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눈이 밝지 않은 분이라도 여기서 바라보면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멋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은 엄숙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희정당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왕세자의 공간인 성정각은 밝고 안온해 보인다. 전통 한옥의 모든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한옥의 멋은 역시 지붕선에 있다. 백회를 두른 용마루의 지붕선들이직선으로 겹겹이 뻗어나가고 팔작지붕의 삼각형 합각들이 가벼운 곡선을 그리며 정면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붕 너머로 대조전을 비롯한 안쪽 건물들의 지붕선이 드러나 은연중 궁궐의 깊이와 넓이를 암시하며 붉은 주칠의 벽채와 초록색 덧문이 어우러진다. 여염집에서는 볼수 없는 왕가의 품위가 잘도 느껴진다.
우리 한옥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은 창덕궁을 대표하는 장소로 가장 많이 소개되며사실상 내전의 파사드(façade, 정면관)로 인식되고 있다. - P136

태조가 경연청을 설치한 이래 역대 왕들은 반드시 경연에 참여해야 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경연에 참석했고, 성종은 재위25년 동안 매일 아침, 낮, 저녁으로 하루 세 번씩 경연에 참석했다고 한다. 물론 반대도 있다. 세조는 집현전 학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잠시 경연을 중단한 바 있고, 연산군은 공부하기 싫어서 이를 폐지하기도 했다.
경연의 기본 교재는 유교의 경전인 사서와 오경, 그리고 중국 역사책인 ‘자치통감』이었다. 보조 교재로는 주자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정리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당태종의 뛰어난 정치술이 기록된『정관정요(貞觀政要)』, 조선 역대 임금의 치적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사용했다. - P143

결국 경연은 매일 이루어지는 국정 세미나인 셈이었다. 대신들은 이를 통하여 왕권를 제어하기도 했고 왕이 대신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학문에 뛰어났던 영조와 정조는 경연을 탕평책 등 개혁정책을추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경연은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 점에서 경연은 조선왕조를 500년 이상 이끌어간 힘이었다. 업무에 시달리는 도승지를 보고 거지가 불쌍하다고 했다는 옛이야기가 있는데, 임금의 삶이야말로 개인 생활 없이 주어진 일정과 틀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피곤한 인생이었다. - P144

화계에는 앵두나무·진달래.철쭉·미선나무·목단 같은 키 작은 나무들과 금낭화·옥잠화·작약·국화·수·원추리. 무릇 같은 풀꽃이 꽃밭을 꾸민다. 곳곳에 기이한 형상의 괴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괴석은 일종의 추상조각인 셈인데, 구체적 형상을 갖지 않고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을 현대미술에서는 오브제라고 하는데옛사람들은 이처럼 오브제 개념을 이미 꽃밭에 구현했다.
화계는 우리나라 건축과 조원(造園)의 독특한 형식이자 큰 자랑이다.
산자락을 등지고 집을 앉히다보면 건물 뒤쪽은 자연히 비탈로 남는데,
여기에 꽃계단을 만들어 사태도 막고 꽃밭도 가꾼 슬기롭고도 자연스러운 정원 형식이다. 평지에 집을 지으면 일부러 만들기 전에는 화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의 조원엔 화계라는 개념이 없다.  - P174

경복궁은 평지에 세운 건축물인지라 화계를 만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경회루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으로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 뒤란에 가산(山)을 만들고 이곳에 아기자기한 아미산 화계를 만들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이 화계를 전통적이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도 받고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속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기록도 없고 사진도 없어서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담양 소쇄원 화계에는 매화가 심겨 있고, 낙선재 입구의 화계는 다복솔로 이루어져 있는 걸 보면 일정한규칙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창덕궁 관리소에서는 이런저런 예쁜 야생초들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꾼다. 마치 풀꽃과 꽃나무로 하는 대지미술 같아서 정말로 힘든 것이 꽃밭 설계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물론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화계라는 형식 자체가 워낙 강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언제라도 대조전 화계를 지나면 이 공간이 주는 상쾌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 P175

장락문 앞에서 보면 사랑채 누마루의 팔작지붕이 활개를 펴듯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평원(平遠樓) 육각정자가 높직이 솟아 낙선재 뒤뜰이 높고 깊음을 암시한다.
낙선재는 모양새로 보나 규모로 보나 문기(文氣)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할 만한 사랑스런 집이다. 앞마당이 널찍하고, 장대석을5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건물이 높이 올라앉아 있으며, 3단의 돌계단이대청을 향해 양쪽으로 나 있다. 또 그 사이에 노둣돌이 있기 때문에 궁궐의 사랑채다운 기품이 있다.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몸채 가운데2칸이 마루이고 동쪽엔 온돌방 2칸과 다락 1칸, 서쪽 1칸은 누마루로 나있다.
낙선재 건물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대단히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 P195

낙선재 동쪽에는 ‘보소당(寶蘇堂)‘이라는 아주 예쁜 현판이 있는데 이는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옹방강의 당호였지만 헌종이 이를 자신의 집에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글씨는 전형적인 추사체의 멋을 보여주는데 낙관이 없지만 나는 이것을 헌종의 글씨로 보고 있다.
헌종은 이처럼 추사 김정희를 사모하여 추사 주위의 문인들과 자주교류하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따르려고 했다. 사실상 헌종은 ‘추사 일파‘
의 한 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98

헌종은 교양이 넘치는 군주였다.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문예 활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승화루에서 책과 서화를 즐겼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헌종의 문예 취미는 그의 인장을 모은 ‘보소당인존장 컬렉션을 인출하여 인보(印)로 엮은 것인데 여기에 실린 인장의 숫자가 500과가 넘는다. - P198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
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세계 각국의 역대 왕들은 궁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별궁과 별장을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만약을 대비한 이궁(離宮),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은 있었어도 임금만을 위한 별장을 따로경영하지는 않았다. 이런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 P215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은 누구든 "세상에 이런 곳이라는 감탄을 절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이런 감탄사를 속으로 감추지만서양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을 안내해보면 한결같이 "Oh, My God!"이라소리치고는 사람마다 ‘Fantastic‘, ‘Incredible‘, ‘Unbelievable‘ 셋 중 한마디를 되뇌곤 한다. - P224

우리나라 정원에서 건물은 마치 자연이라는 거실에 배치된 가구 같아서 건물이 있음으로 해서 경관이 생기고 건물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부용지를 거실이라고 치면 연못은 폭넓은 화문석(花) 같고, 규장각주합루는 듬직한 반닫이와 기품 있는 의걸이장 같고, 부용정 정자는 화려한 화초장(花草 같고, 영화당은 단아한 서안(案) 같고, 비각은 곱상한 연상(床) 같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살로몽이 한국의 건축은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말한 것이다. - P230

정사를 맡게 된 효명세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극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인영 등을 중용해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했다. 추사김정희 부자와 권돈인 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이 세자를 굳건하게 보좌했다.
그러나 순조 30년(1830) 윤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피를 토했다. 약원에서 처방을 해도 효험이 없자 다산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 다산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결국 5월 6일 새벽,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세자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호인 환재에서 굳셀 환(桓) 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환) 자로 바꾸고20년 가까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효명세자의 요절은 왕조의 큰 불운이었다. 조선왕조의 운세는 그렇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 P273

나라의 다스림은 주나라의 융성과 비교될 만하고 책을 얻음은 한나라와 비길 만하니 나에게는 크고 넓은 집이 되리다. 듣자하니 글은 도리를 실은 그릇이라 했다. 중국 50국의 보배로운 책을 다 갖추었고, 조선왕조 21대(태조부터 정조까지의 전사(史)를 갖추었는데, 홍문관에비장된 것이 이미 오래이니 어찌 다섯 수레만 될 것이며, 규장각의 창건이 새로우니 마침내 경사자집(經史子集, 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부(四部)의 책이 다 모이게 되었다.
이에 「고공기」를 상고하여 서옥(屋)을 짓는데, 널따란 동쪽 누대와 서쪽 마루의 제도를 갖추고 서재에는 여덟 창을 활짝 열었다. 상림원(후원)의 풍광을 독차지했고 춘당대의 물색도 넘보는구나. 아름다운공사는 준공에 박차를 더하기에 긴 들보 올림에 즈음해 짧은 노래 아뢰노라. - P274

어기어차동쪽 들보를 올리나니
아침 알현 끝나자마자 책 읽는 소리
멀리 향기로운 안개 속에 나는구나
어기어차서쪽 들보를 올리나니
우리나라 문운이 열림을 알려거든
오성(五星)이 밝은 곳에서 규성(星)을 보려무나
어기어차 남쪽 들보를 올리나니
목멱산(남산)에 봄이 깊어 푸른 아지랑이 노을이 피어난다
어기어차 북쪽 들보를 올리나니
삼각산 날씨 차가운데 눈빛이 높다랗다
어기어차 위쪽 들보를 올리나니 - P274

해와달같이 밝으니 우주가 밝구나
어기어차 아래쪽 들보를 올리나니
초목은 소생하고 간류(澗流)는 흐르는구나
구중궁궐을 향해 영원키를 비나니
만수무강하시고 참된 복을 내리소서


이것이 18세의 효명세자가 쓴 글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효명세자는훗날 그의 아들 헌종에 의해 익종(宗)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고종은 5대조까지의 시호를 모두 조(祖)로 모셨다.
그 계보가 익종, 순조, 정조, 영조까지 이어져 영종, 정종이 영조, 정조가되었고 익종은 다시 문조(祖)라는 시호를 얻었다. 문조의 정식 명칭은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인데, 아마도 처음 두 글자와 마지막 다섯 글자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이름 속에는 효명세자의 공덕이 쭉 나열되어 있으며, 읽으려면 4 자씩 끊어 읽으면 된다. - P275

창덕궁 후원의 관람 동선은 이 두 길의 아름다움과 길을 걷는 즐거움까지 고려한 결과물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고 후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듯한 기분을 주면서 두 길을 모두 걸을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한것이 현재의 관람코스다.
먼저 부용정과 규장각을 본 다음 애련정과 의두합을 보고, 연경당 대신 관람정과 존덕정 영역부터 보고 나서 고개 너머 후원의 마지막 골짜기인 옥류천까지 다녀온 다음, 산길로 내려와 맨마지막에 연경당을 보고 돌계단 길을 통해 규장각 윗길을 거쳐 출구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후원 답사기를 쓰면서 의두합 다음에 연경당을 해설한 것은 효명세자의 이야기가 그렇게 연결되었기 때문이고, 이제 나는 다시 관람코스를 따라 존덕정 영역으로 향한다. - P292

본채의 창방 아래로는 빗살무늬와 꽃무늬교창이 번갈아 설치되어 궁궐의 정자다운 멋이 살아난다. 몸체의 툇간 모서리마다 가는 기둥을 3개씩 세워 마치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여느 정자와 다른 복잡한 구조에 기둥의 굵기 차이와 배열의 정연함이 엇갈리면서 예사로운 정자가 아님이 확연히 드러난다.
천장의 짜임 또한 육각-사각-육각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고 마름모꼴 반자로 둘러싸인 정가운데의 육각 평면에는 왕을 상징하는 청룡과황룡을 화려하게 그려넣어 이것이 임금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뒤에서 보면 존덕정은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는 반달 모양의 연못과 네모진 연못으로 나뉘어 있던 것이 어느 때인가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관람지로 흘러내리는 물길 위에는 화강암을 다듬어 둥글게 홍예를 튼 예쁜 다리 하나가 놓여 있고, 다리 이쪽과 저쪽에는몇 점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높은 것은 해시계를 받쳤던 일영대(日影臺)라고 하고, 낮은 팔각 석물에는 괴석이 얹혀 있다. - P298

이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때 세워진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이라는 뜻이고, 정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의미에서 자서라고 한 것이다.
재위 22년(179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 때 쓴 이 글은 - P298

제목만 보면 군주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 내용을 보면 자신이 만천명의 주인인 근거와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피력해 놓았다.
이 글은 대문장가이기도 했던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얼마나 잘 썼기에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정조가 통치 철학을세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엄청난장문이고 고전의 인용이 많아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지라 많은 것을 생략하고 정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의 요체만 압축해 옮겨본다.
그래도 긴 글이니 긴장하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다. - P299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달은 물론 하나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무리 지어 쫓아다니며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모양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른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바보같이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자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천 가지백 가지일 것이다. - P300

내가 처음에는 그들 모두를 내 마음으로 미루어도 보고 일부러 믿어도 보고, 또 그의 재능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일을 맡겨 단련도 시켜보고, 혹은 흥기시키고 혹은 진작시키고 규제하여 바르게도 하고, 굽은 자는 교정하여 바로잡고 곧게 하면서 그 숱한 과정에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 와서 다행히도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또 사 - P300

람은 각자 생김새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리하여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며, 규모가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고 재주보다는 뜻을 더 중히여겨 양쪽 끝을 잡고 거기에서 가운데를 택했다. - P301

트인 자를 대할 때는 규모가 크면서도 주밀한 방법을 이용하고 막한 자는 여유를 두고 너그럽게 대하며, 강한 자는 유하게 유한 자는 강하게 대하고, 바보 같은 자는 밝게 어리석은 자는 조리 있게 대하며,
소견이 좁은 자는 넓게 얕은 자는 깊게 대한다. 용감한 자에게는 방패와 도끼를 쓰고 겁이 많은 자에게는 창과 갑옷을 쓰며,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하는 것은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를 대하는방법이고, 희석하지 않은 순주(酒)를 마시게 하는 것은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며,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는 실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고 말재주를부리는 자는 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엄하고 드센 자는산과 못처럼 포용성 있게 제어하고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는 포근하게 감싸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내실을 기하도록 권하고 실속만 - P301

차리는 자는 달관하도록 면려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 - P302

사람이 만천(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나의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12월 3일이다.


과연 통치자로서 정조의 철학이 밝게 드러나는 천하의 명문이다. 정조는 이처럼 만 가지를 생각하고 만 가지 고민을 하면서 지냈다. 그것이나라를 통치하는 분의 마음이고 자세였다. 글을 읽다보면 인간의 심성을그처럼 섬세하게 읽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무섭다.
정조는 실제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도장에 새겨 여러 작품에 찍었다. 또 수십 명의 신하들에게 이 글을 써오게 하여 자신의 방에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신들이 점을 찍고 획을 그은 것을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기상을 상상할 수 있어 그 또한 만천명월 같았다고 했다. - P303

2004년 1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창덕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규장각을 둘러보고 존덕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규장각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겠네요. 요즘 내가 위원회를 많이 만든다고 언론에서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꼬는데, 정조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니까 규장각을 세웠지만 나는 5년 임기인데 위원회도 안 만들면 어디서 혁신적인 방책을 내놓겠습니까? 혁신에 대해 청장님은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04

참여정부의 모토는 혁신이었다. 개혁도 아니고 혁신이었다. 혁신도시도 그런 기조에서 만든 이름이었고, 인사과도 혁신인사과라고 바꿔 불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신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개혁을 하면 손해 보는 집단이생겨서 금방 반발에 부딪칩니다. 무를 갖고 동치미 담그는 것이 아니라깍두기를 씻어서 동치미를 담그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동치미도 안 되고 깍두기만 버리는 일이 생길까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동적인 관리에 능동적인 큐레이터십을 더하는 문화재 행정을 정책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혁신이죠. 문화재청장은 그런 식으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관리하면 되겠습니다. 다만 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정부 국정 철학의 기조에 대해서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 P304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앉아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만들기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해낼 네 가지 과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정경유착 근절입니다. 난 재벌들에게 돈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방분권입니다.
지방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셋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야당에 뭐든 양보할 생각입니다. 여기까지는 내 의지대로 하면 되는데 넷째가 어렵습니다. 권력기관 힘을 빼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됩니다."


이때 나는 평소 남들과 대화할 때처럼 의문스러운 부분을 즉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 P306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전화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솔직 담백한 분이셨다. 그뒤로도
‘언론개혁은 언론이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힘들고, 따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 특별 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면 검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깍두기를 씻어 동치미를 담그는 도중 임기가 - P306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이든다. 정조가 그러했듯이. - P307

길을 따라 내려오다 금호문 못미처에 다다르면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그루와 만나게 된다.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것을 심었다고 치면 수령이 700년 가까이 된다. 높이는 6미터,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4.3미터다.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이미 잘려나갔고 북쪽 가지는 죽었는데동쪽 가지만은 온갖 풍상 속에서도 용틀임을 하며 꿋꿋이 살아남아 주인 잃은 창덕궁을 홀로 지키고 있다. 이 향나무가 그 옛날의 창덕궁을 중언하는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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