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영화 <301.302>에서 주인공황신혜 분)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으로 거식증에 걸리고, 또 다른 주인공(방은진 분)은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강박적으로 음식만들기에 열중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성적 고통이 식욕 문제로 드러나는 현실을 빼어나게 재현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식욕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은 폭식을 하더라도 집단적으로 여럿이 모여 먹고 마신다. 하지만 여성에게 폭식은 수치로 여겨지기때문에, 먹더라도 밤에 혼자 먹는다. 또한 남성의 식욕은 성욕과 무하지만, 여성의 식욕은 곧 성욕으로 유추된다. 여성들, 특히 젊은여성들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어머니나 친구 등 주변 여성들이 나서서 협박에 가까운 걱정과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식욕과 성욕은모두, 혐오스런,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여성성인 것이다. - P99

남성 중심 사회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폭식으로 해결하려는 여성의 상황을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덜 된 신호로 파악하고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으로 본다. 여성의 섭식 장애는 지극히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여성과여성성을 비하하고, 여성에게 이중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의 허기, 남성의 이중 메시지로 인한 무기력 같은정치적 허기를 신체적 허기라고 착각하기 쉽다. - P101

나의 타자가 내가 되어서는 해결이 어렵다. 타인의 내 몸에 대한 판단은, 내 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경유한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이 먼저다. ‘아름다운 몸은 자기사랑의 수많은 열매 중 하나일 뿐이다. - P102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 이 말은 이미 북한에핵이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이러한 명명에서 문제 집단은 전쟁을일으키려는 미국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것으로 가정된 북한이 된다. 대개의 사회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문제에 관련한 논쟁도 그 논의 구도 자체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양성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 P103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가지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P103

스와핑 비난의 근거인 ‘일부일처제의 신성성‘은, 대한민국이 마치 일부일처제 사회인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나 일부일처제가실현된 사회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부계 가족의 영속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만 강요된 규율이었다. 일부일처제 현실은 가면극일 뿐이다.
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기 위해 성매매, 축첩, 혼외정사등 다양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실질적인 일부일처제가 가능하려면, 모든 정치·경제 권력의 반 이상을 여성이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 - 현재 한국 사회 - 에서는 남성은 언제 어디서든한 명 이상의 여성을 취할 수 있다. 이때 여성은 교환가치로서, 남성 간에 유통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 P104

이러한 논리 역시, 마치 모든 사람에게 프라이버시 권리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다. 가정이 사적인 공간일까?
아마도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에게 가정은노동의 공간이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영역이다. 여성이 타인을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남성과는 반대로 가정 밖으로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성생활은 프라이버시 영역일까? 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나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공적인 이슈이며,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스와핑 실천의 ‘급진성‘에 비하면,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사유는너무나 가난하고 상상력이 없다. 스와핑이 아니라 스와핑에 대한해석이, 내겐 더 위험스러워 보인다. - P105

서구에서 혼외의 사랑은 대체로 이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그들의 ‘외도‘는 가족에 역기능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도는 가정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집 밖 사랑은자본주의 유지에 봉사하는 가족 제도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가족 이기주의에 별로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순기능적이다. 사람들은 ‘외도‘의 즐거움으로 가족 제도의 고통과 지루함을 견딘다.
한국 남성들의 혼외의 성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성매매의 성격이 강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은 강력한 가족주의 사회지만, 당위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오하고 신화화할 뿐이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은 친밀성과 자발적인 상호 보살핌의 공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도구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는 남성이 희생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이 자녀 교육의 성공. 즉 출세 지상주의와 경쟁 논리로 가득찬 공적영역에 얼마나 종속적인지를 보여준다. - P107

 준이혼 상태의 부부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거의 수위에 다다를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결혼이 법적 · 인신적 상호 예속이라는 보험료를 내는, 외로움에 대한 장기 보장성 보험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성과 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과 실천은 가족의틀을 뛰어넘고 있다‘. 연애가 대중화, 민주화된 지 오래고, 성은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연애에 대한 열망과 다양성에비해 이를 수렴할 제도는 탄력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고민과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다. 변화하는 사람들의 몸과 감정을 제도에 맞출것이 아니라, 기존 가족 제도 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산,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 P108

사랑이나 친밀성이 공감과 연민에 근거한다면, 비슷한 경험과 조건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일, 예성의 오르가슴이 20분이고 남성은 5분이라면, 20분은 20분끼리 5분은 5분끼리 섹스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 아닐까? 그러므로전혀 다른 세계, 즉 극도로 성(차별화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섹스 트러블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동성애가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냐 이성애냐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누가 정하는가가 진짜 문제 (질문)거리다. 또한 똑같은 인간을 다른 종(늑대, 여우.….)으로 분류하여, 다르게 취급하는 성별 제도가 앞에 말한 모든 문제들의 근원일지 모른다. - P110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건조하게 다시 쓴다면, "고정 관념이 사실을 만든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분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 인식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은 늘 ‘내가 본 것을 믿을 것인가, 남성이 말한 것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가정폭력의 실태와 대책‘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women)은 공적인 문제,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선정적인 이슈, 지면 편집 용어로 말한다면 ‘쉬어 가는 코너‘ 쯤으로 여겨진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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