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이라고 하면 대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던 곳으로 알고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궐이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원래 이 자리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홍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창경궁·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1593년 의주 - P195

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저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선조가 머물던 건물이 섞어당(昔御堂)이다. 석어당이란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을 이궁(離宮)으로 삼기 위해 공사를벌였으나 1623년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가 공사를 중단시키면서왕가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반정 직후 인조가 임금으로 즉위한즉조당(堂)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옛날을 말해준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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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운궁 주위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공사관 등이 둘러싸고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런 시류에 맞추어 경운궁 돈덕전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속속 세웠다. 이때가 경운궁의 전성기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壽)라는 이름을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 - P196

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갔다.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면 건축이 바뀌게 마련이고, 건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뜻이기도 하다. 덕수궁을 보면 확실히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에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97

2009년 11월 27일 산화신기전 발사 실험에서는 비행중 2단 로켓에해당하는지화통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산화신기전은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며 500~600미터를 비행해 내려가다 지화통에 불이 붙고 지화통은 소발화통이라는 폭탄과 함께 빠르게 날아가 폭발한다.
자격루와 신기전기 화차는 비록 덕수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도 위대한 문화유산들로 조선시대 과학사의 명작이자 큰 자랑이다. 귀중한국보와 보물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덕수궁 답사에서얻는 망외의 ‘득템‘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유물을 이렇게 옥외에전시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비추는 일 없이 덕수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24

그러나 세월은 여러 가지로 고종 편이 아니었다. 1904년 4월 14일, 불행히도 경운궁에 대화재가일어나 중화전, 함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황급히복구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때는 조만간을사늑약을 당하고 마는 시절인지라 국력을 경운궁 복원에 쏟을 수 없어 단층 건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궁궐의 명맥과 명색이 유지되었던 것은 왕조를끝까지 지키려던 고종의 의지 덕이었다.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 P227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화전 곁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에서 시작해야 한다.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칠해지지 않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아 기거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라 옛석(昔) 자, 어거할 어(御) 자를 써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석어당 또한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때 소실되었는데, 사실 궁궐 체제에 꼭 필요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선조가 전란 중에 임했다는 역사적의의를 저버리지 않고 이듬해에 바로 복원했다. 그런 사연이 깃든 석어당 뜰 앞에는 지금도 늠름하게 잘생긴 살구나무 한그루가 마치 역사의상처를 보듬듯 봄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송이를 소담하게 피워내고 있으니, 덕수궁에 와서 석조전, 미술관만 관람하고 무심히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여, 살구꽃 피는 4월 어느 날 이 석어당 노목 아래에서 나의 경운궁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 않으시려는가. - P227

광해군은 선조와 마찬가지로 석어당에 기거하고 즉조당에서 ‘청정(聽政)‘했다. 청정이라! 창덕궁 선정전 답사 때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시대임금의 정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 한 것은 재삼 음미해볼필요가 있다. 청정이라는 말의 뉘앙스때문에 대리청정, 수렴청정이라하면 마치 왕이 주변에서 자문이나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왕이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업무를 보았다는뜻이다. 국무위원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는 통치자가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말뜻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 P235

광해군이 이처럼 새 궁궐 건축에 집착했던 것은 왕의 지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광해군은 자질이 뛰어나고 왕세자로서 임진왜란에 적극복해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직접전쟁을 치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광해군은 왕이 된 후 외교·국방에서남다른 수완을 보여주었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힘겨루기를 하던 당시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적당히 조율하는 ‘주선(周旋)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친명(明) 사대주의 입장이었던서인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 인조반정이고, 인조 때 외교의 균형이 명나라로 기울면서 청나라가 쳐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 P243

그런 광해군이었지만 서출인 데다 둘째 아들로 적통이 아니었고 왕이되는 과정도 험난했기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을 느껴 ‘살제폐모‘를 저질렀고 왕의 권위를 한껏 보여주고자 무리하게 궁궐 신축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가 술사들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현혹되었던 것도그런 정서적 불안 때문이었다. 어머니 공빈 김씨가 해산 후유증으로 일
‘찍 세상을 떠난 것도 그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원인이었다. 치유되지 않는 콤플렉스와 불안한 정서는 광해군 개인과 나라의 불행이 되었다.
이리하여 경운궁, 인경궁, 경덕궁 세 궁궐 공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나라가 온통 공사판이었다. 인력도 달렸고 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다.  - P243

아관파천 후 꼭 1년 만이었다.
그때 고종은 환궁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지난번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덧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신민(臣民)들이 모두 알 것이다. (...) 아! 내가 정사를 잘못해 (...) 오늘과 같은 상황을 야기하고말았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맡은 관리들은 한결같이 몸과 마음을 다하라. (...)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서 건너갈 때 상앗대로 노를 젓는 것처럼 각각 그 힘을 써야 쉽게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해이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다. (...) 나의 신하들 역시 함께 건너는 의리를 생각해서 조금도 해이해지지 말지어다.(조선왕조실록 고종34년(1897) 2월20일자)


엿새 뒤인 2월 26일 고종은 온 국민이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자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 P258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이다. (...)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했으니 (...) 세상에 따로 설명하지않아도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0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개국되었다.
이튿날인 10월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했으며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이라 공포했다. 연호는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었다. 사실 갑오개혁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 때 일련의관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태양력과 함께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양 2년이 곧 광무 원년이 된 것이다. - P262

10월 14일 대한제국은 이 사실을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수립의 의의를 간취하고 있었다.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W. F. 샌즈는 1930년 미국에서 간행된 『조선비망록』(신복룡 옮김, 집문당 199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은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있으나 황제는 누구의 신하가 될 수 없기때문에 황제에 즉위하면 중국, 일본, 러시아 황제와 동등해진다는 전통적 이론에 근거했던 것이다. - P262

광무개혁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제로 나아감으로써 정치적으로 봉건성을 면치 못했던 것은 시대의 한계였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혹자들이말하듯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탈 탓에 우리의 독자적인 근대화가 좌절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단명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 P271

경운궁을 겨우 복원한 고종이었건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18일 강제로 퇴위되어 황태자 대리청정을 발표하고 태황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8월 27일에는 순종이 석조전 뒤에 있던 양관인돈덕전(德殿)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 돈덕전은 1902년에 총해관 터에 지은 양식 건물인데, 고종이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고 수많은 연회도 열었던 테라스가있는 예쁜 2층 벽돌집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헐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근래에 목수현 박사가 돈덕전의 1층 평면도를 찾아내어 문화재청에서 바야흐로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돈덕전이 복원되면 근대국가의 궁궐로서 덕수궁의 면모가 더 확연히 드러나게될 것이다 - P278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은 법궁의 지위를 내주게되었다. 이때 순종이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고종이 기거하는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태황제로 머물고 있던 1910년 대망의 석조전(石造殿)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하고고종의 칭호를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했다. 이 때문에 석조전은 황실의 궁궐로는 사용되지 못했다.
덕수궁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던 고종에게 즐거운 일이란 없었다.
1911년 7월 귀비 엄씨(순헌황귀비)가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고, 9월엔 고종이 육순을 맞이했으나 순종이 그를 알현하러 왔을 뿐이었다. - P279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1월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 대부분을 철거할 계획을 밝히고 이후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 매각했다. 선원전 구역은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에 팔려 나갔다.
1922년에는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도로가 생기면서 귀비 엄씨의 혼전(殿) 등이 도로 건너편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옛 궁궐의 훼철에 박차를 가했다. 1931년에는 덕수궁 부지 1만 평을 대공원으로 건설한다는 계획을발표했다.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33년 일제는 마침내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했다.
석조전에 일본 작품만 전시된 것에 대해 불만이 일어나자 1936년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석조전 서관을 짓고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미술관을옮겨왔다. 그해 9월에 서구식 정원을 본뜬 분수대를 설치하면서 옛 궁궐의 이미지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 P280

잊힌 제국, 대한제국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경운궁과 덕수궁의 한 많은 역사의 여정을 마친다. 덕수궁 답사기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덕수궁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답사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실체를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선포되었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은개국 120주년, 옛날식으로 말하면 2주갑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날 이때까지 이를 기리는 사업을 볼 수 없고 이를 각별히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고종이 1893년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갔다가 한양으로 - P299

환어한 지 5주갑, 즉 300주년이 된 것을 기린 데 비하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이 불과 1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마지막만 떠올릴 뿐 대한제국의 실체를역사의 기억으로 거의 간직하지 못한 채 흔히 구한말(韓末)이라고 칭하면서 조선왕조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로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끝났고 그때부터 대한제국의 13년 역사가 이어졌다.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P300

그리고 내일의 일이란 밀려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 유커(遊客)들이동관왕묘에 열광할 것이라는 기대다. 관왕묘는 중국인을 상대로 할 때더없이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관우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삶과 마음속에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신이다. 중국인들이 행복과 재물을 다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시는 분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모택동도 아니고관왕이다. 중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을 가나 관왕묘가 있다. 어떤 통계에따르면 약 30만 개가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집과 상점에 관우사당을 따로 두고 매일 치성을 드릴 정도다. 새해를 맞이하는 춘절(春節)때 집집마다 붙이는 연화年畵) 중 가장 인기 높은 것도 관우 초상이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관왕묘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은 왕에게 올릴 향 다발부터 찾을 것이다.
더욱이 유커들은 이처럼 연대가 오래되고 품위 있는 동관왕묘와 관우상이 있음에 놀라고 크게 감동하며 한국문화에 친밀감도 느낄 것이다. - P311

고금도 충무사에서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장수 진(陳)이 세운 고금도의 관왕묘는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충무사(忠武祠)‘로 변신해있다. 이곳 고금도는 13척의 배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1598년 2월에 조선군 2천명을 거느리고 진영을 세운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진지는 덕동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명나라 구원군 진린 도독이 전함 수백 척과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 곁의 묘당도(廟堂島)에 주둔하면서 이곳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진린 도독은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향을 받들었다. 이것이고금도 관왕묘의 유래다.
그리고 그해 11월 퇴각하는 왜군을 상대로 한 노량해전에서 조선과명나라 수군은 대승하며 마침내 전쟁을 끝내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순직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고금도 월송대에 안치되었다가 83일 뒤 아산의 묘소로 운구되었다. - P332

진린 도독은 고금도를 떠나면서 남은 재물들을 섬사람들에게 주며 관왕묘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후 현종 때(1666)에는 관왕묘를 동무와 서무를 거느린 품(品)자형 사당으로 중수하고 동무에 진린 도독,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숙종 때 (1710)에는 이이명이 이순신은 벼슬이 비록 정2품에 그쳤지만 그 공로는 건국이래없던 것이었으니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 숭배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향사가 국가적 제향이 되었다. 이때 이이명이 쓴 ‘고금도 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고금도에 관왕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명나라가 구원군을보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사당(묘)이라는 뜻으로 1791년 ‘탄보묘(誕報廟)‘
라는 사액을 내려 묘격을 올렸다. 이와 함께 1792년에는 노량대첩 때 전 - P333

사한 명나라 부총병등자룡(龍)도 함께 향사케 하여 동무에 진린과등자룡, 서무에 이순신을 모시게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가 1922년 유(有) 재산처분령을 내려 훼철 위기를 맞았는데, 고금도 유림이 계를 조직하여 관왕묘와 그 부지 1,550평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무렵에는 총독부의 항왜 유적 파괴 시책 때문 - P334

에 관왕묘에 있던 관우상이 파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관왕묘 또한 훼철될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에도 섬사람들이 기지를 발휘해 관왕묘를 사찰로 쓰겠다며 불상을 모셔놓아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보존했다.
8·15해방 후 1947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기일을 맞아 다시 제향을 올리게 되었고 1953년에는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옥천사를 경외로 옮겼다. 1959년에는 정전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동무에는이순신 장군을 보필했던 이영남(李英男) 장군을 배향했으며, 충무사는1963년 국가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진린 도독이 세운 관왕묘는 이렇게 이충무공 유적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 P335

이리하여 지금의 고금도 관왕묘는 더 이상 관왕묘도, 정조가 내려준단보도 아니게 되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사당인 묘당도는 원래대로 관왕묘로 복원하여 정전에 관왕, 동무에는 진린 도독, 서무에는 둥자룡 장군을 모시고, 여기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덕동리의 옛 이순신 장군 진지에 이순신 장군의 새 사당을 세워 그곳을 충무사로 모시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이 시대의 정신을 담은 멋진 추모시설도 갖추어 고금도가 임진왜란 극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로 다시 태어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역사적 현장이 갖는 공간의 진정성과 원형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화유산보존의기본 방향에 맞다. - P335

첫번째 현장답사 때 우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백남준 살던 집에 들렀다가 박수근 살던 집을 거쳐 동관왕묘에 이르는 답사 코스를 다음과 같이 잡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맑은내다리 - 신발도매시장(상가) - 종로50길 -동신교회 - 문구·완구시장 입구 - 창신시장 입구 - 종로53길 골목길 입구 - 백남준 살던 집 - 동묘앞역 4거리-동대문아파트 - 시즌빌딩(옛 동대문스케이트장) - 박수근 살던 집 - 동관왕묘


가는 길에 만나는 동신교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화백이 다니던 교회인데, 지금은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뒷동산으로 이장된 박수근 화백의 묘소가 처음 포천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교회의 장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얘기로는 김광석, 윤형주, 조영남이 다 이 교회 합창단 출신이라고 한다.
- P366

성균관이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와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크다. 성균관의 대성전과 명륜당, 동무와 서무, 그리고 외삼문까지 일말해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묘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제(釋奠祭)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참뜻이 유형의 문화재에서 무형의 가치를 새가는 데 있다고 한다면 성균관에 절절히 서려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채취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다.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등이성균관 출신이었고,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은 이 학교 교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 P38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아!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길을 갈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그간 80리만 가도 다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 P389

비천당을 둘러보고 다시 명륜당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보아도 넓은 명륜당 앞마당은 은행나무 고목이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손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조경이 되었다는 감동과 찬사가 나온다.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맞닿는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1미터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12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품이 넓다. 그중 동쪽의 나무는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이제는 상처가 회복되었다. 두 은행나무 아래로는 싹이 돋아 한 아름씩이나 되는7개의 ‘싹 나무‘가 주위를 호위하듯이 감싸고 있어 외롭지 않아 보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尹悼)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으면서 기초가튼튼해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고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니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했다고한다. - P404

성균관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 생김새나 둘러보다가 대성전 안을 들여다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나는 대성전에 공자만 모셔져 있는 줄 알았다. 안자, 맹자 등 중국의성현과 정이, 주희 등 송대 유학자를 함께 모신 것까지는 그랬었구나 하는 새로운 일깨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의 위패가 있는 것은 신기했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조광조·이황 · 이이·송시열 등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굉필·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
박세채 등 그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내 지식으로는 학문과 이력을 말하기 힘든 학자들의 위패도 있었다.
"나는 자신의 상식에 큰 회의를 느꼈다. 이른바 ‘문묘배향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을 대성전에 모셨다는 것도 몰랐고, 기실 우리나라 유학을대표하는 18현의 이름도 다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 P446

안회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공자라는 훌륭한 분을 만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배운 결과라는 뜻이다.
요즘 ‘롤모델‘이라는 화두가 유행해 학생들에게 자기 인생의 롤모델을찾아보라는 숙제를 주는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무명자 윤기가 반중잡영 220수를 읊은 것도 따지고보면 평생 성호 이익을 존경해 그 천리마 꼬리를 놓지 않고 실학정신의 자세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외교적 기술보다 한 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나는 슬라이드를 분류하면서 전사청 앞 사진을 보고 잠시 놀란 적이있다. 성균관에 이렇게 예쁜 공간이 있었던가 싶어 다시 확인해보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주 효종대왕 영릉(寧陵)의 재실 같은 분위기가 있다. 사괴석으로 단정하게 쌓은 기와 돌담 양쪽에 나 있는 아담한 문, 그너머로 보이는 전사청의 맞배지붕과 멀리서 고개를 내민 수복청의 팔작지붕, 그 선의 어울림이 높낮이를 달리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참으로 정겨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이다. - P467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홍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은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 P479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 P480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은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화적 변혁이 정조시대에 그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반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미술사로 한정해 말하면, 이 시기엔 중국화풍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매몰되어 있던 종래의 그림 세계가 넓어져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 - P480

산수, 현실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가 탄생했고 회화의 진수를 담아낸문인화풍이 안착함으로써 미술사의 꽃을 피웠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엔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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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체 인구 1천만 명, 수도권까지 합치면 2천 5백만 명, 총인구의 반이상이 삶을 영위하는 대도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울의 국가적 위상이 실로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옛날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던 시절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지방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보다 낫다(生作長安草 勝爲邊地花)"고했다는데 지금의 서울이야말로 모든 분야의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면서모순 속에서도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해 나아가고 있다.
서울의 힘과 자랑은 문화유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울은 세계굴지의 고도(古都) 중 하나다. 길게는 2천여 년 전에 시작된 한성백제 - P15

500년, 짧게는 조선왕조 500여 년과 근현대 100여 년간의 수도로서 역사의 자취가 켜켜이 쌓여 있다. 더욱이 서울은 로마나 아테네처럼 오래된 과거 위에 현재가 그냥 얹혀 있는 도시가 아니고, 중국의 서안시안), 일본의 교토(京都)처럼 수도의 지위를 내준 역사도시도 아니고600여 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수도이자 고도다.
중국의 북경(北京, 베이징)이 그 유래나 문화유산의 성격에 비슷한 면이있지만 북경은 자금성·천단·이화원 같은 몇 개의 거대한 황실 건축들이도심 속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음에 비해 서울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종묘사직단·성균관 문묘 등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들이여전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이미지와 도시 공간의 매력은 자리앉음새에서나온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크게 의식하며 살지 않지만 서울처럼 도심의 사방이 산으로 감싸이고 그 남쪽으로 큰 강을 끼고 들판이 넓게 펼 - P16

쳐져 있는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의 옛 모습을 말할 때면 나는 2개의 고지도가 절로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한양도성 안쪽을 그린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다. 이를 보면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125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북악산(342미터) 등 반경 약 2킬로미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더없이 아늑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산줄기를 타고부정형의 타원을 그리는 한양도성이 옛 한양의 영역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울타리로 둘려 있어 한 나라의 수도로서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고있다.
서울을 그린 또 하나의 고지도는 한양도성의 외곽까지 그린 「경조도(京兆圖)」다. 경조란 서울 지역이라는 뜻이니 ‘수도권 지도‘인 셈이다. 이를 보면 북쪽의 북한산(836미터), 동쪽의 용마산(348미터), 남쪽의 관악산(629미터), 서쪽의 덕양산(125미터) 등 반경 약 8킬로미터의 외사산(外四山) - P17

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성 북쪽으로는 준수하고도 장중한 삼각산과 도봉산이 받쳐주고, 남쪽으로는 활모양의 긴 호)를 그리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 남쪽의 드넓은 들판 너머에 관악산이 듬직한 수문장인 양안쪽을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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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옛 지도는 먹으로 산·강·개천·거리 · 건물들을 명확히 표시하여 지도로서 정확한 정보를 드러내주면서 강은 파랑, 산은 초록, 건물은빨강과 노랑으로 채색하여 한 폭의 실경산수화를 이루고 있다. 지도에서분명히 보이듯이 서울에는 산·강·도시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우러져있다.
짙은 녹색의 산줄기는 서울의 골격이 되고, 푸른 물줄기들은 도시의살과 근육이 되고, 붉은색으로 나타낸 촘촘한 도로망은 실핏줄처럼 퍼져있어 마치 산천의 맥박이 뛰는 것만 같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 P18

서울의 경우, 이성계의 명(또는 부탁을 받은 무학(無學) 대사가 조선의도읍으로 정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무학대사가 한양정도(定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양 땅이 조선의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도 신중했다. 무학대사의 낭만적인 발품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풍수에 높은 안목과 학식 있는 당대의 경륜가들이 총동원되어 검토한 결과였다. 학자마다 여러 곳을 신도읍 물망에 올렸고 공사를 시행에 옮기기도 하면서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마지막에 다다른 결론이었다.
새 도읍지 물색 과정에서 벌인 열띤 논쟁은 아마도 세계건축사에서 그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얼마나 신중한 검토 끝에 한양땅을 서울로 삼았는가를 생각하면 서울 사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국민모두가 조상들의 그 진지한 노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4

계룡산 신도읍을 포기한 태조는 문제를 제기한 하륜에게 직접 천도할땅을 조사해보라고 명했다. 동시에 고려왕조에서 풍수를 담당했던 기관인서운관(書雲觀)에저장된 비록문서(秘錄文書)들을 하륜이 모두 열람해 참고할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이 대목에서 고려왕조의 국가 기록과소장 도서가 얼마나 잘 관리되어 있었는지와 하륜에 대한 태조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태조의 명을 받은 하륜은 신도의 후보지로 서울 무악산(母岳山, 안산)남쪽, 오늘날 신촌 연희동 일대를 제시했다. 이에 태조는 재위 3년(1394)2월에 권중화, 조준 등 대신들을 현지로 보내 살펴보게 했다. 태조의 명을 받고 현지로 내려간 대신들은 지세와 지형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무악산 남쪽은 땅이 좁아 도읍으로 불가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태조는대신들의 주장이 워낙 강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 P33

개성으로 돌아온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해 도시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 1일에는 신도읍 조성 임시본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청성백(靑城) 심덕부(德)를 책임자(判事)로 임명했다. 고려 말의 문신인 심덕부는 위화도회군의 1등 공신으로 여섯째 아들이 태조의 사위였고, 다섯째 아들은 세종의 장인이었다. 한양신도 건설에는 심덕부 같은 개국공신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해 신도읍 한양 설계에 들어갔다. 당시 국가의 모든 일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조는 아예 한양으로 내려갔다. 태조가 개성을 출발한 것은 10월 25일이었으며28일에 도착했고 한양부 객사를 행궁行宮, 임시 궁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착수 3개월 뒤인 12월 초에 정도전은 종묘사직단·경복궁등 왕실 건축은 물론 도로와 시장까지 신도의 기본 설계를 완성했다. 불과 3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내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서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 P35

지금도 한양도성의 성벽 곳곳에는 ‘진자 종면(辰字 終面, 진 자 구역 끝 지점)‘ ‘강자 육백척(六百尺, 강자 구역 600척)‘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郡)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나타내 ‘의령시면 경상남도 의령,
구역의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구역의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 보수공사를 할 때는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 갑자10월일(嘉慶九年甲子十月日, 1804년 10월) 패(牌)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首) 용성휘(輝)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 P38

그리고 한양도성이 완성된 뒤 세종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인 예겸(倪謙)은 한양 도심을 내려다보고 지은 루부(登樓賦)」에서 이렇게 읊었다.


북악산이 뒤에 솟고 궁궐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고 성벽이 사면으로 둘렸네
높은 성벽 서쪽으로 구불구불 둘려 있고
잇달아 휘둘려서 높고 낮게 동편으로 뻗어갔네 - P45

물을 말하노라면 개천이 동서로 흐르는데 은하수가 꽂힌 것 같고
한강수는 넓게 흘러 발해로 들어가니
물고기를 편하게 키워주고 논밭이 기름지게 해주네


수도 서울의 입지적 강점은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도시가 팽창할 수밖에 없었을 때 한강 남쪽에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한양에 이어 서울이 여전히 대한민국의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점은 로마나 아테네 같은 고도와 크게다르다. - P46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가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지 절감할 수 있다. 대한민국 또한 통치에 관한 기록 관리가 대단히 철저하다.
우리가 부르는 문화재 명칭 하나도 정해진 절차를 거쳐 대한민국 관보(官報)』에 고시된다.
1963년 1월 21일, 국가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지정할 때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축성된 한양의 성곽은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이라고 했다. 이것이 지난 50여 년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해온 ‘서울성곽‘이다. 그러다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명칭을 고칠 필요가 생겨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변경했다.  - P47

많은 사람들이 입에 익은 대로 여전히 서울성곽이라 부르고, 나 또한이를 별칭 내지는 애칭으로 사용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서울 한양도성이다. 일반인들은 그게 그거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명칭에는 사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서울성곽과 한양도성이라는 명칭 차이는 이 유적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서울성곽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옛날 전쟁에 대비해서 쌓은 성곽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일본·유럽의 도시에서 볼수 있는 거대한 성곽과 성채를 연상하면서 서울은 성벽이 저렇게 낮고도성의 관문인 숭례문조차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어떻게 전란을 견뎠겠느냐는 둥,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서울을 방어하지 못하고 임금이 맥없이 평안도 의주로 피란 간 것 아니냐는 둥 지레짐작하며 자조() 섞인 비하를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이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들으면 나는 속에서 불같이 화가 치솟는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그렇게생각하게 만든 것은 문화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 탓이고 거기엔 이름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 P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P48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이 자리가 도읍지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그가 전제로 내세운 첫마디는 "도성을 쌓으면"이었다.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고을이던 한양과 조선왕조가 수도로 건설한 한양의 차이는 도성이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한양도성이 있는 서울과 없는 서울의 역사적 품격의 차이를.


조선시대 전쟁에 대비한 방어체제는 어떻게 한 것인가. 그 답은 바로산성(山城)이다. 본래 우리나라는 산이 많다는 지형 특성상 전투가 도성이 아니라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시엔 도성 안에서 살다가 전란이 일어나면 산성으로 가서 진을 치고 전투태세를 갖추는 방식이었다.
한양도성을 비롯해 지금 남아 있는 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은주민의 안전을 위해 도적의 침입을 막는 고을의 울타리 정도였고 전란을 위한 산성은 따로 쌓았다. 그 때문에 삼국시대 이래 전국에 무수히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다. - P49

서울 인근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행주산성과 아차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삼국시대에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는온달산성·삼년산성·장미산성·견훤산성 등 자못 규모가 큰 산성들이 축조되었다. 태백산·소백산·지리산 같은 명산에 산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길목의 야산에 쌓은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이래 중앙집권체제가 견고해 내란의 위협이 거의 없었던 나라였다. 중국·일본·유럽처럼 지방에 뿌리내린 호족이 정치·행정·군사에 힘을 행사하는 봉건사회를 경험하지 않았다.  - P49

그러던 어느 날, 거의 기대가 없었는데 북악산이 마침내 개방되어 서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2007년 4월 5일 북악산이 개방되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해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 P58

풍경 뻬레스트로이까ㅡ북악산 개방에 부쳐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꼬바에도 없는 산(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 P64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라,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비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 P65

아,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황지우의 이 축시는 숙정문 입구 서울성곽 안내판 곁에 걸려 있다. 기념식이 있고 얼마 뒤 황지우 시인에게 축시를 써준 것에 감사하니 그는
"내 생전에 어용(御用)시를 쓰리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는데 북악산이날 불러냈네요"라며 그날의 감격을 다시 말했다. - P65

북악산 정상에 다다르면 보이는,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그 넓고 멀고시원한 전망을 내 문장력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한다. 숙정문에서, 촛대바위에서, 청운대에서, 암문 밖에서 보아온 전경들은 세세한 한 것일 뿐그야말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이 통쾌한 전망은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시드니에도, 베를린에도 없는 서울만의 자랑이다.
여기에 오르면 한양도성이 용틀임하며 굽이굽이 이어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성곽 라인의 설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자연을 배반하기는커녕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감탄을 자아낸다. - P80

서울 사람들은 창의문이라면 몰라도 ‘자문밖‘이라면 금방 안다. 정식동네 이름은 부암동,신영동 구기동·평창동·홍지동이지만 나 어렸을 때는 그저 자문밖이라고 불렀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의별칭이 자하문(紫霞門)인데 자하문 밖을 줄여 그냥 자문밖이라고 부른것이다. 올해(2017)로 5회째를 맞이하는 이 동네 축제의 이름도 ‘자문밖축제‘라고 한다.
나는 1955년 4월 1일 서울 청운초등학교에 입학했다(그때는 새 학기가4월에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첫 소풍은 경복궁으로 갔고, 2학년 때는덕수궁, 3학년 때는 창덕궁(그때는 비원이라고 부름)으로 갔지만, 4학년부터6학년까지 3년간은 명색이 고학년이라고 언제나 자문밖 세검정이나 백 - P87

사실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청운초등학교에서 고개만 넘으면 곧 자문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 세검정초등학교 애들은어디로 소풍갈까궁금해했다.
그때 어린 내 눈에 자문밖엔 아무런 볼거리가 없었다. 육중한 바위와세차게 흐르는 계곡, 그리고 능금밭과 자두밭 일색이었다. 당시엔 세검정의 정자도 없었다(지금의 정자는 1977년에 복원된 것이다. 지금은 개천이 복개되어 도로가 나고 연립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그 당시 세검정개울가에는 엄청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서 모두들 거기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 도시락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의 소풍이었다.
한길가에는 코 묻은 돈을 겨냥해 광주리 가득 능금과 자두를 담아 팔던 행상이 늘어서 있었지만 나도 내 친구도 시큼한 능금보다는 신나게돌아가는 솜사탕에 손이 먼저 가곤 했다. - P88

서울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예나 지금이나 개나리와 진달래다. 그중에서도 화신(花信)의 전령은 개나리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변화로 올해(2017)는 어느 날 온갖 꽃이 한꺼번에 피고 말았지만 봄꽃의개화에는 엄연히 꽃차례가 있었다.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는 2월 말에도 서울의 꽃들은 미동조차 하지않는다. 3월도 중순이 되어야 북한산·인왕산·북악산에 생강나무와 산수유 노란 꽃이 소리 소문 없이 피어나고 금세 시내 곳곳에 개나리가 피기시작한다. 서울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 P117

사람에게 팔자가 있듯이 유물에도 팔자가 있는데 건물의 경우는 반드시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과 팔자가 오래간다는 것이 사람과 다르다. 유명한 대저택이나 별서는 처음엔 상속하지만 대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대에 가서는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된다. 이때 누구를 주인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집의 팔자가 바뀌게된다.
흥선대원군 사후 석파정의 소유권은 큰아들이자 고종의 형님인 흥친왕이재면(李載冕)에게 상속되었고, 그후 손자인 영선군 이준용(李埈鎔),
그다음엔 증손자 이우(李)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8·15해방과 한국전 - P140

쟁을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의 후손은 더 이상 이 거대한 별서를 감당하지 못해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주인이 천주교도였고 건물은 전쟁 후유증이 낳은 고아와 결핵 환자들을 보호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면서 그 팔자가 이제는나라의 운명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물 소유주 입장에선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 더 이상 건물을 헐고 신축하거나 증축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석파정은 다른 주인에게 넘어갔고 2004년에는 소유주의 부채를 집행하기 위해 법원이석파정을 경매에 부쳤다. 두 차례 유찰 끝에 새 주인을 만났으나 또 소유주가 바뀌다가 마침내 새 주인이 나타나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라는 명성을 지닌 석파정을 후광으로 삼아 인근에 서울미술관을 지어서2012년 개관과 동시에 석파정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 P141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의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내가 『명작순례』(2013)에서 해설한적이 있는데 요약하자면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 P149

보내주신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노부(老夫)도 마땅히 손을 오므려야하겠습니다. 압록강 이동(東)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승에게서 이런 칭찬을 듣자 석파는 자신의 ‘난화첩‘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더욱 칭찬하여 세상 사람들은 늙은 자신에게난초 그림을 부탁하지 말고 석파에게 구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일침을놓았는데 그 말이 준엄하기만 하다.
아무리 9,999분에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1분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 P149

어렵습니다.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우리는 2퍼센트 부족한 것을 말하지만 추사는 0.01 퍼센트 부족해도완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엄한 가르침을 받은 덕에 석파의 난초 그림은 중국의 명사들까지 받아가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난초 그림을
‘석파 난‘이라고 불렀다. - P150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만나듯 하고

讀己見書 如遇故人
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석파는 그 파란만장한 이력이 말해주듯 술도 잘할 수밖에 없었는데술에 대해서도 높은 경지의 한 말씀을 남겼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아서M. 새클러(Arthur M. Sackler) 뮤지엄에 소장된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10곡 병풍에는 석파가 사용한 문자도장들이 각 폭마다 찍혀 있는데 그중 제4폭에 찍힌 도장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 P151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사가 지내던 백석동천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 P152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했던 현진건은 1940년, 친구의 권유로 미두(豆) 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여 파산했고 부암동 집과양계장을 처분하고는 제기동의 조그만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이 궁핍 속에서 현진건은 결국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와 동향의 문우였던시인 이상화도 같은 날 대구에서 별세했다.
현진건은 단 한 편의 친일 글을 남기지 않을 만큼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굳게 견지하며 에둘러서라도 저항의 빛을 역사소설에 담아내려 했지만 현실이 더욱더 ‘술 권하는 사회‘에로 몰아가면서 해방을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인 대구 두류공원에 있는 현진건문학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P169

빙허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나1943년 4월 25일생을 마친 한국 사실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가 일제 치하에 살면서 극명하게 묘사한 암담한 현실들은 그대로 ‘조선의 얼굴‘이었다. 43년 생애를 통하여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빙허의 굳은 지조와 그 철저한 문학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길이 살아 숨쉴 것이다. - P169

현진건의 「빈처」는 작가, 즉 지식인의 자기 독백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내 「운수 좋은 날」에서는 김첨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더군."
"그렇지요. 「운수 좋은 날」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민중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대접받기 시작하던 초창기 작품이지. 현진건은 말로는 프문학에 주저했지만 실제 작품 실천에서는 프로문학을 선도했어요. 방화로 끝나는 「불」은 더해. 민중이 직접 주인공이 되는 소설과 함께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을 그린 일군의 작품이 있는데, 경부선 차중을 그린 「고향」이 대표작이고요. 한중일 세 나라 옷을 걸치고 세 나라 말을 지껄이는껄렁한 노동자에 처음에는 불편해하다가 그 이산의 비극에 공감하며 결국엔 붙잡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잖아. 그렇게 현진건은 식민지의 비극을온몸에 두른 민중을 만났어요." - P171

역시 집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하고 한옥은 사람이 거주할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 허물어져가던 부암정이 좋은 집주인 덕에 이렇게 완벽히 복원되어 부암동이 도성 밖 최고의 별서 지역이었음을 웅변해주고 있으니 한양의 옛 향기를 오히려 여기에서 느낀다는것이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부암정은 살림집이기 때문에 일반관람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1년에 한 번 ‘오픈하우스 서울‘ 행사를통해 공개된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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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긴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음에 반해, 동양미술사에서 산수화는 5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해10세기에 이르면 가장 핵심적인 장르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산수화에서 화가의 시각은 고원),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심원은 깊숙이 내려다보는 것, 평원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또 부감법(法)이라는 것이 있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엔 헬리콥터도 없었건만 어떻게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 P325

그러나 근래 들어 궁궐들을 부감하기 좋은 곳이 많이 생겼다. 덕수궁은 서울시청이 개방되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하고 있고, 경복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에서 보면 북궐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게 보인다. 종묘는 세운상가 옥상에서 보면 숲속의 정전이 그림처럼 드러나고, 창덕궁은 근래에 문을 연 ‘공간‘ 신사옥 4층의 카페에서 보면 측면관을 조망할 수 있다.
창경궁은 서울대병원 암센터 6층 옥상에 행복정원이 생겨 더없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한다. 더욱이 창경궁은 동향 궁인지라 「동궐도」에서는남쪽에서 부감한 측면으로 나타나 있지만 행복정원에서 바라보면 정문인 홍화문, 정전인 명정전, 그 너머 내전 건물의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 뒤쪽으로 멀리 인왕산 자락이 길게 펼쳐져 나아가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순간 거짓말 같은 풍광이 전개된다. - P326

창경궁 춘당지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과 창덕궁 후원이 거대한 숲으로한데 어우러져 낮은 능선을 그리며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뒤를 푸름을 머금은 북악산 매봉 자락이 바짝 받치고 있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철마다우리나라 야산의 빛깔을 그대로 발하여, 봄이면 산벚꽃의 빛이 파스텔 톤으로 눈부시고, 여름철이면 진초록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고, 가을이면 갈색으로 물들고, 눈 덮인 겨울이면 그 자체로 단색조의 수묵화가된다.
2015년에 서울시 주관으로 시민과 함께 서울의 명소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창경궁 답사에 앞서 이곳을 안내했을 때 모두들 감격해 절로 한마디씩 했다.

"이것이 진짜 고궁의 아름다움이네요." - P327

창경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사이에서 그 위상이 좀 애매하다. 경복궁,창덕궁처럼 법궁으로서의 모습도 없고 덕수궁처럼 별격을 지닌 것도 아니고 경희궁처럼 완전히 새로 복원된 것도 아니다. 1909년 일제에 의해식물원·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 시절을 청산하고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한 때는 1983년이지만 그렇다고 창경궁의 주요 전각들을 모두 새로 지은 것은 아니다. 새로 복원된 것은 회랑과 부속 건물들이다. 창경원 시절에도 명정전(국보 제226호)은 엄연히 건재했다. - P328

에뭇경복궁에서는 이런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없고, 창덕궁 후원은 안내원을 따라다녀야 하는 제약이 있어서 이처럼 홀로 즐길 수 없다. 2005년 경복궁 입장료를 1천 원에서 3천 원으로 대폭 인상할 때도 창경궁은 국민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고궁 공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인상하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역사적 공간, 그것도 왕궁을 이처럼 국민공원으로 개방하는 곳은 없다. 그 규모가 자그마치 7만평에 이른다.
‘고궁 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이 넓은 공간에 새로 공원을 짓는다 쳐도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설계할 건축가가 어디 있겠으며, 있다 한들 이처럼 품위 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경궁을 어느 궁궐 못지않게 사랑하고 즐겨 찾는다. 봄꽃이 만발한 창경궁, 낙엽이 지는 창경궁, 비 오는 여름날의 창경궁을 홀로 거닐며 나만의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사는 가장 큰 행복의 하나다. - P331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이라 불렀다.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의 직계존속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은 왕이 모셔야 할 어머니와 할머니 혹은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가 기거할 전각이 필요했다. 이 전각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은 멀어야 편했다. 그래서 창덕궁 곁에지은 것이 창경궁이다. - P331

결국 영조는 그날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사도세자는) 정축년 무인년(영조 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지 못하면서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더이상 조선왕조를 짊어지고 갈 왕세자가 아니었기에 영조는 그를 죽일수밖에 없었다. - P354

병석에 누워 임종이 임박함을 느낀 영조의 마음속 걱정이란 오로지 왕세손인 정조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대신들이 제대로 정조를 보필해줄 것인지였다. 자식(사도세자)을 자신의 손으로죽음에 이르게 하면서까지 국정을 반듯하게 꾸려가고자 했던 터라 그걱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거두지 못했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월 7일, 집경당에 나아가 세손을 불러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때 영조는 세손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삭제해달라고요청한 효심에 감동해 직접 ‘효(孝孫)‘이라 쓰고 이를 은(銀)도장으로만들어주겠다고 공표했다. - P355

지금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은도장과 관계된 유물이 일괄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효손 팔십삼서(書)‘라고 새겨진 거북 모양의 은도장이다. 도장은 주칠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상자에는 ‘어필은인(御筆銀印)‘
이라고 쓴 동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영조가 ‘세손에게 이르는 글‘이라는 뜻의 「유세손서(諭世孫書)」가 함께 전한다.


아! 해동의 300년 역사를 지닌 조선의 83세 임금이 25세 되는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과 반석 - P356

처럼 편안하다. (…) 특별히 효(孝) 자로 그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며 이일을 후대의 본보기로 삼으니 산천초목과 풀벌레인들 누가 이 뜻을모르겠는가.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온몸으로 간직해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영조는 이 글을 쓰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이 유서는 긴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데 곁에는 ‘어제유서(御製諭書)‘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손‘이라는 은도장을 담은 상자와 유서를 넣은 나무통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멀리 행차할 때도 들고오게 하여 자신 앞에 놓게 했다.
정조 때 그린 의궤도를 보면 옥좌 앞에 도장함과 나무통이 놓여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정조가 재위 25년 동안 그렇게 지니고 다녔기에 나무통엔 손때가 깊이 배고가죽끈은 다 닳았다.
‘효손‘ 은도장과 「유세손서」 나무,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비의 한과, 눈을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을 지켜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대왕 다음가는 계몽군주, 문화군주가 되었다. - P357

당시에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 때문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다. 1625년(인조3년) 세자로 책봉된 그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자진하여 봉림대군 및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9년 동안 청과 조선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으며 서구 과학 문명에 대해 탐구했다. 1645년 귀국했으나인조와 조정은 세자의 귀국을 못마땅해했다.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힘을 알게 되었기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했고, 청이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반해 봉림대군은 부왕의 뜻을 충실히 받아들여 반청의 감정을 더욱 다졌고, 전통을 고수하고 서양문물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현세자가 봉림대군(효종)을 남겨두고 먼저 귀국했던 것이다. 인조는 만약 세자가 귀국하면 청나라로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요구가 있을까 걱정하며 의심했다. - P367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는 그리던 서울에 돌아와 부왕을 만났지만의외로 부왕의 쌀쌀한 태도를 접했다. 야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인조가 매우 언짢아했으며,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소현세자의 얼굴에 벼루를 내리쳤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병이 들었다. 세자는 평소에도 몸이건강하지 않았는데,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열을 내리려고 세 차례침을 맞고,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 - P367

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 사람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1645) 6월 27일자)


이 기록으로 보면 소현세자는 독살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 또한 사도세자와 같은 비운의 왕자였던 것이다.
환경전은 이처럼 가끔 사용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국장 때 빈전이나혼전으로 사용되어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전도 여기에 마련되었다. 그런데 1830년, 효명세자의 빈전으로 모셔진 지 두 달 만인 7월에 환경전에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건물이 전소되었다. 군사들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효명세자의 재궁을 건져냈지만, 불은 경춘전과 함인전을비롯한 다른 건물들에까지 번져갔다. 1830년 창경궁의 주요 건물을 다태운 동궐의 대화재였다. - P368

조선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여인들 중 품계를 받은 후궁, 궁녀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왕비, 세자빈, 왕대비(왕의 어머니), 대왕대비(왕의할머니)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하지만 내명부의 여인들은 품계를 받았고, 내관과 궁관으로 나뉘었다.
내관은 왕과 세자의 후궁으로, 정1품부터 종5품까지였다. 서열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이다. 정1품빈에 봉해지면 이름 앞 한 자씩 좋은 단어를 얹어주는데 희빈, 숙빈, 수빈 등이 그것이다.
궁관은 흔히 궁녀라고 하며 정5품부터 종9품까지 각 처소마다 소임에 - P381

따라 배치된다. 정5품 상궁(宮)은 총책임자로 제조상궁(그宮)이중 가장 높다. 정7품 전빈(典)은 손님 접대를 맡고, 정8품 전약(藥)은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고, 종9품 주치(徵)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식으로 직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 즉 장희빈은 궁관에서 내관으로 승진한 뒤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것이다.
이 밖에 궁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는 나인(內人)이 있고, 궁관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비자가 있다. 무수리는상궁의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 통근을 하는 데 비해, 비자는 상근하는 하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궁녀의 수는 후궁의 수에 따라 달라졌다. 후궁의 수는 임금에 따라 많고 적음이 달랐는데 성종의 경우 왕후가 3명, 후궁이 11명이었다. 그렇다고 왕후가 동시에 3명인 것은 아니었다. 왕이 하나듯 왕후도 1명으로, 왕 - P382

후가 죽거나 폐비되었을 때 다음 왕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예로성종의 첫 왕비는 한명회의 딸 청주 한씨(공혜왕후)였고, 청주 한씨가 죽은 뒤 왕후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함안 윤씨(제헌왕후)다. 이분이 왕자(연산군)를 낳았으나 인수대비에게 밉보여 궁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다. 그리고폐비 윤씨를 뒤이은 세번째 왕후로 파평 윤씨(정현왕후)가 들어왔다.
성종의 후궁으로는 명빈(明嬪) 김씨, 귀인 정씨, 소의 이씨, 숙의 홍씨,
숙용 심씨 등이 있는데 이중 숙의 홍씨는 남양홍씨 홍일동(홍길동의 형)의딸로 7남 3녀를 낳았다. 내명부에도 이처럼 서열과 직책이 분명했다. - P383

그러나 두 건물의 내력은 아주 크다. 집복헌에서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그리고 영춘헌에서는 정조가 등창을 치료받다 세상을 떠났다. 특히정조는 이 집을 좋아해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어쩌면 수빈 박씨가 좋아자주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의 아내는 모두 5명으로 왕후가 1명, 후궁이 4명이었다. 왕후(효의왕후 청풍 김씨)는 1762년, 10세 때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들어왔다. 하필이면 궁에 들어온 그해 여름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다. 왕 - P384

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후궁들과도의좋게 지냈고, 정조가 죽은 뒤에도 21년을 더 살아 1821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왕자를 얻기 위해 후궁을 들였다. 첫번째 후궁은 원빈(元嬪) 홍씨로 홍국영의 여동생이다. 1778년 13세 때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1년 만에 요절했다.
두번째 후궁으로 들어온 분은 화빈(嬪) 윤씨다. 1780년 원빈 홍씨가죽은 이듬해에 들어와 1년 만에 낳은 딸이 일찍 죽고 이후 자식이 없었다. 화빈윤씨 역시 정조가 죽고도 24년을 더 살아 18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번째 후궁은 화빈윤씨를 모시던 궁녀였다가 특별상궁으로 봉해진뒤 후궁이 된 빈(嬪) 성씨다.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이었기 때문에가문을 알 수 없으나 정조가 직접 선택한 유일한 후궁이었다. 그래서 정조가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의빈 성씨는 1782년 원자를 낳아 1783년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 P385

이듬해에 옹주도 낳았으나 첫돌 전에 죽었고, 1786년 5월 세자가 5세에 홍역으로 죽는 슬픔을 당하고 그해9월에 셋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여전히 후사가 없는 정조는 네번째 후궁을 들이게 되었다.
삼간택과 가례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빈으로 입궁한 수빈(綏嬪) 박씨다.
반남박씨 명문으로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 집안의 딸로 1787년 18세에 후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790년 6월 18일, 마침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 순조를 낳았고, 3년 후 숙선(善)옹주도 낳았다.
수빈 박씨는 평소 예절이 바르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성품 또한 온화해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이라 불렸다. 그녀의 아들이 세자가 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뇌물을 바쳤으나 이를 고발해 의금부로 잡 - P385

혀가게 하는 청렴한 처신을 보였다.
정조가 죽고 11세의 세자가 순조로 즉위했다. 대왕대비(영조 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수빈 박씨는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대비인 효의왕후를 잘 모시고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는 1815년 81세 효의왕후는 1821년 69세까지 장수했다. 수빈박씨는 1822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늘 절약하며 살림도 잘했다고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3년 1월 27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子)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園, 묘소)을만들 때와 후일 별묘(別廟, 사당)를 지을 때 보태 쓰도록 하라. - P386

이런 영춘헌이었고 이런 수빈박씨였기 때문에 정조는 영춘헌에 자주머물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했다.


선왕(정조)은 천품이 검소하시고 만년에는 더욱 검약하셔서 상시 계신 집의 짧은 처마와 좁은 방에 단청의 장식을 하지 않고 수리를 허락하지 않으셔서 숙연함이 한사(寒士)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정조가 영춘헌에 있으면서 쓴 시가 여러 편 있는데 그중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영춘헌 툇마루에 앉아 편안히 봄을 맞으며 쓴 시 가운데일부이다.


마루가 탁 트여 봄을 맞으니 봄이 늙지를 않는구나 - P387

답사기를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영춘헌을 찾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둘러보았는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현판 글씨가 눈에 띄었다. 예서풍으로 또박또박 썼는데 필획에 연륜이 담겨 있지 않아 서예가의 글씨가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아주 조신하고 느낌이 있어 누가 썼을까 궁금했다. 사진을 찍어 낙관을 확인해보니 원(元), 필정묵의(筆墨意)라 읽혔다. 헌종의 도장이었다.
헌종의 묘지명」과 「행장」에서는 한결같이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했지만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창덕궁 병영(兵營)에 걸었던 ‘내영(內營)‘이라는 현판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또 한 점을 만나니 낙선재의 헌종 모습이 떠오른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하나도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남아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 창경궁의 내전 답사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내전 위쪽엔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자경전 터가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창경궁의 이야기는 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 P388

창경궁 내전의 건물들을 두루 답사하고 정일재가 있었다는 넓은 암반위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반듯한 언덕배기가 나온다. 여기가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자경전 자리다.
저 건너편 함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경모궁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이다.
「동궐도」를 보면 자경전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대단히 큰 전각으로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로 넓게 열려 있다. 자경전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위한 많은 잔치가 벌어졌으나 그보다는 바로 여기가 한중록』의 집필 현장이라는 의의가 더 크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면 한없는 동정과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녀는 80여 년의 한 많은 삶을 견디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증언한 조선 - P389

최고의 궁중문학 작품 『한중록』을 저술한 위대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뒤에도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겨우 열한 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는아픔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한을 풀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경궁은 모자 간의 정을 덮어두고 아들을 영조의 처소로 보내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을 쌓도록 했다. 남편의 정신병이 부자 간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하여 혜경궁을 더욱 놀라고 슬프게 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엽기적인 살인 방법이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아이디어라는 이유였다. 정조는 훗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어, 전날의처분을 후회하고 어머니를 더욱 효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 P391

첫번째 저술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베풀었던 1795년(정조19년)경에 이루어졌다. 혜경궁은 ‘내가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라는 마음에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래서 이책의 최초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서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세자가 병이 없는데 영조가공연히 죽였다느니 친정아버지(홍봉한)가 뒤주를 들이게 했다느니 하며이런저런 맹랑한 말이 많으나 자신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을지니 "이기록을 보면 일의 시종을 분명히 알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조께서 사도세자께 자애를 베풀지 않으시어 세자께 병환이 생겼고 (…) 병환이 만만(萬) 망극하셔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우니 끝내어쩔 수 없이 일을 당하시니라. - P392

67세(순조 1년) 때의 두번째 집필과 68세(순조 2년) 때의 세번째 집필은정조 사후 대리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나 동생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이 유배형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비통한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 이때의 책 제목은 ‘혈錄)‘이 되었다.
혜경궁은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네번째 집필은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71세 (순조 5년)에1,2,3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병의 원인과 증세를 상세 - P392

하게 기록한 것이다. 수이렇게 쓰인 『한중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인의 증언을 넘어 후세인들에게 그 당시 인물·정치·풍속·궁중문화를 생생히 전해주는 고전문학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한중록』에 감동하는 것은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시아버지에 의해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는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엄청난 한이 서린 그 사건의 시말을 담담하게풀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는 혜경궁의 너그러운인간성이고, 또 하나는 한(恨)을 한으로 풀지 않고 인생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극복해낸 노년의 용서다. 그 점에서 한중록은 ‘한(恨)중록‘이 아니라 ‘한(閑)중록‘이 맞다고 생각한다. - P393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던 자경전 터는 창경궁 답사의 끝이다. 자경전터에서 그 옛날의 창경궁을 생각하며 내전 쪽을 내려다보면 옛 모습은잃었어도 늠름한 전각들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그래도 궁궐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보여준다. 지금 상태도 그러하니 그 옛날 여기서 보는 창경궁의 아름다움은 어땠을까. 궁궐지」에 실려 있는 순조의 자경전 기문」에는 자경전에서 본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그림같이 묘사되어 있다.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잘 따랐다. 자신은 할머니의 지극한덕행을 돕기에 부족함이 많고 언사는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덮기에 부족하여 조마조마 조심해서 쓰지만, 글은 성의에 있지 문자에 있지 아니하니 오직 있는 그대로 알린다면서 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길게 말한 다음 자경전에서 본 창경궁의 사계절을 노래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창경궁의 아련한 정취를 생생히 감상할 수 있다. - P394

자경전에서는 궁전의 사방을 조망하는 경치가 아름답다. 봄볕은 잔잔하고 맑은 기운은 환히 비추며 돈다. 꽃은 비단 같은 정원에 어울려피고, 버들은 금 같은 못에 일제히 떨치고 있다. 앵무새는 조각한 새장에서 말을 배우고, 꾀꼬리는 좋은 가지를 택해 소리를 보내고 있다. 붉고 푸름이 서로 섞여 흩어지고 어우러지며 만송이 꽃술은 모양과 빛을 발하고 있어 실로 궁궐 정원의 번화함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궁전의 봄 경치다.
난초 끓인 물에 목욕하고 쑥꽃을 꽂으니 이는 궁중에서 예부터 하는 일이란다. 꽃다운 풀에 앉고 무성한 수풀을 그늘로 하니 봄꽃이 향기를 토하는 것보다 낫다. 천도복숭아가 열매를 맺으니 열매는 삼천 - P394

개라, 아름다운 나무에 매미 우니 울음소리 가득하다. 잎을 천 개의 줄기에 실으니 향기가 자욱하다. 맑디맑은연못은 또한 마치 살아 있는물 같다. 정원가에 석류꽃 나무 수십 그루를 심으니 하나하나 붉게 익었고 계단 위에 기이한 풀백여 포기를 심어두니 그릇마다 기이하고오묘하다. 삼복더위에도 더운 기운이 침범하지 않는다. 궁녀가 부채부치는 수고를 하지 않게 하고도 자연히 맑은 바람이 옷깃을 씻어준다. 이것이 궁전의 여름 경치다.
수풀 단풍이 비단처럼 펼쳐 있고 빼어난 국화가 어울려 향기를 낸다. 가을 달은 휘영청 밝게 빛나며 비추인다. 흰 이슬 버선에 스며드니넓은 정원이 낮과 같다. 빗물이 스며든 것을 모아서 맑은 기운을 띄운다. 이에 온 나라가 풍년을 노래하고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한다. 올해는 작년과 같고 내년도 올해와 같으리니 해마다 이와 같으리, 들에는배 두드리는 소리 들리고 조정에는 풍년 진상을 청한다. 이것이 궁전의 가을 경치다. - P395

궁전의 나무는 구슬을 맺어 여섯 가지 꽃이 다투어 춤추는 것을 보고, 궁궐의 비단은 선을 더하여 동짓날의 처음 돌아옴을 다투어 축하한다. 임금의 생일이 돌아오면 만세 삼창기원 소리 높이 오른다. 찬란한 빛과 상서로운 색에 관과 패물이 쟁쟁하다. 사람들은 채색 대오를이루고 조화가 경계에 넘친다. 이것이 궁전의 겨울경치다.


그런 창경궁의 아름다움을 보듬고 있던 자경전이었다. 내가 이 글을더욱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관람객이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본 창경궁의 자랑이라는 점이다. - P395

꽃나무에서 민족성을 찾는 것은 옹졸한 생각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식물에도 장소성이라는 것이 있다. 윤중로의 벚꽃은 즐길 수 있어도 창경궁의 벚나무는 허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대신 창경궁 관람로엔 ‘궁궐의 우리 나무‘가 즐비하다. 봄이면 하얀꽃을 솜사탕처럼 피어내는 귀룽나무도 있고,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하나로 엉켜 겉으로는 사이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200년을 두고 싸우고 있는 연리목 아닌 연리목도 있다. 그 숲길을 걷는 것이 다른 궁궐에서는 가질 수 없는 창경궁의 큰 매력이다. - P411

일제가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기 기작한 것은 1907년부터였다. 강제로 폐위시킨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남게 하고 이어 즉위한 순종황제를 창덕궁에 기거하게 하면서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개원을 앞두고 일제는 일본의 우에노(上野) 동물원에서 일본인 사육사20명을 극비리에 교육시켰다. 조선인을 고용하면 맹수들을 풀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일본인만 채용했다.
일제는 1차로 창경궁의 행각, 궁장, 궁문을 헐고 이를 경매에 붙였다(이중 몇 채가 지금도 개인 저택으로 남아 있다). 순종은 이를 애석해했지만 소용없는일이었다. 2차로 춘당대 북쪽에 식물원 터를 잡고 내농포에 연못을 파춘당지를 만들었다. 3차 공사로 보루각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위치한궐내각사를 모두 헐고 종묘와 인접한 넓은마당까지 동물원을 세웠다.
1909년 초부터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종 동물들을 수집하고 방방곡곡의 진귀한 식물들을 채집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에 서식하지않는 코끼리·사자.호랑이·곰· 원숭이 공작 등의 동물들과 파초·고무나 - P411

무·바나나 등 고가의 열대식물들까지 수입해 전시했다. 당시 창경궁은17 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었다.
1909년 11월 1일 아침 10시, 개원식이 열렸다. 순종은 연미복 차림에모닝코트(morning coat)를 걸치고 회색 중절모를 쓴 개화된 예복을 입고 참석했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비롯하여 무려 1천 명에 달하는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원을 총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자리에 없었다. 닷새 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 P412

순종황제가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공개하여 온 백성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노대신들이 한사코 반대했다. 그럼에도 순종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했다. 한국동물원 80년사』(서울특별시 1993)에 따르면, 개원 첫해 동물원의 식구는 "반달곰 2마리 · 호랑이 1마리 · 집토끼 18 마리 · 진돗개 1마리 · 제주말 2마리 ·고라니 • 노루 10마리.." 등 총 72종 361 마리였다.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다. 그렇게 창경궁은 창경원으로바뀌었고,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던 시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겨 찾는 대공원이 되었다. 창경원은 하루 2~3만 명이 입장할 만큼 나들이 장소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11년 일제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이왕가박물관 건물을 세우고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했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했다. 1922년에는 이곳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숲을 만드는가 하면 - P412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들어서면서 창경원 동물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패전을 앞둔 1945년 7월 25일,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은전 직원을 모아놓고 도쿄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며 "미군이 창경원을폭격하면 맹수가 우리에서 뛰쳐나올 수 있으니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을 모두 죽이라"면서 "동물들의 먹이에 몰래 넣어두라"며 극악을 나눠줬다. 코끼리·사자·호랑이·뱀· 악어 21종 38마리가 그렇게 독살됐다. 동물들이 죽던 날 밤, 창경원에는 맹수들의 스산한 울부짖음이 밤새도록 가득했고 동물원 직원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창경원은 다시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창경원 동물들이 겪은 수난은 더욱 극심했다. 1·4후퇴 때에는 창경원 직원들도 피난을 떠났다. 돌아와서 보니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은 한마리도 없었다. 부엉이·여우·너구리 삶 따위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고, 낙타・사슴·얼룩말들은 도살당해 먹을거리가 없던 피난민들의 식량이 됐다. - P413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창립되어 정부기관과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동물원 재건 기금으로 42만2천달러를 모았다. 이 기금으로 1955년에 호랑이·백곰·물개·하마. 낙타 등 10여 종을네덜란드, 미국, 태국 등에서 수입해 다시 동물원다운 동물원의 면모를갖추기 시작했다.
사자는 한국은행이 사주었고, 코끼리는 이병철 당시 제일제당 사장이기증했다. 식물원도 야자수 외에 107종의 관상식물을 기증받았다. 이리하여 창경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헤아리는 동물원이 되었다. 다시 관람객들이 모여들었고, 서울의 초등학교들도 봄가을 소풍 때단골로 창경원에 갔다. 1950~60년대 서울의 최고가는 유원지이자 연인들의 행락지는 단연코 창경원이었다. - P413

1977년 마침내 창경원 동물원의 과천 이전 계획이 수립되어 1983년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궁으로 회복되었다.
1984년 5월 1일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개장했고,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23일 일반에 공개했다. 이것이 창경원 74년의 역사다.
내가 창경궁 답사기를 쓰면서 창경원 시절까지 언급한 것은 그것도역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또래에게는 창경원이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창경원에 여러번 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고, 아버지 손잡고 가서 놀이기구를 탄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어린 시절 즐거운 한때로추억에 남아 있다. - P414

나이가 제법 들고 보니 동물을 보던 그때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은 너무도 다르다. 어려서는 인간과 다른 모습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물원을찾았다. 그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또 예전에는 인간성을 강조해서 말할때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명을 창조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요즘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세계」를보면서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을 보게 된다. 존 버거는 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의 첫장 왜 동물을 보는가?」에서 인간이 동물원을만든 것이 자연 속에서 동물과 만났던 관계를 단절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했다.
「동물의 세계」를 즐겨 보면서 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기고만장하지만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텔레비전에서 원 - P414

숭이 편을 만들듯이 원숭이들이 인간 편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도해보고 동물원이 아니라 대자연 속 동물의 생태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원형질을 유추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떤 동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때 가장 먼저떠오르는 모습은 텔레비전의 영상에서 본 것도 아니고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닌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실체감이있다.
그래서인지 창경궁에 오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 점에서 창경원을 경험했던 구세대와 그렇지 않은 신세대는 창경궁 답사에 임하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경궁 답사의마지막을 창경원 이야기로 마무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세대들이 구세대의 이런 독백을 과연 이해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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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눈이 밝지 않은 분이라도 여기서 바라보면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멋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은 엄숙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희정당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왕세자의 공간인 성정각은 밝고 안온해 보인다. 전통 한옥의 모든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한옥의 멋은 역시 지붕선에 있다. 백회를 두른 용마루의 지붕선들이직선으로 겹겹이 뻗어나가고 팔작지붕의 삼각형 합각들이 가벼운 곡선을 그리며 정면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붕 너머로 대조전을 비롯한 안쪽 건물들의 지붕선이 드러나 은연중 궁궐의 깊이와 넓이를 암시하며 붉은 주칠의 벽채와 초록색 덧문이 어우러진다. 여염집에서는 볼수 없는 왕가의 품위가 잘도 느껴진다.
우리 한옥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은 창덕궁을 대표하는 장소로 가장 많이 소개되며사실상 내전의 파사드(façade, 정면관)로 인식되고 있다. - P136

태조가 경연청을 설치한 이래 역대 왕들은 반드시 경연에 참여해야 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경연에 참석했고, 성종은 재위25년 동안 매일 아침, 낮, 저녁으로 하루 세 번씩 경연에 참석했다고 한다. 물론 반대도 있다. 세조는 집현전 학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잠시 경연을 중단한 바 있고, 연산군은 공부하기 싫어서 이를 폐지하기도 했다.
경연의 기본 교재는 유교의 경전인 사서와 오경, 그리고 중국 역사책인 ‘자치통감』이었다. 보조 교재로는 주자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정리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당태종의 뛰어난 정치술이 기록된『정관정요(貞觀政要)』, 조선 역대 임금의 치적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사용했다. - P143

결국 경연은 매일 이루어지는 국정 세미나인 셈이었다. 대신들은 이를 통하여 왕권를 제어하기도 했고 왕이 대신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학문에 뛰어났던 영조와 정조는 경연을 탕평책 등 개혁정책을추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경연은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 점에서 경연은 조선왕조를 500년 이상 이끌어간 힘이었다. 업무에 시달리는 도승지를 보고 거지가 불쌍하다고 했다는 옛이야기가 있는데, 임금의 삶이야말로 개인 생활 없이 주어진 일정과 틀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피곤한 인생이었다. - P144

화계에는 앵두나무·진달래.철쭉·미선나무·목단 같은 키 작은 나무들과 금낭화·옥잠화·작약·국화·수·원추리. 무릇 같은 풀꽃이 꽃밭을 꾸민다. 곳곳에 기이한 형상의 괴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괴석은 일종의 추상조각인 셈인데, 구체적 형상을 갖지 않고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을 현대미술에서는 오브제라고 하는데옛사람들은 이처럼 오브제 개념을 이미 꽃밭에 구현했다.
화계는 우리나라 건축과 조원(造園)의 독특한 형식이자 큰 자랑이다.
산자락을 등지고 집을 앉히다보면 건물 뒤쪽은 자연히 비탈로 남는데,
여기에 꽃계단을 만들어 사태도 막고 꽃밭도 가꾼 슬기롭고도 자연스러운 정원 형식이다. 평지에 집을 지으면 일부러 만들기 전에는 화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의 조원엔 화계라는 개념이 없다.  - P174

경복궁은 평지에 세운 건축물인지라 화계를 만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경회루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으로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 뒤란에 가산(山)을 만들고 이곳에 아기자기한 아미산 화계를 만들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이 화계를 전통적이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도 받고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속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기록도 없고 사진도 없어서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담양 소쇄원 화계에는 매화가 심겨 있고, 낙선재 입구의 화계는 다복솔로 이루어져 있는 걸 보면 일정한규칙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창덕궁 관리소에서는 이런저런 예쁜 야생초들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꾼다. 마치 풀꽃과 꽃나무로 하는 대지미술 같아서 정말로 힘든 것이 꽃밭 설계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물론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화계라는 형식 자체가 워낙 강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언제라도 대조전 화계를 지나면 이 공간이 주는 상쾌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 P175

장락문 앞에서 보면 사랑채 누마루의 팔작지붕이 활개를 펴듯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평원(平遠樓) 육각정자가 높직이 솟아 낙선재 뒤뜰이 높고 깊음을 암시한다.
낙선재는 모양새로 보나 규모로 보나 문기(文氣)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할 만한 사랑스런 집이다. 앞마당이 널찍하고, 장대석을5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건물이 높이 올라앉아 있으며, 3단의 돌계단이대청을 향해 양쪽으로 나 있다. 또 그 사이에 노둣돌이 있기 때문에 궁궐의 사랑채다운 기품이 있다.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몸채 가운데2칸이 마루이고 동쪽엔 온돌방 2칸과 다락 1칸, 서쪽 1칸은 누마루로 나있다.
낙선재 건물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대단히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 P195

낙선재 동쪽에는 ‘보소당(寶蘇堂)‘이라는 아주 예쁜 현판이 있는데 이는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옹방강의 당호였지만 헌종이 이를 자신의 집에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글씨는 전형적인 추사체의 멋을 보여주는데 낙관이 없지만 나는 이것을 헌종의 글씨로 보고 있다.
헌종은 이처럼 추사 김정희를 사모하여 추사 주위의 문인들과 자주교류하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따르려고 했다. 사실상 헌종은 ‘추사 일파‘
의 한 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98

헌종은 교양이 넘치는 군주였다.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문예 활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승화루에서 책과 서화를 즐겼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헌종의 문예 취미는 그의 인장을 모은 ‘보소당인존장 컬렉션을 인출하여 인보(印)로 엮은 것인데 여기에 실린 인장의 숫자가 500과가 넘는다. - P198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
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세계 각국의 역대 왕들은 궁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별궁과 별장을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만약을 대비한 이궁(離宮),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은 있었어도 임금만을 위한 별장을 따로경영하지는 않았다. 이런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 P215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은 누구든 "세상에 이런 곳이라는 감탄을 절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이런 감탄사를 속으로 감추지만서양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을 안내해보면 한결같이 "Oh, My God!"이라소리치고는 사람마다 ‘Fantastic‘, ‘Incredible‘, ‘Unbelievable‘ 셋 중 한마디를 되뇌곤 한다. - P224

우리나라 정원에서 건물은 마치 자연이라는 거실에 배치된 가구 같아서 건물이 있음으로 해서 경관이 생기고 건물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부용지를 거실이라고 치면 연못은 폭넓은 화문석(花) 같고, 규장각주합루는 듬직한 반닫이와 기품 있는 의걸이장 같고, 부용정 정자는 화려한 화초장(花草 같고, 영화당은 단아한 서안(案) 같고, 비각은 곱상한 연상(床) 같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살로몽이 한국의 건축은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말한 것이다. - P230

정사를 맡게 된 효명세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극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인영 등을 중용해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했다. 추사김정희 부자와 권돈인 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이 세자를 굳건하게 보좌했다.
그러나 순조 30년(1830) 윤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피를 토했다. 약원에서 처방을 해도 효험이 없자 다산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 다산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결국 5월 6일 새벽,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세자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호인 환재에서 굳셀 환(桓) 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환) 자로 바꾸고20년 가까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효명세자의 요절은 왕조의 큰 불운이었다. 조선왕조의 운세는 그렇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 P273

나라의 다스림은 주나라의 융성과 비교될 만하고 책을 얻음은 한나라와 비길 만하니 나에게는 크고 넓은 집이 되리다. 듣자하니 글은 도리를 실은 그릇이라 했다. 중국 50국의 보배로운 책을 다 갖추었고, 조선왕조 21대(태조부터 정조까지의 전사(史)를 갖추었는데, 홍문관에비장된 것이 이미 오래이니 어찌 다섯 수레만 될 것이며, 규장각의 창건이 새로우니 마침내 경사자집(經史子集, 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부(四部)의 책이 다 모이게 되었다.
이에 「고공기」를 상고하여 서옥(屋)을 짓는데, 널따란 동쪽 누대와 서쪽 마루의 제도를 갖추고 서재에는 여덟 창을 활짝 열었다. 상림원(후원)의 풍광을 독차지했고 춘당대의 물색도 넘보는구나. 아름다운공사는 준공에 박차를 더하기에 긴 들보 올림에 즈음해 짧은 노래 아뢰노라. - P274

어기어차동쪽 들보를 올리나니
아침 알현 끝나자마자 책 읽는 소리
멀리 향기로운 안개 속에 나는구나
어기어차서쪽 들보를 올리나니
우리나라 문운이 열림을 알려거든
오성(五星)이 밝은 곳에서 규성(星)을 보려무나
어기어차 남쪽 들보를 올리나니
목멱산(남산)에 봄이 깊어 푸른 아지랑이 노을이 피어난다
어기어차 북쪽 들보를 올리나니
삼각산 날씨 차가운데 눈빛이 높다랗다
어기어차 위쪽 들보를 올리나니 - P274

해와달같이 밝으니 우주가 밝구나
어기어차 아래쪽 들보를 올리나니
초목은 소생하고 간류(澗流)는 흐르는구나
구중궁궐을 향해 영원키를 비나니
만수무강하시고 참된 복을 내리소서


이것이 18세의 효명세자가 쓴 글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효명세자는훗날 그의 아들 헌종에 의해 익종(宗)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고종은 5대조까지의 시호를 모두 조(祖)로 모셨다.
그 계보가 익종, 순조, 정조, 영조까지 이어져 영종, 정종이 영조, 정조가되었고 익종은 다시 문조(祖)라는 시호를 얻었다. 문조의 정식 명칭은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인데, 아마도 처음 두 글자와 마지막 다섯 글자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이름 속에는 효명세자의 공덕이 쭉 나열되어 있으며, 읽으려면 4 자씩 끊어 읽으면 된다. - P275

창덕궁 후원의 관람 동선은 이 두 길의 아름다움과 길을 걷는 즐거움까지 고려한 결과물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고 후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듯한 기분을 주면서 두 길을 모두 걸을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한것이 현재의 관람코스다.
먼저 부용정과 규장각을 본 다음 애련정과 의두합을 보고, 연경당 대신 관람정과 존덕정 영역부터 보고 나서 고개 너머 후원의 마지막 골짜기인 옥류천까지 다녀온 다음, 산길로 내려와 맨마지막에 연경당을 보고 돌계단 길을 통해 규장각 윗길을 거쳐 출구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후원 답사기를 쓰면서 의두합 다음에 연경당을 해설한 것은 효명세자의 이야기가 그렇게 연결되었기 때문이고, 이제 나는 다시 관람코스를 따라 존덕정 영역으로 향한다. - P292

본채의 창방 아래로는 빗살무늬와 꽃무늬교창이 번갈아 설치되어 궁궐의 정자다운 멋이 살아난다. 몸체의 툇간 모서리마다 가는 기둥을 3개씩 세워 마치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여느 정자와 다른 복잡한 구조에 기둥의 굵기 차이와 배열의 정연함이 엇갈리면서 예사로운 정자가 아님이 확연히 드러난다.
천장의 짜임 또한 육각-사각-육각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고 마름모꼴 반자로 둘러싸인 정가운데의 육각 평면에는 왕을 상징하는 청룡과황룡을 화려하게 그려넣어 이것이 임금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뒤에서 보면 존덕정은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는 반달 모양의 연못과 네모진 연못으로 나뉘어 있던 것이 어느 때인가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관람지로 흘러내리는 물길 위에는 화강암을 다듬어 둥글게 홍예를 튼 예쁜 다리 하나가 놓여 있고, 다리 이쪽과 저쪽에는몇 점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높은 것은 해시계를 받쳤던 일영대(日影臺)라고 하고, 낮은 팔각 석물에는 괴석이 얹혀 있다. - P298

이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때 세워진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이라는 뜻이고, 정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의미에서 자서라고 한 것이다.
재위 22년(179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 때 쓴 이 글은 - P298

제목만 보면 군주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 내용을 보면 자신이 만천명의 주인인 근거와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피력해 놓았다.
이 글은 대문장가이기도 했던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얼마나 잘 썼기에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정조가 통치 철학을세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엄청난장문이고 고전의 인용이 많아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지라 많은 것을 생략하고 정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의 요체만 압축해 옮겨본다.
그래도 긴 글이니 긴장하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다. - P299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달은 물론 하나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무리 지어 쫓아다니며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모양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른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바보같이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자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천 가지백 가지일 것이다. - P300

내가 처음에는 그들 모두를 내 마음으로 미루어도 보고 일부러 믿어도 보고, 또 그의 재능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일을 맡겨 단련도 시켜보고, 혹은 흥기시키고 혹은 진작시키고 규제하여 바르게도 하고, 굽은 자는 교정하여 바로잡고 곧게 하면서 그 숱한 과정에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 와서 다행히도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또 사 - P300

람은 각자 생김새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리하여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며, 규모가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고 재주보다는 뜻을 더 중히여겨 양쪽 끝을 잡고 거기에서 가운데를 택했다. - P301

트인 자를 대할 때는 규모가 크면서도 주밀한 방법을 이용하고 막한 자는 여유를 두고 너그럽게 대하며, 강한 자는 유하게 유한 자는 강하게 대하고, 바보 같은 자는 밝게 어리석은 자는 조리 있게 대하며,
소견이 좁은 자는 넓게 얕은 자는 깊게 대한다. 용감한 자에게는 방패와 도끼를 쓰고 겁이 많은 자에게는 창과 갑옷을 쓰며,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하는 것은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를 대하는방법이고, 희석하지 않은 순주(酒)를 마시게 하는 것은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며,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는 실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고 말재주를부리는 자는 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엄하고 드센 자는산과 못처럼 포용성 있게 제어하고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는 포근하게 감싸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내실을 기하도록 권하고 실속만 - P301

차리는 자는 달관하도록 면려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 - P302

사람이 만천(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나의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12월 3일이다.


과연 통치자로서 정조의 철학이 밝게 드러나는 천하의 명문이다. 정조는 이처럼 만 가지를 생각하고 만 가지 고민을 하면서 지냈다. 그것이나라를 통치하는 분의 마음이고 자세였다. 글을 읽다보면 인간의 심성을그처럼 섬세하게 읽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무섭다.
정조는 실제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도장에 새겨 여러 작품에 찍었다. 또 수십 명의 신하들에게 이 글을 써오게 하여 자신의 방에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신들이 점을 찍고 획을 그은 것을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기상을 상상할 수 있어 그 또한 만천명월 같았다고 했다. - P303

2004년 1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창덕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규장각을 둘러보고 존덕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규장각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겠네요. 요즘 내가 위원회를 많이 만든다고 언론에서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꼬는데, 정조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니까 규장각을 세웠지만 나는 5년 임기인데 위원회도 안 만들면 어디서 혁신적인 방책을 내놓겠습니까? 혁신에 대해 청장님은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04

참여정부의 모토는 혁신이었다. 개혁도 아니고 혁신이었다. 혁신도시도 그런 기조에서 만든 이름이었고, 인사과도 혁신인사과라고 바꿔 불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신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개혁을 하면 손해 보는 집단이생겨서 금방 반발에 부딪칩니다. 무를 갖고 동치미 담그는 것이 아니라깍두기를 씻어서 동치미를 담그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동치미도 안 되고 깍두기만 버리는 일이 생길까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동적인 관리에 능동적인 큐레이터십을 더하는 문화재 행정을 정책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혁신이죠. 문화재청장은 그런 식으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관리하면 되겠습니다. 다만 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정부 국정 철학의 기조에 대해서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 P304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앉아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만들기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해낼 네 가지 과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정경유착 근절입니다. 난 재벌들에게 돈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방분권입니다.
지방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셋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야당에 뭐든 양보할 생각입니다. 여기까지는 내 의지대로 하면 되는데 넷째가 어렵습니다. 권력기관 힘을 빼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됩니다."


이때 나는 평소 남들과 대화할 때처럼 의문스러운 부분을 즉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 P306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전화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솔직 담백한 분이셨다. 그뒤로도
‘언론개혁은 언론이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힘들고, 따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 특별 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면 검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깍두기를 씻어 동치미를 담그는 도중 임기가 - P306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이든다. 정조가 그러했듯이. - P307

길을 따라 내려오다 금호문 못미처에 다다르면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그루와 만나게 된다.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것을 심었다고 치면 수령이 700년 가까이 된다. 높이는 6미터,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4.3미터다.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이미 잘려나갔고 북쪽 가지는 죽었는데동쪽 가지만은 온갖 풍상 속에서도 용틀임을 하며 꿋꿋이 살아남아 주인 잃은 창덕궁을 홀로 지키고 있다. 이 향나무가 그 옛날의 창덕궁을 중언하는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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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출간 소식은 언제나 설레임이다. 서울편 답사기 3, 4권이 나왔다. 책을 받아놓고 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서울편 1권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서울을 모른다. 서울에 살아본 적도 없고 머물러본 적도 없다. 스치듯 잠깐씩 찾아간 곳도 횟수도 기억할만큼 정도이다. 수도권에 사십 년 넘게 살면서도 그 지경이다. 하여 내게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서울을 달리 보게되었다. 서울이 궁금하고 찾아가고 싶어졌다. 보고 싶다. 특히 종묘.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 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 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p5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 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서울은 누구나 다 잘 아는 곳이다. 굳이 내 답사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전문적·대중적 저서들이 넘칠 정도로 나와 있다. 그래도 내가 서울답사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서울을 쓰지 않고는 우리나라 문화유산답사기를 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古都)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위상이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생겨났다. 한편 서울은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는 도시이고 그만큼 모 - P4

격차가 많은 도시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역시 문화유산이다. 서울 시내엔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이 있다. 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서울 사람의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며 나아가서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즐기는 세계유산이다.
또 서울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다. 특히 내가 느끼는 인사동, 북촌, 서촌, 자문밖, 성북동은 지금 젊은이들이 보고즐기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많아 그 구구한 내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현대 생활문화사의 한 증언일 수 있다는 약간의 의무감 같은것도 있었다. - P5

강진과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지 햇수로 25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하자니 감회가 없지 않다. 내가 답사기를 처음 쓸 때는 시리즈의 완간이라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한 권, 두 권, 권수가 쌓여가고, 10년,
20년, 해를 더해가면서 국내편 8권에 일본편 4권이 나오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최종 형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았다거나 자료가 부족하여 쓰지 못할 곳은하나도 없다. 다만 그간의 내 인생이 ‘답사기‘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주어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점점 글 쓰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답사기의 마감도 의식하기 시작했다. - P7

그리고 나의 고참 독자들께 각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새 독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꿈이지만, 답사기가 나오기를기다리는 오랜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정년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답사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항시 옛 친구 같은 독자들과 함께 가고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답사기를 섬세하게 잘 읽으면 문체 자체에 그런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는 안 하든 나는 그런 마음으로 답사기를 썼다. 그 점에서 독자 여러분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2017년 8월
유홍준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 - P15

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일종의 신전이다. 세계 모든 민족은 제각기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신전을 갖고 있고 그 신전들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의 건축적 표현이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동양에서는 불교의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의교회당이 1천 년 이상 신전의 지위를 대신했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신전은 존재했다. 이집트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天壇, 톈탄),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이세진구) 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종묘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지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 P18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기에 관심을 갖고 그 공신들의 공적을 밝히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 P43

세상의 모든 신전에는 본전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회랑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가장자리에는 회랑 대신 담장이 정연히 둘러져 있다. 그런데 이 담은 특별한 치장도 없이 아주 낮게둘러 있어 조용히 정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 정전에서 내다보면 담의 지붕이 거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신당과 칠사당 또한 월대 아래 담장에 바짝 붙여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자기 표정을 갖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음으로 해서 정전 건물은 외롭지 않고 더욱 거룩해 보인다. - P47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전 앞의 넓은 월대가 아우른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뢰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 P48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총화를 이룰 이데올로기가 필요한데 중세사회에서 그것을 제공해준 것은 종교였다. 동서양의 모든 고대·중세 국가들은 고유의 종교가 있었음에도 샤먼의 전통에서 벗어나 발달된 종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결국 서양은 기독교, 동양은 불교를 국교로삼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근 1천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가 마침내 말폐현상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똑같은 현상이었다. - P49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취하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있다. 발달된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맑스가 러시아 사람이 아닌데도 레닌이 맑스주의를 소련의 이데올로기로삼은 것이 그 예이다. 훌륭한 선택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으며, 이입된 이데올로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소련은 맑스주의를 레닌식, 스탈린식으로 변하더니 종국에는 70년 만에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유교문화를 조선적으로 변용하고 세련하여 500년을 이어갔다. 한 왕조가 500여 년간 종묘와 사직을 지킨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 P51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중국의 종묘는 자금성 동쪽에 있는 태묘(太廟)로 현재 노동인민문화궁 안에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북경의 태묘에 대해 세계 어느 건축가가 찬미한 것을나는 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해도 차분한 교양을 갖춘 이라면 이태묘를 보고 감동할 리가 없다. - P52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P52

답사기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로부터 듣는 얘기는 대개 이렇다.
‘아, 거기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몰랐네‘ ‘옛날에 가본 적이 있기는한데 지금은 아무 기억이 없네‘ ‘네 책을 읽으니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마음이 생기는데 거기를 언제 가면 좋은가?‘ 아마도 종묘 답사기를 읽은독자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 - P53

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수묵 진경산수화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건축으로 이런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했던, 그 정전의 지붕과 월대가 온통 눈에 덮여 흰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줄지어 늘어선검붉은 기둥들이 자아내는 침묵의 행렬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사색의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무거운 고요함에 무언가 복받쳐오르는감정이 일어나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그런 날을기다려 여러 점의 사진을 남겼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 찍은 장면은 무게감이 있어 좋고, 얇게 덮여 있는 작품은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빛이 환상적이다. - P54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 P54

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왕과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吉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1464년(세조 10년) 1월 14일, 세조는 마침내 종묘제례에 친히 제향하면서 새로 다듬은 「정대업」과 「보태평을 연주했다. 실록의 이 기사에는 종묘제례의 전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종묘제례악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악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배치하는데 당상(堂上)의악사단을 등가(등歌), 당하(堂下)의 악사단을 헌가(軒架)라고 했다. 악기의 편성은 박·편종·편경·피리·장구·대금·해금·북·아쟁·태평소·축·어등 15가지이다. - P69

제례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정연하게 열을 지어 춘다고 해서 일무(舞)라고 한다. 일무는 가로세로 8명씩이면 64명이 추는 팔일무이고, 가로세로 6명씩이면 36명이 추는 육일무인데, 대한제국 이후에는 우리나라도 팔일무를 추었다. 성균관문묘제례에서도 팔일무를 추는데 그 춤은종묘제례와 비슷한듯 약간 다르다.
종묘제례에서 「보태평」의 춤은 문치를 기리는 문무(文舞)이고 정대업의 춤은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다. 문무에서는 왼손에 약),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에서는 앞의 네 줄은 검(劍), 뒤의 네 줄은창(槍)을 들고 춘다. 문묘에서 팔일무를 출 때는 문무는 같지만 무무에서는 왼손에 방패(干), 오른손에 도끼(戚)를 들고 춘다. - P70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신이 가고 제왕이 걷는 길이라면 폭이 넓고 곧게 뻗어 위풍당당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종묘의 신도는 폭도 좁고 바닥은 거칠며 중간에 꺾여 들어간다. 종묘의 신도는 정전의 건축과 일체를 이루는 디자인이며,
가무악으로 이루어진 제례의식의 경건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길례(吉禮)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 P91

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덴마크 여왕, 스웨덴 국왕,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방한했다. 이들은 모두 창덕궁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서울 시내에 이런고궁이 5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그 내력에 대해 묻곤 했다.
서울의 궁궐 중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진즉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때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 등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규정에 ‘영역의 확대‘라는 것이 있다. 아니면 개별 추가 등재로 서울의 5대 궁궐을 모두 등재하도록 노력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론 그냥 ‘궁궐의 도시‘보다는 ‘5대궁궐의 도시‘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서울의 5대 궁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고 이를 마음으로 동의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 P97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황제가 머무른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덕수궁까지 서울에 5대 궁궐이 자리잡게 된것이다.
5대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동물원이되었으며, 경희궁엔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의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 P100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 P101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 경복궁과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있다. - P102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 조원(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금천 좌우의 여덟 그루 회화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된 고목들이다. 궁궐 안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주례』에도 나와 있는 궁궐 조원의 법칙이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쓴다. 주나라 때 삼공(三公, 세 정승)이 괴목 아래에서나랏일을 논했다는 고사에서 회화나무 괴(愧) 자에 ‘삼공‘ 또는 ‘삼공의자리‘라는 뜻이 더해졌다. 이런 상징성 외에도 회화나무는 생기기도 늠름하게 잘생겼고, 낙엽의 색조가 갈색으로 차분하며 수명도 길어 궁궐의품위를 잘 지켜준다. - P113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 P126

(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 P124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아름다움은 궁의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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