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는 주기적으로 반드시 다시 써야는하는 특이한 장르이다. 이른바 ‘명작(名作)‘들에 대한 상대적인 성취도와 평가가 시대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이 지니는 고유한자율성과 역동성, 문학이 쉬임없는 생성과 극복의 대상이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朴景利선생의 土地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민족의 대서사시(大敍事)다. 장강(長江)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대(大) 서사시는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시름을 달래주고 풀어준다. ‘한국문학사‘가「土地」의 탄생과 더불어 한 획이 그어졌음을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원우 作家 - P-1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뿌러진 한 마리의 송학(松鶴)이 초라한 것은당연한 일이거니 용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門)을 물리면은 현인신(現人神)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뿌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총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론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 P59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통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이렇게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홀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옴쭉달싹을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드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 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 P68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겠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학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요?"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시끄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라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 P78
것, 그건 아무도 못쓴다. 바보 시눔,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계절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먹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 P79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요, 나으리 용서해주시요,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몸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驛舍)며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 P107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내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 - P107
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九割)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피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그들, 그들인 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나, 홍!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니다. 분명 운명이아닌 쪽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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