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숭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다. - P-1

시인의 말


지금 이 지구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중백 년 후에 지구에서 하차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인정사정없는 죽음을 생의 앞뒤에 두고,
죽음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짜거나,
죽음의 돌림노래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죽음이 우리 앞뒤에 공평하게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평등하다.
그러기에 죽음은 가장 사나운 선(善)이며 은총이며, 영원이다.
나는 이 시들을 쓰며 매일 죽고 죽었다.
하지만 다시 하루하루 일어나게 만든 것도이미지와 리듬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역설.
시는 죽음에의 선험적 기록이니 그러했으리라.

당신이 내일 내게 온다고 하면, 오늘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리.

2025년 6월
김혜순 - P-1

시인의 말
(2016)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없지 않겠는가.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 아팠다. 죽음이 정면에,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 림보에 사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가 갔다. 뙤약볕 아래 지구의 여름살이 곤충들처럼 고통스러웠다.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전철에서어지러워하다가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라나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가련한 여자. 고독한여자, 그 경험 다음에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
시간 속에 흐느끼는 리듬들을 옮겨 적었다. 죽음 다음의 시간엔 그누구도 이름이 없었다.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하게 외워지는 것처럼, 구구단을 외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이 시를 쓰고난 다음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연구년 동안에 이 시들 중 대부분을 적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죽어버린 옛 여자들처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먼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시안의 죽음으로 이곳의 죽음이 타격되기를 바랐다. 이제 죽음을 적었으니, 다시 죽음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집(49편의 시)을 한 편의 시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 P-1

출근
하루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P-1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첫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저 오가는 검은 머리털들이 꽉 껴안은 것, 단 한 벌,

저 여자의 몸에서 공룡이 한 마리 나오려 한다.
저 여자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이제 출구는 없다.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 P-1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너는 이제 저 여자를 향한 노스탤지어 따위는 없어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너는 저 여자의 생시의 눈빛을 희번득 한 번 해보다가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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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디 일상에 관하여 말을 주고받은 뒤 공노인에 대한 안부 한마디 없이, 용이는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었다.
종이를 접어서 저고리 안에 기워붙인 호주머니 속에 넣은 한복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떤다. 막바지에 접어든 긴장이었다.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생각하면 줄곧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외갓집이 있는 함안에서 평사리를 오가고 한 일은 있었지만 그 밖의 곳에 나가본 일이 없는 한복이가멀고 먼 만주까지 간다는 일이 불안하였고 행여 왜헌병에게 잡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상상하기조차 힘든거금을 몸에 지녔다는 그 자체가 한복으로선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을 때 한복은 불안과 공포와는 사뭇 다른 감정,
무엇인가 심장을 조이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은 슬픔을 느꼈다. 한복의 개인적인 감정도 물론 복잡하였으나 뚜렷이 그것은망국민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었다. 이때 비로소 한복이는 자신의결단을 잘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파렴치한 동기로 살인한 아비와 매국노가 된 형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 이 길이요, 지하에 잠든 어머니의 멍든 자긍심을 치유하는 방법도 이 길이라 생각하였다. 한복은 푸르고 거센 강물에 맹세하진 않았으나 푸르고 거센 물결에 맹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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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시간은 기다렸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고문이다. 사랑방의 공간은 최서희의 무시무시한 힘의 팽창이었고, 시간은 사멸되어가는 화석의 기나긴 길이었다. 조준구는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땀은 계속하여 흘렀다. 입속은 가뭄날의 점토(粘土)처럼 바싹바싹말라서 굳어진다. 그러나 차 한잔 내오질 않는다.
"마님께서 오십니다."
조준구는 눈을 뜨며 여자를 노려본다. 서희가 들어왔다. 방바닥을 쓸며 지나가는 치맛자락, 보료에 가서 앉는다. 조준구는 팔에서힘을 빼며 서희를 쳐다본다. 서희도 조준구를 쳐다본다. 물건을 바라보듯 쳐다본다. 중년 여자는 서희 곁에서 좀 물러난 자리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조준구는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이렇게 대하니 면목없네." - P140

"네, 네놈은 누구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조준구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거 석이가심부름꾼으로 집에 들어왔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검은 의혹으로 마음을 새까맣게 했던 것이다.
"나 말이오?"
반문하는데 석이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눈밑의 근육이 중풍든 사람같이 떨린다. 물지게꾼 시절의 역경을 견디던 우직스런 얼굴이 아니다.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고학(苦學)하던 서울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시골 풋내기의 치졸함으로 하여 오히려 제자신의 정체를 조준구에게 간파당하지 않았었던, 설익은 그 모든 것, 기화에 대한 엷은 연정, 생소하기만 했던 지식, 언어와 풍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증오와 위장(僞裝)이 사투를 벌이던 풋되고 처절했던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과묵하며 탄탄했던 그의 천성만을 남겨둔 채 냉정하고 조리 있게, 하여 나이에 비하면 노숙했던 진주에서의 몇 해, 그 얼굴도 간곳이 없다. 짚세기를 벗어들고 맨발로 뛰던 소년이다. 아부지이! 아부지이! 외치며 오랏줄에 묶이어 피 흘리면서 가던 사내를 따라 뛰던 소년의 얼굴이다. 소년의 눈은 비수가 되어 조준구 심장에 깊이 몰려드는 것만 같다.
"너, 너, 너는 누구냐!"
가위 눌린 것처럼 조준구는 되풀이 묻는다. - P148

여한(餘恨)과 미진(未盡), 울분을 풀 길 없는 밤이었다. 관수나 석이에게도 그랬었지만 서희라고 후련한 밤이었을까? 여한은 마찬가지, 이제 서희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조준구가 걸어오지 않는 이상 보복은 끝난 셈이다. 간도 땅에서 이를 갈며 맹세한 보복은 사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하고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을 것을. 관수나 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살찐암탉 같았던 젊은 날의 조준구, 여전히 살찐 암탉이지만 늙은 닭이되어버린 조준구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끝날 원한이 이렇게 싱겁게끝난 것이며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관수와 석이는 나란히밤길을 걸어간다. 행랑에서 이들은 저녁을 얻어먹고 어두워진 뒤최참판댁을 나섰던 것이다. 연학이가 실소해가면서 소상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준구의 비천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또 한순간의 여유만 있어도 수전노에게는 거의 없는 가련한 허영의 자락을 걸치는 그 거동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밤바람을 마시며묵묵히 걸어가는 두 사내, 이들이 끝난 보복이라 생각한 것은 십분보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서희의 경우는 제쳐놓고 정확히 말해서 이들은 보복을 포기한 것이다. 어느 하늘 밑에서 살아 무엇을하건 잊어버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P163

잠시 한눈을 팔았던 석이 마음에 화살이 꽂히듯, 그 말은 관수의 말이자 자신의 마음이었다. 한눈 팔았던 마음이 관수에게로 따뜻하게 쏠린다. 동지적 우애와 다 같은 설움이 굳게 맺어진다. 어둠을 향하여, 얼마나 길지 모르는 어둠을 향하여 함께 가리라는 생각이 등불처럼 발밑을 비춰주는 것만 같다.
‘슬프고, 이 밤이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하고많은 일이 있고 어리석은 놈 등쳐서 깝데기 벳기묵을 재간도 있는데 와 하필이믄 이 짓을 하고 있제? 하는 생각이들 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석아, 우리같이 설운 놈들이 마음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매나 좋노. 굽히도 굽히는 기이아니요 기어도 기는 기이 아니라, 안 그렇나? 나는 내가 오늘 당했이니께 울적해서 말이 많다 생각할지 모르겄다마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술을 마시도 좋고 일만 잘되믄 못할 짓이 머 있겠노. 도리어 보람이 있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저기 저 하늘에 별이 깜박깜박한께 내 가심도 깜박깜박하는 것 걷고, 내 새끼 내 계집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 가슴도 그러리라 생각하믄은, 그렇지 내가 하는 일도 과히 헛된 일은 아닐 기라."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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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3부는 3.1운동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1919년 가을부터 광주학생운동의발발 소식이 청년들을 흥분시키던 1929년의가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다. 3부의 세계는 우리 민족이 겪게 되는 일상생활적 가치관적변화를 이 시대의 생동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매우 풍요롭게 이야기한다. 소설 무대는 평사리와 간도를 비롯 서울 부산 진주 만주일본으로 확대되고, 1,2부에서의 주요인물들이 상당수 무대를 떠나 그들의 2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사회주의운동과 독립 운동에 가담하는 수많은 새로운 지식인 인물들과 동학혁명의 잔당이라 할 수있는 뜨거운 의식과 덕성을 갖춘 민중적인물들이 등장, 서로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는 사건 속에서 3부는 당대의 윤리적이념적 인생론적 진실을 장강(長江)처럼 열어간다. - P-1

朴景利씨의 「土地」가 지닌 놀라운 힘은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으로 버티다가 죽어간 이름 없는 무수한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서술에 있다 할 것이다. 끊임없는 불화와 화합,
알력과 협조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을 사람들과 하인들의 생활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작가는그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이들의 생활 감각 속에 깊이 스며 있는 공통적인 특성을 추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일상적 생활 감각 속에 들어 있는 유머러스한 대화로 드러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른바 유교적가치체계인 ‘도리(道理)‘에서 드러나기도 하며,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그들의 생활 태도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金治洙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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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는데 끈적끈적한 문어다리 같은 것이 철버덕 얼굴 위에 떨어져서 목을 감는다. 길상은 징그러운 환각에 머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이상한 환각과 더불어 육체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다. 사지에 감각이 돌아온다. 손을 뻗쳐 어둠 속을 더듬더듬 더듬는다. 자리끼를 더듬다 말고 길상은 일어서서 전등을 켠다. 부신눈에 흰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작은 얼굴 큰 얼굴 두 개의 얼굴은 푸른 산돌 틈새서 솟아난 흰 버섯. 아내와 둘째아들, 생후육개월 된 윤국(允國)의 잠든 얼굴이다. 어둠이 눈부신 밝음으로 변했는데 어미와 어린것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첫아이 때도 그러했었다. 아이가 젖을 많이 빠는 요즘의 서희는 업어가도 모르게깊은 잠에 빠진다. 또 많이 잤다. 길상은 자리끼를 찾던 생각을잊어버리고 어린것과 아내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유모 젖을먹여라 했었지만 기여 제 젖을 먹이는 서희다. 길상은 두 개의 얼굴말고 유모 곁에서 꼼짝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還國)이를 생각한다. - P168

허리를 구부려 어린것의 볼을 쓸어주고 전등을 끈 뒤 길상은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공허, 공허 속에 어둠이 스며오고, 가득히 스며오고 밤의 침묵이 모난 짐짝처럼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모서리에 찔리는 통증과 더불어마음바닥에 짐짝이 가라앉는다. 밤인가, 아니 신새벽이다. 물먹은듯 별들이 희미하게 하얗게 깜박거린다. 초가을의 냉기가 옷깃 사이로 기어든다. 가난하다. 허기지게 마음이 가난하다. 길상은 안마당을 돌아나간다. 옛날 최참판댁 안마당을 걸어가는 착각이 든다. 오소소 떨며 신새벽 안마당을 건너서 사랑에 군불을 때러 가던 소년. 그 동안 과연 세월은 흘렀는가. 흘러갔는가.  - P169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풍을 잠재운 것이다. 판단, 서희의 소망과 서희의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이상 길상은 길상 자신을 잃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회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대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파아랗게 질렸던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평정으로 돌아간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 P213

경찰서에 가자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애를 먹이자는 것이었는데 인력거에서 서희가 내려섰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진다. 옥색 자미사의 춘추 두루마기, 미색 장갑을 끼었고 순백색 치맛자락이 물결친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행복하리라 오해하는 뭇 사람들에게 바수어서 나누어주는, 가령 지금의 이런 경우다. 서희에게 집중되는 뭇 시선들은 바어서 나누어가진 일순의 작은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과 흥미와 동경과, 자아, 그러면은 다음 어떠한 광경이 벌어져서 구경꾼들을 흡족하게 해줄 것인가. 미인은 노상 무대 위의 희극배우요 익살꾼은 무대 위의 광대다. - P216

햇빛이 서편 창가에 두 줄기 비쳐들어 그 빛 속에서 시끄럽게 먼지가 날고 있었으며 이따금 풀쑥풀쑥 기어든 담배연기가 맴을 돌고 있었다. 겨울날에 모처럼 스며든 햇빛이건만 암울한 사람들 마음을 더욱더 암울하게 할 뿐이다. 방에는 주름살투성이의 한층 얼굴이 길어진 영팔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공노인은 담뱃대를 털기가 무섭게 누가 담뱃대로 뒤꼭지를후려치기라도 할 듯 재빠르게 새 담배를 넣어서 불을 붙였고, 그것을 무한정 연기가 나든 안 나든 입에 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방학이어서 학교를 쉬고 있는 두메도 와서 함께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안방, 월선이 누워 있는 방을 지키는 사람은 방씨였다. 이러기를 벌써 사흘, 월선은 기름 떨어진 호롱의 심지처럼 기름 아닌심지를 태우고 있는 그런 상태, 죽음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기보다 이미 사신(死神)은 머리맡에 와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두메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하마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나간 채 기척이 없는 홍이 걱정을 하고 기회를잡은 두메가 벌떡 일어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두메는 부엌을 들여다본다. - P285

이날 밤 서희는 길상이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새벽녘까지 잠을이루지 못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길상은 사랑에서 올라오질 않았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도 지나고 길상은 손님과 함께 하얼빈에 볼일이 있어 떠났다는 전갈이다.
"이럴 수가?"
도사리고서 밤을 꼬박이 밝힌 서희는 노했다. 격노한 것이다. 서회가 남편 길상에게 이렇게 노해보기는 처음이다. 안절부절 어떻게해볼 수도 없는 마음, 서희는 이불을 깔고 드러눕고 말았다. 아이들을 멀리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구 울었다. 인척이라며 큰절까지시킨 손님에 대한 짙은 의혹을 풀어주지도 않고 떠난 것도 괘씸하고 분하였으나 행선지가 하얼빈이라는 데도 쌓이고 쌓인 감정이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실컷 울고 난 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서희는 안정을 찾는다. 냉정해지니까 왜 울고 왜 그토록 노하였는지 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님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기로 그것은 종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자신과 길상의 생활인 것이 깨달아진다.
‘인척이면 인척인가 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그이도 모든 것정리하고 할일이 없어지니 손님 뫼시고 하얼빈으로 갈 수도 있는일.‘
결국 눈을 감아주기로 결심한다. 자리를 치우라 이르고 세수를한 서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놀아주는 것이다. 더욱 자상하게 깊은 애정을 기울이며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열중한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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