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보건실에 비치된 생리대도 차마 부끄러워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희 생리대도 없다며, 온 세상이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어쩐지 죄스러웠다.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가난을 체험하러 나온 사장 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오만한 사람이 ‘해봤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딱 그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영역의 가난에 대해서 더 겸손해야 했다. 더 살펴야 했다. P238


   벌써 오래 전에 마친...책이다.
   호평 일색이어서 구입했던 산문집인데 나에겐 많이 아쉬웠다. ˝골목˝을 갖지 못하고 살아서 그랬을까? 우리가 한 때 후일담, 후일담하던 아류로만 읽혀서 씁쓸했다.

   그러나 뒤쪽으로 갈수록 저렇게 빛나는 페이지들이 있어서 초반의 아쉬움을 뛰어넘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욕한 순간을 맞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린 나를 서늘하게 떠올리게했다.

  곧 사라질 ˝여가부˝, 도대체 ‘뭣이 중한디!!‘ 묻고 싶다.






그런 내게 『못나도 울 엄마』는 현실이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소공녀』 속의 인자한 부자 아빠 대신 『못나도 울 엄마』 속의 괴팍한 할머니가 내 부모라고 나타난다면 나는 과연 작정한 대로 키워준 부모와 이별할 수 있을까.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게 있어 책은 꿈이고 판타지였다. 책을 많이 읽으면 성공한다거나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믿음을 가졌던 적은 없다. 그런 건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오히려 나는 책에 있는 텍스트와 현실을 자주 혼동했다. 나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어떤 동물들처럼 현명할 것이고, 『십오 소년 표류기』의 소년들처럼 고난에 빠져도 맞서 싸울 것이며, 『작은 아씨들』의 베스처럼 끝내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의연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책에 있는 권선징악의 세계, 주인공은 끝내 승리하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미래는 마땅히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나는 늘 안전했다. 그런데 미래가 결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면? 책이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 P30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말 알기는 알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철거 지역에 살았으니 철거민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인기척을 내는 일 말고 철거민으로서 애써본 적도 싸워본 적도 없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 건 내 부모였고, 내 형제였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심정 같은 처지였을 수는 없다. 아무도 못 본 꽃을 내가 본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르포인 『4천원인생』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이 지나갔다. 아, 이건 내가 겪어본 삶이다, 싶다가 바로 그 말을 삼켰다. 그 삶을 겪은 건 내가 아니라 내 가족이고 내 친구였다. 유통 업체에서 일해본 적은 있었지만, 아르바이트였다. 연말 대목에는 보수가 많다고 해서 나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열두 시간 가까이 서 있어야 하는 육체노동과 마냥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에 질려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일을 했다. 등록금을 생각하면 그 정도 힘든 걸로 그만둘 수 없었다. 방학 동안 여행 다니는 친구들과 견주면 나는 내가 위기의 이십 대인 척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돌아갈 학교가 있는 ‘대학생 알바‘일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 동갑내기 점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 나도 유통 업체 노동자의 삶을 알아,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 가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 P45

비교적 쉼터에서 가까운 텃밭을 분양받았는데도 소금기만 없다면 그 밭을 가는 동안 흘린 내 땀으로 물을 줘도 될 지경이었다. 잡초는 또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내 밭의 잡초만 열심히 뽑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농사를 포기한 사람들의 밭에서 원래 심은 농작물과 알아서 뿌리내린 잡초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뤄 오가는 길에 발목까지 잠겼다. 내가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해 텃밭을 가꾸는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 잡초가 숲이 되도록 버려놓은 텃밭 주인들에게 미움이 절로 솟았다. 글은 당연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흙내 나는 소설은커녕 ‘텃밭일기‘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달아놓은 메모장도 한 문단을 채우지 못했다.
그 농사의 마지막은 사십 도가 넘는 고온이 계속되던 날 중 하루였다. 가을 농사를 위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땅주인의 요청에 따라 텃밭 정리를 해야 했다. 지열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지주를 뽑아내고 남은 작물을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는 이 밭에 오지 않으리라, 적어도 가을에는 오지 않으리라, 이를 박박 갈았다. 고작 세 평 밭을 정리하면서 애초에 내가 꾸었던 꿈을 하나하나 반성했다. 삶이라니, 땀이라니, 땅에 대한, 농사에 대한 이해라니, 그 무엇 하나 가당한 것이 없는 오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농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농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땅을 대한다는 건, 삶을 이해한다는 건, 폼으로 낭만으로 자랑삼아 될 일이 아니었다. P148,149
- P148

고통은 왜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하는가.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 건 기금을 모집할 때만이 아니다. 공적 기금이나 후원이 필요한 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고통이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결핍과 아픔과 절망을 누군가의 특정한 이름으로 노출하고 공감을 얻는 사회를 두고 ‘고통의 포르노‘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고통의 증명‘을 강박처럼 요구하는 사회는 맞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기근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전쟁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학대가 있고, 세상 어딘가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과 연대가 가능할 수는 없을까.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고 돕는 사람들의 연대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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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들 창비세계문학 88
에밀 졸라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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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이 책을 마친 소감이다. 세상의 속물이란 속물들의 집합소인 ˝집구석들˝은 신랄하고 빡치는 독설가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환청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뼛속까지 그득한 욕망 덩어리들은 현재 진형형으로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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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가 알을 보호하면서 가슴에 품은지도 꽤 여러 날이 지났다. 검은 고양이는 어쩌다가 자기 몸에서 몇센티미터라도 알이 멀어져 갈라치면 그의 털북숭이 다리로 알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에게는 불편한 날들이 계속 될 뿐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 모든 일들이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하얀 껍질에 푸른 반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생명도 없고 깨지기 쉬운 돌 조각 같은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이렇게열심히 돌보고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때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질 못해서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소르바스는 꼴로네요의 명령에 따라서 식사나 용변 보는 일 외에는 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그 칼슘 껍데기 안에서 진짜로 갈매기 새끼가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양쪽 귀를 번갈아가며 알에다 대보기도 했다.  - P75

소르바스는 무엇 때문인지 배가 근질근질 가려워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라서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갈매기알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노란 주둥이 같은 뾰족한 물체가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소르바스는 앞발로 알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갈매기 새끼가 주둥이로 구멍을 뚫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소르바스는 드디어 그 구멍으로 물기에 촉촉하게 젖어 있는 하얀색 갈매기 머리를들여다볼 수 있었다.
새끼 갈매기가 종알거렸다.
소르바스는 당황하고 어리둥절한 채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자기 피부 색깔이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동하고 무안하기도 해서 자신의 피부색이 엷은 자줏빛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느꼈다.
- P79

소르바스는 작고 귀여운 아기 갈매기를 혀로 열심히 핥아주었다.
그는 어미 갈매기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꽤나 안타까워했다. 만일 인간들의 부주의 때문에 죽은 어미 갈매기의 활강술을 이아기 갈매기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팔자로 태어났다면, 어미 갈매기와 똑같은 이름을 가져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때 꼴로네요가 제안했다.
아기 갈매기가 우리의 보호 아래 자랄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니 아기 갈매기의 이름을 ‘행운아‘ 라는 뜻의아포르뚜나다‘ 라고 짓도록 하지."
"고등어 아가미 같은 훌륭한 생각이군! 멋진 이름이야! 나는 언젠가 발트 해에서 보았던 멋진 돛단배를 아직도 기억하지. 그 배 이름이 바로 ‘아포르뚜나다‘ 였어. 온통 하얀색이었지."
"이 녀석은 나중에 커서 한가락 할 놈이 틀림없네. 출중한 인물이될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이 녀석 이름도 백과사전의 ‘이부분 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걸."
- P109

아포르뚜나다는 눈물을 흘리며 마띠아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털어놓았다. 소르바스는 아기 갈매기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그때까지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넌 갈매기란다. 그건 침팬지의 말이 옳아. 그러나 아포르뚜나다,
우리 고양이들은 모두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아주 예쁜 갈매기지 .
그래서 우리는 너를 더욱 사랑한단다. 네가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했을 때,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지. 네가 우리처럼되고 싶다는 말이 우리들을 신나게 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우리와는 달라. 하지만 네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도하지, 우리는 불행하게도 네 엄마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너는 도와줄 수 있단다 - P117

"날아라!"
아포르뚜나다는 곧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찰나의 일이었다.
당황한 고양이와 시인은 최악의 경우까지도 생각했다. 조바심이 났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고개를 쭉 내밀어 난간 끝을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아기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그대로 떨어지던 아기 갈매기가 날개를 쫙 펴고 주차장 위를 힘차게 날고 있었다. 그리고는산 미겔 성당의 맨 꼭대기까지, 아니 탑 위에 달린 팔랑개비까지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아포르뚜나다는 아무도 없는 함부르크의 상공을 혼자서 쓸쓸히날고 있었다.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저 멀리 있는 항구의 기중기들과 선박들의 마스코트 위를 자유자재로 날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되돌아와서 산 미겔 성당의 종루 주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소르바스! 자, 봐요! 이제 날 수 있어요!"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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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날개를 자랑하는 갈매기 켕가는 선박의 깃발들을 관찰하는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깃발들 하나 하나가 서로 다른나라의 언어들로 쓰여졌으며, 같은 물건이라도 나라와 언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란 꽤나 복잡한 동물이야! 우리 갈매기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말 한마디면 다 통하는데 말야."
켕가는 같이 날고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말야. 그렇게 복잡한 데도 사람들이 서로서로 이해하고 말이 통할 수 있다는 건 더 희한한 일이지."
동료 갈매기도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해안선 저 멀리로 진녹색 풍경이 보였다. 드넓은 초원이었다. 바람을 타고 느릿느릿 돌고 있는 풍차 날개가 보였고, 방파제 아래에서는 양 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이윽고 선두 갈매기는 무리에게 하강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갈매기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앞다퉈 하강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청어 떼 위로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우며 돌진했다. 한류성기류를 탔기 때문에 하강 속도가 더 빨랐다. 거의 120마리에 달하는갈매기들은 마치 떨어지는 화살처럼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갈매기들이 잠수할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었다. 갈매기들이 수면으로 다시 올라올 때는 모두가 입에 청어 한 마리씩을물고 있었다.
- P12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는 모처럼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4주 동안은 내 세상이다! 그러나 이웃집에 사는 소년의 친구가 매일을 것이다. 소르바스에게 통조림 먹이도 주고 작은 자갈이 깔린 고양이 집을 깨끗이 청소해주러 말이다.
어쨌든 이제는 의자와 침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리 뒹굴 저리뒹굴 게으름피우고 농땡이도 칠 수 있게 되었다. 발코니에 나가 지붕에도 기어오르고 그곳에서 늙은 밤나무 가지로 뛰어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마당까지도 내려갈 수 있다. 안마당은 동네의고양이 친구들과 종종 만나서 놀던 곳이었다. 결코 지루하지 않을거야. 결코!
몸집이 큰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는 신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으로 수 시간 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르바스는 마냥 즐거워할 수 있었다.
- P25


켕가는 힘없이 물 위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일생중 가장 길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죽음의공포에 떨면서 자문해 보았다. 혹시 죽음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모습의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고기 밥이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질식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굶어 죽는것이 아닐까? 그는 죽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통 전체를 뒤흔들어댔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기름에 젖은 날개가 몸에서 떨어진 것이다. 은빛 깃털은 검은 농축 물질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날개는 최소한 펼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래, 여기서 빠져나가서 높이, 아주 높이 나는 거야. 그러면 석유가 햇빛에마를지 누가 알아?"
켕가는 한 가닥 희망을 찾은 듯 혼자 중얼거렸다.
    - P30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갈매기도 소르바스의 말을 인정했다.
"보아하니 몰골이 꽤나 엉망진창이군, 온몸에 묻은 게 뭐니? 악수가 심한데!"
소르바스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검은 파도에 휩쓸렸어. 바다의 재앙 덩어리 말야. 나는 곧 죽게될 거야."
갈매기가 처량하게 읊조렸다.
"죽는다고? 그런 소리 마. 너는 단지 피곤하고 약간 지저분할 뿐이야. 그게 전부야. 그런데 이왕이면 동물원으로 날아가는 게 어떻겠니? 동물원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아. 거긴 너를 도와줄 수의사들도 많아."
소르바스가 말했다.
"그럴 수가 없어. 이게 내 생애 마지막 비행이었어."
갈매기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면서눈을 지그시 감았다.
- P36

고양이 네 마리는 오래 된 밤나무 밑에서 구슬픈 기도를 올렸다.
곧이어 가까이 있던 다른 고양이들과 강 건너 저편에 있던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이에 합쳐졌다. 뿐만 아니라 개들의 울부짖음과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들, 그리고 등지에 있는 참새들이 구슬프게 우짖는소리와 개구리들의 서글픈 울음소리, 심지어는 침펜지 마띠아스의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까지도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와 합쳐졌다.
함부르크에 있는 모든 집 안의 등불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그 날밤 항구의 주민들은 밤새 궁금해했다. 함부르크의 동물들을 갑자기사로잡아버린 저 이상한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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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는 가만히 소종을 집어들었다. 분노의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그는 그의 항복을 비우는 동료들 속에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들거리며 걸어갔다. 아! 저 장이라는 인간! 좀전의 쓰디쓴 훈계! 하지만좋다고 느껴지는 훈계에 충격을 받은 모리스는 장에게 주체할 수 없는증오심을 느꼈다. 슈토가 저따위 하사들은 전두가 발발하면 머리에 중알을 맞기 십상이라고 투덜거렸기에, 분노에 찬 모리스는 담장 뒤에서장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사소한 사건이 모두의 주의를 다른 데로 이끌었다. 장과 모리스가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과슈가 슬그머니 자기 소총을 땅바덕에내려놓은 것을 루베가 알아챈 것이었다. 왜 그랬지? 파슈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처음으로 잘못을 저지른 모범생처럼조금 부끄럽지만 내심 기쁜 표정으로 슬며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주명랑하고 쾌활해진 그는 두 팔을 흔들며 걸어갔다. 끝없이 단조롭게어지는 무성한 밀밭과 홉밭 사이로, 불처럼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기나긴 도로를 따라 패주가 계속되었다. 총도 배낭도 없는 낙오병들은 이제 길을 잃고 터덜터덜 걷는 군중이요, 거지와 건달이 뒤섞인 인파에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은 대문을닫았다.
그때 누군가와 조우하며 모리스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 P47

랭스에서 내린 106 연대가 거기서 야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모리스는 깜짝 놀랐다. 전방 주둔군과 합류하기 위해 샬롱으로 가는 게아니었단 말인가? 두 시간 후 그의 연대가 시내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쿠르셀 근처에서, 엔에서 마른으로 이어지는 운하를 따라 펼쳐진 드넓은 평원에서 소총을 걸어총으로 세워뒀을 때, 게다가 아침부터 퇴각한살롱의 전군이 여기서 야영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그의 놀라움은 한층 더 커졌다. 과연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생티에리와 라뇌빌레트까지, 심지어 라옹 도로 너머까지 천막이 쳐졌고, 저녁이되자 4개 군단의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렇다면 파리 근처에 포진해서프로이센군을 기다린다는 계획을 세운 게 분명했다. 모리스는 기분이좋아졌다. 이게 가장 현명한 작전이 아니겠는가?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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