은 아내를 훈육하려는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의 많은 폭력은 이보다 훨씬 더 도구적이다. 남편은 폭력을 통해 자기이해(利害)를 실현한다. ‘맞을 짓‘에 대한 성별적 적용은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남편이 ‘맞을 짓‘을 해도 아내가 맞게 된다. 어떤 남편들에게 폭력은 생활 방편이다. 가정만 유지한다면 아내의 경제력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 폭력은 남편이 ‘노상(언제나 하는 일)‘로서 직업이자 노동이 된다. 이때 아내는 가족을 벗어나길 바라지만,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 관계의 유지를 위해 서건 청산을 위해 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6
여성의 탈출 의지는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산소화하였다. 또한 피해 여성의 공포심, 자기방어, 저항 행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성별 규범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가족 제도 아래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247
첫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언니 한 명은 애인이 있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면 왜소하고 성말라 보이는 남자가 껌을 씹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그 언니를 보면 날름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그 언니는 아기 팔뚝보다도 가늘게 마른 몸이었는데 일요일에 쉬고 나오면 멍투성이였다. 이유는 넘어졌거나 부딪혔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알았다.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는 남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가 툭하면 맞고 있다는 것을.
또래의 멋쟁이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미모며 몸매며 애교도 뛰어났지만 화장도 잘했다. 화장의 변신술을 그녀를 통해서 보았을 정도다. 주말이면 곱게 화장하고 잔뜩 들떠서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고는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었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약속에 늦었다고 길에서 막무가내로 때려서 팔이 부러졌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거의 45년 전 이야기다. 아마 그들은 그 남자들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혼해서도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좋아해서 놓아주지 못하고 사랑해서 놓을 수 없다는 흔하디흔하고 뻔한 이유들이다.
사귀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같이 공부를 했고 같이 많은 길들을 걸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이야기했고 암담했던 지난 시절들을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씩 길 위에 있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은 공원의 미끄럼틀 밑이 비를 안 맞게 하는 것도 알았고, 팔달산에 그렇게 많은 오솔길들이 있는 것도 그 아이를 통해서 알았는데 만날수록 헤어져야 할 시간에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스무 살, 남자와 자버리는 일은 너무 두려운 미래였다. 그 거듭되는 거절에 결국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 당했다. 너무 놀라서 아픔도 느끼지 못했는데 찰칵, 칼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골목에서 순간적으로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문소리가 나자 칼을 거두고 돌아서서 씹어뱉듯이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공부나 하라면서 뛰어가 버렸다. 다행인지 그 이후로 다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히 자주 마주치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한 번씩 생각해 본다. 그 아이와 밤을 같이 보냈다면 나는 영영 그와 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맞고 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위가 꼿꼿해진다. 체할 것 같다. 저녁밥(밥보다는 국수나 수제비였을 때가 훨씬 많았지만)을 먹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장남'이 들어오면 위부터 뒤틀려서 꼭 체하고는 했다. 쳇기는 설사로 이어지고 몸살을 앓고서야 끝이 났다. 그 이후로도 자주 체한다. 조금만 불편한 자리에서 식사만 해도 밥알이 차곡차곡 얹히는 기분이 든다. 이 이야기를 풀어 놓는 지금도 쳇기가 명치를 누른다.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