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체험기

박완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남편이 통금시간이 지나고도 안 들어올때 보통 아내들은 어떤 걱정을 할까.
대개 교통사고 아니면 으슥한 골목길에 입을 벌리고 있을지도 모를 맨홀 걱정을 하리라. 나도 이 두 가지 걱정을 번갈아 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고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 통금에 걸리지 않은 게 분명해지니 더욱 앞의 두 가지 방정맞은 생각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러나 가게(남편은 전기용품상을 하는 장사꾼이다)를 열 즈음 해서 가게에다 전화를 걸었더니 점원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어제 안 들어가셨다고요? 그럼 큰일났는데요. 실은 어제 저녁 무렵 검찰청 수사과에서 나왔다는 형사하고 같이 나가셨거든요. 잠깐이면 된다고 하면서 데리고 가길래 아마 일보고 댁으로 바로 들어가셨거니하고 댁에 연락도 안 드렸는데." - P13

나는 다시 울먹이며 애원했다. 가족은 가족의 거처를 알 권리가 있는게 아니겠느냐고 따져보기도 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따져요. 따지길. 따질데가 따로 있지. 썩 비켜나지 못해요."
나는 초췌한 몰골로 처음부터 그에게 저자세로 나온 걸 후회했다. 몇호 검사실에 볼일이 있다든가, 당당한 얼굴과 당당한 용무를 가진 사람은 주민등록증만 보관시키고 수월하게 통과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수위는 젊고 토실토실한 귀여운 얼굴이었으나 눈빛만은 특이했다. 자기가 일단 죄인의 가족이라고 단정한 사람이면 단박 걸레쪽처럼 비참하게 주눅들게 할 수 있는 섬뜩한 무엇이 있었다.
나는 유월의 뙤약볕 아래 후끈후끈 악랄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검찰청 건물과 수위에게 잔뜩 주눅이 든 채 지독한 절망을 느꼈다.
그곳엔 맨 주눅들린 여편네들 천지였다. 피의자 대기실 주변의 맨땅에 뙤약볕을 무릅쓰고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는 초라한 여편네들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뙤약볕에 생기와 수분은 다 증발해버리고 마지막 남아 있는 사람의 가장 흉한 찌꺼기처럼 보였다. - P15

이런 여편네들이 어디서 피의자를 실은 버스가 온다든가 대기실에서굴비 두름처럼 묶은 피의자를 법정으로 끌고 간다든가, 아무튼 푸른 수의자락만 흘긋 비쳤다 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기발랄해지면서 민첩하게 그곳으로 엉겨들면서 힘차게 손짓도 하고 새된 소리로 악도 썼다.
그럴 때마다 교도관이나 사복 차림의 감시꾼들의 구박은 혹독했다. 반말지거리로 욕설을 퍼부으면서 짐승 몰듯이 내몰았고 여편네들 역시 - P15

억세고 줄기차게 이 구박에 맞섰다. 그럴 때 여편네들은 죽은 듯이 늘어져 있을 때와는 또다른 의미로 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사람의 얼굴에서 그렇게 완전히 수치심이 제거되고절망과 독기로만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여편네들이 피의자의 가족, 그러니까 아내나 어머니나 누이라고 알아차렸고, 푸른 수의를 보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혐오감을 느꼈고, 이어서 깜짝 놀라면서 나 역시 피의자의 아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떡하면 남편을 이 끔찍한 고장에서 빼낼 수가 있을까. 문득 섬광처럼 이럴 때 빽이라는게 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금 당장생각이 나지 않는다뿐이지 나에게는 빽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내 나이를 합하면 거의 백세, 사람이 백 년씩 살면서 사귄 연줄 중 그래 이럴 때 돌봐줄 유력한 빽줄 하나가 없대서야 그게 말이 될까. 꼭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뿐일 것이다.
나는 그 생각나지 않는 걸 빠르게 생각해내려고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조바심했다. 큰집, 작은집, 친정집, 사돈집, 외갓집, 이웃집, 동창생.....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한꺼번에 많이 나와 남편이 아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중에서 든든한 빽이 돼줄 만한 사람을 골라잡으려 했지만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생전 아무하고도 안 사귀고 산 것처럼 떠오르는 그럴 만한 얼굴이 없었다. - P16

"알아요. 알아. 누가 당장 교제비 달랬나. 본격적인 비용은 사건이 검사한테 넘어가고 나서 드는 거고, 에에또, 사건은 아직 우리 수사과에걸려 있으니까 서류는 내가 알아서 잘 꾸밀 테고, 우리 과장님 식사 대접할 정도의 비용이야 일간 어떻게 마련하실 수 있겠지?"
나는 그렇도록 해보겠노라고 했다. 그는 일어서면서 한마디 했다.
"김선생님 그 양반, 보아하니 법 없어도 살 양반이던데, 참 안됐단 말야."
그 소리가 나에겐 김기철이 그 머저리 우리 밥이더라 하는 소리처럼들렸다.
나는 내 남편이 권주임 같은 남자의 심문에 걸려들어 도저히 자기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법이라면 달라는 것 없이 두렵고 싫어서 자기 양심에 걸리는 일과 법에 걸리는 일을 동일시하며 조심조심 살아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법의 그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걸 피할 수 있는 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실제로 죄가 있고 없고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총이 결코 총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며, 칼이 결코 칼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듯이 법이 결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의편일 수는 없을 것 같은 깨달음이 왔다. 뭔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 - P27

았고 남편은 쉬이 풀려날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미칠 것 같았다. 억울하다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차니까 울음도 안 나왔다.
나는 남편의 초저녁 코 고는 소리와 새벽녘의 줄담배를 싫어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 때문에 짜증도 많이 내고 늘 침실을 따로 쓰기를 벼르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남편이 없고 보니 내가 그 코 고는 소리와 줄담배에 얼마나 깊이 길들여졌었나, 아니 그것들을 얼마나 좋아했었나를알 것 같았다. 그게 없는 곳에서 내 안면은 아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때 나는 작가랍시고 언론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문제로 제법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진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고보니 세상 하고많은 지붕 밑, 어느 지붕 밑에고 다 계집 서방이 만나 자식 낳고 사는게 사람 사는 기본형태라면 서방은 저녁에 계집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계집은 서방을 맞아 바가지 긁을 자유만 있으면 됐지 그 이상의 자유가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 P28

창구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길게 늘이고 줄을 서 있었고, 긴 폭이 얽히고 설켜 자기가 원하는 창구의 줄의 끝을 찾는 것만도 수월치 않았다.
면회 신청하는 줄, 신청서하고 번호표하고 바꾸는 줄, 번호 부르기를 기다리는 서너 시간 내지 네댓 시간, 번호 부르고 나서 구치소 정문 앞에서 또 줄서기, 주민등록증과 번호표를 교환하고 들어선 어딘지 모르게 딴 세상같이 서러운 구치소 안마당, 어둡고 음산한 대기실의 발돋움하고 올라서야 손이 닿는 높은 창구, 그 창구로 신청서를 디밀고 다시또 번호 부르기를 기다리는 기진맥진한 것도 같고 악에 받친 것도 같은 이삼십 분...... 이렇게 무려 대여섯 시간도 넘어 걸려서 면회실에 들어가니 철망이 든 두터운 유리 너머에 번호가 붙은 푸른 수의의 남편이있었다. 그런 옷은 형이 확정된 후에나 입히는 건 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앞을 분간 못하게 눈물이 났다.
울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이에 면회시간은 끝났다. - P29

옥바라지하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속도 수속이지만, 그런 수속절차를 거치면서 수없이 부딪쳐야 하는 해당 직원의 철저한 불친절과 경멸과 냉대였다. 그건 사람다운 오기가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이면 견디기 어려운 천시요 구박이었다.
그렇다고 K지청의 수위들처럼 돈을 받아가며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친절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쳐 있었다. 죄짓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 보잘것없는 족속들의 뒤치다꺼리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넌더리가 쌓이고 쌓이니까 대인관계에서 사람 개개인에 대한 이해나 보살핌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기계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 말 붙여볼 수 없는 기계 같은 냉혹성은 어떤 적극적인 구박보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았다가는 단박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손해를 보게 마련이었다. - P31

나도 매일매일 주눅이 들면서 고분고분 길들여졌다. 나는 그전까지도 누구에게나 겸손했다. 행상이나 거지에게까지도 상냥하고 공손하게대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결코 겸손이 아니라 나 역시 어떤 세도가나 권력자에게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내 나름의오만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매일 아침 면회 갈 때마다 서대문 못 미쳐 광화문서부터 내 오기를 달래야 했다. 오기를 달랠 때처럼 내가 얼마나 오기가 센 여잔가를 느낄 적도 없었다. 내 온몸에 가시처럼 돋은 오기를 부드러운 털이되게 무마시키고 나서도 모자라 아예 구더기처럼 땅을 길 각오를 했다.
면회하기 위해 내가 통과해야 하는 절차와 사람을 가시철망으로 생각하면 됐다. 가시철망치고는 땅에 낮게 드리운 가시철망이라고, 그 가시철망을 상처 입지 않고 통과하는 길은 오로지 구더기처럼 그 밑을 기는 길밖에 없다고, - P31

내가 이런 파렴치한 억울함까지를 포함한 모든 억울함을 진짜처럼 느낀 나머지 내 억울함을 가짜처럼 느꼈음은 그들이 모두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여직껏 알고 지낸 누구보다도 가난했다. 마치 억울함만을 숙명처럼 보장받고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구치소와 친해지기 전에 내 상식으로 구치소엔 살인범을 비롯한 흉악범은 물론이거니와 신문을 떠들썩하게 하는 억대의 밀수범, 억대의 도박범, 억대의 탈세범, 수회 한 고급 공무원들이 갇혀 있어야 했고, 면회 온 사람도돈을 물 쓰듯 하는 그들의 가족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와비슷한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어느 날, 누군가가 친절한 미소로써 나에게 접근해왔다.
"사모님 같은 분이 이렇게 오래 기다리는 면회를 하신대서야 말이 됩니까? 오죽한 사람들이 이 짓을 합니까? 돈푼이나 있는 사람은 다 특별 면회라는 걸 이용하니 사모님도 제가 그걸 알선해드리죠. 이거면 되니까요, 이거요."
그는 다섯 손가락을 짝 펴 보였다. 그후 나는 구치소 정문 앞 주차장에 즐비한 승용차가 이런 특별 면회자 중의 또 특수층의 차라는 것도알게 됐다 - P34

강변호사는 내가 설명하는 사건 내용을 시종 비웃는 듯한, 지루한 듯한 미소로써 들었다. 다 듣고 난 그는 사건에 대한 일언반구의 반문도없이 엉뚱스럽게도 작가의 남편이 장사꾼이란 것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나타냈다. 아마 친구가 내가 작가라는 소리까지 해놓은 모양이다.
"거참 이상한데요. 암만해도 이상해요. 작가의 남편이 상인, 이래도이상하고, 상인의 부인이 작가, 이래도 이상하고......"
사건을 검토할 척은 안 하고, 당사자들이 이십 년 넘어를 조금도 이상해하지 않으면서 산 것을 제가 뭐라고 혼자서 이상해하기에 여념이없는가.
나는 남의 삶에 대한 그의 이런 속기스러운 호기심과 안이한 이해방법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친구의 소개도 있고 해서 그가 호기심을 제풀에 가라앉힐 때까지 참았다.
그는 저절로 직업적인 자신만만한 태도를 회복하더니 간단히 말했다.
"불기소로 해드리면 되죠?"
"네?" - P36

한편 옥바라지하면서 귀에 박이도록 들은 말, 큰집에 들어가 있는 사람 쉬이 나오고 더디 나오는 건 뒤에서 손쓰기에 달렸다는 말이 내의식에 따끔따끔 걸렸다. 나는 남편을 위해 손쓰는 일을 너무 안 하고 있었다. 돈 없는 사람들이 밑져야 본전 식으로 누구나 한 번씩은 해본다는 검사실에 가서 애원하는 일조차 나는 못했던 것이다. 그 밖에 손쓴다는 일은 다 불법적인 수회의 방법이었고, 그때는 마침 폭력범 단속과함께 공무원 부조리 단속이 한창이었다. 나는 모든 불법에 그저 겁밖에 나는 게 없었다.
결국 남편을 위해 합법적으로 손을 쓰는 길은 변호사한테 의뢰하는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변호사에게 삼십만원을 주고 사건을 맡겼다.
그러나 남편은 기소됐다. 기소된 걸 나한테 재미난 듯이 알려준 건권주임이었고, 정작 강변호사는 의뢰인이 기소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려주자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전화로 알아보더니,
"거 어떻게 그렇게 됐나. 그럼 그까짓 거 보석으로 꺼내드리지."
또 한번 힘 안들이고 큰소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위임을 취소했다.
결국 남편은 재판받았다. 쌀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밥을 훔쳐먹은 도둑놈, 주인의 옷가지를 훔쳐낸 식모, 사고 낸 운전사, 버스칸에서 싸우다가 이를 부러뜨린 폭력범, 수금한 돈을 가로챈 점원 등, 삼십여 명의조무래기 잡범들과 함께 무더기로 재판을 받았다. - P37

그러나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네" 하고 대답할밖에 없는, 사건의 표피를 건드리는 데 불과한 판사의 신문이 한 사람 앞에 두 번 내지세 번씩이나 돌아갔을까. 그런데도 워낙 피의자가 많고 보니 서너 시간은 후딱 지나갔고 곧 검사의 구형이 있었다.
나는 변호사를 취소한 걸 은근히 뉘우치고 있었는데 재판을 보면서백번 잘한 일이다 싶었다. 왜냐하면 삼십여 명 중 단 한 사람도 변호사가 딸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남편에게만 변호사가 딸렸더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법정에서까지 그 고약한 억울함을 맛보았을 게 아닌가.
십오일 후의 언도 공판에서 남편은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다시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게 됐고,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니 차츰 시들해지면서 나는 다시 바가지를긁게 됐다. - P38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생활의 평온이 돌아오니 다시 그전처럼 자유의 문제를 생각하는 밤까지도 돌아왔다. 어느 날이고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 좋아져서 우리 앞에 자유의 성찬이 차려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전 같으면 아마 가장 화려하고 볼품 있는 자유의 순서로 탐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 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억울한 느낌은 고통스럽고 고약한 깐으론 거기 동반한 비명이 너무없다. 그게 워낙 허약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일 게다.
자기나 자기 가족에 대한 편애나 근시안에서 우러나는 엄살로서의 억울함에는 그래도 소리가 있지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명처 - P38

럼 보장된 진짜 억울함에는 더군다나 소리가 없다. 다만 안으로 안으로삼킨 비명과 탄식이 고운 피부에 검버섯이 되어 피어나기도 하고, 독한한숨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마지막엔 원한이 되어 공기 중에 떠 있을지도 모른다.
각종 공해가스가 충만한 공기 중에 그까짓 무해무익한 원한쯤 떠 있기로서니 어떨까도 싶지만, 글쎄 원한이 인체에 정말 무해무익할까. 화학적 공해처럼 그것도 일정량이 넘으면 공해의 구실을 할지 누가 아나.
육신을 해치는 공해가 아니라 심정을 해치는 공해로서 말이다.
내 친구의 동생이 이런 병을 앓은 일이 있다. 일류 대학 나와 일류기업체에 취직해서 승진도 순조로운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데 초기엔 세상 살맛 없는 우울증에서 시작해서 괴상한 증세를 나타냈다. 그가 딛고선 땅이 무수한 맨홀 구멍을 숨기고 있다가 그가 발만 내디디면 그 음흉한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삼켜버릴 것 같은 황당한 환상이 그것이었다. 이런 증세가 점점 심하게 되자 직장까지 그만두고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의사는 전지요양을 권했다. 공기 좋은 데를 아무리 찾아다녀도 별 차도가 없자 마지막으로 형이 있는 미국으로까지 전지요양을 갔다. 미국에 닿자마자 그 병은 감쪽같이 완쾌되어 지금은 아주 유능한 청소부 노릇을 하면서 행복하게 지낸다고 한다.
그 청년도 혹시 그런 공해병 환자가 아니었을까. 잠 안오는 밤, 문득그런 생각을 해본다. - P39

「조그만 체험기」는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1975년 자영업자였던 남편 호영진이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옥바라지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쓴 작품이다. 이듬해에 ‘개인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검찰측의 입장만 밝혀서 문제가 되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작품 발표 이후에 모종의 말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튼 삼십여 년에 걸쳐 백여 편의작품을 발표한 박완서의 작품 가운데서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그가 등단하여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무렵에 씌어졌고, 경험한 것들의 기억을 미세한 곳까지 찾아내어 재현하는 작가의 창작 특성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어느 평론가의 지적처럼 "행복의 질서가 지금 이곳에서 끝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되풀이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비판적 현실 파악의 단단함이 엿보"인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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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삶일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를따돌릴 것이다. 그것을 붙잡는 또 다른 방법은 살아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꿈들은 나를 무의식의 늪에 빠뜨리는 현실보다 더 완전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뭘까? 사는 것? 아니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아는 것? 몹시도순수한 말들, 작은 크리스털 방울들. 나는 촉촉이 반짝이는 형상이 내 안에서 뒹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어디 있을까? 내게 영감을 달라.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으니, 나는 본질을 기다리는 틀을 갖고 있으니, 그런데 겨우 그게 내 전부라고?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몸과 영혼을 유익케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몸과 영혼으로 나누어 써야 할까? 아니면 자기 내면의 힘을 저 바깥의 힘으로 치환해야할까?  - P107

나는 계속해서 조용히 숨을 쉬었고, 내 몸은 공중에 따스하고 반투명한 웅웅거림으로 남은 마지막 소리 속에서 여전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은 너무 완벽해서, 나는 두렵지 않았고 무언가에 감사하지도 않았으며, 신이라는 관념에 이끌리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죽고 싶다고, 내 안에서 해방된, 고통 이상의 무언가가 외쳤다. 이 다음에 이어질 순간은 더 낮고 공허할 터였다.
나는 위로 오르고 싶었으니, 오직 하나의 끝과도 같은 죽음만이 내리막 없는 절정을 안겨 줄 터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연약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출구로 걸어갔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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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혼자였다. 그는 주목받지 못했으며, 행복했고, 삶의 야성적 핵심 가까이에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He was alone. He was unheeded, happy, and near to the wild heart of life."
-James Joyce-

편집자 주

위에서 언급된 문장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등장한다. 리스펙토르의 데뷔작 제목은 이 문장의 ‘near to the wild heart‘라는 구문을 그대로 옮긴것이다. 이 제목은 리스펙토르의 친구이자 작가인 루시우 카르도주가 제안한 것이었는데, 그때까지 조이스를 읽어 본 적이 없었던 리스펙토르는 작품의 맥락보다는 나열된 단어들이 주는 인상에 매료되어 이 제목을 받아들였다.
리스펙토르가 데뷔작에 담은 메시지 중 하나는 언어를 넘어선 심상의 세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어들의 관습에 도전하고, 낯설게 하고, 거기서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를 탄생시키곤 한다. 본 작품의한국어판 제목 역시 그러한 특성을 반영했다. 즉, 주로 ‘야성의 중심(핵심) 가까이‘
정도로 번역되는 한국어 번역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wild heart‘를 ‘야생의 심장‘이라는 이미지로 변형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탁탁...... 탁탁탁...... 이어졌다. 시계가 먼지 없는 뎅그랑 소리로 깨어났다. 정적이 잠잠잠잠잠잠 이어졌다. 옷장은 뭐라고 말했지? 옷- 옷- 옷. 아니, 아니야. 시계와 타자기와 정적사이에는 귀가 하나 있다. 듣는, 커다란, 분홍빛, 죽은귀. 세 가지 소리는 햇빛과 반짝이는 작은 나뭇잎들의바스락거림으로 이어져 갔다.
그녀는 반짝이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이웃집 마당을, 저- 죽을- 줄- 모르는- 암탉들의 커다란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단히 다져진 따스한 흙, 그 흙의 몹시도 향기롭고 건조한 냄새를 마치 바로 코밑에 있는 것처럼 맡을 수 있었고, 지렁이 한두 마리가사람들이 잡아먹을 암탉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기지개 - P12

를 켜는 걸, 저절로, 그냥 알아차렸다.
커다랗게 텅빈 고요의 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기다렸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공백. 그러더니 갑자기 그날의 태엽이 감기면서 모든 것이 위잉 되살아나, 타자기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고, 아버지의 담배가 연기를 피우고, 정적이, 작은 나뭇잎들이, 알몸의 닭들이, 빛이, 물건들이 끓는 주전자처럼 다급하게 활기를 띠었다. 빠진 건 너무도 예쁜 시계의 뎅그렁거림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 시계 소리와 존재하지않는 리드미컬한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가장하고는 발끝으로 섰다. 날아가듯 가볍고 빠른 춤 스텝을 세 번 밟았다. - P13

그녀는 이미 인형 옷을 입히고, 벗기고, 인형이 파티에가서 다른 모든 딸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상상을 했었다. 아를레치는 파란 차에 치어 죽었다. 그 다음엘 요정이 나타나 그녀를 도로 살려 냈다. 딸과 요정과파란 차는 주아나 자신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 놀이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어면 등장인물이 집중 조명을 받는 순간에 그 역할을 자기 자신에게 맡기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냈다. 그녀는침묵 속에서 양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진지하게 임했다. 아를레치 역할을 하기 위해 아를레치 가까이로 갈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멀리서도 사물을 소유했다.
그녀는 판지 쪼가리들을 갖고 놀았다. 그녀는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았고, 판지 쪼가리 하나하나가 학생이었다. 주아나는 선생님이었다. 어떤 학생은 착하고 어떤 학생은 나빴다. 그래, 그래, 그래서 뭐? 이제 이제 이제 뭐? 그리고 그녀가 …… 기다릴 때면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P15

악은 나의 소명이라는 확신, 주아나는 생각했다.
억눌린 힘. 눈을 질끈 감은 채, 야수 같은 무모한자신감을 통해, 폭력으로 터져 나올 준비를 마친 그 억눌린 힘을 모조리 발산하고 싶은 갈망을 달리 어떻게설명할 수 있을까? 오직 악 안에서만 공기와 허파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 없이 숨을 쉴 수 있지 않았던가? 내겐 기쁨 그 자체도 악만큼 큰 기쁨을 주진못했어, 그녀는 놀라며 생각했다. 그녀는 모순들과 이기심과 활기로 넘실대는, 자기 안의 완전한 짐승을 느꼈다. - P21

자책하지 마. 이기심의 근본을 탐구해 봐: 내가 아닌 것은 내 흥미를 끌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넘어선 존재가 될 수는 없다ㅡ그럼에도 나는 정신이 혼미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초월하며, 따라서 나는 거의 늘 나 자신을 넘어서 있다ㅡ. 내겐 몸이 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시작으로부터 이어진 것들이다. 마야 문명이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그건 내 안에 그 얕은 돋을새김 조각들과 관련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태어난 원인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내가 나도 모르게 아주 중요한 것을 짓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가장 위대한 겸허함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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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향

이호철


하룻밤 신세를 진 화찻간은 이튿날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 더러는 하룻저녁에도 몇 번씩 이 화차 저 화차 자리를 옮겨 잡아야 했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그런대로 흐뭇했다. 나이 어린 나와 하원이가 가운데, 두찬이와 광석이가 양 가장자리에 눕곤 했다.
이상한 기척이 나서 밤중에 눈을 떠보면, 우리가 누운 화찻간은 또화통에 매달려 달리곤 하였다.
"야야, 깨깨, 빨릿......"
자다가 말고 뛰어내려야 했다. 광석이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 화차가는 쪽으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뛰곤 했다. 내리고 보면 초량 제4부두 앞이기도 했고 부산진역 앞이기도 했다. 이 화차 저 화차 기웃거리며 또다른 빈 화차를 찾아들어야 했다.
"아하, 이 노릇이라구야 이건 견디겐."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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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손창섭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끝으로 잔굽을 핥았다.  - P249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원구의등에다 대고, 중요한 옷가지랑은 꾸려가지고 간 모양이니 자살할 의사는 없었음이 분명하고, 한편 병신이긴 하지만 얼굴이 고만큼 반반하고서야 어디가 몸을 판들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주인 사나이는 지껄이는 것이었다. 얼굴이 고만큼 반뱐하고서야 어디 가 몸을 판들 굶어죽기야 하겠느냐는 말에 이상하게 원구는 정신이 펄쩍 들어,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고 대들 듯한 격분을 마음속 한구석에 의식하면서도 천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 듯한 육체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어 그는 말없이 발길을 돌이키었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하고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을 느끼며 원구는 호박넝쿨 우거진 밭두둑길을 앓고 난 사람모양 허전거리는 다리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 P265

오발탄

이범선


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는 여섯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접어치운 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곗바늘을 밀어올리다시피 다섯시를 기다려 휘딱 나가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 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 P275

운전수가 힐끔 조수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봐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철호는 점점 더 졸려왔다. 다리가 저린 것처럼 머리의 감각이 차츰없어져갔다.
"가자!"
철호는 또 한번 귓가에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로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에 교통신호대에 빨간불이 켜졌다. 차가섰다. 또 한번 조수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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