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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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이시가키 린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밥을
푸성귀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입을 닦으면
주방에 널려 있는
당근 꼬리
닭 뼈다귀
아버지 창자
마흔 살 해질녘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서경식의 책 [시의 힘]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
그는 또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P155

묵직하지만 역시 서경식..좋네
다 읽고 혼자 뿌듯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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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엄청 힘든 유월이었다.

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아 마르고 칙칙한 개울 청소하러 내려갔다가 무리지어 핀 망초꽃에 마음이 흔들렸다.

백만년전 어디쯤에 단편을 하나 썼는데 제목이 "개망초꽃" 이었다.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안도현의 시 "개망초꽃"을 인용한 기억은 오롯하다.

그래서였을까?

안 하던 짓, 꽃을 한아름 꽂아두고

오래 비워둔 서재에 카스에 숨겨둔 글 하나 옮겨 본다.

칠월엔 이 슬럼프가 극복되려나?

드디어 비가 오신다.

후덥지근, 더운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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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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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김사인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 덕분에 혹독한 여름을 견딜 수 있었다. 산다는 건 `중과부적`의 무게로 `선운사 풍천장어집`의 김씨처럼 누가 알아 주든 아니든 제 자리를 지키고 제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일 아니겠는가.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을 그리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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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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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김태정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

 

 

 

구월입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이면 시인의 ‘가을 드들강’이 읽고 싶어지고

읽다보니 이 가을, 구월에 4주기가 되는 시인의 생애가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물푸레나무처럼 스며듭니다.

어느 시인은 가장 죄를 덜 지은 시인을 꼽는다면 ‘김태정’일 거라고 했지요.

녹록치 않은 신산한 삶에서도

아무런 죄 짓지 않고 쉰이 되기도 전에 달랑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시인의

시편들이 잔잔하게, 찬찬히 가을 저녁 간장색 어둠으로 몸을 담가줍니다.

오래~ 먹먹합니다. 

달랑 시집 한 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의 집에 시인의 온 생애가 담겨있군요.

땅 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가고 싶은 구월의 저녁입니다.

혹 그곳에 가시거든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나무 곁에 있을 시인께 가볍게 목례를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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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9-1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태정 시인은 얘기만 듣고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사서 읽어야겠어요. 미황사 가본 지도 너무 오래 됐네요. 다시 가고픈 절집이에요.
 

 

손등
              고영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시집 [사슴 공원에서(창비2012)]중에서


태풍 고니가 지나가는 중인가!
종일 비가 도란도란 내린다.
덕분에 봄에 몇 뿌리 심어 둔
도라지꽃을 요모조모 살펴 볼 시간을 얻었다.
예쁘다.
어여쁘다.
애쓴 일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들은 기특하다.
장하다.
척박한 땅에 여리디여린 가지로 저렇게 꽃을 피워내다니...
삶도 이와같다면.. 하는 씁쓸한 생각~

책에서나 보았던 도라지꽃을 처음 본 건
제천을 지나는 중앙선 기차 안에서였다.
산 옆으로 기차는 지나고 철로곁엔 색색의 아기별들이 흐드러져 있었다.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홀린 표정의
무식한 내게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은 투로
˝도라지꽃˝
을 알려주시던 뚝뚝하고 다정한 그 분은
안녕하신지...?
오래,
아주 오래되었다.
제주올레를 같이 걷자던 헛된 약속만 남아있다.
꽃은
하나씩 일 때와
무리로 만났을 때
어찌나 다른 표정을 가졌는지 그날 그 창가에 매달려 알았다.
그 꽃을 위해 들이는 노고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꽃은 언제 어떻게든 제 몫을 다하는데
예쁘다, 예쁘다하는
이는 제 노릇을 못하고 사는 것이다.

비 오시는 날은 노릇노릇한 전이 맛있다.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감자전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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