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18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순분이가 다니던 야학은 일요일엔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탔다. 네시쯤이나 되었을까, 버스가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멈추어 섰다. 시위 군중들이 모여들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내리는 바람에 순분이도 따라 내렸다.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이미 부근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찼다. 금남로와 소방서 쪽에서 군중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순분은 군중들과 섞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쓰라린 눈을 가까스로 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나중에 그들이 공수특전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 P17

공수특전단들은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내질렀다. 그들과 맞닿아 있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손을 뻗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누군가가순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골목길로 내달리다가 앞사람을 좇아건물 속으로 숨어들었다. 서너 명이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창밖으로군용 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트럭이 멈추어 서자 이미 포승으로묶은 사람들을 차에다 던져 올렸다. 올라온 즉시 옷을 찢어대더니 등뒤를 개머리판으로 계속 난타했다. 어떤 공수특전단원은 대검으로 청년의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어서 트럭 위에 던졌다. 노인 하나가 끌려가는 청년을 뒤따르며 손을 저었다. 공수특전단은 한 손에 청년의 발을 잡은 채로 대검으로 노인을 내리쳤다. 노인은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다. 시뻘건 칼날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트럭 안은 던져진 시체들로 가득 들어찼다. 트럭이 움직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17

동시에 총소리가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내었다. 주위는 다시캄캄해졌다. 동지들과 더불어 김두칠은 방아쇠를 당겼다.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일시에퍼부어왔다. 김두칠은 달려오는 수많은 군홧발을 보았다.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 하나가 날아와 김두칠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은폐물 뒤로 나동그라졌다. 동지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군홧발은 마치대지를 뒤흔드는 것같이 은폐물 위를 넘어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김두칠은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써보았다. 가까스로 손 한쪽을 은폐물 위에 올려놓았다. 온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총을 은폐물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군홧발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러 발의 총탄이 천지를 흔들었다. 김두칠은 은폐물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총은 가슴께에 품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이 먼 곳을 응시하였다. 두 눈은군홧발을 넘어, 탱크와 장갑차를 넘어, 쭉 뻗은 시가지를 넘어 먼 곳 고향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입속에서 나오는 마지막 부르짖음이 총성과 군홧발 소리에 묻혀버렸다. - P61

당시 여덟 살 외동아들이 걸려 마지막 순간 도청에 남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그때 만난 노동자들의 그 선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죽음을 넘나드는 절박한 순간에 꽃피던 동지애∙∙∙∙∙∙ 홍희윤에게 그것은 평생을 안고 살아갈 자산이 됐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역사의식에 눈을 떴다.
이후 홍희윤은 두 차례나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협박을 당했다. 1980년 5월항쟁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 때 송백회의 자금책으로 몰려경찰에 시달렸다. 결국 그해 송백회는 겉으로 해체를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여성노동자들과 구속자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황석영의 평양 방문을 간첩사건으로 조작하려던 안기부에서 닦달했다.
홍희윤은 인터뷰를 지독히 싫어한다. ‘나는 한 일이 없어. 그냥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야.‘ 수줍게 손사래를 칠 뿐이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한 소녀 같은 열정과,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어느 5월 그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글이 바로 1988년 ‘작가 홍희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깃발」이다.
"「깃발」의 주인공은 5월 도청에서 살아 숨쉬었던 모든 노동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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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게임
오정희


꼭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것 같잖아.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처음에는 젖은 행주로, 다음에는 마른 행주로 꼼꼼히 문지르며 나는 새삼마루와 부엌을 훤히 튼, 소위 입식 구조라는 것을 원망하는 시늉으로등을 보이는 불안을 무마하려 애썼다. 그래도 가스레인지 주변의, 점점이 뿌려진 몇 점의 얼룩은 여전히 희미한 자국으로 남았다. 아마 지난겨울 아버지가 약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흘린 자국일 것이다. 승검초의뿌리와 비단개구리, 검은콩과 두꺼비 기름을 넣고 불 위에 얹어 갈색의거품이 끓어오를 즈음 꿀을 넣고 천천히 휘저어 검은 묵처럼 만든 그것을 겨우내 장복하며 아버지는, 피가 맑아지고 변비가 없어진단다라고말했었다. 내의 바람으로 군용 항고에 콜타르처럼 꺼떻게 엉기는 액체를 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있는 아버지는 영락없이 중세의 연금술사였다. - P321

병원에서 호송차가 왔을 때 어머니는 식탁 아래로 기어들었다. 아가 난 싫어, 무서워, 날 데려가지 못하게 해줘. 호송인들에게 반짝 들리워나가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왜웃어. 왜 웃어. 심한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모르는 소리야.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니. 넌 아직 어렸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어. 갓난애도 그렇게 없애지 않았니? 넌 마치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모두내 탓이라는 투로구나. 잘 보살펴드릴 수도 있었어요. 외려 네 엄마에겐 그곳이 편한 곳이야. 친구들도 있고 가족이란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너부터도 내심 네 엄마를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된다는걸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니? 그전에 번번이 네 혼담이 깨지던것도 어미 탓이라고 원망했을걸.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화투장 뒷면에 가로질린 금을 손톱으로 긁어 지우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었다. - P335

오빠는 어딜 가 있을까요.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버지는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이 생기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어.
아버지는 둘이서 하는 화투놀이가 셋이서 하는 것보다 재미가 덜하다는 것 때문에 오빠의 부재를 노여워하는 걸까. 더러운 게임이야.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을 떨치고 일어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의 한끝을놓아버렸을 때 삼각 구도는 깨지고 아버지와 나는 균형을 잃은 힘의 반동으로 형편없이 비틀거렸다.
나도 오빠처럼 훌쩍 나가버릴 수가 있을까. 침몰하는 선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결사적으로 탈출하듯 그렇게 달아나버릴 수 있을까. 나는매조를 먹을까 칠띠를 깨뜨릴까에 긴장되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좁고 긴 얼굴, 매처럼 구부러진 코끝은 볼의 살이 빠짐에 따라 더욱 길게 늘어져 보였다. 아가, 날 데려가다오. 여긴무섭고 쓸쓸하단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화투는 아버지의 손에서 내 손으로 옮겨갔다. - P337

1966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책으로만 만나던 김동리, 서정주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편의 소설을 써보았지만 작가의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스무 살의 환상, 스무 살의절망에 사로잡혀 발밑을 보고 다녔다. 이학년 가을학기부터 그녀는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진로를 결정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절에 가서 중이 되든가 고아원에서 밥 짓는 보모가 되든가 아니면 땅장사를 해서 돈을 벌든가, 하여튼 무엇이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쓰고 던져버린 초고를 찾아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그녀를작가로 만들어준 「완구점 여인」이었다. 오정희는 그때부터 사실상의 습작기가 시작되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한 해에 두어 편씩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소설을 쓰겠다는 말뿐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잡지사에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생활에 어렵게 어렵게 적응해가던 1974년에는 한 해 동안 한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글을 못 쓰는 괴로움, 열등감도 컸지만 글을 쓰 - P348

는 두려움, 빈 원고지의 공포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오정희에 대하여 「넉넉함과 깐깐함」이라는 기록을 남긴 소설가 윤후명의 글에도 나오지만, 쓰는 두려움과 자신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추스름과 안간힘으로 쓴 것이 「목련초였고, 그저 내게는 쓸 수 있었다는 것만이 중요해요‘라고 말할 정도로 결혼은 이 여성작가에게 창작적 위기의 시초였다. 윤후명의 말에 의하면 작품이 머릿속에 들었을 때 오정희는 재처럼 말이 없고 눈에는 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잠재우고 한밤중에 그녀는 공책을 펴놓고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연금술사처럼 한 획씩 또박또박 썼다. - P349

‘가부장적 질서‘는 한국 중산층의 가족사를 결정짓는 이데올로기다. 전쟁과 근대화의 변동을 겪어나가면서 여성들은 남자들과는 달리 무서운 괴물로 변한 일상에 의하여 서서히 상처받고 무너져갔다. 그것은 종종 남자들에게는 억척스레 새끼들과 더불어 살아간 ‘어머니라는 여성영웅‘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다. 느닷없는 낯선 사내와의 정사 장면과스스로 창녀처럼 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나‘의 고독한 저항에소름이 돋으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끝 장면에서 아기를 재우는 이층여자의 발소리가 이어지고 모성은 조난당한 배의 마스트에서 구조 요청을 하는 헝겊 쪼가리가 되어버린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연필심을 날카롭게 깎아 들고 이 소설을 쓰던 그 무렵의 오정희를 문득 떠올려본다. ‘가부장제의 감옥‘으로부터 꾀어내려는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를 그녀는 무수히 귓전으로 들어왔으리라.
아, 참으로 좋은 작가를 알게 되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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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고 장터가 있는 진보읍은 그의 문학적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구에서 대구농림고를다니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1959년 농대에 진학하라는 의붓아버지의 분부를 뿌리치고 도망하다시피 상경했다. 고교 시절에 동시를 써서 지방지에 투고를 하여 지면에 실리기도 했으니 은근히 문학에 뜻을두었던 터였다. 서라벌예대의 장학생 모집에 응시하여 입학했으나, 김동리와 박목월로부터 시보다는 산문을 써보는 게 어떠냐는 ‘삼엄한 권유‘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군에 입대했다. 1962년 군에서 제대하고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취직했다. 김주영은이십대부터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십육 년간을 엽연초조합의 주사 경리직으로 근무한다. - P284

키 크다고 난쟁이 흠한 적없고, 대하소설 썼다고 잡문장이를 손가락질해본 적도 없으니, 있어도없는 것 같고 없어도 있는 것 같던 그 무던한 처신은, 이것이 곧 비록 복은 더디 와도 재앙이 저절로 물러갈사람이 된 그의 근본이다"라고 기록한 문장이 족집게가 되었다. 그렇기는 하여도 그가 예전 소설가 이병주의 충고를 회상하기를 "절대 도덕적인 것에 얽매여선안돼. 생활도 그래야 돼"라고 했다는 말에는 나도 적극 지지 찬성이다. 예술가가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무던한 처신‘은 어쩐지 아쉬운 면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예술가의 삶이란 부딪치고넘어지고 깨져서 상처가 아물 날이 없거나, 억제된 가운데서도 참을 수없이 터져나오는 애증의 미친 구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 P289

이 작품은 시종 거침없는 욕설과 음담으로 이어지는데도 등장인물모두가 어쩐지 ‘순둥이‘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하층민의 악착같은 밑바닥 고생에는 어딘가 벗어난 것 같은 순진함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작의 둑방동네에 대한 실감이나, 조세희의 추상화되었지만 빈민의 도시생활을 꿰뚫는 난장이 연작에서 우리가 느꼈던 강렬한현실은 김주영의 고물수집소에 이르면 어딘가 시골 장터의 아직 순박하고 어수룩한 ‘것‘들을 데려다놓은 듯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이 사용하는 은어도 다르고 도회지에서의 먹이사슬의 관계도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의 그것과는 달리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면서 재미있다. 그것은 작가의 입심과 천부적인 낙관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무난함‘이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글을 쓰게 해주었던 미덕이 아니었을지. - P290

당시에는 과작이라고 했어도 작가가 일생을 바친 어느 즈음에는 저절로 쌓여서 적지 않은 책들이 남게 된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서영은은 십여 권의 산문집을 제쳐놓고라도 중단편전집 다섯 권에 장편소설 여덟 권을 써놓았다. 나는 어쩐지 서영은의 글도 그렇고 그의 삶도수도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돈되고 성실하고 반듯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가원로 작가 김동리와 결혼을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 될지 우리 몇몇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연보에 짤막하게 한 줄도못 되게 나와 있는 결혼, 병구완, 사망, 이사 등등의 단어 밑에는 그야말로 드러내놓고 표현 못할 인고의 시간이 감추어져 있다. 칠십이 다되어 한반도를 걸어서 종주한 것과 같은 사십여 일의 ‘스페인 산티아고길 위에서 그녀는 신과 더불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새로이 갈무리했을 것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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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며, 복가시나무, 가시나무, 쥐똥나무, 황철나무 등 잡목이울창한 까치산 후미진 계곡 속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아버지의 울부짖음만이 산울림처럼 쩌렁쩌렁 울려왔다.
월곡리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노인들까지도 마을 앞 돈들막 위에 모여 서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까치산 계곡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심장에 송곳질하는 아픔을 참으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보다도 아버지의 죽음을 말릴 생각은 않고 무표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이들 마을 사람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미루나무에 묶인 채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의 힘을 쥐어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서울에서 돌아온 부면장네 도련님과 아버지가 부면장 집으로 오기 전 오랫동안 머슴을 살았던 대추나무집 최 주사어른과 통샘거리 박생원 어른도 불러보고, 땅뺏기 놀이며 자치기, 발들고 밀어내기 놀이 등에 가끔 나를 끼워주곤 했던 월곡리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 P231

그러나 내 울부짖음은 까치산 잡목숲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산울림이 되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외로움과 고통을 주었을 뿐이었다.
아버지를 끌고 간 청년들은 얼마 뒤에 찬란한 가을 햇살을 등지고 개선장군처럼 까치산에서 내려왔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돈들막으로 가서, 부면장 어른 부자와 이장 어른을 죽인 빨갱이의 앞잡이를 처치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물레방앗간 옆 째보네 주막으로 몰려가 술을 퍼마셨다.
아무도 미루나무에 묶여 있는 나를 끌러주지 않았다.
나는 미루나무에 묶인 채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연리초꽃처럼 빨강보랏빛으로 변하는 까치산만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디쯤 죽어 있을까. 먼 시선으로 잡목숲을 헤집고 있는 것이었다. - P252

산골의 짧은 가을 해가 미끄러지듯 할미산 너머로 떨어지고, 월곡리사람들의 마음처럼 음산한 어둠이, 대지에서부터 까치산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꾸역꾸역 디밀고 올라가서야, 남편도 없이 곰배팔이‘ 아들과함께 사는 째보네 주막아줌마가 미루나무에 묶인 나를 풀어주었다.
그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 아버지를 찾으러 까치산에 갈 수가 없었다.
언젠가 꼴을 베러 가서 낫을 부러뜨리고 돌아와 부면장네 할아버지한테, 눈에서 마른 번갯불이 튀도록 호되게 꾸중을 듣고 쫓겨났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어슬렁어슬렁 돌아왔을 때처럼. 나는 온몸의 물기가•좍 빠져 휘주근한 몰골로 아버지도 없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부면장 집에서는 나를 안으로 들여넣어주지 않았다. 은혜를 모르는 개만도•못한 살인자의 아들을 거두기 싫다면서 밖으로 내쫓고 대문을 걸어버렸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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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그 만남이 인상적이었다. 이문구와 내가 어느 술 취한 밤에 손님이 다 가버린 목로술집에 앉아 ‘글쟁이란 천업이다‘ 또는 ‘이담에 다 때려치우고 풍 맞아 손 떨릴 무렵에 송기원이나 이시영이나 아랫것들이 찾아오면 시치미 떼고, 이들 여직도 문학 같은 거 허구 댕기냐?" 해주고 싶다던 농담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스스로 ‘글동네와 거리두기‘를 오랜 기간 선택했던 때가 있어서 이러한 내면을 좀 아는 척하고싶다. ‘문학‘은 목숨 바쳐서 할 건 아니다. 글이란 언제나 때려치울 수있고 다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그리움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내색 않고 참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생업을 바꾸고 모른 척하는 일 또한 보통 내공으로는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형편이 괜찮다면 그냥 은거하여 가만히 앉아 책 읽고, 음악 듣고, 징징대거나 시달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늙어가는 것 또한 복 받은 팔자다. - P188

그는 언제나 ‘열외‘에 서서 어떤 작가도 다가서지 않았던 ‘독특한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표현은 창녀, 때밀이.
펌프, 개백정, 호스티스, 도둑, 알코올중독자 등의 등장인물들도 그랬지만 작가가 어떠한 윤리적 선택이나 제시라든가 판단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이야깃거리를 툭 내던지고 말 뿐이라는 데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최서해의 소설이 극단적이고 비참한 삶의 장면들을 헤집어 보여주는 것과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조선작의 소설들은 같은 장면인데도 지나치게 비참하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묘한 활기와 낙천적 분위기로 흘러간다. 어떤 평자는 ‘소재주의의 위험‘
과 ‘줄거리 위주의 서술‘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를 ‘풍자‘와
‘체험의 우화적 처리‘로 보았다. 이를테면 버스 차장을 하다가 한길에떨어져 차에 치여 외팔이가 되고 창녀로 전락한 ‘영자‘의 이야기도 작가의 체험에서 변형된 이야기였다. 그 무렵에 김승옥이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영자의 전성시대」를 영화화한다고 조선작과 어울려 다닐 적에 조선작이 내게 실토한 적이 있다. ‘영자‘의 실제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 P189

조선작의 단편소설 「성벽」은 1973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당시 서울 변두리에 번성했던 판자촌과 일대의 부랑자들을 그리고있는데,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더럽고 추잡한 일상이 무슨 놀이라도 벌여놓은 것처럼 활기차고 시끌벅적하다. 여기서 지문과 대화에 걸핏하면 나오는 은어나 패담의 사용은 이른바 ‘자기 계급‘만의 언어로써 서로의 동질감과 다른 자들과의 구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상소리와 패담은 세상에서 쫓겨났거나 소외된 징표로서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 저들만의 독립된 보금자리임을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보통시민들에게는 일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하는 불행의 순간을 연거푸 당할 적에도 상소리 한마디 날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을 부린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하층민을 그리는 문체가 기묘한 활기와 낙천적분위기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밤마다 - P190

술타령으로 늘어졌고, 가출해버린 누나를 찾아다니다 쩔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나‘가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신나게 악을 쓰며 ‘둑방동네아이들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노래‘를 불러댄다.

청계천 다리 밑에, 따라라라 라라라라
개떡 같은 집을 짓고, 따라라라 라라라라
귀신 같은 마누라와ㅡ
쥐약 먹고 죽고 싶네요ㅡ - P191

나는 개도둑인 아버지와 공장에 다니는 누나와 둑방동네에 산다. 누나는 개도둑질과 술로 나날을 보내는 아버지를 못 견뎌 가출하고 아버지는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어버린다. ‘나‘는 탱보네 자전거포에서 일해주며 아버지를 수발하다가, 누나가 사창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 개서방은 개를 잡아다 불에 그슬리곤 하던 둑방위의 모래밭까지 기어가 죽는다. 아침까지 아버지 시체는 거기 그대로 버려져 있었는데 동네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공사가 시작된다. 내일이면 청량리에서 제천 가는 고속전철이 달리게 되는데 그 개통식에 ‘아주 높은 사람‘이 타고 둑방동네의 건널목을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더럽고 추잡하며 헐벗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동네가 그런 어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며 어디선가 인부들이 까맣게몰려들어 삽시간에 건널목을 중심으로 양편에 높다란 합판 담장을 친다. 공사중에 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되지만 인부들은 재수 옴 붙었다며세 번씩 침을 뱉고 모래를 깊이 파고 그 속에 묻어버린다. 저녁 무렵이되자 건널목에서 바라보이는 동네는 완전히 가려지고, 그들로서는 이 - P191

제까지 가져본 적이 없는 그네들끼리의 정다운 울타리를 얻은 셈이 되었다.
인부들은 밤까지 그 높은 성벽에 줄을 맞춰 전등불을 밝히고 합판 위에 페인트를 칠한다. 구린내를 풍기며 언제나 도도하게 괴어 있던 냇물에 썩은 널빤지와 녹슨 함석이나 찢어진 루핑 따위로 연이어진 판잣집의 그림자가 아니라, 줄지은 전등불이 밝히고 있는, 아름다운 색깔로말끔히 도장된 아스라한 성벽이 영롱하게 떠 있다.

다시 읽어도 앞뒤 짜임새가 꼭 맞아떨어지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파리 잡아먹고 시치미를 뚝 떼는 두꺼비처럼 노련한 조선작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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