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는 주기적으로 반드시 다시 써야는하는 특이한 장르이다. 이른바 ‘명작(名作)‘들에 대한 상대적인 성취도와 평가가 시대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이 지니는 고유한자율성과 역동성, 문학이 쉬임없는 생성과 극복의 대상이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朴景利선생의 土地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민족의 대서사시(大敍事)다.
장강(長江)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대(大) 서사시는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시름을 달래주고 풀어준다. ‘한국문학사‘가「土地」의 탄생과 더불어 한 획이 그어졌음을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원우 作家 - P-1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뿌러진 한 마리의 송학(松鶴)이 초라한 것은당연한 일이거니 용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門)을 물리면은 현인신(現人神)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뿌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총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론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 P59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통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이렇게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홀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옴쭉달싹을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드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 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 P68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겠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학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요?"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시끄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라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 P78

것, 그건 아무도 못쓴다. 바보 시눔,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계절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먹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 P79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요, 나으리 용서해주시요,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몸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驛舍)며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 P107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내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 - P107

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九割)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피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그들, 그들인 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나, 홍!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니다. 분명 운명이아닌 쪽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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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형 만나기 전에 나를 따라가는 거다. 구경하러 가자는 것만은아니야 뭐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하자는대로"
"그렇지만."
길상은 한복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짜믄 저렇게도 눈이 깊으까‘
한복의 가슴에 서늘한 것이 와닿는 것만 같다. 범치 못할 위엄과 덮쳐씌우는 것 같은 압력, 평범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 한복의주변을 몇 겹씩이나 감아올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당장에라도 자기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려서 올라온 잉어같이 파닥거릴 것만같다.
"그곳에 가면 너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다. 너의 형을 네 마음속에서지우기 위해서도 거복이를 만나기 전에," - P296

길상은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었다.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손등에 대고 톡톡 치다가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길상은 많이 변했다. 평사리 마을에서 보고 처음 만나는 한복에게는 한 번의 변화겠으나 길상의 변화는 두 번이다. 얼마간 냉소적이며 비꼬였고 자기 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던 용정서의 전반기에 비하면, 그런 모순과 갈등과 열등감은말끔히 헐리어지고 없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때로는 나약했던 면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힘이었다.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힘, 한복은 바로 그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것이다. 화살같이 돌아가고 싶어한 마음의 위축을 느낀 것이다. 힘이라고 집어내진 못하였지만 깊은 눈이라 했는데 그 눈의 깊이는사색에서 오는 깊이는 아니었다. 의지로써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한후에 오는 깊이, 의지의 깊이, 그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포용할 수 - P296

있는 넓이였다. 평범한 대화에 격렬하지 않은 어조는 격렬한 감성, 추상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온 그 두 가지의 융화, 현실과의 융화였던 것 같았다. 기름기 없이 바삭바삭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 지나가는 미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형님은 가족들 보고 싶은 생각 안 합니까?"
한복은 길상을 쳐다보다가 뇌듯 물었다.
"보고 싶지.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나 참을 만하다.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 같으믄,"
"너 같으면 돌아가겠나?"
"하기는 내일 일을 누가 아냐. 안 돌아간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 허허헛....." - P297

"어릴 적부터, 예, 어,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두수가 그렇다는 것을 물건 생각하듯 해야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의외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 형제니까 어렵겠지만 나하고너하고는 다르다. 그렇게 갈라놓고 보아 이번 여행은 너에게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길상은 밝게 웃었다. 웃음은 화려했다. 햇빛 아래 보는 그의 얼굴이 만주 벌판의 바람과 눈과 끝없이 오가는 행로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키가 껑충하니 커 보였다. 머잖아 등이 좀 굳어질지도 모른다. 한복은 새삼스럽게 그러한 길상의 모습에 다정한 것을 느꼈다. - P299

"최참판댁 사위라서?"
"안 그렇십니까?"
"어떻게 된 사위냐."
"......"
"가난한 것도 답답하고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 너는 그 두 가지에서 다 답답한 사람이다."
"예. 두 가지가 다아, 답답할 정도가 아니지요."
"우선은 내 나라가 남의 치하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많은 것을 착취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는다. 내 것 주고 빌어먹는 격이지."
"나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개돼지보다 못했었소."
"그 말 할 줄 알았다."
"누굴 탓하는 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탓을 보고 원망하겠십니까. 사람 대접 못 받는다고 해서 나는 아우성도 칠 수 없었습니다. 통곡도 못해보았십니다. 할 수 없었지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이니께. 형님, 나는 이대로가 좋십니다. 문둥이는 문둥이니까요. 문둥인 줄 알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기지요. 형님도 용정인가 거기서 비슷한 말씀 하지 않았소? 거복이형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나보고 가겠소."
"형님."
"내가 두만강을 넘을 때 무신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의 심부름은 살인자인 아버지와 매국노인 형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을했지요." - P303

"한복이 이놈아!"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사내자식이... 누가 너더러 일하라 했냐! 하면 좋겠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데. 그러나 아무도 너 목덜밀 잡고 끌어내지는 않아. 마음이 가야 발이 가고...... 크게는 독립이다. 크게는 말이야.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독립은 아닌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두 사나이는 결투라도 벌이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목에서 소용돌이칠 뿐, 해돋는 시각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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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숭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다. - P-1

시인의 말


지금 이 지구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중백 년 후에 지구에서 하차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인정사정없는 죽음을 생의 앞뒤에 두고,
죽음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짜거나,
죽음의 돌림노래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죽음이 우리 앞뒤에 공평하게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평등하다.
그러기에 죽음은 가장 사나운 선(善)이며 은총이며, 영원이다.
나는 이 시들을 쓰며 매일 죽고 죽었다.
하지만 다시 하루하루 일어나게 만든 것도이미지와 리듬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역설.
시는 죽음에의 선험적 기록이니 그러했으리라.

당신이 내일 내게 온다고 하면, 오늘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리.

2025년 6월
김혜순 - P-1

시인의 말
(2016)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없지 않겠는가.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 아팠다. 죽음이 정면에,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 림보에 사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가 갔다. 뙤약볕 아래 지구의 여름살이 곤충들처럼 고통스러웠다.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전철에서어지러워하다가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라나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가련한 여자. 고독한여자, 그 경험 다음에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
시간 속에 흐느끼는 리듬들을 옮겨 적었다. 죽음 다음의 시간엔 그누구도 이름이 없었다.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하게 외워지는 것처럼, 구구단을 외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이 시를 쓰고난 다음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연구년 동안에 이 시들 중 대부분을 적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죽어버린 옛 여자들처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먼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시안의 죽음으로 이곳의 죽음이 타격되기를 바랐다. 이제 죽음을 적었으니, 다시 죽음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집(49편의 시)을 한 편의 시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 P-1

출근
하루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P-1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첫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저 오가는 검은 머리털들이 꽉 껴안은 것, 단 한 벌,

저 여자의 몸에서 공룡이 한 마리 나오려 한다.
저 여자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이제 출구는 없다.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 P-1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너는 이제 저 여자를 향한 노스탤지어 따위는 없어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너는 저 여자의 생시의 눈빛을 희번득 한 번 해보다가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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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일상에 관하여 말을 주고받은 뒤 공노인에 대한 안부 한마디 없이, 용이는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었다.
종이를 접어서 저고리 안에 기워붙인 호주머니 속에 넣은 한복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떤다. 막바지에 접어든 긴장이었다.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생각하면 줄곧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외갓집이 있는 함안에서 평사리를 오가고 한 일은 있었지만 그 밖의 곳에 나가본 일이 없는 한복이가멀고 먼 만주까지 간다는 일이 불안하였고 행여 왜헌병에게 잡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상상하기조차 힘든거금을 몸에 지녔다는 그 자체가 한복으로선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을 때 한복은 불안과 공포와는 사뭇 다른 감정,
무엇인가 심장을 조이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은 슬픔을 느꼈다. 한복의 개인적인 감정도 물론 복잡하였으나 뚜렷이 그것은망국민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었다. 이때 비로소 한복이는 자신의결단을 잘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파렴치한 동기로 살인한 아비와 매국노가 된 형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 이 길이요, 지하에 잠든 어머니의 멍든 자긍심을 치유하는 방법도 이 길이라 생각하였다. 한복은 푸르고 거센 강물에 맹세하진 않았으나 푸르고 거센 물결에 맹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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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시간은 기다렸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고문이다. 사랑방의 공간은 최서희의 무시무시한 힘의 팽창이었고, 시간은 사멸되어가는 화석의 기나긴 길이었다. 조준구는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땀은 계속하여 흘렀다. 입속은 가뭄날의 점토(粘土)처럼 바싹바싹말라서 굳어진다. 그러나 차 한잔 내오질 않는다.
"마님께서 오십니다."
조준구는 눈을 뜨며 여자를 노려본다. 서희가 들어왔다. 방바닥을 쓸며 지나가는 치맛자락, 보료에 가서 앉는다. 조준구는 팔에서힘을 빼며 서희를 쳐다본다. 서희도 조준구를 쳐다본다. 물건을 바라보듯 쳐다본다. 중년 여자는 서희 곁에서 좀 물러난 자리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조준구는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이렇게 대하니 면목없네." - P140

"네, 네놈은 누구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조준구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거 석이가심부름꾼으로 집에 들어왔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검은 의혹으로 마음을 새까맣게 했던 것이다.
"나 말이오?"
반문하는데 석이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눈밑의 근육이 중풍든 사람같이 떨린다. 물지게꾼 시절의 역경을 견디던 우직스런 얼굴이 아니다.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고학(苦學)하던 서울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시골 풋내기의 치졸함으로 하여 오히려 제자신의 정체를 조준구에게 간파당하지 않았었던, 설익은 그 모든 것, 기화에 대한 엷은 연정, 생소하기만 했던 지식, 언어와 풍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증오와 위장(僞裝)이 사투를 벌이던 풋되고 처절했던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과묵하며 탄탄했던 그의 천성만을 남겨둔 채 냉정하고 조리 있게, 하여 나이에 비하면 노숙했던 진주에서의 몇 해, 그 얼굴도 간곳이 없다. 짚세기를 벗어들고 맨발로 뛰던 소년이다. 아부지이! 아부지이! 외치며 오랏줄에 묶이어 피 흘리면서 가던 사내를 따라 뛰던 소년의 얼굴이다. 소년의 눈은 비수가 되어 조준구 심장에 깊이 몰려드는 것만 같다.
"너, 너, 너는 누구냐!"
가위 눌린 것처럼 조준구는 되풀이 묻는다. - P148

여한(餘恨)과 미진(未盡), 울분을 풀 길 없는 밤이었다. 관수나 석이에게도 그랬었지만 서희라고 후련한 밤이었을까? 여한은 마찬가지, 이제 서희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조준구가 걸어오지 않는 이상 보복은 끝난 셈이다. 간도 땅에서 이를 갈며 맹세한 보복은 사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하고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을 것을. 관수나 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살찐암탉 같았던 젊은 날의 조준구, 여전히 살찐 암탉이지만 늙은 닭이되어버린 조준구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끝날 원한이 이렇게 싱겁게끝난 것이며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관수와 석이는 나란히밤길을 걸어간다. 행랑에서 이들은 저녁을 얻어먹고 어두워진 뒤최참판댁을 나섰던 것이다. 연학이가 실소해가면서 소상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준구의 비천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또 한순간의 여유만 있어도 수전노에게는 거의 없는 가련한 허영의 자락을 걸치는 그 거동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밤바람을 마시며묵묵히 걸어가는 두 사내, 이들이 끝난 보복이라 생각한 것은 십분보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서희의 경우는 제쳐놓고 정확히 말해서 이들은 보복을 포기한 것이다. 어느 하늘 밑에서 살아 무엇을하건 잊어버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P163

잠시 한눈을 팔았던 석이 마음에 화살이 꽂히듯, 그 말은 관수의 말이자 자신의 마음이었다. 한눈 팔았던 마음이 관수에게로 따뜻하게 쏠린다. 동지적 우애와 다 같은 설움이 굳게 맺어진다. 어둠을 향하여, 얼마나 길지 모르는 어둠을 향하여 함께 가리라는 생각이 등불처럼 발밑을 비춰주는 것만 같다.
‘슬프고, 이 밤이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하고많은 일이 있고 어리석은 놈 등쳐서 깝데기 벳기묵을 재간도 있는데 와 하필이믄 이 짓을 하고 있제? 하는 생각이들 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석아, 우리같이 설운 놈들이 마음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매나 좋노. 굽히도 굽히는 기이아니요 기어도 기는 기이 아니라, 안 그렇나? 나는 내가 오늘 당했이니께 울적해서 말이 많다 생각할지 모르겄다마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술을 마시도 좋고 일만 잘되믄 못할 짓이 머 있겠노. 도리어 보람이 있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저기 저 하늘에 별이 깜박깜박한께 내 가심도 깜박깜박하는 것 걷고, 내 새끼 내 계집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 가슴도 그러리라 생각하믄은, 그렇지 내가 하는 일도 과히 헛된 일은 아닐 기라."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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