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나는, 내가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은 시간 동안 어머니가 이곳 병원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실제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껏해야 어머니가 하는 일은 식당에서 식사나 하고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는 일이 고작일 것이다. 나는 장차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하여간죄책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건 생명이 멈추어버린 것과다를 바가 없었다. 나의 삶이 고통과 죄책감으로 소멸되는이치와 같은 것이다. ‘어머니는 곧 ‘나‘임을 실감한다. 

- P57

나는 어머니의 노쇠한 모습, 전과는아주 달라져버린 참혹한 얼굴을 무심코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어머니의 변화된 모습에 대해서 이미 타성에 젖어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가던 그 끔찍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사람처럼 자꾸만 집을 되돌아보았다. (가을이면 사방으로 가로수가 즐비했던 안시에 살았을 당시 그 집 정원에는 거북 한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거북은 쇠창살 문에 달라붙어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중에야 생각난 것은 어머니가 떠날때 찾았던 것이 바로 이 거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나서어머니가 쓴 글이 이것이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 P90

어머니는 받기보다는 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인정받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 나 역시 어릴 적에는 사랑받고 인기를 누리고 싶어서그림책과 사탕들을 나누어주길 좋아했다. 그 후론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게다가내가 지금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주는 방법이 아닐까??
- P112

1986년

2월 2일 

일요일어머니의 현재 생활을 이야기하고픈 소망을 가지게 된후로는, 어머니를 문병하고 난 후 지금까지 항상 써오던 일기를 계속해서 쓸 수가 없었다. 아마도 더 이상 글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수많은 사연들, 즉 어머니의 과거 속에 내가 존재해 있었고 그때문에 더욱 이 글쓰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P135

4월 7일 월요일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울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나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거기 제자리에 있건만생각은 멈추어버렸다. 그렇다. 정지해버린 것이다 - P145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예측조차도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느니 차라리 미쳐서라도 살아 있기를 바랐다.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와 화해하려고 이 모든 시간을 보냈지만 충분히 화해하지 못했다. 어제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제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린 개나리는 아직도 잼을 담았던 병 속에 꽂힌 채 탁자 위에 있었다. ‘숲속의 과일 이라는 네모난 판자 모양의 초콜릿을 가져다드렸더니 어머니는판 한 줄을 모두 먹었다. 어머니를 씻겨드리고 오데코롱 화장수를 뿌려드렸다. 그게 끝이었다. 어머니는 오직 생명력일뿐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움켜잡고 일어서기위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곤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가엾은 작은 인형 같았다.  - P146

이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어머니가 한 말들을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아니 기억나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자, 모두들자리 잡고 앉으세요."라고 말했다. 대략 이런 말을 했던 것같다.
- P147

내가 이 고통에서 곧 벗어날 수 있게 될까?
일거수일투족을 옮길 때마다 어머니와 관련된 추억들이 오른다. 어쩌면 난 이렇게 나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기록하여 진술함으로써 내부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뿌리를 끌어내어 고갈시켜버리고 지쳐버린 고통이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와 함께 고통을 상쇄시켜가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전에 적어놓았던 메모들을 다시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어머니가 피폐하기 시작한 때부터 최근 이 년 반 동안의 기록이다. 이 기간 동안 어머니는 나와가까워졌고 그러고 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다시 어린애가 되었지만 성장하지는 않았다. 자꾸만 어머니에게 음식을먹여드리고 손톱을 잘라드리고 머리 손질을 해드려야 할 것만 같은데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지난 부활절 일요일, 깨끗하고 부드럽던 어머니의 머릿결, 그 모든 것이 멈추어버렸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 P148

4월 28일 월요일

오늘 아침, 계산서에 적힌 막힌 물이라는 말을 읽으면서내가 예닐곱 살 적에 이 말을 꽉 막힌 놈이라고 부르곤 했던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부르던 어머니의 별명이었다. 눈물이흘러내린다. 유수 같은 세월의 흐름 때문이다.
- P164

오로지 ‘이분은 내 어머니이시다‘ 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모든 것을 망각하며 지냈던 순간들이었다. 어머니는 더이상 오래전 내 삶의 저편에서부터 이제까지 내가 알아왔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참담한모습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당신 본래의 목소리와 몸짓, 웃음을 발견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어머니임을 실감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일기를 양로원에서의 장기체류에 관한 객관적 증언으로 읽지 말 것이며 하물며 어떤 고발로도읽지 말고 (간병인 대부분이 정성스런 헌신을 보여주었다)오로지 고통의 잔재로서 읽어주길 바란다.
- P170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어머니가 글로 마지막 문장이다.
치매에 걸리기 전 본래 모습의 어머니를 꿈에서 자주다. 어머니는 마음속에 살아 있지만 실제론 죽었다. 나는잠에서 깰 때마다 잠시 동안 어머니가 죽었으면서도 동시에 이중 형상으로 실제로 살아 있음을 확신한다. 마치 죽올의 강을 두 번 건넌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처럼,

1996년 3월 아니 에르노 - P171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주고 단장해주는이 기쁨이여!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 한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옆 사람이 어머니의 목과 다리를 쓰다듬고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살아 있다는 건 어루만지는 손길을받는다는 것, 즉 접촉을 한다는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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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어머니는 극도로 쇠약해져서 무기력하고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거실 의자에 앉아 있다. 입은 벌리지 않았지만 멀리서보면 마치 벌어진 것 같다.
어머니는 ‘도대체 찾을 수가 없구나"라고 말한다. (자신의 화장도구 세트와 조끼, 그 밖의 모든 것을 찾고 있다.) 그녀는 물건들을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P9

1984년

1월

어머니는 항상 자신의 방과 내 작업실을 혼동한다. 작업실 문을 열었다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슬며시도로 닫는다. 이내 걸쇠가 올라가고 문 잠기는 것이 보인다.
마치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 P13

고속도로 위에는 자동차들이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일요일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의 옆 사람은 한 손을 팬티 속에 집어넣은 채 누워 자고 있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선 참혹한 모습이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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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국왕은 아침부터 조용히 전쟁터를 바라보며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아마도 세 시간이 흘렀다. 오직 결정적시기가 문제였다. 톱니바퀴는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분쇄기가 덜컹거리며 온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전쟁터가점점 좁혀졌고, 검정개미떼가 물밀듯 쇄도하며 스당을 포위했다. 도시의 유리창이 반짝였고, 왼쪽 카신 교외 부근에서 가옥이 불타고 있었다. 그 너머로, 동슈리와 카리냥 쪽 인적 없는 들판에는 눈부시게 작열하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즉 정오의 불타는 태양 아래 뫼즈강의 많은 물, 짙은 녹음을 뽐내는 나무들, 광활하게 펼쳐진 기름진 땅, 풀이무성하게 자란 푸른 초원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프로이센 국왕에게 필요한 것은 명료한 정보였다.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그는 자기가 부리는 말들의 동향을 확실히 파악하고자 했다. 그의 오른쪽에서 대포 소리에 놀란 제비들이 푸드덕 날아올라 이리저리맴을 돌더니, 하늘 높이 솟구쳐 남쪽으로 사라졌다.
- P316

앙리에트는 그녀를 찾는 죽어가는 두 눈, 단말마적 임종의 고통, 시체를 흔드는 발길질까지, 모든 것을 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손을 가만히, 노여움에 차서 이로 깨물었다. 바이에른 병사가 끔찍한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를 넘어뜨렸고, 때려죽일 기세였다. 둘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피 묻은 붉은 턱수염과 머리칼, 광기로 뒤집힌 그 병사의 크고 푸른 눈을 그녀는 결코 잊지않을 것이었다.
잠시 후, 앙리에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명히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남편 곁으로 가서, 남편을 집으로 데려가 밤새워지키고 싶은 한 가지 욕망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몽을 꾸는 듯, 남편에게로 한 걸음 뗄 때마다 온갖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또다시 격렬한 일제사격이 터졌고, 바제유를 점령한 독일군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프랑스 해병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전투가 너무도 치열하게 전개되었기에, 그녀는 왼쪽 골목으로, 공포에 질린 주민들 틈으로 몸을피했다. 그러나 그 전투는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포기한 진지들을 되찾기는 이미 가망이 없는 듯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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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비어 있고, 나는 넘어신 바로 그 자리에누운 채로이다. 바다 안개가 사물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수평선에는 돛대 하나 보이지 않고, 내 앞 바위 위에 수천 마리 새들이있다. 다른 바위에 물개 일가가 있다. 아비 물개는 지치지도 않고 파도 위로 솟아오른다. 고기를 입에 물고, 번들거리며, 헌신적으로,
이따금 제비갈매기들이 너무도 가까이 내리앉아 나는 숨을 죽이지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내 오랜 욕망이 깨어 일어나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조금만 더, 그러면 새들이 내 얼굴 위에 내려앉고, 내독과 품속으로 파고들어, 나를 온통 뒤덮을 텐데 하고... 마흔네살에, 나는 아직도 어떤 본질적인 애정을 꿈꾸는 것이다. 하도 오랫동안 꼼짝않고 해변에 누워 있었더니 마침내 펠리컨과 가마우지 들이 나를 빵 둘러 원을 만들고 말았다. 조금 전에는 물개 한 마리가 파도에 실려 내 발치까지 왔었다. - P9

"엄마한텐 말하지 마, 어쩔 수가 없었어. 엄마이기 때문이라는 건알지만, 그것도 역시 아름다운 하나의 사랑이라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결국 너를 갖고 싶어 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널 그처럼사랑해주는 여자는 평생 또 없을걸, 그건 분명해."
그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사십 줄에 들어서야 나는 겨우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토록 어려서, 그토록 일찍, 그토록 사랑 받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나쁜 버릇을들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어디에나 다 있는 일인 줄 알고,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요구하게 된다. 바라보고 갈망하고 기다린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인생은 그 여명기에, 결코지키지 않을 약속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죽는 날 까지 찬밥을 먹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어떤 여자가 당신을 안아서가슴에 품어준다 해도 조사에 불과할 뿐, 우리는 버림받은 개처럼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무덤으로 돌아와 짖어대는 것이다. 이제다시는, 이제 다시는, 이제 다시는 사랑스런 팔들이 당신의 목을두르고, 아무리 달콤한 입술이 사랑의 말을 속삭여도, 당신은 계속달려야만 한다. 당신은 너무도 빨리 샘을 지나쳤고, 그리고 바닥나도록 다 마셔버렸다. 다시 갈증에 사로잡힐 때, 사방으로 몸을 던져보아야 샘물은 없고, 신기루뿐이다. 여명의 첫 빛 속에서 당신은 사랑에 대해 매우 압축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세세한 자료들을 잔뜩 머릿속에 넣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도 비교라는 독을 품고다니면서, 전에 한 번 받았던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한다.
나는 어머니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어머니들에게 누군가 달리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에게 애인이있었다면, 나는 샘물들 주변에서 매번 갈증으로 죽어가며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진짜 금강석에 정통하다는 것, 그것이 내겐 불행이었다.
- P37, 36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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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정말지도력도, 군사적 재능도, 단순한 상식도 없는 것인가? 그러나 병사들은 자기들을 곤경에서 구해준 이 유일하게 현명한 결정이 만족스러웠기에 더이상 지문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했다. 장군들부터 졸병들까지모두가 파리 가까이 가면 다시 강군이 되리라고, 바로 거기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동이 트자마자 부지에를 떠나 르센으로 행군해야 했다. 이내 병사들이부산하게 움직였고, 나팔소리가 울렸으며, 명령이 교차했다. 후미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벌써 군사 장비 마차와 병참 장교 마차가 선두에서출발했다.
- P131

가로질러 불토부아로 이동했으며, 3군단은 연락망을 확보하기 위해 왼쪽, 즉 벨빌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이옥고 106 연대가 뫼즈강을 향해 음울한 행군을 시작했을 때, 모리스는 연로한 데로 부인의 얇은 커튼에 비친, 방안을 끝없이 오가던 황제의 음울한 그림자를 다시 떠올렸다. 아! 대패가 확실한데도 왕조의안녕을 위해 사지로 급파되는 이 절망의 군대여, 이 파멸의 군대여! 진격하라, 진격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빗속으로, 진창 속으로, 전멸을향해!
- P147

병사들은 길 양쪽 가장자리로 열을 지어 걸었고, 장교들이 두 대영 사이로 지나갔다. 랭스에서 야영한 다음날 샹파뉴에서 병사들이 했던 즐거운 행군, 농담과 노래로 떠들썩했던 행군,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 격퇴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배낭을 가볍게 들어올렸던 행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 분노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소총과배낭을 저주했고, 지휘부를 더이상 믿지 않았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채 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가축떼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그저 앞으로옮길 뿐이었다. 이 가련한 군대는 자기들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 P153

장은 다시 수통을 채우러 갔고, 그 물을 단숨에 마셨다. 실은 그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너무 굶주려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 다시 행군! 힘내, 모리스, 동료들을 따라잡아야 해!"
모리스는 장의 품에 몸을 맡겼고, 어린아이처럼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어떤 여자의 품도 그의 가슴을 그렇게 따듯하게 덥힌 적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한 존재로부터 포근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은 그에게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 더욱이 그의 가슴과 맞닿아 있는 한 존재가 애당초그가 혐오했었던 무지렁이 농부라는 것이 이 순간 우정과 감사를 한없이 증폭시켰다. - P172

이것이야말로 원초적 우정, 일체의 문화와 계급 이전의 우정, 자연이라는 적의 위협 앞에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하나로 결합한 두 인간의 우정이 아닐까? 그는 장의 가슴속에서 인류가 뛰는소리를 들었고, 구원자인 장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한편 장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과 달리 천부적 재능과 지성을 갖춘 친구를 보호한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무시무시한 폭력과 강간을 당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뒤로 그는 자신에게는감정이 없다고 믿었고, 인간이란 모두 고통의 원인이므로 사악하지 않은 인간들조차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슴속에 우정이 흘러넘쳤다. 굳이 포옹할 필요도 없었다. 그토록달랐음에도 둘은 서로에게 깊이 감동했고, 내면에서 진정으로 교감했다. 레미로 가는 이 끔찍한 도로 위에서, 두 남자는 서로에게 기대며 마침내 연민과 고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 P173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선부른 결정이에요. 언젠가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야. 이, 사랑해요,
삼다.
그는 입맞춤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하늘이 내려준 지복에,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다고 여긴 행복한 삶을 더이상 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으로 그를 꼭 껴안았고, 되찾은 보물인암, 이제 아무도 자기한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자기만의 보물인 양 그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퍼부었다. 잃어버렸던 그를 되찾았어, 또다시 그를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야.
- P200

대니의 짙푸른 경사지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왼쪽 창의 구릉지대도 화염에 휩싸이 있었다. 땅에서 솟은 듯한 대포들은 발이 늘어나는 벨트 같았다. 누아에서 1개 포병대가 발랑을 폭격했고,
바들랭쿠르에서 1개 포병대가 스당을 공격했으며, 마르페 아래 프레누아에서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1개 포병대가 도시 위로 쏘아올린포탄은 7군단이 포진한 플루앙고원에서 폭발했다. 바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언덕들이, 푸른 계곡을 닫으며 언제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언덕들이 돌연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요새로 변한 채 스당의 성채를 파괴하는 모습을 단말마적 고통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벽토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총탄 한 발에 경계벽 너머 그의 집 전면 모서리가 떨어져나갔다. 그가분노하며 소리쳤다.
"우리집을 박살낼 작정이군, 날강도 같은 놈들이!"
바로 그때 그의 등뒤에서 퍽하고 물컹한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앳된 얼굴의 이 병사는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첫 사망자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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