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두 시간은 기다렸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고문이다. 사랑방의 공간은 최서희의 무시무시한 힘의 팽창이었고, 시간은 사멸되어가는 화석의 기나긴 길이었다. 조준구는 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땀은 계속하여 흘렀다. 입속은 가뭄날의 점토(粘土)처럼 바싹바싹말라서 굳어진다. 그러나 차 한잔 내오질 않는다.
"마님께서 오십니다."
조준구는 눈을 뜨며 여자를 노려본다. 서희가 들어왔다. 방바닥을 쓸며 지나가는 치맛자락, 보료에 가서 앉는다. 조준구는 팔에서힘을 빼며 서희를 쳐다본다. 서희도 조준구를 쳐다본다. 물건을 바라보듯 쳐다본다. 중년 여자는 서희 곁에서 좀 물러난 자리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조준구는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는다.
"이렇게 대하니 면목없네." - P140

"네, 네놈은 누구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조준구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거 석이가심부름꾼으로 집에 들어왔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검은 의혹으로 마음을 새까맣게 했던 것이다.
"나 말이오?"
반문하는데 석이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눈밑의 근육이 중풍든 사람같이 떨린다. 물지게꾼 시절의 역경을 견디던 우직스런 얼굴이 아니다.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고학(苦學)하던 서울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시골 풋내기의 치졸함으로 하여 오히려 제자신의 정체를 조준구에게 간파당하지 않았었던, 설익은 그 모든 것, 기화에 대한 엷은 연정, 생소하기만 했던 지식, 언어와 풍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증오와 위장(僞裝)이 사투를 벌이던 풋되고 처절했던 시절의 얼굴이 아니다. 모든 것 다 털어버리고 과묵하며 탄탄했던 그의 천성만을 남겨둔 채 냉정하고 조리 있게, 하여 나이에 비하면 노숙했던 진주에서의 몇 해, 그 얼굴도 간곳이 없다. 짚세기를 벗어들고 맨발로 뛰던 소년이다. 아부지이! 아부지이! 외치며 오랏줄에 묶이어 피 흘리면서 가던 사내를 따라 뛰던 소년의 얼굴이다. 소년의 눈은 비수가 되어 조준구 심장에 깊이 몰려드는 것만 같다.
"너, 너, 너는 누구냐!"
가위 눌린 것처럼 조준구는 되풀이 묻는다. - P148

여한(餘恨)과 미진(未盡), 울분을 풀 길 없는 밤이었다. 관수나 석이에게도 그랬었지만 서희라고 후련한 밤이었을까? 여한은 마찬가지, 이제 서희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조준구가 걸어오지 않는 이상 보복은 끝난 셈이다. 간도 땅에서 이를 갈며 맹세한 보복은 사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하고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을 것을. 관수나 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살찐암탉 같았던 젊은 날의 조준구, 여전히 살찐 암탉이지만 늙은 닭이되어버린 조준구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끝날 원한이 이렇게 싱겁게끝난 것이며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관수와 석이는 나란히밤길을 걸어간다. 행랑에서 이들은 저녁을 얻어먹고 어두워진 뒤최참판댁을 나섰던 것이다. 연학이가 실소해가면서 소상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준구의 비천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또 한순간의 여유만 있어도 수전노에게는 거의 없는 가련한 허영의 자락을 걸치는 그 거동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밤바람을 마시며묵묵히 걸어가는 두 사내, 이들이 끝난 보복이라 생각한 것은 십분보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서희의 경우는 제쳐놓고 정확히 말해서 이들은 보복을 포기한 것이다. 어느 하늘 밑에서 살아 무엇을하건 잊어버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P163

잠시 한눈을 팔았던 석이 마음에 화살이 꽂히듯, 그 말은 관수의 말이자 자신의 마음이었다. 한눈 팔았던 마음이 관수에게로 따뜻하게 쏠린다. 동지적 우애와 다 같은 설움이 굳게 맺어진다. 어둠을 향하여, 얼마나 길지 모르는 어둠을 향하여 함께 가리라는 생각이 등불처럼 발밑을 비춰주는 것만 같다.
‘슬프고, 이 밤이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하고많은 일이 있고 어리석은 놈 등쳐서 깝데기 벳기묵을 재간도 있는데 와 하필이믄 이 짓을 하고 있제? 하는 생각이들 때가 없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석아, 우리같이 설운 놈들이 마음을 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매나 좋노. 굽히도 굽히는 기이아니요 기어도 기는 기이 아니라, 안 그렇나? 나는 내가 오늘 당했이니께 울적해서 말이 많다 생각할지 모르겄다마는 땅바닥에 꿇어앉아 술을 마시도 좋고 일만 잘되믄 못할 짓이 머 있겠노. 도리어 보람이 있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저기 저 하늘에 별이 깜박깜박한께 내 가심도 깜박깜박하는 것 걷고, 내 새끼 내 계집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 가슴도 그러리라 생각하믄은, 그렇지 내가 하는 일도 과히 헛된 일은 아닐 기라."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