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숭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다. - P-1
시인의 말
지금 이 지구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중백 년 후에 지구에서 하차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인정사정없는 죽음을 생의 앞뒤에 두고, 죽음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짜거나, 죽음의 돌림노래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죽음이 우리 앞뒤에 공평하게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평등하다. 그러기에 죽음은 가장 사나운 선(善)이며 은총이며, 영원이다. 나는 이 시들을 쓰며 매일 죽고 죽었다. 하지만 다시 하루하루 일어나게 만든 것도이미지와 리듬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역설. 시는 죽음에의 선험적 기록이니 그러했으리라.
당신이 내일 내게 온다고 하면, 오늘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리.
2025년 6월 김혜순 - P-1
시인의 말 (2016)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없지 않겠는가.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 아팠다. 죽음이 정면에,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 림보에 사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가 갔다. 뙤약볕 아래 지구의 여름살이 곤충들처럼 고통스러웠다.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전철에서어지러워하다가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라나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가련한 여자. 고독한여자, 그 경험 다음에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 시간 속에 흐느끼는 리듬들을 옮겨 적었다. 죽음 다음의 시간엔 그누구도 이름이 없었다.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하게 외워지는 것처럼, 구구단을 외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이 시를 쓰고난 다음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연구년 동안에 이 시들 중 대부분을 적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죽어버린 옛 여자들처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먼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시안의 죽음으로 이곳의 죽음이 타격되기를 바랐다. 이제 죽음을 적었으니, 다시 죽음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집(49편의 시)을 한 편의 시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 P-1
출근 하루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P-1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첫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저 오가는 검은 머리털들이 꽉 껴안은 것, 단 한 벌,
저 여자의 몸에서 공룡이 한 마리 나오려 한다. 저 여자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이제 출구는 없다.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 P-1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너는 이제 저 여자를 향한 노스탤지어 따위는 없어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너는 저 여자의 생시의 눈빛을 희번득 한 번 해보다가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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