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손창섭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가는 목조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끝으로 잔굽을 핥았다.  - P249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원구의등에다 대고, 중요한 옷가지랑은 꾸려가지고 간 모양이니 자살할 의사는 없었음이 분명하고, 한편 병신이긴 하지만 얼굴이 고만큼 반반하고서야 어디가 몸을 판들 굶어죽기야 하겠느냐고 주인 사나이는 지껄이는 것이었다. 얼굴이 고만큼 반뱐하고서야 어디 가 몸을 판들 굶어죽기야 하겠느냐는 말에 이상하게 원구는 정신이 펄쩍 들어,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고 대들 듯한 격분을 마음속 한구석에 의식하면서도 천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 듯한 육체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어 그는 말없이 발길을 돌이키었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하고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을 느끼며 원구는 호박넝쿨 우거진 밭두둑길을 앓고 난 사람모양 허전거리는 다리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 P265

오발탄

이범선


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는 여섯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접어치운 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곗바늘을 밀어올리다시피 다섯시를 기다려 휘딱 나가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 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 P275

운전수가 힐끔 조수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봐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철호는 점점 더 졸려왔다. 다리가 저린 것처럼 머리의 감각이 차츰없어져갔다.
"가자!"
철호는 또 한번 귓가에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로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에 교통신호대에 빨간불이 켜졌다. 차가섰다. 또 한번 조수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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