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어떤 그림 속의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가 시에서 나와
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마는
그렇게 된다면
나온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2014년 봄
이규리



생일

그해 봄은 참혹이라고 씌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제 생을 툭, 툭, 떨구던 거북이 주름진 항문을 천천히 오므릴 때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
사랑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모르겠다.
그냥 헐겁게 끝이 났을 뿐이다
자랑도 수고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닫아거는 눈꺼풀

결과물이 툭 떨어지는 순간,

모래를 뒤집어썼다.
- P12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 P13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 P66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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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지금 얘기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거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하버드 시절의 기억은 마음 한구석에 꼭꼭 잘 숨긴 상태였다. 잊었다기보다는 언젠가 그 기억을 되살릴 만한 힘과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꺼내 보려고 꽁꽁 얼려놓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 내가 꺼내고 싶은 것은 그 이후의 사랑, 그 오랜 세월내가 품어온 사랑, 너무나 그립지만 돌아가 다시 살고 싶다.
는 생각은 단 일 분도 들지 않는 그 시절로 기어코 나를 잡아끄는 마법과도 같은 그 이후의 사랑이었다. 아마도 그 사랑이나로 하여금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의 대장정을 시작하게만든 것 같다. 나는 내 방패이자 보호막이자 대리인인 아들을데리고 케임브리지에 다시 와보고 싶었다.
- P18

이 작은 지하 카페에 있던 모든 것이 내가 떠나왔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중동의 어느 곳을 연상시켰고, 나는 내가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하버드나 미국,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심지어 언젠가 낳을 아이를 위해서도, 내가 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케임브리지에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고,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았고, 들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집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사람들은 내 동포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동포가되진 않을 것이었다. 여기는 내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내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나 자신이 아니었고, 내가 될 수없었다. 1977년 여름의 케임브리지가 그랬다.
- P23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티파자 포스터를 보면 언제부터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바다와 해변의의식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카페 알제의 모든 것이 나를 알렉산드리아로, 칼라지를 튀니스로, 알제리인 모우모우를 오란으로 데려갔다. 우리가 매일 카페 알제에 들르는 건 아마도우리가 북아프리카에 두고 온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삶이 길을 잘못 든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고, 그것은 마치 골절과 뼈에 간 금, 탈구가 치유되고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부목을 대고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오전의 태양을 피해 카페 알제로 들어와 강한 커피 향과 세제 냄새를 맡으면서, 자기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길을 찾았다.
- P63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지만 그는 하버드 광장에서 목소리가 가장 컸다. 나는 속 좁고 조심스럽고 소심한 반면 그는 무모하고 잔인하며 작은 불씨에도 곧 터질 화약고 같았다. 그는 자기 마음을 솔직히 말했지만 내 마음은 수장고에 있었다.
그는 항상 정면에 대고 말했지만 나는 상대방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시렁거렸다. 그는 그 무엇도 지지하지 않았고 일절 타협하지 않았으며 모두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나는모두를 포용했지만 단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내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케임브리지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과 말을 튼 반면,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사 년째 공부했지만 그해 여름에는 거의 모든 날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은 채 보냈다. 그는 기분이 상하거나 지루할 땐 발끈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폭발했지만 나는 그야말로평정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확고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타협이란 이름과 평정심이란 별명을갖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없었지만 나는 누가 조금만 얼굴을 붉혀도 아무것도 못 했다.
- P72

우리 둘 다 돈이 없었지만 내가 그보다 훨씬 더 가난했이 있다. 그 기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가난했던과기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자의식보다 부끄러움을 더 많이.
대 깊이 느꼈다. 수치심은 언제나 내 목숨과 내 영혼을 쉽게배앗고, 내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나를 헌 양말 뒤집듯 뒤집어서 내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더 보여줄 것이 없고 나 자신을 더 참아줄 수도 없으며,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함으로써 못난 내 모습을 만회하려 하는 지경까지 나를 끌고갈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안다는걸 자랑스러워 했지만 나는 그 작은 카페를 나오면 그와 함께있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그는 아랍인이었고 나는유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즉시 역할을 바꿔서 살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 P73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남자였다. 나는……….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는 목소리였고, 내 과거와의 잃어버린 연결고리였으며, 내가 다른길을 택했다면 나의 롤모델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는 야성적이었지만 나는 길들여지고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나를 강력한 용액에 담가서 내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습관과미국에 양보한 모든 것을 내 피부에서 벗겨낸다면 내가 아니라 그가 발견될 것이다. 내가 처음 카페 알제에서 용기를 내그의 테이블로 걸어가 침묵을 깼을 때 그가 내게 불쑥 다가온것처럼, 별안간 푸른 지중해가 펼쳐질 것이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다른 시대에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내게 말을 걸었을 것이다.
- P74

케임브리지에서 <스타워즈>를보지 않았고 보기를 거부했으며 그해 여름 갑자기 불어닥친스타워즈 열풍을 경멸하고 개탄한 사람은 나와 칼라지밖에없었다. 오비완 케노비와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가세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유명한 등장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R2-D2와 C-3PO가 그들을 따라다니는 어릿광대나 아부하는 신하라도 되는 듯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칼라지에게는 그 모든 것이 특대형 대용품의 상징일 뿐이었다.
처음에 내가 칼라지에게 끌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심술궂은 육감이나 생존본능,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전까지 상대방의 숨통을 죄는 고약한 성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많은 사람을 떨어져나가게 한 짐짓 거친 척하는 그의 태도도 아니었다. 내게는 그 태도가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건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엄마를 욕하면 그 다른 아이도 질세라 상대방 아이의 엄마 욕을 하고,  - P75

그는 나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잃어버린 원시적인 모습의 나. 나의 그림자,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다락방에 숨어 사는 미친 형제, 나의 하이드 씨,
나의 아주 아주 거친 초고, 가면을 벗고 속박의 쇠사슬에서도 벗어난, 완성되지 않은 나, 속박받지 않는 나, 누더기를걸친 나, 격분한 나,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세련된 매너가 없는, 영주권이 없는 나, 칼라슈니코프를 들고 있는 나.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 이유는 그가 날마다.
카페 알제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믿거나 존중해서가 아니었고, 옛날 잡동사니를 뒤지는 듯한 그의 음색과 어조에서 내가 됐어야 했던, 그러나 운명을 거스르고 되지 않은 어떤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날마다 늘어놓는 미국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가 통렬히 비판하는 대상이 실은 미국이 아니었고, 그의 목소리가 막강한 서구 세계를 막아내려고 애쓰는 중동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들은 것은 나이 든 인간의 거칠고 쌕쌕거리며 겁먹은 목소리, 인류애처럼 보이고 그것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닌,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모었다.  - P76

그게 바로 그가 브뤼똥", 즉 천도복숭아를 싫어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천도복숭아처럼 달콤해지고있었다. 친절함과 진심은 없이 달달한 말만 하고, 조작되고,
꿰매지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진짜로 태어나지 못한 천도복숭아. 머리는 자두 모양, 엉덩이는 복숭아 모양, 고환은 초콜릿 과자 모양. 과일 왕국에 사는 실제 친적은 단 하나도 없는 천도복숭아, 그들의 모든 것이 접붙여진거였다.
"우리처럼 말이죠?" 어느 날 카페 알제에서 칼라지가 카터 대통령에 대해 웃는 꼴은 물론이고 얼굴 자체가 천도복숭아처럼 달달하고 가식적이라며 비난하는 말을 듣고서 내가그에게 물었다. 나도 카터 대통령의 얼굴이 천도복숭아 같다는 점에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라고 뭐 다른가? 우리도 그와다르지 않았다. 세 개의 대륙에서 살아본 우리야말로 진정으로 접붙여진 천도복숭아가 아닌가?
- P77

어땠든 처음부터 우리의 우정을 공고히 해준 것은 프랑스와 프랑스어에 대한 사랑, 아니 프랑스라는 이데아에 대한사랑이었다. 사실 우리에게 진짜 프랑스는 더 이상 쓸모가 없었고, 마찬가지로 우리도 프랑스에게 쓸모가 없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죄책감이 깃든 비밀로 간직했다. 이 사랑을 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믿지도 않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스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가 북아프리카 식민지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물려받은 이제는 초라해지고 빛이 바랜 가보처럼 우리의삶을 맴돌고 있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은 프랑스도, 프랑스의설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우리가 삶에서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단단한 무언가에 붙인 별명이었다. 우리가 꼭 붙들어야 했던 가장 단단한 것이 과거였고, 그 과거가프랑스어로 쓰였을 뿐이었다.
- P79

내가 그를 도운 것은 실제로 그의 이민국 인터뷰 준비를 몇 시간 도와준 적이 있었다 - 단순히 별 생각 없이 한 일이거나 요청을 거절할 좋은 핑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다시 읽는 일이 절대로없을 그 모든 책을 읽는 것 말고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는나 자신을 보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는 굉장히 고마워했고, 살면서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해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말 말라고, 별일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내 말이 틀렸다면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모르는 것이 좋은 친구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점을 두고 논쟁을 벌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내 몸짓은 너무 쉽게, 어떤 위험이나 의무, 양심의가책, 망설임, 극복해야 할 어려움 없이 나왔다.  - P83

그가 그랬고, 내가 그랬다. 사방에 실수들이 있었고 각각의 실수는 작고 은밀한 방식으로 곪아 터지고 있었다. 실수와 헛소리, 헛소리는 우리만의 저항이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려고 알코올을 들이붓듯이 그는 ‘헛소리‘와 ‘개소리‘를 외쳐댔다. 처음 한 대를 맞을 때 ‘헛소리‘를 외쳤고, 마지막에도
‘헛소리‘를 외쳤다. 더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들 앞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헛소리‘를 외쳤다. 또한 우리자신을 향해서도 ‘헛소리‘를 외쳤다. 욕지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였고, 존엄성이라는 흔들리는 매립지에 세워진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그다음에는 울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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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요즘 말로 순삭~! 여러 이유를 각설하고 가독성이 있다는 건 작가의 능력이다. 그것도 출중한.
편의점이라고는 여행지에서 끼니가 마땅찮을때 컵라면먹으러 몇 번 가본게 전부여서 어눌하고 굼뜬 내 쇼핑을, 눈치빠르고 배려심 두둑한 독고씨 덕에 쉽게 할 수 있었다. 내 주변에도 저렇게 매력적인 독고씨가 있을 텐데.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화를 끊고 염 여사는 주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기름 튀는 불판에 올려진 것처럼 아팠다. 통중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슴 전체를 압박해왔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들이켰다. 가슴의 불을, 심장의 고통을 끄기라도 할 기세로 마시다.
보니 사레가 들려 캑캑거려야 했다. 술 취한 아들의 흰소리를 잊기위해 술을 마시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어떡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깔끔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식의 문제는 늘 그녀를 고장 난 저울로 만들었다. 편의점을 정리해 아들놈의 사업인지 사기인지를 돕는다고치자, 잃는다고 치고, 그럼 무엇이 이어질까? 그건 아마 남은 유일한 재산인 이 방 두 개 빌라겠지. 청파동 언덕에서 20년째 빛바랜채 서 있는 구옥 빌라의 3충, 염 여사의 마지막 터전까지 빨리고 나서야 아들은 실패를 멈출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들은 못난이에 준사기꾼이다. 며느리 역시그걸 알게 되었는지 결혼 후 2년이 되어갈 즈음 부랴부랴 이혼했고, 그때는 며느리의 야멸찬 결정에 분노했지만… 결국 잘못은대부분 아들에게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 후 3년간아들은 남은 재산마저 다 털어먹고 초라한 꼴이 되었다. 이럴 때 유일하게 도울 수 있는 엄마인 나는,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 P27

버스를 타고 홀로 돌아오는 길에 염 여사는 편의점 직원들을 떠올렸다.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아들놈과 오지게도 잘난 딸년보다 요즘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가족 같고 편하다. 이렇게 말하면 딸은또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하면 악덕 업주니 옳지 않다느니 따지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랴. 직원들에게 날 가족같이 생각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원들을 가족같이 여겨 무리한 업무를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염 여사는 지금 가까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편의점 직원들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전에 편의점을 책임지는 오 여사는 동네에서 20년을 알아온친구이자 같은 교회 성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녀는 염 여사를 친언니처럼 따르고 지난 시간 함께 고락을 나누지 않았던가. 오후의시현은 딸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한 게 늘 챙겨주고 싶게 만든다.  - P31

한동안 독고 씨는 자신의 수염을 쓸어대며 입술을 조물딱거렸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거절당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독고 씨에게 손으로 수염 그만 만지작대고 어서 말하라고 독촉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때 결심한 듯 독고 씨가 염 여사를 응시했다.
"그럼..… 한 병 더요....….. 한 병만 먹고 끊는 건 좀….. 억울해서..."
- P50

1년간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면 알바생에게 가장 중요한 사장이 괜찮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정년 퇴임했다는 사장님은 시현에게 어른이란 바로 이런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분이다. 요즘 편의점은 주휴수당을 주지않으려고 주 5일 근무하는 알바를 두지 않는다. 이틀씩 사흘씩 끊어 고용하기에 한곳에서 진득하게 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알바 모두가 주 5일 근무다. 또한 사장님은 시현과 같은 알바생에게 시켜야 할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했고, 솔선수범했으며, 무엇보다 직원들을 귀하게 대했다.
‘사장이 직원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직원도 손님 귀하게 여기지않는다."
요식업으로 일가를 이룬 부모님 아래서 자란 시현이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다. 가게도 결국 사람 장사다. 손님을 귀하게 대하지않는 가게와 직원을 귀하게 대하지 않는 사장은 같은 결과를 얻게된다. 망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파동 이 편의점은 적어도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P53

독고 씨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시현은 안도했다. 그녀는이제 독고 씨가 많이 먹어 떨어진 카누 블랙을 알아서 채워주고 있었다. 그를 통해 누군가를 돕는 일이 보람 있다는 걸 체험했고,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어제도 유튜브 영상을 찍으며 독고 씨를 생각했다. 그에게 가르쳐주듯 차분히,
천천히, 말하고 움직였다. 어쩌면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도울 방법.
은 그렇게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아무런 사회와의 끈도 없다고 느끼던 자발적 아싸인 자신이 무언가 연결점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녀 역시 독고 씨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 P8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그녀는 이번에 나선 길에서 인경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밥 딜런 생각이 났다고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된 까닭에 인경은 자기도밥 딜런의 팬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P140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제목을 적고 두 칸 줄을된 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왔다면, 그것에 대해 북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 만큼 생각의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할 일은 타자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 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봉인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하늘의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글도 밀도를 더해갔다.
그 새벽,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그녀의 작업실뿐이었다.
- P163

"당신 어머니 요 며칠 계속...… 아프시다고. 그런 어머니 돌보진못할망정....… 날 자르면 편의점 야간 일.... 어떡하려고? 또.....
………엄마 시키려고?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해?"
…텅
무언가가 민식의 몸속 어딘가에 낙하했다. 고통의 추가 내장을 관통해 바닥으로까지 그의 몸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민식은엄마가 아픈 것도, 엄마가 자신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남에게 말한다는 것도 몰랐다. 사내가 판결문 읽듯이 숨을 골라가며 진술한 말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민식을 심해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 P181

그로부터 한 시간 동안 민식은 엄마와 맥주를 마셨다. 냉장고에있던 에일 맥주 네 캔을 모두 마신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대작을 한 건 그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술을 마신다는 것도 낯설었고 둘만의 대화가 지속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지난 몇 년간 민식은 엄마에게 늘 무언가를 요구했고, 엄마는 그것이 무엇이든 거부했으며,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지금 민식은 엄마와 적당히 취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집쟁이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하다가 헛웃음을 지었고,
얄미운 누나와 매형 흉보기에 같이 열중했고, 민식도 한때 다녔던엄마의 교회 사람들 근황을 들었고,  - P187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
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늦겨울 찬 바람에 술이 다 깨는 기분으로 시청과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에 다다른 곽의 시야에 노숙자 몇이 들어왔다. 그러자 마치 자동 반사처럼 발걸음이 청파동을 향하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원효로로 돌아가려 했으나 가는 길에 청파동에 들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오늘의 먼 길을 시작한 그곳으로 가 말없는 곰 인형처럼 서 있을 타깃을 만나 무어라도 말하고 싶어졌다.
마스크를 벗고 없는 발언권이라도 발휘하고 싶어졌다. 당신을 따라다니다 이 겨울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고, 당신도 나 같은 이유로방황하고 있냐고, 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 P215

뭐지? 무엇보다 이곳의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옆구리를간질이는 온풍기의 열기도, 앞에 마주 앉아 바람을 막아주는 큰 덩치의 사내도, 직원들 생계를 위해 돈 안 되는 가게를 접지 않는다는사장이 있는 편의점도,
- P222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아니, 언제나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다면? 그 한 가지 생각이 고통으로 점철된 기억이라면? 고통에 흠뻑잠긴 뇌는 점점 무거워지는데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망망대해에 빠지게 된다면, 뇌는 커다란 추가 되어 거대한 심연 속으로 당신을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숨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만다. 코도 입도 아가미도 아닌 것으로 숨을 쉬며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사람 아닌 존재로 살 뿐이다.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 허기조차 잊고 술로 뇌를 씻어보려 하지만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휘발시켜버리고 이제 내가 누구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다.
- P225

술을 끊고 음식을 많이 먹고 따뜻한 잠을 자게 되자 몸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쪽방에서 긴장을 내려놓고 한낮 늘어지게 누워 있으면 그곳이 바로 치료 병동인 듯했고, 야간 알바를 하기 위해 일어날때면 지병마저 달아난 듯 개운했다. 삶과 죽음의 평균대에서 늘 죽음 쪽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제 점점 평균대 위로 올라와 살며시 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머릿속에도 피가돌기 시작했다. 동료의 질문에 답하며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고, 손님을 응대하며 더듬거리던 말투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됐고 냉동인간의 뇌처럼 얼어 있던그곳에 열선이 깔리는 게 느껴졌다. 기억과 현실 사이에 놓인 빙벽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서서히 빙하 속 매머드 같은 덩어리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의 시체들, 그것들이 좀비처럼 일어나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나는 좀비들에게 뜯기면서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려 애썼고, 그건 그것대로 견딜 만한 일이었다.
- P230

역지사지. 나 역시 궤도에서 이탈하고 나서야 깨우치게 된 단어다. 내 삶은 대체로 일방통행이었다. 내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고, 남의 감정보다는 내 감정이 우선이었으며, 받아들이지않는 자는 내치면 그만이었다. 가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비로소 얼마 전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소통 불가라고 내게 말한 사람은 딸이었다. 딸의 얼굴이 기억나려 한다.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는다. 소통 불가에 일방통행인 나를 아내는 받아줬다.  - P237

정 작가가 마스크 위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자신의 비극을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새벽의 편의점에서 우리는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 과거를 캐내기 위해 자신의 과거도 많이 털어놓았다. 나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 지치지않는 그녀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대체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이냐고? 그녀가 말했다. 인생은 원래 문제 해결의연속이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라면, 그나마 괜찮은문제를 고르려고 노력할 따름이고요..
"독고 씨, 기억은 좀 돌아왔나요? 내 작품 속 독고 씨 캐릭터는기억이 돌아왔는데."
- P247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살기로 했다. 죄스러움을 지니고 있기로 했다. 도울 것을 돕고 나눌 것을 나누고 내 몫의 욕심을 가지지 않겠다. 나만 살리려던 기술로 남을 살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죄하기 위해 가족을 찾을 것이다. 만나길 원하지 않는다면사죄의 마음을 다지며 돌아설 것이다. 삶이란 어떻게든 의미를 지니고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겨우 살아가야겠다.
기차가 강을 건넜다. 눈물이 멈췄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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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은빛 무늬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유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W. B. 예이츠, 하늘의 융단 p41



판사 문유석이 아닌, 책 덕후의 성공한 독서 이야기다. 딱 내 스타일로 유쾌하고 쉽게 풀어 놓으면서 사법 현실의 여러 문제들도 건드린다. ‘내로남불‘이 아닌 성찰이 돋보이는. 책의 많은 부분, 공감이었다.


미래는 결국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다. 자기실현적인 예언이다. 다수가 공유하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것이 곧 법이되고, 도덕이 되고, 가치가 된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발전도 인간들의 무수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패턴화해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현재의 사회부터 바꾸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쓸모가 없어진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지 궁금하면 지금 이 사회가 탑골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과 편의점 알바 청년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의 눈부신 과학 발전이 낳을 부가 어떤 방식으로 분배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의 분배 구조를 보면 된다. 더 먼 미래에 인공지능 또는 그와 결합한 신인류가평범한 인간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하면 지금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보면 된다. 미래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 P229

상당 구간에서 앉아 갈 수 있게 되자 매일 책을 들고 다니며 읽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전철은 도서관이 되었고, 통근길은 견뎌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거움이 되었다.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하다. 한가한 휴일에 집에서 뒹굴거릴 때는 등허리는 소파와, 손은 리모컨과 합체하는 폐인이되는 주제에, 통근길 전철에서는 세상 다시없는 독서광으로변신한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더더욱 책에 몰입하게 된다.
통근길 전철은 책이 유일한 도피 수단이던 소년기로 잠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이었다.
하루 세 시간에 가까운 독서 시간이 강제로 확보되자 참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언급한 책들중 대부분이 전철에 앉아 흔들거리며 읽은 것들이다. 그 외에도 엘리자베스 워런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 『싸울 기회, 경제학계 두 거목의 일대기 『케인스 하이에크, 심지어 900이넘는 벽돌책 『빈 서판까지 전철에 앉아 읽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 P249

통근길 전철에서 책 읽기는 독서 시간 확보 외에도 장점이있었다. 각인 효과‘다. 오리 새끼가 갓 태어나서 사람을 보면엄마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각인 효과처럼,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단 십 분이라도 책 읽기를 하면 뇌의 모드 설정이 그쪽으로 이루어지는지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되더라. 출근 때 책을 보면 퇴근 때도 보게 되고, 이어서 밤에도 뒤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고, 반면 출근 때 페북질을 시작하면 ..
이때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읽든 못 읽든 책을 들고 출근길에나서려고 한다. 하루의 시작을 책과 함께한다는 것은 충실한하루를 여는 좋은 방법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객차 안을 둘러보아도 책을 들고 있는 이는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 엄청난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양 일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은 사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좀 무서운 모습이다. 사이비종교 의식 같기도하고, 외계인이 전파로 사람들을 세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 P250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생각을 확장해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 P253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 P258

대학 갈 때 써먹을 욕심에 논술학원 보내서 초등학생에게어려운 책을 읽히고 있는 학부모들께 죄송하지만, 눈을 감고생각해보면 입시 때문에 마지못해 본 책은 한 줄도 기억나지않는다.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소설책,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보러 간 에로 영화는 방금 본 듯 생생하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책까지 내게 된 건 그 때문일 거다. 쓸데없이 노는 시간의축적이 뒤늦게 화학 작용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 P259

나에게 책이란

운동신경 제로의 꼬마에게 방구석에서
허풍선이 남작과 가르강튀아를 따라
대모험을 떠나게 해주던 날개.
부잣집 도련님 친구의 천장까지 가득찬 서가 앞에서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리플리의 심정을 느끼게 하던 동경
세로글씨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며,
제갈량, 양산박 호걸, 오다 노부나가, 사이토 도산을만나러 가게 해주던 타임머신
맹수의 포효에 몸을 떨며 비니키우스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새 같은 리기아를 보며 조숙하게 찾아온 사춘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중 나는 어느 쪽 인간일까
고민하게 하던 중2병앓이.
대학 문에 들어선 후 접한, 암호 같은 줄임말로 불리던
- P260

모피어스의 빨간악들,
하지만 어느 이즘보다 먹고사니즘이 중하기에
억지로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하던 지식의 파편들.
밥벌이는 하면서도 변하는 세상의 가속도를 감히 따라잡아보려
번지르르한 실용적 지식만 찾아 헤맨 어리석음의 증거들.
뒤늦게 아무 써먹을 데 없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옛 기억을 떠올려 재회하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첫사랑들
하지만 속절없이 아는 형님> <왕좌의 게임) 다시보기와
카톡방, 페북에 넘쳐나는 석 줄짜리 언어들에뒷전으로 밀리곤 하는 퇴기.

언제나 사랑했고,
언제나 쉽게 버렸던 친구.

널 읽고 싶어,
마지막 장까지.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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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채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라 지시받은 대로, 조직논리에 따라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 역사에 가득한 악의 실제였다. 흑인과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면 병균에 감염된다고 진심으로 믿은 미국 남부의 숙녀들, 유대인을 가스실에 보내는 일이 맡은 바 행정절차일 뿐이라고 믿은 독일 공무원들, 미국 한 주보다도 작은 나라에서 호남 사람들은 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킬킬대며 지껄이는 사람들, 여자의 ‘노‘는 ‘예스‘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믿는 남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고, 자식이고, 친구였을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악마였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지가 곧 악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이경규의 말 들으며 웃을 수 없는 이유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 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 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 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아파...... ‘억울해 ‘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 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성난 눈으로 부모를 노려보는 아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말을, 감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신호다. 열이 펄펄 끓는 것도 우리 몸이 열심히 병과 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여러갈등은 실은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이다. 국론 분열이 사회를 살리기도 한다.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다한다면,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 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 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p192~195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은 많이 망가져버렸지만 그래도 일상은 또 시작된다. 이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야말로 오랫동안 살아남는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다. 어린시절 읽던 그 많은 고전 명작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의 소설들은 이야기의 힘‘ 자체보다는 다른 요소들에만 힘을 기울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때로는 작가가 독자를 이야기로 끌어들이려 하기보다 한사코밀어내려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생경한 관념어와 뚝뚝 끊어지는 구조, 현란하기만 하고 피로감이 이는 미문 집착, 작가내면 독백의 과잉, 모호한 결말, 그리고 말미에는 평론가의 격찬, ‘일기는 일기장에 쓰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 P118

그러다가 오랜만에 투박하지만 오래된 이야기의 맛을 느끼게 해준 소설이 위화의 인생』이다. 몇 페이지 읽자마자 작가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솜씨와 능청맞은 문제에 정신을 빼앗겼다. 루쉰이 아큐정전 스타일로 펄 벅의 『대지를 다시 쓰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대지』를 연상시키는 중국 현대사 격변기 민초의 이야기인데, 비극적인 이야기도 능청스러운 유머로, 능치며 시장통 이야기꾼의 옛날이야기같이 흘러간다. 소설 읽는 재미에 중독되었던 나의 소년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인생은 잡다한 분칠 없이 『일리아드 오디세이』 『아라비안나이트, 『수호지』 등 소설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꾼의 구라(고급지게 말하면 구비문학) 같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읽어도 금세 이야기에 몰입된다. 위화는 정말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하나인 듯싶다. 복잡한 구성 하나 없이 시골 노인의 느긋한 구라가 구비구비 이어지고, 또 그것이 꽤나 전형적이고익숙한 이야기인데, 독자를 완전히 몰입시켜 가지고 논다. 처음엔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다가 27 페이지쯤(푸구이의 난봉꾼 도련님 시절 뚱뚱한 기생과 놀아나는 장면, 해학적인 판소리를연상시킨다)부터 이미 두 손 들고 영접 모드에 돌입했다.
- P119

번번이 나오는 인물들에 정이 가게 만들고 턴턴이 죄 없는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선사한다. 이건 뭐 왕좌의게임, 쓰는 조지 R. R. 마틴 영감 못지않다. 나중에는 해도 취도 너무해서 작위적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또 한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미친 바람이 몰아치던 시기 중국의 민초들이 격어야 했던 금찍한 고난을 퍼올려보면 현실이 더하면 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것으로는 도대체 읽기도 힘들었을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웃음과 눈물로 읽게 만든 힘 역시 낙관주의와 유머, 연민이다.
위화의 세 권짜리 소설 형제는 인생 과는 결이 다르다.
유머와 풍자는 있지만 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여운은 덜하다. 그래도 정말 재미는 있다. 정말 더럽고 웃기고, 야하고 눈물 나고, 갈 데까지 가고도 더 가는 과잉의 끝이었다. 천명관의 고래를 행튀기 기계에 넣어 튀겨내면 형제 같은 괴물이 나올 듯하다.  - P120

소설이란 게 원래 장터에서 구라군들이 입에 침 튀기며 온갖 개빵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것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오히려 요즘 한국소설이 너무 깔끔단정하게, 문학상 심사위원 취향에 맞게, 축소 지향적으로만가는 건 아닌지. 물론 우리 소설 중에도 천명관의 『고래』, 긴언수의 설계자들』, 김영하의 『검은 꽃』 등 기가 막힌 이야기군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도 많지만, 늘 아쉽다. 이 기막히게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느릿느릿 장대하게 죽 써주면 안 되나싶어서, 길면 안 읽어서 그러나? 아, 원래 재밌는 소설은 기본이 세 권에서 한 열 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 P121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타인의 존재를 편하게 받아들일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꼭 누구를 착취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부를 만끽하는 모습만 꼴 보기 싫은 게 아니다. 정당하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성취를 누리는 당연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의도적인 과시로 비쳐 증오를 낳을 수도 있다.
그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연결되어있다. 나 홀로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지않고 사는 건 불가능하다. 관계의 촘촘한 거미줄 속에서 나는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으며,
또는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어느 선사는 산길을 걸을 때 꼭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치며 걸었다고 한다. 작은 동물들이나 벌레들이 미리 피하여 혹시나 자기에게 밟히는 해를 입지 않도록, 하지만 그가내리치는 지팡이, 걷는 발걸음 하나마다 땅속의 무수히 많은미물들이 밟혀 죽었을 것이고,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생 - P127

물들이 입안으로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생명은 늘 다른 생명을 해치며 살아간다. 개인의 선의, 악의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나로 인해 고통받는 타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보다 강한 자가내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상황이라면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나보다 약자인 사람, 나보다 절박한 처지인 사람이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선택의 문제였다. 내 평소 사고방식대로라면 도서관에서 그 선배에게 유감이지만 이건 내 공부 방식일 뿐이라고 말하고 내 자리로 돌아갔어야 한다. 후배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 그 선배야말로 찌질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그 선배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아무런 심적 여유도 없이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내게는 여기가 아니어도 선택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내 선택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 『인간의 조건을 너무나 열심히 읽다보니 휴머니스트 주인공에 과하게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다.
- P128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 중에서 유일무이한 이질적인 소설이다.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커리어 초반에 작심하고 ‘나도 리얼리즘 이야기를 쓸 수 있어!‘ 하는 결심으로 써본 작품이기도 하고, 모든 작가가 평생 한 번씩은쓰게 되는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전적인 요소가 있는 이야기를 리얼하게 쓴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대체로 찌질하고 인생이란 누가반사판을 대주지 않기에 영화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범속하고 남루하고 지리할 때가 대부분이다.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 몇 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혼자 생각일 뿐이다. 가끔 글에 자기 치부까지도 적나라하게 고백할수록 뭔가 대단한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이 길에서 똥 싸는 걸 진지하게 봐줄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건 그냥 노출증이다.  - P136

결국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편집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상실의 시대도 물론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집하고 부풀리고 반사판을 잔뜩 대서 미화한 이야기일 거다.
내가 하루키 대학 시절 친구가 아니어서 단언까지는 못하겠지만, 대체로 현실에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첫사랑 소녀가 푸른 초원을 같이 걷다가 자위 행위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일도, 캠퍼스에서 마주친 통통 튀는 매력의 여대생이 포르노영화관에 데려가달라고 조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기가 엄청 단단하게 발기했다. 엄청난 양을 사정했다는 그야말로 TMI(굳이 알고 싶지 않은 과한 정보)에 해당하는 묘사가 반복되는 걸 보면 작가가 이 부분에 관한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 P137

하루키는기사단장이 대체 무엇인지를 표현할 때 혼, 영령, 스피릿 등등 다른 말은 마땅치 않았는데 ‘이데아‘라는 말의 어감이 딱맞아떨어져서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메타포‘도 마찬가지다.
『양을 쫓는 모험」을 쓸 때에도 쓰다보니 갑자기 ‘앙사나이‘라는 괴상한 인물이 툭 튀어나와서 스스로 충격이었단다. 단적으로 그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자기도 뭘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평생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키 소설을 읽어온 내게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속시원한 말인가. 하루키는 한 발 더 나아가서 머리로 해석할 수있는 건 글로 써봐야 별 의미가 없다. 쓰는 사람도 잘 몰라야그 막연하고 종합적인 이야기를 독자 역시 막연하고 종합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 쓴 소설은 구조가 빤히 들여다.
보여서 재미없다고 말한다.
- P145

말하자면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수면 상태에서 끝도 없이 지속되는 꿈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다. 다만그 꿈을 옮기는 필치는 치열하고 꼼꼼하다. 그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非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문체를 사십 년간 가다듬고 또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작가의 글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지에 대해 나 자신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 없는 부분들을 작가 본인이 씩 웃으며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응,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라고그리고 그건, 책을 읽으며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 중 손에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 P146

유시민 작가가 자신을 ‘지식 소매상‘ 이라고 규정하는데,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왜 소비자들이 직접 도매상, 심지어 공장까지 가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물건을 폐와야 하나? 내 아이 밥상에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올리기 위해 직접 도축장에서고기를 해체해야 되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원전목록이 아니라 그중 필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하지만 왜곡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설명해주는 지식 소매상들의 목록이다. 소매상일수록 사기꾼도 많기 때문에 잘 골라야 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도 필요하긴 하다. 그렇다고 소매상은 미덥지 않으니 소비자들이 직접 원산지를 찾아가야 한다는 건 무리한이야기다.
- P169

자극적인 기사 몇 줄만 읽고 바로 화르르 불타올라 십자군전쟁에라도 나선 기사가 된 양 개인 신상을 털고 집단 다구리‘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래가 두려워질 뿐이다. 하긴 십자군전쟁도 대중의열정을 악용한 사기에 가까웠으니 인간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남용하는 이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있다. 나치 시대의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과연 집단지성이 발동했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지성적으로 사고하려노력하지 않으면 야만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의 직접민주주의란 공포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거창해졌지만, 여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충일감에도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터브이를 본 날,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 날,
하루종일 책을 읽은 날의 느낌은 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책의 우선순위를 높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루의 시작인 출근길에 단 십 분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고, 내 주변 어디든 책을 흩어놓기도 한다.  - P176

글재주 좀 있는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걸 읽으라는 얘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구차한자기 포장들도 있지만, 이건 진짜구나, 싶은 이야기들도 있다. 신기하게도 어떤 거창하고 화려한 이야기보다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시시하고 소박한 이야기더라도말이다. 글이란 뛰어난 문장만으로 얼마든지 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 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되는대로 살 때 더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한다. 그저 솔직히 자기 얘기를 계속 쓰는 것 정도가 글쓰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중 어떤 얘기는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어떤 얘기는 시시한 글이 될 것이다. 그건 쓰는 이가 의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 P184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공감이 기존의 세계를 부숴버릴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넘어』라는 책을 읽었던 순간, 1980년 광주에서 이른바 국가가 시민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들에 대한 이야기만 읽어왔었다. 먼 옛날에 이미 시민혁명이 이루어졌고,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말이다. 교과서에서도 그게 인류 역사라고 배웠다. 그래서난 그게 ‘상식‘인 줄 알았다. 그 모든 믿음이 한순간에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난 그래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권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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