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마디 일상에 관하여 말을 주고받은 뒤 공노인에 대한 안부 한마디 없이, 용이는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었다.
종이를 접어서 저고리 안에 기워붙인 호주머니 속에 넣은 한복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떤다. 막바지에 접어든 긴장이었다.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는다. 생각하면 줄곧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외갓집이 있는 함안에서 평사리를 오가고 한 일은 있었지만 그 밖의 곳에 나가본 일이 없는 한복이가멀고 먼 만주까지 간다는 일이 불안하였고 행여 왜헌병에게 잡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상상하기조차 힘든거금을 몸에 지녔다는 그 자체가 한복으로선 가장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두만강을 넘을 때 한복은 불안과 공포와는 사뭇 다른 감정,
무엇인가 심장을 조이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은 슬픔을 느꼈다. 한복의 개인적인 감정도 물론 복잡하였으나 뚜렷이 그것은망국민의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었다. 이때 비로소 한복이는 자신의결단을 잘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파렴치한 동기로 살인한 아비와 매국노가 된 형의 죄를 보상하는 것이 이 길이요, 지하에 잠든 어머니의 멍든 자긍심을 치유하는 방법도 이 길이라 생각하였다. 한복은 푸르고 거센 강물에 맹세하진 않았으나 푸르고 거센 물결에 맹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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