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실은 화장을 지웠다. 완전히 기진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입가와 눈가에서 시작되는 잔주름을 응시하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대체 누구한테서 혹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지 자문했다. 열정이나 생의 수고에서 비롯된 주름은 아닐 터였다. 분명편리함과 한가로움과 소일의 표시였다. 순간 끔찍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그녀는 한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1년 전부터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이런 순간이 잦아졌다. 아무래도병원에 가봐야 할 듯했다. 긴장 탓이리라. 그녀는 비타민을 몇알 삼키고 나서, 계속해서 마냥 쾌활하게 삶을 탕진할 터였다.
(혹은 꿈을 꿀 터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일종의 분노와 함께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샤를..…? 왜 날 앙투안과 단둘이 내버려둔 거죠?"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문제를, 사건을 키우려 하고 있다는걸, 조용히 치미는 자기 인의 혐오감을 물리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대가를 치를 이는 샤를 이었다. 고통을 당할 이는 샤를이었다.  - P66

그걸 타인에게 겪게 하다니 더더욱 어리석었다. 하지만 문장이 이미 시위를 떠났다. 말이 화살처럼 침실과복도를 가로질러, 자기 방에서 천천히 옷을 벗고 있는 샤를에게 꽂혔다. 그는 몹시 고단했기에, 질문을 피하며 그냥 ‘이봐요, 루실, 난 감기 기운이 있었소‘라고 얼버무릴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도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으리라. 그녀의 진실 추구는, ‘대결의 순간‘은 결코 더 진척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싶은 욕구가, 고통 받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지난 20년간 그에게 애인들의 외도를 능숙하게 무시하게했던 이 안전에 대한 취미를 이렇게까지 잃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답했다.
"당신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소."
건 이 도아보지 않았다. 거울만을 응시했다. 그리 - P67

조니는 이 확신을 시기심과 슬픔이 어우러진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루실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가 침묵하고, 지루해하고, 웃는 방식이 좋았다. 이제 그는 욕망의 힘으로 젊어지고 어린애 같아지고 거의 원시적이 된 이 새로운얼굴을 응시했고, 아주 오래 전에 자신도 세상 모든 것에 앞서누군가를 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로제였다. 그랬다, 조니는 로제가 연회장에 들어서는 것이 눈에 선했고 더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을, 혹은 다시 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이 사랑이야기 속에서 삶은 어디에 있고, 꿈은 어디에 있는 것 - P76

왜냐하면 앙투안은 루실이 웃는 것에, 그녀가 이튿날 같은시간에 그의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 뒤 노곤해진 채로 그에게왜 웃었는지 설명할 걸 자기가 아는 것에 기뻐하며, 루실을 바라보고 그녀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왜 웃어요?‘라고 묻지 않았다. 많은 은밀한 관계들이 이런 식으로 침묵과, 질문의 부재와, 되짚지 않는문장과, 작정하고 선택한 평범한 단어, 너무 평범해서 엉뚱해보이는 단어에 의해 발각된다. 어쨌든 루실과 앙투안의 웃음을, 그 행복한 표정을 처음 보는 누구라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들도 이를 막연하게 짐작했고, 볼디니가 선사한 이 막간의 시간을, 그들이 마음 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설렘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얼마간의 순간을 어쩌면 오만하게누렸다.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클레르나 다른 이들의 존재가그들의 기쁨을 배로 증폭시켰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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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시간을 앓고 나서 나가 본 세상은 회색빛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분명 루실이 이른 아침에 만난 봄은 아니었다. 현깃증으로 목덜미에 식은 땀이 돋았다. 그렇게 두 시간후 돌아와서 [패배의 신호]를 폈다. 쏟아지는 잠과 무력함 사이에 주황색이 놓여있다.






그녀는 눈을 떴다. 돌연한 세찬 바람이 방안에 스며들었다.
커튼이 돛처럼 나부끼고, 커다란 화병의 꽃들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이젠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 봄바람이었다. 첫 봄바람. 희붐한 새벽에 나무 냄새, 숲 냄새, 흙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휘발유를 잔뜩 머금은 파리의 거리를 가로질러 경쾌하고기세등등하게 방안에 안착하며, 그녀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살아있는 기쁨을 알렸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엎드리고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묻은 채로 한 손을 더듬어 방바닥의 시계를 찾았다. 어딘가에두고 잊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늘 모든 걸 잊었다. 이제 그녀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어둑했고, 맞은편의 창들은 닫혀있었다. 이런 시간에 불어오다니 - P18

그는 물었다. "오렌지만 한 알 먹었다고요?"
"네, 사장님께도 외출하실 때 바깥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라고전해달라고 했어요. 봄 냄새가 느껴진다고."
폴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는 샤를이 자신에게 루실이남긴 말을 구걸했다는 걸 눈치챘을까? 그녀는 샤를 앞에서 더러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나무라는 건 루실이 아니라, 루실을 향한 그의 열정의 형태라고 느꼈다. 그가 오직 그녀에게만 들킨, 굶주리고 고통스런 열정의 형태. 그녀는 상식과 모성애, 그리고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루실이라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일 그가 그녀가일컫듯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여자‘에게 빠져들었더라면
틀림없이 불만을 표했으리라. 그녀는 어쩌면 그게 더 나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P27

루실은 그의 표정을 보며 일순 몸이 굳었다. 곧바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세상에, 정말 불행해보여!‘
그녀는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옆에서 남자가 숨 쉬는 것이 느껴졌다. 거칠고 불규칙적인 호흡, 총상이라도 입은듯한 사람의 호흡이었고, 비록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에겐 참을 수 없는 그 총상을 입힌 사람이 바로 그녀인 듯 느껴졌다.
- P33

공유된 웃음의 힘과 위험과 미덕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지나치지 않으리라. 사랑도 그에 비하면 우정이나 욕망, 또는절망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하지 않다. 앙투안과 루실은 초등학생 같은 둘만의 킥킥거림을 나누었다. 진지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발가벗겨지고, 갈망을 받는 그들 두 사람은 자기들이
어떤 식으로는 벌을 받게 되리라는 걸 인식한 채로, 연회장 구석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킥킥거렸다.  - P43

"사라요."
루실이 디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 이름이 디안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앙투안을 추궁하지는 말아야 했다. 그에게 묻지 말아야 했다. 그가 아무것도모르는 심상한 표정으로 두 여자를 향해 다가왔다. 불현듯 깨달은 디안이 루실을 홱 돌아보았다. 루실은 움찔했다. 아닌 게아니라 디안은 루실을 후려칠 뻔했다. 그러니까 이 어린 여자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잔 그걸 알 권리가 없었다. 앙투안은 그녀 거였다. 앙투안의 웃음도, 앙투안의 슬픔도, 그는 밤에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사라를 꿈꿨다. 그녀보다 사라와의 추억을 택했다.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그녀는 앙투안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앙투안은 멍한 시선으로 디안에게 이끌렸다. 몇몇 평론가들이며 디안의 몇몇 친구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고, 디안이 착석하는 걸 도왔다. 벨이 세 번 울리고 어둠이 장내를 감쌌다. 그녀가 그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불쌍한 우리 자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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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심히 일해야지....라고 생각하다가 여태도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왔는데 겨우 여기왔을 뿐이라는 현타!
아, 생각만으로 살 떨리네ㅠ

책 표지에 낚였다. ㅋㅋ
저런 서재, 믓찌다.
하루끼 전문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유쾌한 번역자여서 기분 좋았다.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생각한다. 오늘은 열심히 일해야지. 굳게 다짐하고 떨어지지 않는 눈을 뜬다. 시간을보려고 스마트폰을 켠다. 켠 김에 어제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몇 명이었는지 본다. 보는 김에 뉴스 한번 훑는다. 잠이 깬다. 메일이 있으면 답장도 하고, 블로그 들어가서 안부게시판에 답글도 단다. 스마트폰은 한 손가락으로 치기때문에 지렁이보다 더디고 거북이보다 느려서, 본의 아니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치게 된다. 상대방이 이 정성알아주려나. 일어난 지 한 시간이 가뿐히 지났는데 몸은아직 침대 위다. 스마트폰 때문에 세월이 더 빨리 간다. 시간이 주먹 속의 모래처럼 술술 샌다. 얼른 일어나서 오늘은 열심히 일해야지…….
- P17

예전에는 ‘오늘은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다짐 같은 것하지 않았다. 그런 다짐 하지 않아도 과로사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때보다 이렇게 농땡이 부리며 설렁설령 사는 지금의 내가 좋다. 죽기 전까지 일을 하고 싶지만, 일만 하다 죽고 싶진 않다. 그렇게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본 뒤로,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숨 좀 돌리고 여유 좀 갖고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열심히 일하려고 했는데 또 열심히 하지못하고 말았다. 내일은 열심히 해야지…….
- P19

꽃은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면, 오역은누군가가 까발려주어야 오역이 된다. 알고 오역을 하는사람은 없으니 지적받기 전까지는 바른 번역의 탈을 쓰고있다. 오욕의 오역은 번역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두려운것.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어디선가 좀비처럼 튀어나온다. 생각만 해도 살 떨리네.
- P89

역주는 어디까지 달아야 할까. 번역하면서 늘 갈등하는문제다. 내가 모르는 건 독자도 모른다는 기준으로 달아야할까. 나는 알지만 독자는 모를 것 같을 때? 나도 알고 대부분 독자도 알겠지만 모를 수도 있는 일부 독자를 위해?
갈등하다 역주를 달기도 하고 어물쩍 넘어가기도 한다. 역주를 다는 게 귀찮아서가 절대 아니다. 너무 친절한 역주는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 있어서 때로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미주(본문 끝에 다는 역주)로 달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역주가 많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절반 이상의 독자가 모를 것 같은 고유명사에만 역주를=달고 싶지만, 실제로는 기모노, 유카타, 다다미같은단어까지 역주를 달고 있다.  - P95

후배들이 조언을 구할 때면 늘 하는 말이다. 출판사에꾸준히 존재를 어필하라고, 책은 아마존에서 주문해도 되고 대형서점 외서 코너에서 사도 된다. 검토서를 작성해서 관련 도서를 내는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는 것이 가장넘게 어필하는 방법이다. 무조건 보내는 게 능사가 아니고, 발췌번역을 닳도록 다듬고 다듬어서 최고의 상태일때 보내야 한다. ‘번역을 잘하는 나의 존재를 알려야지,
무조건 "나 번역하는 사람이에요"만 어필해봐야 귀찮아할뿐이다. 견본품 들고 일일이 매장 돌아다니며 영업하는분들에 비하면, 번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한가.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니까. 문전 박대를 당할일도 없고, 무시당해도 보이지 않고, 답장을 주면 감사하고 안 줘도 그만이고, 보내는 것은 나의 의지,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 메일 한 통 보내고 너무 많은 기대도 하지 말고, 좌절도 하지 말고,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천천히 조금씩 도전하고 싶은 곳의 벽을 뚫어봅시다.
- P99

작가 그늘에서만 살던 번역가가 작가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백댄서를 하던 김종민이 앞으로 나와서 코요태가 되고 예능인이 된 것처럼, 그러나 김종민이 다시백댄서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번역가란직업을 사랑하며 원서와 사전과 고군분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145

어느 때부터인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게 되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않고, 번역하고 싶지않은 책은 정중히 거절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하는 말에서 자유로워지자, 지구의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나이를 먹어서 뻔뻔해진 것인지해탈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소한 사람의 도리를하고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세상을 왕따시키며 살고 있다. 물론 외롭다. 외롭지만, 편하다. 편하지만, 찜찜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잠자리에 들며 혼자 반문하지만, 다음 날 해가 뜨면 또 찜찜하지만 편한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다. 아, 이렇게 고집스러운 독거노인이 돼가는 건가.
- P169

나는 주류보다 비주류가, 인싸보다 아싸가, 메이저 보다 마이너가, 강남보다 강북이 편하다. 사람은 편한 게 장명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어쩌고 하는 속담도 있지만, 애초에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을 따라가려고 애를써본 적이 없다. 굳이 왜? 의식의 흐름이 뜬금없지만, 이글을 쓰다 문득 ‘근데 뱁새는 어떻게 생겨먹은 새지?‘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길이 13 센티미터의 아주 작은 새다. 이렇게 작은 새인지 몰랐네. 황새의 키도 찾아보았더니 100 ~115 센티미터다. 음, 열 배는 차이가 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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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걸을 수 있는 부상병은 부축하고, 그럴 수 없는부상병은 어린아이 안 품에 안거나 자기 목에 팔을 두르게 하고 업어서 옮겼다. 또는 부상 정도에 따라 둘이나 셋, 혹은 넷이서 들것을 대신해 부상병의 어깨와 다리를 나눠 들고 옮겼다. 또한 구급 들것이 모자랐기 때문에 소총 몇 자루를 배낭끈으로 연결해 들것을 급조하는 등온갖 기발한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 포탄이 파헤쳐놓은 들판 곳곳에서, 집과 함께 머리를 숙인 채 신중하게 무릎으로 기어가는 들것병들의가슴 뭉클한 영웅적인 모습이 보였다.
모리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엄청나게 큰 밀알을 옮기는근면한 개미처럼 다리가 부러진 육중한 중사를 업은 깡마르고 허약한소년 들것병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포탄 하나가 폭발해서 두병사를 모두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연기가 걷히고 보니, 땅바닥에 등을대고 누워 있는 중사는 새로운 부상 없이 멀쩡했지만, 소년 들것병은옆구리가 터진 채 쓰러져 있었다. 다른 들것병, 다른 개미가 달려와서동료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중사를 자기 등에 업고 구급마차로옮겨갔다.

- P345

그가 무슨 말인가 하고 있을 때, 포탄이 터져 그의 오른팔이 날아가고 왼쪽옆구리가 갈라졌다. 그는 대포 위로 쓰러졌고, 행복의 침대인 양 거기서 머리를 적에게로 돌린 채, 분노에 찼으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죽었다. 찢어진 제복 틈으로 빠져나온 편지 한 장이 그의 손가락에 꼭쥐여 있었는데, 그 위로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직 목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중위가 명령을 내렸다.
견인차 이동!"
그때 탄약 마차 하나가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연결고리가 땅에 떨어진 대포 한 문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다른 탄약 마차의 말들을 데려와야 했다. 마침내 기마 운반병들이 유턴을 해서 네문의 대포에 연결고리를 걸었다. 그들은 즉시 전속력으로 달렸고, 1킬로미터 떨어진 가렌숲의 나무 뒤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췄다.
모리스는 그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불쌍한 오노레! 불쌍한 오노레!"
슬픔이 굶주림으로 위가 뒤틀리는 고통을 배가시키는 듯했다.  - P361

모리스의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앙리에트였다. 모리스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앙리에트였는데, 그녀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바제유에서 저들이 그이를 총살했어.…… 나도 그 자리에 시신이라도 찾고 싶은데,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긴 해……….
그녀는 프로이센군도, 바이스라는 이름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히 모두가 상황을 이해했다. 모리스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위로했다.
"아, 불쌍한 누나!"
두시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앙리에트는 발랑의 어느 집 부엌에서식탁에 머리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울음을 그쳤다. 연약하고 조용한 여인의 내면에서 영웅적인 용기가 솟구쳐올랐다.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오직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는일만 생각했다. 애초의 계획은 바제유로 다시 가는 것이었다. 모두가절대 불가능하다고 만류했다. 그래서 그녀는 함께 가서 시신을 수습해줄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그녀의 뇌리에 르센 정련공장 부공장장이었던 사촌오빠가 떠올랐다. 당시 정련공장 사무원으로 일했던 남편을 무척 좋아했던 사촌오빠는 요청을 외면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 년전 아내가 유산을 상속받은 덕분에 은퇴하고 풍 드 지본 맞은편에 있는 아름다운 저택 ‘에르미타주‘로 이사했는데, 스당에서 가까운 그 저택은 노대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군중의 발에 밟혀 죽을 수도 있는위험 속에서 온갖 장애물을 뚫고 그녀가 가려 하는 곳이 바로 그 에르미타주였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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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1
아니 에르노 지음, 김선희 옮김 / 열림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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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일 년간 코피를 흘리셨고 일 년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하셔서 이마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지내셨다. 막막하고 참혹했던 어린 관찰자이자 보호자였던 내가 떠올랐다. 아픈 엄마를 지켜보는 일은 곧 나의 미래를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의 부재는 누구에게나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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