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시간을 앓고 나서 나가 본 세상은 회색빛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분명 루실이 이른 아침에 만난 봄은 아니었다. 현깃증으로 목덜미에 식은 땀이 돋았다. 그렇게 두 시간후 돌아와서 [패배의 신호]를 폈다. 쏟아지는 잠과 무력함 사이에 주황색이 놓여있다.






그녀는 눈을 떴다. 돌연한 세찬 바람이 방안에 스며들었다.
커튼이 돛처럼 나부끼고, 커다란 화병의 꽃들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이젠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 봄바람이었다. 첫 봄바람. 희붐한 새벽에 나무 냄새, 숲 냄새, 흙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휘발유를 잔뜩 머금은 파리의 거리를 가로질러 경쾌하고기세등등하게 방안에 안착하며, 그녀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살아있는 기쁨을 알렸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엎드리고는 여전히 베개에 얼굴을묻은 채로 한 손을 더듬어 방바닥의 시계를 찾았다. 어딘가에두고 잊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늘 모든 걸 잊었다. 이제 그녀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어둑했고, 맞은편의 창들은 닫혀있었다. 이런 시간에 불어오다니 - P18

그는 물었다. "오렌지만 한 알 먹었다고요?"
"네, 사장님께도 외출하실 때 바깥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라고전해달라고 했어요. 봄 냄새가 느껴진다고."
폴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는 샤를이 자신에게 루실이남긴 말을 구걸했다는 걸 눈치챘을까? 그녀는 샤를 앞에서 더러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나무라는 건 루실이 아니라, 루실을 향한 그의 열정의 형태라고 느꼈다. 그가 오직 그녀에게만 들킨, 굶주리고 고통스런 열정의 형태. 그녀는 상식과 모성애, 그리고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루실이라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일 그가 그녀가일컫듯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여자‘에게 빠져들었더라면
틀림없이 불만을 표했으리라. 그녀는 어쩌면 그게 더 나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P27

루실은 그의 표정을 보며 일순 몸이 굳었다. 곧바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세상에, 정말 불행해보여!‘
그녀는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옆에서 남자가 숨 쉬는 것이 느껴졌다. 거칠고 불규칙적인 호흡, 총상이라도 입은듯한 사람의 호흡이었고, 비록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에겐 참을 수 없는 그 총상을 입힌 사람이 바로 그녀인 듯 느껴졌다.
- P33

공유된 웃음의 힘과 위험과 미덕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지나치지 않으리라. 사랑도 그에 비하면 우정이나 욕망, 또는절망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하지 않다. 앙투안과 루실은 초등학생 같은 둘만의 킥킥거림을 나누었다. 진지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발가벗겨지고, 갈망을 받는 그들 두 사람은 자기들이
어떤 식으로는 벌을 받게 되리라는 걸 인식한 채로, 연회장 구석에서 더는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킥킥거렸다.  - P43

"사라요."
루실이 디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 이름이 디안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앙투안을 추궁하지는 말아야 했다. 그에게 묻지 말아야 했다. 그가 아무것도모르는 심상한 표정으로 두 여자를 향해 다가왔다. 불현듯 깨달은 디안이 루실을 홱 돌아보았다. 루실은 움찔했다. 아닌 게아니라 디안은 루실을 후려칠 뻔했다. 그러니까 이 어린 여자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잔 그걸 알 권리가 없었다. 앙투안은 그녀 거였다. 앙투안의 웃음도, 앙투안의 슬픔도, 그는 밤에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사라를 꿈꿨다. 그녀보다 사라와의 추억을 택했다.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그녀는 앙투안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앙투안은 멍한 시선으로 디안에게 이끌렸다. 몇몇 평론가들이며 디안의 몇몇 친구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했고, 디안이 착석하는 걸 도왔다. 벨이 세 번 울리고 어둠이 장내를 감쌌다. 그녀가 그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불쌍한 우리 자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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