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9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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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없는 집

                       곽효환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 도시로 떠난

  지나간 사람들의 그림자 가득해

  이제는 하루 종일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드문

  한때는 차부였을지도 모를 빈 버스 정류소

  그곳에서 멀지 않은 비포장길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 소리도 멈춘 지 오래

  텅 빈 인적 없는 한적함이 두려움으로 찾아드는

  길섶에 두려운 마음을 접고 차를 세웠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를 지나

  교목들이 이룬 숲에 노루 울음 가득한 여름 산길

  하늘엔 잿빛 날개를 편 수리 한 쌍 낮게 날고

  투명하고 차가운 개울 몇을 건너

  굽이굽이 난 길이 더는 없을 법한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더 걸은 뒤

  고즈넉한 밭고랑

  황토 짓이겨 벽 붙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곡식 창고

  함석지붕을 머리에 인 처마가 깊은 집이 있다

  산나물이 들풀처럼 자라는

  담도 길도 경계도 인적도 없는 이곳은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고 돌아왔다

                                            시집[지도에 없는 집]중에서

 

      

 

 

  이 시를 읽는데 오래전에 비스름한 시를 끄적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따라 올라왔다. 지도에는 없고, 내 혈관 속으로 난 길을 따라 어쩌고저쩌고했던 거 같다. 한참 끄적거림에 왕성하던 시기의 치기 어린 짓이었는데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꽤 오래 담아두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는 결말을 얻지 못해 시는 내게서 멀다. 지도에는 있지만 누구도 애써 찾지 않는 지도에 없는 길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수한 지도에 없는 집들에 대한 생각, 나만 알고 나만 누리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지도에 없는 길.

 

   이제는 떠나온 직장에서 출, 퇴근하는 길에(아침 이든 저녁 이든) 애정 하는 공간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런 공간을 찾고, 그런 공간을 누린다는 것이 소확행이었음을 깨닫기도 했다. 우선은 집들과 건물들 사이의 공터에 꽤 많은 사람들이 가꾸는 텃밭이 있었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다르고 주인의 성품을 닮은 농작물들의 달라지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은 몇 분에 불과하지만 마음을 촉촉하게 해줬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상추는 입맛을 다시게 하고, 완두콩 줄기들은 매번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그 비싸던 대파들은 오동통한 잎들을 자랑하고, 이슬 맺힌 감자꽃은 어찌나 예쁜지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했고, 손가락만 한 오이들은 어찌 자랄지 궁금했다. 그중에는 화초를 심어두는 고랑도 두어 군데 있는데 꽃을 가꾸고 꽃 차를 만들어파는 카페를 운영한다는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공교롭게도 꽃을 시작한 그즈음부터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도 나누지 못하는 마음 안에 그 친구의 방에 잠깐씩 불이 들어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도라지, 몇 군데 도라지들이 있어 고개를 돌려 도라지 꽃들에 눈 맞춤을 하고는 했다. 저 사진은 출근 마지막 날에 그곳에 머문 130일의 애틋함을 담아서 찍었다.

 

 

    

      

 

 

  그리고 문정공 조광조 선생을 모시는 심곡서원, 저 주변에 있던 직장에서 삼 년을 넘게 지냈는데 그저 지나치기만 했었다. 이번에도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의자를 애용했다. 작은 못이 있고 수련이 가득한 보호수 아래에 십분쯤 앉아있으면 숨차게 걸어온 도롯가 길들의 소란과 땀이 잦아들었다. 정암 선생을 생각했다. 내 고향에서 멀지 않을 능주를 생각해 보면 가보지 못한 능주 대신 남평역의 정경이 떠올랐다. 권력을 잡은 정권은 개혁을 불편해한다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도 소환해본다. 기득권의 반발은 '주초 위왕'처럼 엉성하고도 집요하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가진 것을 지키려는 노력은 바꾸려는 의지보다 뛰어나는 법이다. 선생이야 당신의 소신대로 생을 살고 마감했으나 가솔들은 어찌 되었을까? 신원 회복이 되기까지 그 긴 시간을. 오백 년을 살아온 고요한 나무의 영이 어깨에 서늘하게 내려앉는 찰나를 떨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지키고 있는 심곡서원은 지도에 있는 집이고 지도에 있는 길이지만, 나에게만 오롯한 이정표를 세워주는 곳이다. 주변을 공원화 사업하느라 공사들이 어수선한데 정리되면 또 다른 공사를 시작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토목공화국이고 공사 진행형의 나라다. 삶의 방향을 물으면 묵묵부답이지만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의 지적질과 지시가 난무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걸어 다니기로 결정한 며칠은 걷고 시간을 체크하고, 어떤 길이 더 걷기에 좋은지, 빠른지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볼 여력이 없었다. 사실 이 길들을 통과한 시간은 꽤 되는데 지금까지는 걸어보려 한 적이 없었다. 걸을 시간도 없었고 밤 열시쯤에나 마치는 식당의 특성상 걸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초기에 두 번인가 동료랑 걸어보았으나 소음과 분진이 심해서 다시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누구인가, 광교산 밑에서 종종걸음으로 12시간 일을 하고도 퇴근은 걸어서 해야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길 위에서'다. '길'은 찾는 것이고, '길'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 비로소 충만해진다. '길 위에서' 하루치의 생활이 정리되고 마감된다. 지도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곳을 걷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 모든 길은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이다. 하루치의 노고를 저 의자에 내려놓고 앉아있다 보면 스르르 내 안으로 침몰해가는 지점쯤에서 툭툭 일어나서 다시금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사진 속에 지명이 나와있으니 지명은 생략하고 바로 곁에 '심온의 묘'가 있다. 세종의 장인인 그의 묘역은 높은 곳에 위풍당당해서 근처의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와 늘 비교가 된다. 물론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으나 정치적, 학자적 입지를 생각해 볼 때 흔적의 차이는 극명하다. 나의 저울추는 항상 정암에게로 기울어있다. 이 박물관 모퉁이를 돌면 해령군 이지의 묘가 있다. 해령군은 세종의 이복동생이고 우리가 아는 이방원, 즉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어느 권력관계에서도 그렇겠지만 우리가 동화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왕자들의 삶은 단 하루도 평탄하지 않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매일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무는 슬픈 족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생의 이면엔 그토록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집에서 후손들의 권위의 상징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이곳에서 해봤다. "지도에 없는 집'은 어쩌면 죽은 자는 떠나고 없는 누군가의 '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머무는 시간은 평화롭고 흡족했다. 강아지와 어린 아기들이 비슷한 비율로 산책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의 하나였다. 산책길에서는 댕댕이의 비율이 훨씬 높다. 거기다 그 아이들의 실례를 모른 척 지나가는 몰상식한 견주들의 비율도 상당히 높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의 시절에 '지도에 없는 집'과 '지도에 없는 길'들이 있어 살만하다. 팽팽 돌아치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들숨과 날숨을 편히 쉴 곳은 지도에는 없고, 내 안에는 있다. 이곳에서 지나 온 130일의 시간이 내게 새로운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다시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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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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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보다 조금 더

                       이문재

   어제보다 더 젊어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건강해질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많이 가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나눌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강해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더 지혜로울 수는 있다

   어제보다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어도

   어제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는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어제보다 조금만 더

                                    시집 [혼자의 넓이]

    "어제보다 조금 더" 오늘은 나아져 있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어제보다 더 나빠진 나를 매일매일 발견한다. 그런 오늘이 쌓여 여기까지 등 떠밀려왔다. 그런데 "어제보다 조금만 더"의 간절함이 짙어서 울컥한다. 단지 '만'이 더 들어갔을 뿐인데 '제발'의 기원이 얹어져서 간절함은 저렇게 배가된다. 딱 하나만 더하면 저렇게 달라진다. 그 딱 하나를 찾지 못해서 이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어제'가 아무리 좋았어도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죽어버린 시간이다.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너그러워진 오늘, "어제보다 조금만 더" 내려놓는 오늘을 살자고 시인은 말한다. 따끈따끈한 시집엔 '혼자'들이 무수하다. 여러 번 울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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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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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든 정치가든 자기가 사는 사회의 언어에서 벗어날 수있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이런 상식이 필요한 남성 학자들이 떼 지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는 <동물의 왕국>일 것이다. <도니 브래스코>(1997년) 같은 영화를 보면 마피아나 '조폭' 들도 즐기는 것 같다. 힘의 원리에 대한 남성 문화의 집착은 적자생존(適者生存. natural selection)의 원리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으로 바꾸어버린다. 가부장제는 과학보다 힘이 세다. <동물의 왕국>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이유는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힘의 원리만이 동물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정이고, 후자는 동물에게는 정치가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상반된 듯하지만 두 가지 사고방식은 같다. 모두 자기 생각을 자연(타자)에 투사하는 것이다.p123. 124

 

  날도 더운데 뜨겁게 훅 들어 온 문장

   "가부장제는 과학보다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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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시선 456
이상국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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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이상국

   산에 가 돌을 모아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나를 모르고 나도

   돌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게 돌에다 한 것인지

   내가 나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탑을 쌓은 나와

   탑을 쌓기 전의 내가 다르듯

   탑이 된 돌들도 이미

   그전의 돌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남은 아니었다

   그곳이 산천이거나 떠도는 허공이거나

   우리가 무엇으로든

   치성을 드리고 적공을 하면

   짐승들도 함부로 하지 않고

   비바람도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산에 가 돌로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돌만은 아니었다

   나도 나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중에서

   지난 5월 25일 심**님께서 돌아가셨다. 위독하셔서 119로 실려간 지 5일 만이었다.

   나이트 근무였다. 출근하자마자 어르신의 용태부터 살폈다. 잠깐의 낮잠 동안 꿈으로 내게 오셨다. 엄마도 그랬다. 꿈으로 내게 오셨다 가셨다. 설마 했는데 호흡이 달랐다. 아침에 퇴근할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지셨다. 그렇게 119가 오기까지 40분쯤, 응급처치를 하느라 분주했던 시간이 지나고 십분쯤 손을 잡아드렸다. 따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다고, 손주를 보고 가셔야 한다고 쉼 없이 말을 걸면서...... 점점 호흡은 가빠지고 산소포화도는 낮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을 잡은 채 계속 말을 걸었고 대답을 하셨다. 함께 있던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기도를 해주셨다. 고맙다 하신다. 그렇게 구급차로 실려가셨다. 겨우 손을 놓았다.

   47년 전 아버지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날 밤, 병풍 뒤 아버지의 관이 놓인 방에서 자다 깨었다. 동생은 무섭다고 울면서 나가는데 나는 무섭지 않았다. 35년 전 엄마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내 꿈에 오신 시간에 돌아가셨다. 입관 전 겨우 도착해서 작별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엄마 이마를 쓸던 손의 감촉이 아직도 서늘하다.

   그분의 손은 따뜻했다. 따뜻한 손을 맞잡아드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어서 어찌나 감사하던지. 떠나시고 나서도 한참이나 손에 감촉이 남아있어서 망연하게 손을 내려다보는데 그제서야 다리가 푹 꺾였다. 그렇게 보내드렸다. 그분은 1933년생이시다. 생애가 어떠했는지 단 한 줄도 알지 못하지만 생의 마지막 두 달쯤의 시간을 함께 해드릴 수 있었다. "돌을 모아 탑을 쌓고 서원을 했다/ 돌도 나를 모르고 나도/ 돌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게 돌에다 한 것인지/ 내가 나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이 시를 읽는데 그분을 향한 나의 서원이 꼭 이랬구나 싶었다. "돌도 돌만은 아니었다/ 나도 나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와 나 사이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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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일 K-포엣 시리즈 11
안현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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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마음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시집 [깊은 일] 중에서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가해 남성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가 저지른 일을 남의 얘기처럼 말하며 피해 여성을 비웃거나 자신과 같은 가해 남성 '동료'를 비난하기도 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폭력이 훨씬 심각한데도 '덜 맞은' 여성들을 보며 놀라고 걱정한다. 경험, 몸, 인식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 p102, 103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늑대, 여우, 토끼가 한 집에 사는 것이 가능할까? 늑대가 여우를 때리지 않을까?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지 않을까? 먹이 사슬에서 포식자와 피식자가 같이 살 수 있는가? 이처럼 근대 핵가족은 성별과 연령이 교차하는 위계적 제도다. 가정 폭력은 근대 이전에도 빈번한 문화였지만 늑대, 여우, 토끼처럼 서로 덩치 차이가 크고 힘이 다른 이들이 함께 사는 곳에서 폭력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구조다.

  쉼터(shelter house)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쉬는 곳이라기보다는 긴급 피난처다. 미셀 푸코는 군대, 감옥, 병원이 훈육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집에서 전쟁을 치르는 여성에게 감옥은 방공호일 수 있다. 동네마다 쉼터(방공호)와 여성 자경단이 있어야 한다. 왜 쉼터를 찾아 서울까지 와야 하는가. 쉼터는 '자기만의 방'이자 고통을 함께 해석하고 위로하는 공동체다. 그곳은 언어가 다른 세계다. 다른 국민이 사는 네이션(국가)이다.

  내가 여성의전화에서 일하던 시절 어떤 가해 남편이 단체 상근자들을 인신 매매범으로 고발한 적이 있다. 우리가 피해 여성을 가두고 노동을 착취할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괴담처럼 "새우잡이 통통배에 여성들을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상근자들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구타 남편은 그렇다 치고, 남자의 말을 믿고 사무실에 출동한 경찰은 뭐 하는 사람인가. 그런 영화 같은 시절이 지나가고 쉼터가 만들어진 지 30년이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 공간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여성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이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이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그 일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중에서 P106, 107

 

 

 

  햇살이 뜨거웠다. 며칠 만에 만나는 반가운 햇살은 악수를 나누기보다는 손사래를 칠 정도로 오전임에도 이미 달구어질 대로 달궈져서 화들짝 손을 거두고 싶었다. 냉방을 안 틀고 있는 버스는 뜨거웠고 하필이면 저 페이지를 마저 읽던 내 심장은 녹아내렸다. 심장초음파 검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딱 저 페이지에서 책을 덮었다. 더 읽다가는 초음파 검사도 전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결과는 다음 주에 보는 것이지만.

   "정희진의 글쓰기 3"편인 이번 책은 읽으면서 벌써 몇 번째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한 꼭지를 겨우 읽고 밀어두고 다시 한 꼭지를 읽다가 미뤄두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서평인데, 언제나처럼 그 책들을 내가 읽게 될 것 같지 않고 설사 읽는다 한들 서평을 쓸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책 한 권을 통해 자신의 견해와 철학, 경험과 정신이 뭉퉁그려졌음에도 스스로 검증하고 검증한 혹독한 글쓰기의 산물이어서 읽는 동안 덩달아 경건해지는 그녀의 글을 좋아한다. 밥벌이로서 서평에 매달리는 작가의 자세가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밥벌이는 냉혹하고도 경건한 삶의 과정이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가진 게 몸뚱어리밖에 없어서 몸을 굴려 밥을 번다. 작가 정희진은 글을 써서 밥을 번다. 많이 다르지만 결국 같다. 치사하고 더럽지만 참아야 하는 순간도 있고 견뎌야 하는 수모도 있다. 누가 더 괜찮은 삶이냐고 묻는다면 질문자를 뜨아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밥벌이는 신성하다. 어떤 밥벌이가 괜찮은지는 없다. 다만 그 밥벌이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스스로 검증하고 세상의 잣대로 검증당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 앞에 항상 노출되고, 막무가내로 참고 견뎌야 한다면...... 저런 글 앞에서 나는 무릎이 꺾인다. 분노하지만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나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겨우, 부끄럽게도.

  언젠가 후배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아마도 결혼을 해서 두들겨맞고 살고 있다고 해도 그 결혼을 지키고 살 사람이라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말지언정 그 약속을 파기할 자신은 없는 사람이어서, 아예 결혼을 포기했다고. 빈말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 자신이 무서워서 비혼을 선택했다. 물론 반대일 수도 있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 내 선택이 옳다고는 믿지 않지만 시간을 거슬러 다시 결정을 한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는 맞고 살기는 싫다. 나는 장난으로라도 툭 친다든가, 애칭으로라도 비하적인 호칭이 너무 싫다. 참고 살기 싫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에게 입으로든 손으로든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참으면 더욱 안 된다. 그래서 안현미 시인의 『깊은 일』이다. 이것은 저 심장 깊숙한 심연(深淵)이고 더욱 아득한 먼바다의 深淵이다. 안현미 시인의 신간을 오래 기다렸다. 시인은 쑥과 마늘만 가진 채 동굴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짐과 각오가 안쓰럽고, 이런 세상에 놓인 시인의 무거운 책무가 안타깝다.

 

 

 

   "너도 할 수 있어!"

 

  그 한마디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깐 그건 어떤 슬픔 앞에서도 어떤 절망 앞에서도 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누구나 해줄 수 있는 평범하지만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나는 윌트 휘트먼처럼 나 자신을 축하하고 나 자신을 노래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습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 바다를 슬퍼하고 그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살다가 죽어야겠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초과할 수는 없었다고, 깊고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고 울부짖는 당신, 할 수만 있었다면 대신 죽고 싶었을 당신, 당신은 말합니다. 십자가는 천사의 날개 고난 버전 같다고. 무섭고 쓸쓸하고 한없이 고독한 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중단해야 맞는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기록하겠습니다."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그 바다에 못 박혔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그 바다에 못 박힌 천사 같은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고, 잊지 않겠습니다. 잊힌대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 바다를 슬퍼하고 그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죽다가 죽어야겠습니다.

                                    2020년 흰쥐의 해

                                                   안현미

 

 

 

  [깊은 일] 시집에서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은 남은 생을 그 바다의 기록으로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이 문장들을 읽는데 속이 아렸다. 청양고추를 한꺼번에 백 개를 씹어먹으면 이럴까?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예전에 광화문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히죽대던 우리를 보았을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무례를, 그 무식을 용서하시라. "사랑을, 인간을, 잃어야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중단해야 맞는다고 생각하는 밤입니다." 어차피 심장은 괜찮을 것이다. 조금 두껍고 약간 커서 일 년이면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아온 지 벌써 여섯 해째다. 深淵, 가라앉는 밤이다, 라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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