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박소란

옷장 속 가장 어두운색을 고른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어서, 때때로 완벽히 숨겨진 채로

나는 있다

멈춰 서 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만지작대는 척하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을 뿐인데
너는 그대로 나를 지나친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깜박이는 신호등
그늘을 펼친 가로수 아래 황급히 들어서면
겹겹의 잎으로 싸인 길을 뜻 없이 걷다 보면
또한 뜻 없는 저녁은 오고

무시로 두리번거린다
무엇을 찾듯이 어떤 우연을 바라듯이

불분명한, 나조차 나를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으레 그런 것일까

때가 되면 출근을 하고 구석 자리에 얌전히 앉아 서류철을 매만지면서
어쩌다 가끔은 아니지 이게 아니다 하는 심정이 되어 창 너머 뜨거운 시선을 부려놓기도 하는 것, 그럴 때마다
네게로 곧장 달려갈 듯이, 그럴 때마다
더욱 고요히 뭉뚱그려진 채로

나는 있다

이런 나를 뭐라고 부를까 너는

시집[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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