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디인지 알 수없는 그곳으로부터 ‘북서풍을 맞으며 130킬로미터‘를 가면여행자들은 동지와 하지, 춘분과 추분이면 일곱 나라의 상인들이 모인다는 도시 에우페미아에 도착할 수 있다. 그 도시의 풍경은 이렇다. 생강과 목화를 가득 싣고 도착한 배는다시 닻을 올리고 떠날 때 즈음이면 피스타치오와 양귀비씨앗으로 선창을 가득 채운다. 또 다른 배에는 다른 물품들이 실린다. 배에 걸린 깃발은 같은 것이어도 실린 물건은 달라진다. 그러나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강을 건너고 사막을가로질러 이 도시에 온 것은 어느 시장에서나 똑같이 찾을수 있는 물품들을 교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 P5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글의 제목은 ‘도시와 교환‘이다. 칼비노는 도시는돈과 상품만 교환되는 곳이 아니라 이야기, 경험, 추억들도교환되는 곳이라고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와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나도도시의 방역지침에 따라서 이리저리 내 삶을 맞춰가며 살고 있다. "곧 보자",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건강하자",
"서로 조심하자." 몇 번은 텅 빈 식당, 텅 빈 밤거리에 어린서글픔을 감지하기도 했다. - P6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졌다. "살아 있는데, 이 살이 있다는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나눠야 할까?‘ 그 질문을 중심으로 여러 생각들이 잔물결처럼 펴져나갔다. 그때 칼비노의 이야기도 생각나곤 했다. 흔하디흔한 시장 한구석이 특별해지는 것은 우리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고,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인어가 우리를 구해줄 수있다고 믿고 있다. 세로운 생각, 새로운 말,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수선년 동안 인간 삶은 그렇게 변해왔다. 그러니 나에게서 어떤새로운 말도,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내가 가장 슬퍼해야 할 일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할까?
- P7

보르헤스는 자신의 인생은 열 개 정도의 단어로 압축될 것이라고 했다. 시간, 불멸, 거울, 미로, 실명, 시는 보르헤스가 평생 열정을 기울여 그 의미를 확장시키려고 노력한 단어다. 위화 역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등 열 개의 단어로 그의 인생을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단어는 이인조, 장애다. 그는 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말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것을 소설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 P9

그런데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다이버나 아마추어 조류학자나 목욕탕 주인이나 인삼파는 상인이나 구름 연구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바로 이 모습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존재하지않을 수도 있었는데 존재한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각자의 가장 무거우면서도 놀라운
‘현실‘이다. 생각할수록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지만 우리의고유성은 계속 하나의 범주로, 하나의 숫자로 지워져만 간다.  - P12

두 번째 이유도 있다. 자신의 단어를 찾는 것은 쉬워 보여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단어를 찾으려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늘 보던 대로 자신을 보고, 늘 하던 이야기만 해서는 단어를 잘 찾아낼 수도, 설령 찾았다 해도 말할 방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제대로 말하기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 위에 다양한 현실이 달라붙는다. 그래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어들이 지도"라는 표현을 썼다.
- P13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내 인생을 걸 가치가 있는 단어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 안에서 만나야 한다. 살아 있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주 슬픈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어둠 속에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 글의 초반에 몇몇 단어들이 그립다고 한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몇몇 단어 안에 비밀이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사람도 듣는 사람도 바꾼다.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나부터새롭게 바뀌고 싶다. 나의 누이는 너의 누이가 되고 나의 전투는 너의 전투가 되고 나의 늑대는 너의 늑대가 되고 너의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리고 다음번에는, 우리 정말로 더 잘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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