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베티 프리단도 매 맞는 아내였다. 그녀는 여성운동 집회에 나가 연설할 때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때린 얼굴의 푸른 멍을 짙은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얼마전 여성 연예인의 가정폭력 피해 사건이 충격을 준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남편에게 10~20여년 동안 구타당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정폭력은 계급 문제로 인한 억압이 아니라 성별 권력 관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해자가될 수 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더 큰 피해자라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바로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사회적 권력보다도 성별 권력이 더 압도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P118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P119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 P125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매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 찍힌다. 가정폭력은 인정되지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 P127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進步) 않고 멈춘다면(守舊),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것은 폭력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 P130

문제는 ‘아들들‘이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자신들에게가했던 억압 논리와 규범을 다른 진보 세력(대표적으로 여성주의 진영)에게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70~80년대에 보수 세력은 부정부패와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너희들.
한국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 가라."는 식으로 탄압했다. 이런 인식체계 안에서 민주화운동은 ‘친북‘을 의미했고, 이 같은 논리는 오랜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수 세력이 마음 놓고 휘두르는 칼이다. <100분 토론>에서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일부 발언은 그들이 폐지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논리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 P133

일제 시대 ‘군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물론 바람직한일이지만, 이는 여성의 성 피해가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 시대 ‘군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여성은물론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본다. 즉,
전시 성폭력을 여성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기능하게 된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 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P141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 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문제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 라는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 있으면, "여자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 P143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 라는 말은, 당위적인진리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희망적 가치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인간의 범위는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차별주의,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 중심주의,
이성애주의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표준적 인간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몸이 인간을 대표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탈락한 타자(他者)로 간주된다. 흔히, 흑인은인간과 동물의 중간으로,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존재로 ‘다루어진다‘. - P151

인간과 인간 아님의 경계는 한 사회의 지배 규범에 의해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가 친미 반공 국가 건설을 위해다수의 제주 도민을 학살한 제주 4·3 사건에서 우익 테러 조직인서북청년단이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한 것이나, 아내폭력 가해자들이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주장하는 사례 등은 가해자가피해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 P152

임으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성 기관을 모두 가진
‘자웅동체‘ 인간인양성구유자(性具有者)의 존재는, 인간이 원래부터 양성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성별 구분은 계급. 인종·학력·성격· 사회적 지위 등에서 여성과여성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클 경우와 모순된다. 모든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인데, 인간을 성별이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여성‘, ‘흑인‘으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이다. 동성애 인권운동가들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차이‘는 성별 구분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남성, 여성으로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성애 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 P153

인권 이론에 대한 여성주의의 가장 큰 공헌은, 국가 권력으로부
‘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근대적 인권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까지 비정치적인 공간으로 간주되었던 ‘사적인 영역에 인권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인권의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여성주의 인권은 기존 공적 영역에서 ‘국가 대 개인의 억압뿐만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억압도 중요한 인권 문제로 보며 일상을 정치화했다. 사실, 기존의 인권 범위는 대단히 협소한 것이었다. 인구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에의해 차별받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고통은 더욱 심각하다. 일상의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 학벌·나이·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 침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 P164

않기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 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 P171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몸은 단순히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몸은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으로 간주된다. 몸은 존재를 담아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것이다. - P177

이 같은 인권, 평등 개념의 재구성은 성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
한 조건에서 달리기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인권운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인권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인권 개념을문제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운동‘ 과정이기도하다. 인권운동은 인권 개념의 운동을 낳고, 동시에 새로운 개념은인권 운동을 발전시킨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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